갈치 한담閑談 / 민 경 찬
숭례문을 뒤로하고 남대문시장 먹자골목에 들어섰다. 두어 사람이 빗겨 지나갈만한 골목에 매콤 짭조름한 냄새가 범벅인 갈치조림 집이 옹기종기 10여 호 넘게 늘어서 있다.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갈치조림은 남대문시장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꽤나 알려져 있다. 중앙갈치, 왕성갈치, 희락갈치 등 하나같이 수십 년째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점심때나 저녁때는 어느 집이든 긴 줄이 늘어서 있어 골목 지나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곳 대부분 식당의 갈치찌개는 양은냄비에 무를 깔고 네모 반듯이 토막 낸 갈치를 얹고 고춧가루와 파 마늘 등으로 버무린 다진 양념을 얹어 무가 타지 않을 정도의 센 불로 뽀글뽀글 끓여낸다. 1인분 팔천 원에 갈치구이와 거기에 생김, 계란찜은 덤이다. 짙은 고추 빛 국물을 잘 익은 갈치에 살짝 부어 입에 넣으면 한입 가득 입속엔 행복이 고인다. 빨강 국물에 흰밥을 비벼 한 수저를 생김에 싸서 먹으면 짭조름 매콤달콤이 어우러진 별미에 나도 모르게 취하게 된다.
갈치는 단백질과 오메가지방산이 풍부한 식품으로 갈치조림뿐 아니라 갈치회, 갈치구이, 갈치국, 갈치속젓, 갈치통젓으로도 사랑 받고 있다. 특히 부산 김해 진주지방의 토속음식인 갈치식해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적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경남 기장 연안이 갈치의 산지로 유명하여 기장갈치가 서라벌로 진상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매미 우는 늦여름이나 초가을에는 곰삭은 갈치식해를 꺼내 따뜻한 밥에 비벼먹는 맛이 어느 귀한 음식맛보다 귀하고 맛나다고 한다.
갈치를 생각할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삼삼하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갈치가 송장을 뜯어먹은 고기라고 입에 못 대셨다고 생전에 자주 말씀하셨다. 아마도 갈치는 이빨이 날카롭고 자기 동료 꼬리를 뜯어먹는 습성을 지닌 것 때문이리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소금 뿌린 갈치를 구어내곤 하셨다. 어렸을 적 내가 자란 시골 동네는 갈치를 접하기가 힘들었고 시오리 장터에 나가거나 생선을 이고 들어오는 아낙에게서 쌀 몇 되를 주고 사야 했다.
신이행愼以行 등이 만든 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 어휘사전 역어류해譯語類解에서는 갈치를 군대어裙帶魚라 하고 한글로 갈티라고 하였고 갈치어葛峙魚, 도어刀魚로 자산어보玆山魚譜에 기록으로 전해진다. 군대어는 허리띠처럼 길어서, 갈치어는 가늘고 긴 모습이 칡넝쿨처럼 생겨서 이름 붙여졌고 칼처럼 생겨 칼치라고 불렀다고 전하며 지방에 따라 갈치라고도 부른다. 한편 표피의 구아닌이라는 성분은 모조진주 제조 시 광택제로 쓰이며 립스틱의 원료로도 쓰인다니 재미있는 이야기다.
“은빛 칼날 뾰죽 세우고 잠잔다 칼치
물커덩 물컹 곰처럼 느릿느릿 곰치
누가 잘라 갔나 꽁지만 달랑 꽁치”
(김바다의 “물고기 이름, 그냥 지은 게 아니야” 일부)
성격도 칼 같아서인가 자세히 보면 맑은 바닷물속의 대부분의 갈치는 머리를 위쪽으로 하고 꼿꼿이 직립으로 쏜살같이 먹이를 쫒는다. 칼잠을 잔다는 말이 이래서 연유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부산, 목포에서 오는 아리랑호, 도라지호가 풍랑이나 바람으로 끊기는 날이면 제주 시내의 동문시장 물가는 두세 배나 폭등하던 1980년대에 제주 근무시절 이야기이다. 늦여름 서울의 등산모임 회원 열두어 명을 초대한 적이 있다. 저녁나절 제주항 서부두로 갈치 낚시채비를 하고 나갔다. 멜(멸치의 제주방언)을 따라 갈치가 부둣가로 모여드는 낚시꾼들 절호의 낚시 철이었다. 낚시 바늘을 가느다란 철 줄로 묶어 본 줄에 연결하고 미끼 생선살을 꿰어 던진 다음 릴을 조금씩 감아올려 툭 채는 순간 낚아채면 되는데 물살을 감아 올라오는 이 낚시의 손맛은 생각보다 묵직하고 독특했다. 등지느러미가 가지런히 춤추듯 요동하며 몸체는 눈부신 은빛으로 번쩍이는 갈치가 낚일 때마다 회원들의 환호는 부둣가를 흔들었다. 그 자리서 회를 뜨고 한잔 소주와 곁들였더니 꽤나 감칠맛 나는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었다. 젊은 날의 황혼 녘 제주 서부두에서의 일은 지금도 잡힐 듯 말 듯 빛바랜 추억으로 남아 가끔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서산에 석양이 기울었다. 오늘은 옛 친구를 만나 갈치찌개를 곁들여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저 먼바다 노을빛에 물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