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익호와 천주교
구한말에 조선 조정은 밀려오는 외세의 물결과 함께 문명개화, 근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돌파구를 찾고 있었는데 해운에 있어서도 상당한 고심을 하고 있었다.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국가가 직접 해운을 경영하기도 하고 민간에서도 선박을 도입하여 ‘근대해운’을 시도했다. 1885년 전운국을 설치해 기선을 구입하였던 것이다.
현익호
이때 처음 드려온 선박 중 가장 큰 선박이 400톤급 2범(帆) 기선인 현익호(顯益號)가 그것이었다.
경향잡지 1969년도 12월호 44페이지에 백브레드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익호는 청룡환보다 더 크고 객실도 많고, 시설도 낫다. 나는 거지처럼 돈이 한푼도 없었다. 원산가서 선가를 물기로 하고 배를 탔다. 이 현익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배가 될 뻔하였다.
1894년에 동학이 대치하여 정부를 전복시키려했을 때 이배가 서울서 병정 800명을 군산으로 실어 날랐고, 조금후 청일전쟁으로 사태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조선왕실이 중국으로 피란을 가기위하여 이배를 어느 해변가에 몰래 갖다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일경 3,000명이 갑자기 제물포에 상륙하여 왕실의 피난갈 길을 차단하니 현익호는 열흘 동안이나 공연히 기다리다가 떠나갔다.“
이후 536t의 창룡호(蒼龍號)를 더들여와 창룡호는 국제선으로 현익호는 원산, 마산, 군산, 제물포 등 국내화물선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독일에서 1000톤급 이운호가 들여왔다.
그러다가 1903년 민영준(閔泳駿), 정병하(鄭秉夏), 우경선(禹慶善) 등의 발의에 의해 청으로부터 받은 20만 냥의 차관으로 설립한 이운사(利運社)에게 넘어간다.(이운사는 형태는 개인기업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왕실에서 경영하였다고 봐야한다.(청의 차관으로 설립하였고 위의 사람들도 고위관원)
그러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창룡호와 현익호는 일제의 군수품 수송에, 이운호는 일본군 수송에 징발되었다.
1907년 세창양행에서 임대하여 군산, 목포등지로 다시 취항하였다.
1897년 이 현익호를 원산에서 타고 군산항에서 내린 베르모렐신부는 아직 개항도 하지 않은 군산에는 도저히 성당을 건립할수없다고 판단하고는 강경에 성당을 짖기로 하고 강경으로 갔으나 강경에도 성당을 설립하는 것이 어렵자 안대동에 머물면서 화산의 김여산의 집을 구입해 나바위성당을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