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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혼이 꿈꾸는 불멸과 초월적 세계인식
- 윤의섭 시인의 자선시를 중심으로
박현솔
인간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존재이고 자신이 죽을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이다. 삶 속으로 내던져진 순간부터 인간은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죽음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데 정신적인 죽음은 사회에서 고립되었을 때나 소외감과 불안감을 느낄 때, 무기력함을 느낄 때 주로 나타난다. 인간의 죽음은 삶과의 관계에서 더 의미를 갖게 되고 죽음을 통해서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문학작품에서 죽음은 삶의 의미와 깨달음,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전쟁이나 혁명 같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죽음의식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인간이 죽음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삶과 죽음은 서로를 열어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편 문학작품에서 나타나는 몽상은 유년시절을 향하는 원초적 상상력이나 기억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심층심리가 관여하는 원형적 상상력에서 기인한다. 바슐라르는 ‘몽상이 심층적일 때 우리 속으로 꿈을 꾸러 오는 존재는 우리의 아니마이며, 몽상의 시학은 우리를 유년시절로 이끈다’고 하였다. 유년의 몽상 속에서 상상은 기억을 계속해서 반추하고 이것은 일생 내내 지속되면서 무의식 속에 건재한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즉 시인은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을 통해서 현재의 고독을 과거의 시간에 비추면서 교감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과 몽상의 추구는 모더니즘시의 특징으로 자연과 동일성을 이루려는 서정시의 세계를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서정시 계열의 모더니즘시에서도 이러한 죽음과 몽상의 시학은 자주 나타난다.
한국 현대시에서 서정시이면서 모더니즘적 성격을 띠는 시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서정시가 모더니즘시를 받아들이면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세계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산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경쟁사회로 돌입하게 되고, 부조리한 모순들이 양산되면서 다양한 인간군상이 나타나게 되어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은 깨지고 세계는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모더니즘시는 서정시보다 시인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며 당대 사회에 대한 민감한 인식을 드러내게 된다.
서구 모더니즘이 유입된 이래 한국의 모더니즘시는 역사적인 격동기를 거치게 되는데 6․25전쟁과 4․19의거, 5․16 군사 쿠데타, 광주민주화항쟁 등을 통해서 정치적인 충돌을 겪으며 창작의 동기가 마련되었다. 이때 주목하게 된 것은 인간의 실존과 죽음의 문제였다. 1970년대에 산업화를 거치고 1980년대에 시의 확대가 이루어지지만 1990년대에 다시 시의 위기론이 부상하게 된다. 1990년대의 모더니즘시는 상업주의에 대한 반미학을 실험하거나 해체의 방식을 도입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정시 계열의 모더니즘시가 이어지고 다양한 흐름이 유지된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정치와 경제가 고도화되면서 개인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소외의 양상과 불안의식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개인의 지성과 자각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시에 몽환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시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 서정시의 순환적 시간관이 모더니즘시의 단절적 시간의식으로 변형되기 시작한다. 기존의 시간적 의미를 해체하고 초월을 시도하거나 현실 너머 이상향을 지향하는 시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더니즘시의 공간도 서정시의 합일적이고 개방적이며 관계지향적인 공간이 아닌 수량화되고 폐쇄적이며 체계적인 공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때 특정한 의도에 의한 공간의 의미가 탐색되기도 하고 기존의 공간의식을 해체하여 의식 너머 꿈의 공간을 지향하기도 한다.
1990년대의 정치적 ․ 사회적 흐름 속에서 서정시 계열의 모더니즘시를 쓰면서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세계를 확보해온 시인으로 윤의섭 시인을 들 수가 있다. 윤의섭 시인은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1994년에 문학과 사회로 등단하여 7권의 시집을 출간했는데 초기시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다가 중기시에서 죽음과 삶, 사람들에 대한 사유로 확장되고, 후기시에서는 자연과 우주, 천체에 대한 사유로 시적 인식이 확장되는 경향을 보인다. 첫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에서 시인의 가족사와 일상 속의 죽음, 영원성 등을 다루었는데 이때 서정성과 함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주로 나타난다. 두 번째 시집 천국의 난민에서 일상적인 죽음과 타자의 기억 속을 오고가는 현상에 대한 탐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 번째 시집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에서 사라진 사람들과 기억에 대한 시, 지층적 상상력이 드러나는 시, 개인무의식에 관한 시, 죽음과 불멸에 대한 시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네 번째 시집 마계에서 자연물과 인공물의 탐색, 창작신화, 죽음과 관련된 시, 일상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시를 쓰고 있다. 다섯 번째 시집 묵시록에서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점차 옅어지고 우주와 천체에 대한 탐색이 이뤄진다. 여섯 번째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에서 천체와 은하계와 날씨에 관한 시, 신비주의자에 대한 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커지지 않았다에서는 평행우주론, 행성과 별에 대한 시, 기억과 꿈에 대한 시, 천국과 신에 대한 사유가 담긴 시 등이 펼쳐진다.
윤의섭 시인의 근작시 8편에는 유년의 기억에서 기원하는 죽음의식, 초월적이고 영원한 시공간, 불멸을 꿈꾸는 자의 외로움, 종말의 징후, 이별의 아픔, 꿈과 현실의 혼돈 등의 주제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1. 산에도 저수지 근처에도 무덤 사이사이에도
집에서 한 이 리쯤 떨어진
남사박 저수지에서는 해마다 한 명씩 꼭꼭 익사했다
물 속으로 꼭꼭 숨은 뒤에 산 모습으론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해엔 시체조차 건져내지 못했고
검푸른 물 속에선 무얼 먹는지
커다란 잉어가 지그시 배 깔고 산다는데.
어릴 적 저수지에서 헤엄치고 놀던 마을 사람들은,
물풀을 물귀신으로 믿고
섬뜩 놀라 쥐가 나거나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은
친구들 문드러진 살국물을 조금씩은 다들 먹었고
벼농사 밭농사가 밑천이니
매년 그 물을 논 밭에 대어왔다
<중략>
남사박에선 예로부터 나물이 많이 났고
즐겨 먹는 먹거리이기도 했다
산에도 저수지 근처에도 무덤 사이사이에도
나물은 근근이 끼니 때울 때 무척 요긴했었다
남새밭, 이름 그대로 남사박은
무얼 먹고 자꾸 돋는지 시퍼런 나물이 매년 씨도 마르지 않고 있다
- 「남사박」 부분
“남사박 저수지”에서 발생하는 “익사”는 연례행사 같은 것으로 죽은 이들의 “살국물”은 논과 밭에 뿌려져서 작물을 키우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더욱이 “익사한 사람들의 무덤”이 특별할 것 없이 취급되고 그 무덤들을 품고 있는 마을은 “개발도 퇴화도 더”뎌서 물자를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남사박에 “나물”이 많이 나서 마을 사람들의 먹거리 근심을 덜어주었다. 즉 “남사박”은 알게 모르게 “남새밭”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음이 밑거름이 되어서 생명이 유지되는 순환적 구조에서는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고 먼 조상 때부터 이어져온 공동체의 집단무의식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윤의섭 시인의 시에서 죽음은 개인적인 체험에서부터 주변의 사물들에게 내재된 죽음의 의미로 확대되거나 내 안의 죽음을 고백하기도 하고, 미래의 죽음을 예언하기도 한다. “下官을 마친 행렬은 한없이 흐른다//문득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긴긴 밤의 강/밑바닥에 가라앉지 못하고 아침 햇살 비치는 창가에//나는 간신히 정박해 있는 것이었다//불투명 유리창 너머로 바람결에 흐드러진 보리 잎이 어른거린다/밤새 꼿꼿이 누워 있는 내 몸뚱어리를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청보리밭에서 끊임없이 갈라지는 바람 소리」 부분)에서 외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와 잠에 빠져들었던 화자는 주변에 늘 존재하고 있는 죽음을 자각하게 된다.
“철거를 끝낸 자리엔 거대한 지하층이 입을 벌리고 남아 있었다/건물이 무너지기 전까지 품었던 자궁/빗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메우기 위해/수련이 피어났다 예정된 날짜에 맞춘 듯 꼭 사십구일째에/피었다(…)여기 적멸궁으로 모든 게 빨려들어갔다(…)멀리서 비틀거리는 몸을 끌고 순례 온 취객이 인신공양을 한 다음날/민들레 꽃 피어 이 사원에 헌화를 하고 주위에는 금줄이 둘러졌다” (「은하계 NGC4261」 부분)에서 철거된 건물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서 빗물이 고이고 취객이 빠져죽는 일이 발생하는데 사십구일째 되는 날에 수련이 피어나는 일이 우연이 아니라 건물의 죽음이 사람의 죽음을 부르는 연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서기 2096년의 書」에서 “여기 잘 보존된 고대 도시가 있다/아직 식물은 푸르고 사람들은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자동차에는 그저도 시동이 걸려 있다/어느 집에선 죽은 자를 위해 제사까지 올린다/누구는 사람 비슷한 두개골을 파내기 위해 제 생을 파묻는다//몇 층이나 되려나 이 카타콤/한 켜 밑에는 까맣게 녹슨 이십세기의 태양이/한 켜 밑에는 머나먼 아버지의 초원이/한 켜 밑에는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인류가 아닐지도 모르는 종족이/나는 내 심장을 드러낸 채 서른 살보다 많은 부장품을 내준다” (「서기 2096년의 書」3 부분)와 같이 고대도시의 이미지와 지층의 상상력을 통해서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윤의섭 시인이 모더니즘 계열의 서정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세계와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서정시의 특성이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죽음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는 모더니즘시의 사고가 함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시에서 죽음이 자연의 이치이고 인간이 감내해야 할 통과의례인 반면에 모더니즘 시에서는 죽음의 의미를 변형시키고 해체해서 기존의 관념에 다양성을 부여한다. 즉 죽음을 맞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으며 죽음을 깨닫는 시점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어느 지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윤의섭 시인에게 죽음은 가까이 있기도 하고 멀리 있기도 하며, 가볍게 흘려보내기도 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기도 하는 입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 그들의 꿈이 꼭은 이 세상을 이룬다고 여겨졌다
어느 묘목에서 귀곡성이 들린다기에 베어봤더니
어린 아이가 웅크린 채 들어 있었다
나무 안쪽엔 손톱으로 새긴 듯한 불살계가 쓰였다
서녘으로 가는 벌판에서 이상한 빛이 솟아올랐다
그 곳에 가까이 간 사람들은 죄다 돌아오지 않았다
소문엔 황금 거울이 놓여 있어 다들 거울 속에 살 거란다
산자락을 타고 오르는데
볼을 스치는 바람에서 비린내가 났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하늘을 나는 물고기였다
물고기 주둥이엔 편지가 물려 있고
지느러미를 흔들며 한 소식 전하러 지상으로 내려갔다
농부가 땅을 일구는데 낯 선 지붕이 묻혀 있었다
아무리 파헤쳐도 층을 알 수 없는 고층 아파트가
뿌리 내린 채 비상등을 켜놓았다
아파트에 사는 이들은 잠을 자고 있었고
그들의 꿈이 꼭은 이 세상을 이룬다고 여겨졌다
- 「천국유사」 부분
2-2. 불사조처럼 죽어야 사는
내 지향점은 늘 북반구로 향한다 자성에 이끌리듯이
그곳에 거대한 절벽이 서 있다 시간을 뚫고 솟은 망각의 벽
한 귀퉁이에 강의 흔적이 남아있다 은하를 탁본하여
남에서 북으로 천구를 가로지른 삼백 억의 태양이 흘러간 흔적이 새겨 있다
나는 안다 북벽의 뿌리와 마천루 사이는 고단한 영혼으로 채워야 할 여백이라는 것을
작은 틈바구니에 겨우 둥지를 튼 이 간빙기가 단 한 줄 그어진 퇴적층인 것을
<중략>
깨어나보면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아침에 늘 혼자 깨어난다
하루 동안 새하얗게 늙어도
아침이면 생의 처음으로 돌아와 있다
늘 그녀의 품에서 죽었다 살아난다 불멸의 시대다
<중략>
옥상에 올라 불타는 노을을 본다
옥상에 올라가 불타는 하룻저녁에 몸을 담근다
옥상에는 시들어 죽은 화초가 박제된 채 화분에 꽂혀있다
불사조처럼 죽어야 사는
불사조처럼
<중략>
당신은 별빛의 화석이다
별은 죽을 때 가장 반짝이고/당신은
가장 빛나며 가장 먼 저편으로부터 간신히 찾아온
지울 수 없는 상흔이다/그러나 슬퍼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화석이므로
- 「북벽 연대기」 부분
<2-1>에서 화자가 제시한 상황들은 대부분 현실적이지 않고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들이다. “묘목”에 갇혀있는 “아이”와 “이상한 빛” 가까이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편지”를 물고 “하늘을 나는 물고기” , 땅 속에 묻혀있는 “고층 아파트” 등 이것이 가능한 것은 “천국유사”이기에 가능하다고 제목이 암시하고 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었고” “꿈”을 꾸고 있었다는 부분에서 하나의 단서가 제시되고 있긴 하다. 이 시가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지만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꿈속에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고 어떤 비상식적인 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먼 훗날”의 “나를 꿈꾸고” 있는 여인의 방문은 화자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상황임을 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꿈속에서 여인이 찾아옴으로 해서 화자가 “먼 훗날”과 “추억”과 “현생”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상태를 “천국”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2-2>에서는 시적 화자가 꿈꾸는 영원불멸의 세계가 “불사조”와 “화석”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지향점”이 늘 “북반구”로 향하고 있음을 자각하는데 그곳에는 높이 솟은 “북벽”과 “마천루”가 존재하고 있다. 화자는 북벽이 “시간을 뚫고 솟은 망각의 벽”이고 높이 솟은 마천루는 “고단한 영혼으로 채워야 할 여백”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하지만 화자가 속해있는 곳은 “작은 틈바구니에 겨우 둥지를 튼” “간빙기”이다.
화자는 북벽으로 가기 위해서 “그녀”를 안고 “깊은 잠”에 빠진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삼십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와 함께 잠들었어도 “아침에 늘 혼자 깨어”나는 것과 “새하얗게 늙어” 잠들어도 아침이면 “생의 처음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다. 즉 화자가 “그녀의 품에서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성스러운 시간”이면서 “불멸의 시대”에 머무르는 매우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실체는 무엇이고 “당신”과 동일한 존재인지가 궁금해진다. 화자는 “당신은 별빛의 화석”이면서 “지울 수 없는 상흔”이라고 존재 의미를 규정해주고 그로 인해 화자와 당신은 별과 별의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별은 죽을 때 가장 반짝이고” “불사조처럼 죽어야 사는”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된 화자는 별을 꿈꾸고 별과 하나가 되었을 때 “영원” “불멸”의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 꿈과 죽음은 현실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 화자가 모색하는 최고의 수단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윤의섭 시인의 다른 작품 「추방」과 「花界」에서도 꿈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 나타나는데 “집에 가는 전철 중간쯤에서/깜빡 잠이 들었다/귓가에 어렴풋이 맴돌던 안내 방송이/잠깐 끊기고 나는/아무 역도 거치지 않는 세상에 오래 머물렀나보다(…)그 후로 며칠을 지냈지만/아무래도 예전에 내 살던 집이 아니었다/내가 늘 앉던 의자엔 먼지가 끼어 있었고/식구들은 어딘지 모르게 그들이 아니었다(…)내 살던 곳에는 누가 귀가했을까/그날 전철에서 눈을 뜨는 순간/차창 너머로 얼핏/내 얼굴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추방」 부분)에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 화자는 왠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가족들도 사물들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원래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원래 있던 자신의 자리로 또 다른 “내”가 돌아간 것 같기만 하다.
그리고 「花界」에서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꽃무늬 벽지에 그림자가 서 있다/가늘고 구부정한 줄기에 커다란 꽃송이가 무겁게 얹혀 있다//하루 종일 꽃은 집 안을 배회한다(…)여느 밤처럼 누워 꽃은 잠을 청한다/언덕이 나타난다” (「花界」 부분)에서 화자는 흉흉한 꿈을 꾸고 일어나서 평상시와 같이 일상을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꽃”으로 변한 사실을 알게 된다. 화자가 꽃으로 변한 이유는 “어제 종일 꽃구경을 한 탓인지” “언덕에 서 있어”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처럼 윤의섭 시인이 다른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 꿈을 이용하는 것과 함께 영원불멸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 취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 그것은 오래된 유적을 탐색하거나 과거의 인물이 현재나 미래로 환생하기도 하고, 이국의 땅에 묻힌 미라를 제시하기도 하고, 인간들 틈에서 살아가는 귀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철기 시대」에서 대장간이 있던 마을의 모든 사물들이 철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고 이곳의 지나간 날들을 유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카페 서기 816년」에서 당나라 시인 이하가 폐병으로 죽기 전 자신의 몸으로 환생할 방법을 모색하지만 그의 환생을 도와줄 “그녀”가 죽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樓蘭의 美少女」에서 “신문에서 본 누란의 미소녀”가 중국 누란의 “황인종의 무덤 속에서” “6천 4백 70년을 살았다”고 한다. 화자는 이 “미라”를 통해서 영원불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점쳐보기도 하였다.
요컨대 시적 화자가 다른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 꿈을 이용하는 것과 영원불멸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식들을 취하는 것은 기존의 서정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이것은 모더니즘시에서 유입된 것으로 모더니즘 계열의 서정시를 쓰는 윤의섭 시인이 자신의 개성을 더해서 변형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수 세기를 거슬러 기원전으로
느지막한 휴일 오후에 걸려 온 전화의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언제부터 외로웠느냐고 묻자 이번 생부턴 아니었을 거라며
수화기를 일 세기에 걸쳐 내려놓는다
<중략>
그들은 계류를 따라 세워진 돌무더기에
돌멩이를 쌓으며 소원을 빈다
자신들의 운명을 타고 난 별을 옮기는 중이다
<중략>
그 후로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아침마다 얼굴을 봐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럴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달을 주워 온다 달을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 조금씩 사그라져 감쪽같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바라본다 가끔은 엄한 자리에 달을 놓아주기도 한다 미끄러져 달아나는 눈썹달의 지느러미가 흐릿하다 달을 들고 나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폭포 아래 용소에 石魚가 산다는 소문은 내게 간신히 전해졌다
실은 물속에 시퍼런 돌덩이가 잠겨있을 뿐이지만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石魚는 상류로 상류로 헤엄치고 있었다
수 세기를 거슬러 기원전으로
- 「石魚」 부분
이 시에서는 “휴일 오후에 걸려 온 전화의 목소리”와 폭포 아래 용소에 사는 “石魚”와 시적 화자의 외로움이 한데 어우러져서 흘러가고 있다. 사람들이 “돌멩이를 쌓으며 소원을 비는” 것과 화자가 “달을 주워” “조금씩 사그라져 감쪽같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같은 행위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운명을 타고 난” “별”과 “달”을 어딘가로 옮기는 것이다. “石魚” 역시 “외로운 회향을 거듭하는” 존재로서 “상류로 상류로 헤엄치”는 운명을 감내하고 있다. “石魚와 심적으로 동류의식을 느끼고 있는 화자의 지향점은 “수 세기를 거슬러 기원전으로” 옮겨가는 것인데 화자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원불멸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또 다른 시 「눈바다」, 「담장 밑에서」, 「에필로그」 등에서도 이러한 현실을 초월하여 영원의 세계와 이상향을 꿈꾸는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 「눈바다」에서 “등을 후리치는 파도에 바위는 점차 사람 모양을 찾아갔다(…)온종일 바다는 하늘과 몸을 섞는다/골수를 뽑아 올린다/바위는 바다 위를 걸어간다(…)어딘가로 세상이 옮겨지고 있다” (「눈바다」 부분)와 같이 바위가 거센 파도와 눈발에 의해 겨우 “사람 모양을 찾아”가는 듯하지만 “그리운 이를 만”나기 위해서 바다 위를 걸어서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다. 화자는 이것을 “세상이 옮겨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다음으로 「담장 밑에서」를 보면 “정원은 내가 잃어버린 세상(…)이 섬에/내가 언제 앉아 있게 되었는지/지하 세계로부터 솟아오른 명계의 관문 같은 곳에/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지/담장은 고독하다/지쳐서 몸을 기대고 있는 자보다 고독하다/담장 너머에서는/이곳을 찾아 황량한 사막을 건너는 이도 있다/신기루처럼 담장이 솟아오르면 그의 일생을 바쳐 걷는다/그가 오기 전에 떠나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담장 밑에서」 부분)에서 화자는 정원의 “담장”에 “몸을 기대고 있는” 상황으로 이곳에 오느라고 “황량한 사막을 건너” “일생을 바쳐”야 했다. 화자는 “명계의 관문 같은 곳”에서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고 짐작도 할 수가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떠나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현실과 그 너머의 경계가 되고 있는 담장은 헤어짐의 공간이기에 “고독하”고 “지쳐서 몸을 기대고 있는 자보다 고독”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는 “누군가 죽었을 것이다/별무리에 끼었을 것이다//서늘한 바람이 귓불을 스치자/까맣게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난다/냉기와 냄새와 습도와 조명이 적절히 일치하면/설움 같기도 하고 외로움 같기도 하고/슬픔 같기도 한 느낌이/불현듯 찾아온다//별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청각도 마찬가지다/새벽엔 해안을 따라 걸었다/이 바다는 방금 죽었다” (「에필로그」 부분)와 같이 화자는 “누군가”의 죽음이나 “바다”의 죽음 등을 금방 알아차릴 정도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다. 그가 죽음의 기운을 느끼는 순간은 “냉기와 냄새와 습도와 조명이 적절히 일치”할 때이다. 일상에서 갑자기 그런 일치감을 느꼈을 때 누군가는 죽고 “은하는 소란”스러워진다. 이러한 죽음을 알아차리는 존재로서 화자는 “설움 같기도 하고 외로움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다른 세계로의 이동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라기보다 그것을 자각하는 자로서의 외로움이나 쓸쓸함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징조는
Ⅰ-ⅰ
어제같이 달이 떠오르고 향기로운 미풍 귓불을 스쳐 가는데도, 어디선가 마악 꽃봉오리 터지려는 순간인데도 어떻게 종말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징조는 도처에서 가냘프게 떨거나 울고 있지만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징조는 그녀일 수도 있다
Ⅰ-ⅱ
이날 없던 별이 나타난다
Ⅰ-ⅲ
새벽 여섯시 육분육초 시계는 멎는다 떠오르던 태양이 지평선에 굳어 있다 승천하려다 절정의 순간을 간직한 채 곧추선 물안개 비늘처럼 흩날리다(…)육신 가운데 가장 먼저 정지하는 것은 방금까지 흐르던 기억이다 영혼은 폐쇄된다 다만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화면을 비집고 나오려다 실패한 동물의 왕국과 사막의 모래와 메마른 강물을 맨발로 걸어간 자는 이천 년 전 지층으로 내려가 화석이 되었다 새벽 여섯시 육분육초 시계는 혼자 움직인다
Ⅰ-ⅳ
이날 모든 문이 일제히 닫힌다
Ⅰ-ⅴ
그녀의 거리는 향기롭다 그녀는 몰약을 부어 줄 남자를 찾아다닌다 그녀가 예언자라면 눈이 먼 것이다(…)그녀의 악기는 부서진 지 오래여서 절정을 부를 때면 늘 아프다 그녀가 걸음을 디디면 목련이 떨어졌다 잠시 앉을 때면 비가 내렸다 하늘을 바라보면 깨진 달이 떴다 그녀를 스쳐 볼 때마다 내게선 한 계절이 지난다 그녀는 유행가를 흥얼거린다 세상 끝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목소리가 거리에 차오른다 이 마지막 세례는 처음이었다
Ⅰ-Ⅵ
이날 모든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 「묵시록 Ⅰ」 부분
이 시는 신약성서의 마지막권인 요한계시록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서 “묵시”는 어떤 의도나 의미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고 은연중에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즉 윤의섭 시인은 이 묵시의 의미대로 징조나 징후와 같은 것을 통해서 자신이 의도한 바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화자는 “종말”과 관련해서 “징조는 도처에서 가냘프게 떨거나 울고 있지만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면서 “징조는 그녀일 수도 있다”고 암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종말의 날을 예언하는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제시된다.
그날 “새벽 여섯시 육분육초”에 “시계”가 멎으면서 자연의 흐름도 일제히 멈추고 인간의 “기억”이 정지되면서 “영혼은 폐쇄된다” . 그리고 “없던 별이 나타”나고 “모든 문이 일제히 닫히”며 “모든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일들이 종말의 날에 일어나게 된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살아 있지 않”은 그 시간에 “사막의 모래와 메마른 강물을 맨발로 걸어간 자”는 아마도 “예수”일 것이고 화자는 예수가 “이천 년 전 지층으로 내려가 화석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종말의 “징조”로 제시된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몰약을 부어 줄 남자를 찾아다”니고 “악기는 부서진 지 오래”이고 “유행가를 흥얼거린다” . 그녀가 삶 속에서 일상적인 행위를 하면 바로 부정적인 일들이 생긴다. “걸음을 디디면 목련이 떨어”지고 “잠시 앉을 때면 비가 내렸”고 “하늘을 바라보면 깨진 달이 떴다” 그러니까 그녀는 종말의 징조이고 “몰약”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녀를 만난 남자는 죽음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화자는 “그녀를 스쳐 볼 때마다” “한 계절이 지난다”고 고백한다. 그만큼 그녀는 화자에게 매력적인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불길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의 노래는 “세상 끝에서” 종말을 감지한 화자에게 “마지막 세례”와도 같은 인상을 남긴다.
윤의섭 시인은 2019년 《문학과 사람》 여름호에서 자신은 “무신론자이고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므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해보고 파헤쳐보고 꿰뚫어보려는 나의 시도는 한계에 부딪친다. 그렇다고 무신론자임을 바꿀 생각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윤의섭 시인은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불교적 사유를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가닿을 수 없는 세계나 우주의 비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 대한 의구심을 절대자에게 비추어보려는 작은 몸짓일 수도 있다.
시인의 다른 시 「城」, 「列島經」, 「무반주 첼로를 켜는 나무」에서도 종말의 징후와 사물과 타자들이 종말의 징후를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城」에서 종말의 징후와 종말의 반복적 패턴이 드러난다. 그리고 「列島經」에서는 종말의 징후와 그것의 수학적 규칙이 제시되는데 “수열”과 “열도”의 “종말”이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반주 첼로를 켜는 나무」에서 화자가 느끼는 종말의 징후와 사물과 타자들에 나타나는 종말의 징후가 다르지 않고, 종말의 징후를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임을 깨닫게 된다.
5-1. 말없이 뿌리내리다 떠나가는 유목
이건 몸에 쓰이는 후기 혹은 가장 오래 이어진 필사여서
아프기 전에 이미 아픔의 절정을 알고 마는 참어(讖語)
<중략>
그러니까 나는 네게 복제된 증상이다
비접촉으로도 너의 고통과 결합하는 방식
물들기 쉬운 내력을 앓고 있었으므로 너는 다시 내가 불러낸 처음
어느 살점 속에 말없이 뿌리내리다 떠나가는 유목은 흔적을 남기지 않지
치명적이더라도 내게만 머물기 바라는 난치의 기억
내게서 자라나다 내 안에서 죽어야 하는 너라는 병
전이의 경로를 따라가 보면 달처럼 맴돌았다는 진단이 나올 것이다
한때 월식이 있었고 해독하기 힘든 천문이 새겨졌을 것이다
온몸으로 퍼지는 불온한 증여를 들여다본다
<중략>
나는 지금 징후와 후유증 사이의 중간계를 통과하는 중이다
나는 아프기도 전에 감동했다는 것이며
물들었으므로 닮아 가야만 하는 의례를 따라
그리하여 면역이라는 영역에 들어설 때까지
- 「감염」 부분
5-2. 내리지 않는 비와 이명이 만들어낸 눈물 사이에서
비가 내리는데 실은 비가 오진 않아
내심으론 늘 낙하지점이 생겨났고 피할 수 없이 젖어드는
착각이라고 알면서도 비를 내리게 했다
한 번도 스스로 내린 적 없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물기가 언제부턴지 모르게
긴 밤이 필요했다 내 알기로 물방울의 심장이 소진하는 비구름은 충분히 고통스럽다
나는 내리지 않는 비와 이명이 만들어낸 눈물 사이에서
여전히 너를 겪는 중이다 긴 밤이 필요했다 소진은 충분히 고통스럽다
<중략>
영역을 알 수 없다는 고비라는 사막도 있지 끝없이 번지는 중이기 때문이겠지 이 생존은 어떻게 죽지 않았을까라는 우문에는
미안해 나는 죽어 가며 사는데 이 말이 대답으로 들리면 도망쳐야 해 나는 아직도 비를 뿌리고 있어 메마를수록 잠기고 침몰하고 쓸리고(…)사막화는 격렬해지겠지 오지 않는 빗소리를 강제로 볼륨 높이고 영원히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믿는 거지
- 「고비」 부분
<5-1>에서 “감염”은 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너”에게서 형성되어 나에게로 전달된 사랑은 “감동”이었고 너무 “닮”고 싶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말없이 뿌리내리다 떠나가는 유목”처럼 “네게서 너무 멀어져” 있고 “나는 지금 징후와 후유증 사이의 중간계를 통과하는 중이다” . 그리고 “면역이라는 영역에 들어설 때까지”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5-2>에서 시적 화자는 “비가 오진 않”는데도 “비가 내리는” “착각”을 하고 그걸 “알면서도 비를 내리게” 하는데 그 심리의 기저에는 “너”가 있다. 화자는 “여전히 너를 겪는 중”이고 “긴 밤이 필요”하며 그로 인한 “소진은 충분히 고통스럽”다. 즉 화자는 “너”와의 이별로 인해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데 실은 비가 오진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고비”는 화자의 심리적 상태가 극심하게 황폐화되어 사막화가 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이 상황이 인생의 고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나는 죽어 가며 사는데” “사막화는 격렬해지겠지”에서 드러나고 있다. 윤의섭 시인은 평소에 영원불멸의 상태로 진입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미라”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감정이 황폐화되어가는 결과물로 제시되고 있다.
다른 시 「번짐」, 「돌 속에 내리는 비」, 「Y의 날」에서도 이별에 대한 정서가 나타나고 있다. “어렵사리 이별을 하고 다시 만날 일이 그리 쉽게 일어나지는 않겠지만/돌이켜보면 할 말을 잃고 네 앞에 앉아 있는 것도/언젠가 함께 해안에서 북극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내 스산한 나무 아래에 서 있는 동안 너는 저만치 모퉁이를 돌아서고/겨울이 들이닥쳤고 겨울비가 내린다/공명/같이 운다는 뜻이다/그러니 나는 울음이며 나뭇잎은 울고 있는 중이다.” (「번짐」 부분)에서 화자의 이별은 사물과 계절의 이동을 앞당기면서 함께 울어주는 의식을 치른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돌 속에 내리는 비」에서는 조금 다른 이별을 보여주는데 “옥잠화 넓은 잎 들쳐보면/그 속에 앉아 새참 먹던 아버지/무슨 일인가 하고 뒤돌아본다(…)멀리 지평선에선 노을이 가늘게 벌어져/건너 세상이 설핏 보인다/바깥은 이미 맑게 갠 모양이지만/여전히 돌아가신 아버지는 새참을 먹고/돌아가지 못한 별빛은 길바닥에 나뒹군다/온전히 마르려면 아직 멀었다” (「돌 속에 내리는 비」 부분)와 같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직 이 세상과 이별하지 못하고 화자의 주변을 서성이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것은 화자의 무의식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아직도 이별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별”은 아버지의 영혼을 의미하고 이 세상에서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또한 「Y의 날」에서는 사물이나 인간이 아닌 신과의 이별을 다루고 있다. “그날 아침 Y는 결국 신이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았다(…)바란 적 없으나 Y에겐 단 한 조각 꿈의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다/Y는 의아한 아침을 본다/그날 원년이었다/그날 모두 쏟아져 내렸다/그것은 낙엽이 아니라 착륙하는 무덤이었다/Y가 보기에 심히 미치더라” (「Y의 날」 부분)에서처럼 화자는 “신”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신이 떠나자 “꿈의 기록”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쏟아지면서 세상이 “무덤”이 되어간다.
이처럼 다양한 대상과의 이별은 윤의섭 시인이 평소에 생각한 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살아있는 존재와의 이별은 자신을 메마르게 하거나 황폐화시키고, 죽은 자들과의 이별은 머뭇거리면서 완전한 분리가 어려워지고, 신과의 이별은 모든 것이 죽음으로 치닫는 막막함을 느끼게 한다. 살아있는 존재들이나 죽은 존재들, 신과의 이별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까닭에 시인은 삶과 죽음 사이에 꿈이라는 통로를 마련해두고 그들과의 접선을 시도하거나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6. 어떤 영원이 잘려나갔을지도 모르는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
그의 얼굴이 문득 아버지 얼굴과 겹치더니
다른 낯익은 얼굴로 보이다가
끝에 가선 모르는 얼굴로 바뀌어 있다
<중략>
조용하던 카페에 갑자기 음악이 흐른다 상황을 눈치챈 듯
당황한 듯 관심을 돌리려는 듯
어느새 그는 그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 한잔 하자 웃으며
카페가 서서히 멈추는 미동을 느낀다
그는 꾸는 사람 없이 돌아다니는 꿈이었다
자기가 꿈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였고
어쩌면 나 역시
<중략>
내가 아는 나이라면 졸음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아주 긴 장면을 잘라내고 편집된 영화가 상영 중이다
다큐멘터리인데 언제 찍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등장하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어떤 영원이 잘려나갔을지도 모르는
분명 아름다운 날들이었으나 믿지 못할 순간의 연속일 뿐이다
가급적 놀라지 않기로 한다
우린 신이 꾸던 꿈일 수도 있다
원래 꿈이었을 수도 있다
<중략>
증거 하나 세상은 누가 죽어도 지워진 적 없다
증언 하나 너 어디 있다 지금 나타난 거니
증좌 하나 빈자리는 어떻게든 메꿔진다
<중략>
거기 창가에도 빗방울이 흘러내리고 있겠지
같이 거닐던 도서관 길가에도 코스모스 피었겠지
다락에 잠들었어도 라디오는 최신가요를 수신 중일 테고
천막극장 사라졌지만
어느 마을에선가 천막 펼치고 옛 영화를 상영하고 있을 것만 같은
<중략>
이제 보니 나는 한평생을 다 가보았어요
무슨 계절이 끝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알 일도 없죠
좀 더 보고 싶어 달려봐도 노을은 빨랐다
영영 따라잡지 못하는 건 매일 꾸는 악몽에서도 그랬다
가까워질수록 좁혀지지 않는 거리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이 여기서 할 수 있는 다다
깨어나도 깨어나는 꿈이었다
- 「비몽」 부분
윤의섭 시의 특징 중 하나는 한 사람을 세 사람이 스쳐 지나기도 하고 두 사람이 스쳐 지나기도 하고 그들은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먼 과거에서 온 사람도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교차적으로 엇갈리면서 그 세계 속의 사람들도 함께 혼융되는 양상을 보인다. 화자의 과거 시간 속에는 유년의 기억과 저수지의 기억, 가족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현재의 시간 속에는 별과 우주의 운행원리, 자신의 몸을 매개로 오고가는 사람들과 영혼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미래의 시간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유적이나 미라, 화석, 불사조 등을 통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원불멸을 꿈꾸기도 한다. 이때 ‘꿈’(夢)과 ‘죽음’의 통로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소통이 가능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시에서는 에피소드가 다수 소개되고 있는데 화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그”는 “아버지 얼굴”로, “다른 낯익은 얼굴”로, “모르는 얼굴”로 세 번 변신한다. 그리고 공간 역시 “산 너머에서 헬리콥터가 날아”오거나 “조용하던 카페에 갑자기 음악이 흐”르는 등 속도의 전환이 급격하게 이루어진다. 이것은 현실의 시간과 공간에서 과거의 시간과 공간으로 교차되면서 그 사이에서 인물과 사건이 엇갈리기도 하고 몽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는 “사몽(思夢)”으로 “옆집 살던 누나”가 “삼십 년 만에 나타났다”거나 “펫 숍에서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개”가 있다거나 “공원 벤치에서 졸고 있던 노인”을 만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과거 속 인물들이 현실에서 마주치게 된다. 화자는 그들이 “꾸는 사람 없이 돌아다니는 꿈”이었고 “편집된”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꿈”에서는 “어떤 영원이 잘려나갔을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운 날들”이면서 “믿지 못할 순간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린 신이 꾸던 꿈일 수도 있”고 “한평생을 다 가”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미래의 시간에 속한 “노을”이나 “악몽”과는 “가까워질수록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어 “멈출 수는 없”고 “깨어나도 깨어나는 꿈”을 꾸는 “비몽”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시인의 다른 시 「꿈속의 생시」, 「꽃잠」, 「이몽」에서도 꿈과 관련해서 다양한 의도를 엿볼 수가 있다. 「꿈속의 생시」에서 “내가 이 해안에 있는 건/파도에 잠을 깬 수억 모래알 중 어느 한 알갱이가 나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내가 이 산길을 더듬어 오르는 건/흐드러진 저 유채꽃 어느 수줍은 처녀 같은 꽃술이 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그리하여 몇 번이고 나는 생의 지층에 켜켜이 묻혔다 불려 나온다” (「꿈속의 생시」 부분)와 같이 화자가 “해안”에 있거나 “산길”을 오르는 것은 “어느 한” 모래 “알갱이”가 나를 기억하거나 “유채꽃” “꽃술”이 “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꽃잠」에서 “벌써 한 계절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새벽마다 같은 꿈을 끄집어내고는/똑같은 꿈을 꾸며 하루를 보낸다(…)음습한 술집에 불려 나가 백일몽처럼 무언가 중얼거리다 들어온다//봉긋 솟은 언덕에 사람을 처음 보는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깔깔거리다 인기척에 숨을 죽인다//노오란 하늘 아래 나와 꽃만 마주 보는 중이다/꽃은 조용히 머리부터 먹기 시작한다” (「꽃잠」 부분)와 같이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화자가 “술집에” 불려갔다 집에 돌아와서 곯아떨어졌고 꿈속에서 꽃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이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몽」에서 밤송이를 줍는 꿈과 산을 종주하는 꿈을 연이어서 꾸고 있다. “나는 어쩌다 능선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좀 전까지 꾸던 꿈에서는 밤송이를 주워담고 있었다(…)스스로 알게 된다는 건 저버릴 줄 안다는 것이다/종주 네 시간째/선두에서 얼마 안 남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나는 거짓 희망처럼 걷는 중이고 희망을 걷어내는 중이다” (「이몽」 부분)와 같이 화자는 두 가지 다른 꿈을 통해서 채움과 비워냄의 이치를 생각하게 된다. 즉 「꿈속의 생시」에서 꿈을 통해서 기억을 떠올리고, 「꽃잠」에서 화자의 욕망을 드러내고, 「이몽」에서는 채움과 비워냄이라는 명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윤의섭 시인은 몽환적 상상력을 통해서 꿈과 죽음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탐색해왔다. 90년대의 여러 시인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적인 변화를 추구할 때에도 윤의섭 시인은 자신의 세계관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그런 태도의 긍정적인 측면은 지속적인 반복과 강조를 통해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전문성을 획득하게 된다. 반면에 부정적인 측면은 일곱 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 일관된 주제를 향해 매진했다는 것만으로도 고집이 세고 유연성이 없는 사람으로 비칠 수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나올 시집들도 같은 경향일거라는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 이러한 지속적인 시세계의 추구는 의연해 보이면서도 때로 위험해 보이는 양가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윤의섭 시인은 모더니즘 시의 특징인 몽상과 죽음의 탐색을 통해서 존재의 근원에서 소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종말 이후 영원성의 세계를 향한 추구에서 모더니즘시의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천체와 우주에 대한 원리와 자연의 순리를 따르려는 것에서는 서정시를 수용함으로써 모더니즘계 서정시를 쓰는 시인으로 점차적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또한 윤의섭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시간의식에 대한 독특한 사고체계를 운용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교차적으로 엇갈리게 하여 그 세계 속의 사람들도 함께 혼융되는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화자가 불러내는 과거의 시간 속에는 유년의 기억과 저수지의 기억,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현재의 시간 속에는 별과 우주의 운행원리, 자신의 몸을 매개로 오고가는 사람들과 영혼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미래의 시간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유적이나 미라, 화석, 불사조 등을 통한 영원불멸을 꿈꾸기도 한다. 이때 꿈과 죽음은 하나의 수단으로 시인의 비밀 통로가 되어서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시간들을 교차하는 화자와 인물들은 한 사람을 통해서 여러 사람이 스쳐 지나기도 하며 기존에는 없던 시간관과 세계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국문단 특히 한국시단을 들여다보면 인생의 문제와 삶의 문제, 소통의 문제를 점차적으로 확대해가면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등단 초기부터 일관되게 하나의 세계만을 집요하게 추구함으로써 노시인이 될 때까지 한 우물만 파는 시인들이 있다. 후자의 경우 전문성을 인정받긴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소통이 부족하여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서 대중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것과 진정으로 독자들과 소통할 때가 되었는가 하는 것은 시인 개개인의 성향과 관련이 있다. 시적 완성도가 덜 된 경우에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해서 충분히 사유하고 탐색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고, 어느 정도 사유와 기법이 완성되었을 때에는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소통의 미학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윤의섭 시인의 시는 여물 대로 여물고 익을 대로 익어서 이제는 시를 함께 감상할 독자들의 존재가 요구된다. 자신의 시세계에 독자들을 초대하고 소통을 점차적으로 확대하여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시적 성취를 이룩하기를 바라게 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모더니스트였던 정지용 시인은 초기시의 모더니즘적 감각이 중기시의 종교시를 거쳐 후기시의 자연시로 가면서 점차 약화되었지만 대신에 후기시에서 전통적인 미학에 바탕을 둔 산수시를 통해서 서정시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당시 시대적인 상황도 어느 정도 작용을 하였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큰 시세계를 향해 나아가려고 한 그의 열정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윤의섭 시인 역시 모더니즘계 서정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모더니즘적 감각과 서정시의 감성을 조화롭게 만들어서 그만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식은 색채가 어둡고 슬프고 무거워서 일상의 가벼움에 중독된 독자들에겐 이해하기가 조금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삶이 너무 힘들어서 놓아버리고 싶을 때 자신의 마음을 다독여주면서 상처를 치유해주길 바라는 독자들에게 윤의섭 시인의 시는 불친절하고 배려심이 없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만큼 윤의섭 시인의 시는 독자를 위한 시가 아니라 시의 절대미학을 중시하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고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흘러가고 흘러가서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더라도 말이다. 또한 독자들의 모더니즘시를 이해하는 품도 넓어져서 윤의섭 시인의 시가 독자들의 가슴에 흠뻑 스며드는 시대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박현솔
제주 성산 출생. 아주대 대학원 졸업(국문학 박사).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01년 현대시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와 시론집 한국 현대시의 극적 특성이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2005년, 2008년). 현재, 계간 문학과 사람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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