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홍치 중흥과 丘濬 『大學衍義補』과 楊廉 『大學衍義節略』、『補略』 편찬
2021년 2월 28일
명나라 중기부터 황제가 근면하지 않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관원들도 사리사욕에 빠졌고 부유한 사람들은 각종 수단을 써서 재부를 늘렸습니다. 결국에 국가재정이 부족하고 군사비용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많이 징수하였기에 농민사회가 붕괴되고 각지에서 반란이 많이 일어났고 반란세력들이 뭉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중앙정부는 가난한 농민과 빈민에게 세금 감액과 면제 등 혜택을 많이 주었으나 국가 혜택은 오히려 부유한 지주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국가 혜택이 농민과 빈민에게 돌아가도록 하려면 유능한 관원들의 투명한 행정실행이 바쳐주어야 합니다.
주목할 것은 유능한 고급관원을 발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정직하고 유능한 여러 사람이 추천하는 사람 몇 명만 제대로 발탁하여 행정을 맡기고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끔 도와주는 것뿐입니다. 효종의 홍치 중흥에서도 인재 발탁과 임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효종(朱祐樘, 1470-1505, 재위 기간 1487-1505)이 18살(1487) 9월에 황제 자리에 올라 개혁을 진행하였고 38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18년 동안 개혁하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홍치 중흥”입니다.
홍치 황제는 병약하였으나 아침 회의(早朝)를 열고 점심때 회의(午朝)까지 열어 대신들과 국무를 논의하고 좋은 방안을 찾아 처리하였습니다. 또한 경연(經筵)과 일강(日講)을 열어 학자들에게서 국가 통치의 핵심 요령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더욱 나빠지고 황제 자리를 물려줄 자식도 없기에 불교와 도교에 기대어 비방을 찾았고 그래서 일부 부당한 일들이 일어났으며 38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재위 18년 동안에 많은 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첫째, 효종은 즉위하자 곧바로 마문승(馬文升, 1426-1510)을 도찰원 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에 임명하여 군대에서 부패한 인물들을 몰아내고 홍치 2년에는 병부 상서로 승진시켜 군정를 정비하였습니다.
둘째, 홍치 원년 정월에는 정직하고 유능한 신하 왕서(王恕, 1416-1508)를 이부 상서로 임명하여 국가의 중앙정부 행정에서 간신과 아첨꾼들을 몰아내서 행정을 바로잡았습니다. 홍치 2년에 왕서의 천거를 받아 유대하(劉大夏, 1437-1516)를 홍치 15년(1502)까지 지방에 파견하여 각종 사건을 해결하였습니다.
셋째, 홍치 2년에 이동양(李東陽, 1447-1516)을 시강(侍講) 학사로 임명하여 홍치 연간 내내 그를 곁에 두고 자문받았고 과거시험을 맡겨 인재를 선발하였습니다.
구준(丘濬, 1421-1495)은 효종이 즉위한 1487년 11월에 『대학 연의 보(大學衍義補)』 160권을 올렸고 효종이 칭찬하였습니다. 양염(楊廉)은 홍치 12년(1499) 정월에 경연의 교재로 『대학 연의(大學衍義)』를 쓰자고 건의하여 효종이 받아들였습니다. 양염은 구준의 저서를 요약하여 『대학 연의 절략(大學衍義節略)』 10권과 『보략(補略)』 21권을 편찬하여 올렸습니다.
물론 진덕수(眞德秀, 1178-1235)의 『대학 연의(大學衍義)』가 국가 통치에 중요하다는 것은 명 성조가 일찌감치 알고 경연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효종이 중흥 정치를 실행하는 동안에 다시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반 지식인들은 주자학이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출세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국가 통치에 필요한 사회과학이라는 점을 재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명나라 말기까지 주자학 가운데 경세학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효종 황제의 홍치 중흥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국가재정과 군사력이 많이 개선되었으나 국가체제의 붕괴를 피할 수 없었고 민생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가정 황제 연간에는 더욱 상황이 나빠졌습니다.
아래 글은 『명사 기사본말』에서 구준과 양염에 관한 글을 인용하여 번역하였습니다.
丘濬,『大學衍義補』,160卷。
楊廉,『大學衍義節略』十卷、『補略』二十一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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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응태(谷應泰) 편찬, 『명사 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권42, 「홍치 연간의 군신(𢎞治君臣)」︰
헌종 성화 23년(1487) 9월 임인일에 황태자가 황제위에 올라가서 천하에 사면하는 조서를 내리고 이듬해부터 홍치(弘治) 원년으로 삼았습니다. 요망한 사람 이자성(李孜省)을 사형하고 요망한 스님 계효(繼曉)를 원적지로 돌려보내고 백성으로 바꾸고 태상경 도사 조옥지(趙玉芝)와 등상은(鄧常恩)을 변경지역 군인으로 귀양보내고 서역 스님 국사 영점죽(領占竹)을 해고하고 아첨꾼 양방(梁芳)과 진희(陳喜)를 효릉의 제사를 담당하는 직위로 좌천시켰습니다.
11월에는 예부시랑 구준(丘濬, 1421-1495)은 『대학 연의보(大學衍義補)』 160권을 올렸기에 예부 상서로 발탁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구준은 진덕수(眞德秀, 1178-1235)의 『대학 연의(大學衍義)』가 통치술의 요점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국가와 천하를 다스리는 구체적인 사항을 빠뜨렸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경전, 제자백가, 역사 서적 등에서 국가와 천하를 다스리는 데 관련된 글들을 모아 분류하고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붙이고 『대학 연의보(大學衍義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11월에 완성하여 올렸고 황제가 보더니 아주 기뻐하며 “당신이 편찬한 서적은 고증이 정확하고 논술이 박식하기에 정치하는 데 도움이 되어 높이 평가한다.”고 평론하고 상금을 내리고 예부 상서로 승진시키고 예부에서 간행하도록 시켰습니다.
홍치 4년(1491) 겨울 10월에 예부 상서 구준에게 문연각 대학사를 겸직하도록 시켰다.
홍치 5년(1492) 4월에 대학사 구준이 상소문을 올려 당시 정책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황제께서 몸가짐을 반듯하게 하여 국가의 모범이 되시고,
둘째, 과도하고 헛된 의욕을 줄이고 행정업무에 전념하시고,
셋째, 취향 때문에 이단 종교에 빠지지 마시고,
넷째, 황실 재용을 절약하셔서 국가재정을 낭비하지 마시고,
다섯째, 높은 관원 임용을 공정하게 하셔서 한쪽 의견만 듣지 마시고,
여섯째, 개인적인 만남을 금지하셔서 국정을 바로잡으시고,
일곱째, 올바른 의리를 밝게 따지셔서 간신과 아첨꾼을 멀리하시고,
여덟째, 검소한 습관을 들이셔서 장구한 미래 계획을 품으시고,
아홉째, 정무를 열심히 보셔서 최상의 정치를 확대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시면 자연재해를 줄이고 이상한 증후를 없앨 수 있으며 옛날 요순임금과 하은주 삼대 성왕의 통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2개 조목을 만들어 조정이 간사한 언론을 누르고, 과도하고 허망한 요구를 막고, 국가 재용을 절약하고, 국가권력의 누수를 줄이는 것을 도우려고 하였습니다. 상소문 분량이 많았습니다. 황제가 상소문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당시 폐해를 정확하게 지적하였다고 여겼습니다.
홍치 12년(1499) 정월에 급사중 양염(楊亷)이 상소문을 올려 경연 자료는 『대학 연의(大學衍義)』를 쓰는 것이 좋다고 건의하였습니다. 황제와 조정에서도 좋다고 동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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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應泰編,『明史紀事本末』,卷四十二,「𢎞治君臣」︰
憲宗成化二十三年(1487)九月壬寅,皇太子即位,詔赦天下以明年為𢎞治元年。妖人李孜省伏誅,妖僧繼曉發原籍為民,太常卿道士趙玉芝、鄧常恩謫戍邊,番僧國師領占竹等悉革職,斥佞豎梁芳、陳喜等,徃孝陵司香。……
十一月,禮部右侍郎丘濬(1421-1495)進所著『大學衍義補』(160卷),擢禮部尚書。先是,濬以真西山『大學衍義』有資治道,而治國平天下之事缺焉,乃采經傳子史有關治國平天下者,分類彚集,附以已意,名曰『大學衍義補』。至是,書成進之,上覧之甚喜,批答曰︰“卿所纂書,考據精詳,論述該博,有輔政治,朕甚嘉之。”賜金幣,遂進尚書,仍命禮部刋行。
(孝宗𢎞治四年)冬十月,命禮部尚書丘濬,兼文淵閣大學士。
五年四月,大學士丘濬,上疏言時政之弊,大略言︰陛下端身以立本,清心以應務。謹好尚勿流于異端,節財費勿至于耗國,公任用勿失于偏聽,禁私謁以肅内政,明義理以絕奸佞,愼儉德以懐永圖,勤政務以𢎞至治。度可以回天災消物異,帝王之治可幾也。因擬為二十二條,以為朝廷抑遏奸言,杜塞希求,節財用、重名器之助,凡萬餘言,上覧奏甚悦以為切中時弊。
(弘治)十二年(1499)春正月,給事中楊亷,疏講書,宜用『大學衍義』,從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