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 (15)
돌아온 용사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전화가 왔다. 환자 혈압이 떨어지고 의식이 없어진다는 전갈이다. 콜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렸다. 와보니 월남전쟁의 한 참전용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 월남전쟁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떠오른다. ‘콩은 콩인데 못 먹는 콩은? 베트콩.’ 전쟁은 누가 기억하는가? 바로 그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과 그 가족들이 기억한다.
월남전쟁은 1975년 4월 끝났다. 월남이 공산화되면서 사람들의 뇌리속에서 월남은 서서히 잊혀져갔다. 사이공이란 익숙한 이름도 호치민으로 바뀌면서 잊혀져갔다. 그러나 그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무수히 이 땅에 남아있다. 한국은 이 전쟁에 연인원 32만여 명이 참전하여 10년 동안 싸우면서 5천백여 명이 죽었고 만 천 명 정도가 부상당하여 돌아왔다. 이 전쟁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에게는 아직도 전쟁의 악몽과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다. 이분을 만난 것은 3년 전이었다. 양팔에 상처가 있었으며 우측 다리에 마비증세도 있고 하체에 힘이 없어 자주 넘어졌다. 전신통증이 심하며 가슴엔 강력한 진통제 패치를 붙이고 있었다. 뭔가 모를 울분으로 차있었고 구역질을 자주 하고 호흡곤란도 있었다. 한마디로 자신을 지탱하던 지주 같은 것이 붕괴된 느낌이었다. 격심한 전투를 겪고 난 후 외상후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원하고 일주일이 되었을까 호흡곤란이 생겨 숨을 못 쉬겠다며 큰 병원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가족에게 연락하니 부인과 딸이 달려와 같이 종합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응급실에서는 가슴 사진과 심전도검사를 하고 진찰을 해보더니 딱히 큰 병이 안 보인다며 입원을 거부하여 할 수 없이 되돌아왔다. 가족들은 꾀병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꾀병은 전혀 아니었다. 치료 계획을 세웠는데 영양공급이나 통증관리보다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 같았다. 통증을 없애기는 힘들어도 울분은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양팔에 생긴 상처는 매일 치료를 하니 차츰 아물었고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통증과 불안증이 있어 진정제를 처방하니 식사도 조금씩 하게 되어 전신상태가 차츰 호전되었다. 보훈병원에 검사하러 간다고 해서 물어보니 월남전참전용사였다. 하루는 옥상에 나와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길래 다가가서 말했다.
“격심한 전투를 겪으셨겠군요.”
그분은 마음의 문을 열고 부상 입은 상황을 내게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월남전에 관심이 없는데 물어봐 주어 고맙습니다. 한국에서 1년간 훈련 후 부산에서 LST를 타고 월남으로 갔지요. 닌호아에서 근무했습니다. 나는 전투부대원은 아니고 후방의 보급부대원이었어요. 백마부대 10호 작전에 참가했지요. 하루는 사단장이 와서 전방의 부대원들이 보급이 끊겨 굶어죽게 생겼다고 목숨을 걸고 식량을 전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헬기에 전투식량을 싣고 베트콩들이 우글거리는 정글 위를 비행했습니다. ‘투투투투~.’ 고립된 아군 진지에서 연막탄을 쏘아올리면 그곳에 식량을 투하할 작정이었는데 마침 그날은 안개와 구름에 가려 연막탄이 보이지 않았어요. 헬기 조종사는 모두 미군입니다. 미군 조종사는 높은 상공에서 투하하려고 했어요. 높은 데서 투하하면 진지에서 2~3km나 떨어져 아군에게는 전달되지 않고 베트콩의 식량이 될 뿐입니다. 나는 미군 조종사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며 구름 아래로 하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헬기가 짙은 안개구름 아래로 내려가니 아군 진지가 선명히 보이고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백마부대 병사들이 보였어요.‘투투투투~.’ 전투식량을 투하하는 순간 베트콩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동료가 쓰러지고 나도 엉덩이 부위가 관통되어 피를 흘리며 쓰러졌어요. 부상을 입고 귀국하게 되었지요. 당시엔 참전용사들에게 어떤 혜택도 없어 너무 고달팠습니다. 부산의 5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다 허리를 다치게 되었고 고엽제의 후유증인지 식욕부진, 기력저하, 전신통증 증세가 나타나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참전수당 34만 원에 시보조금 10만 원을 합쳐 44만원이 매달 나오지만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진 못합니다.”
베트콩들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지원했다가 부상을 입은 이 참전용사를 최선을 다해서 도우려고 노력했다. 이분은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입원 3년 만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
장례를 치른 3일 후 부인과 딸이 병원비 정산하고 인사차 찾아왔다.
“떠나는 날 아침에 비가 내렸어요. 남편의 눈물인가 생각했습니다. 날씨가 참 좋았어요.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정말 좋은 시기에 가셨네요.”
산청 호국원에 모셨다고 한다. 잔디가 잘 조성되고 넓고 평온해서 좋았다고 한다. 딸에게 말했다.
“이제 어머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여태까지 정신력으로 버텼는데 이제 심신이 풀려 숨겨진 병들이 나올 수 있으니 건강검진도 꼭 해보세요.”
“네, 올해는 홀수해라 내년에 꼭 해보겠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전쟁은 누가 기억하는가?
바로 그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과 그 가족들이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