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팝아트전을 다녀온 후 차일피일 하다 일주일이나 지나서야 후기를 작성해 보려니 장애물을 만난 기분이다. 지식이나 정보 제공이라면 검색후 짜깁기 신공을 발휘하겠지만 후기는 느낌 영역인데 이미 가물가물하니 말이다.
전시회장이 개조된 역사 건물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건물 모습에 조금 놀랐다. 도시 속에 읍내 건물이라고나 할까. 숨고르기 하는 듯 얇게 펼쳐진 잔디 마당 위에 연분홍 2층 건물이 수줍은 듯 납작하게 앉아 있었다. 생뚱맞게도 2도심권 상업지대 속 고즈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주변의 기능적이고 반질거리는 건축 양식과는 달리, 아담한 촌티 건물에서 할머니 품이 느껴졌다. 잔디마당의 여백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느낌까지 자아내니 아날로그 감성이 스멀스멀 솟아나며 그 내부에 걸려 있을 그림들에 호의가 배가 되어 대충 지나칠 뻔 했던 영국 팝아트 서막부터 발전까지의 스윙런던 대중문화 현상을 좀 더 관심 있게 본 편이다.
보다 보니 스윙런던은 '런던을 흔든 물결' 또는 '스윙 춤추는 런던'의 함의가 아닐까 생각했다, 가진자의 미술이 아닌 만화/영화/팝음악 등 대중의 욕구와 취향을 주축으로 한 새 미술 경향과 함께 격변의 시대상을 이미지화하기 위해 사용했을 듯 싶다.
스윙런던을 선도했던 리챠드 해밀턴 등 팝아티스트들의 작품에서 사회의 주류지만 자칫 예술에서 소외되어 온 이들이 예술을 향유하도록 예술의 거품과 위선을 거둬내려 한 마인드가 잘 조명되어 있었다. 보수적 시각에선 반항으로 보였겠지만 이미 런던을 뒤흔들며 세계적 아티스트들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 중에 데이비드 호크니가 있다.
지성미와 선구자적 기질도 갖춘 데이비드 호크니, 돈도 일도 인간관계도 성공적이니 이 남자만큼 다 가진 사람이 있을까.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타고난 도전자이고 지칠 줄 모르는 창조자다. 지금까지도 노익장을 발휘하며 신세대에 뒤지지 않는 마인드로 끊임없이 새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아래 그림1) 2)의 강렬하지만 깔끔한 마법의 색 조합과 구성을 볼 기회, 세계적 명성의 호크니를 누려보고 싶었으나 늘 그렇듯이 정작 보고 싶은 그림은 걸려 있지 않았다. 종사자가 아니니 그 바닥 관행을 알 수는 없지만 비용등 제반 여건상 대여해 오기가 힘들거라고 짐작은 해 본다. 아쉬움을 해소하는 길은 현지 방문 뿐일려나...
그림1) The Road to York through Sledmere, 1997
그림2) Nichols Canyon, 1980
이번 전시된 호크니 작품들의 주종은 리도그래프(석판화)였고 사진 콜라쥬와 공연 포스터도 제법 많았다. 낯선 그림들이 많았기에 가급적 꼼꼼히 보려 노력한 편이다. 그 중 트리스탄과 이졸데 포스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보색조합에 끌린 셈이다.
이 포스터는 1987년 LA 뮤직센터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시 오페라 무대디자인과 함께 제작된 작품이란다. 포스터에 압도적으로 사용된 푸른계열 색상과 붉은 손의 얽힘 등 우울하고 위험한 분위기에서 원래 스토리를 모른다 해도 '로미오와 줄리엣'류의 남녀간 비극적 사랑이 담긴 오페라임을 느끼게 했다. 그릴 당시 완전한 감정이입 상태였나 보다.
이 포스터가 내 주의를 끈 이유는 여러 부분이 해체된 뒤 입체적으로 조합해 놓은 면에선 얼핏 피카소를, 남녀가 한 몸뚱이로 섞인 모습은 클림트의 ‘키스’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검색해보니 호크니가 가장 존경한 화가가 피카소라고 하고 클림트의 영향도 받았단다.
나름 구성과 주제 구현에 공을 들인 전시 기획 덕분에 영국 팝아트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다양한 작품들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나 시그너쳐 작품들은 쏙 빠진 채 호크니의 명성만으로 밀어부친 느낌이기에 호크니의 광대한 영역의 작품세계, 환상적인 색과 대상들의 조합을 확인하기엔 미흡했지만 이미 언급했듯 이해 못할 부분이 아니다.
한편, 협소한 전시장을 핑계로 개인 카페와 나눠 공동전시한 것은 관람자 중심이 아닌 장삿속 마인드의 작용이 아닌가 의심이 들고, 전시장 공간 형태상 그림 일부를 원거리에서 보아야만 했던 점은 안일해 보였다. 바닥에 가설 설치물을 채워서라도 관람 장애를 제거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유명인의 작품을 볼 기회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운으로 자족하며 전시장을 나왔다.
# 데이비드호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