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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_ 한국근현대시와 그 평설ㆍ43
보편성의 감각 일꺠워 유기적 자연과 선비정신 탐색한 이용대의 시세계
- 「처음 만난~」, 「외나~」, 「초등학교」, 「꽃밭에서」, 「바람이~」, 「선비~」, 「감자」, 「촛불」
조신권(문학평론가ㆍ연세대 명예교수)
서언
가촌(街村) 이용대(1950~ ) 시인은 1950년 강원도 삼척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 이동균씨와 어머니 김순란 여사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초등학교를 고향에서 마치고 외지로 나와 중ㆍ고등학교를 거쳐 숭실대학교 법경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는데, 대학재학 시 김현승 시인으로부터 대학국어를 배우며 글짓기 수련을 쌓았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진양화학에 입사하여 사원으로 열심히 봉직하다가 얼마 후 퇴사했다. 그 후 그는 독자적으로 수출회사 백동무역을 운영하던 중 IMF로 폐업을 하게 되었고, 2013년엔 부친의 사망으로 고향을 떠난 지 51년 만에 귀향하여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창작생활을 하고 있다. 양천문학 강서문협과 춘우청소년문학상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삼척문협 회원으로, 청소년회관과 가곡 중ㆍ고등학교 강사로, 각 문학지 추천 및 심사위원으로, 한국기독시인협회 이사로, 한국문인협회 문단윤리위원으로, 삼척교육문화원 시창작 이사로, 평론 및 칼럼리스트로 활동을 하며 문학 교육과 문단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시인이다. 2003년에 『조선문학』을 통해 「신리」, 「하늘공원」, 「가곡천」, 「터미널」, 「공금」을 표하면서 등단한 시력이 근 20년이 되는 중견 시인이다.
가촉 이용대 시인이 받은 상으로는 T.S. 엘리엇 현대시부분 최우수상, 한국기독시인협회 작품상, 서울 강서문학상 본상 등이 있고, 그의 시집으로는 『처음만난 그날처럼』(2008), 『가곡천의 여울물소리』(2009), 『바위도 꽃을 피운다』(2010), 『붉은 입술을 샘에 씻고』(2013), 『아직도 못한 대답』(2016), 『상흔을 꽃으로 여기며』(2020) 등 7권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가곡천(柯谷川) 그 여울을 따라』(2018)가 있다. 그 외에도 서울 강남구 우장산 정산에 「꽃초롱」, 강원도 영월에 「와석재」, 서울 강서구 봉재산에 「봉재산」, 강원도 삼척시 사곡면 면사무소 정원에 「가곡천의 여울물소리」등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강원도 삼척군 가곡면 탕곡리 병풍산 등산로에는 목시비(2016)가 설치되어 있다. 이성교 시인이 제1시집의 하서(賀書)에서 “이용대 시인이 시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래다. 그의 출생 성장 환경이 남다른 자연 환경에서 보는 눈이 다르고 느낌이 달랐던 것이다. 여기서 시심(詩心)이 우러났다고나 할까. 그의 말에 의하면 초등학교를 고향에서 마치고 중학교 때부터 외지에 나온 이후 고향이 그리워 글짓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학업을 다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도 시를 좋아하고 가끔 시를 써왔다고 했다.”1) 라고 말한 대로, 가촌 이용대 시인이 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래며 그 시심은 그가 태어나 자란 환경에서 비롯된다. 그의 시세계는 그가 향리에서 이렇게 자라며 이루어진 어린 시절의 체험과 일상의 대수롭지 않은 한순간 한순간, 그리고 작은 돌 하나까지도 시적인 소재로 골라 알맞은 시의 자리에 제대로 넣고 세련된 언어로써 큰 울림을 주도록 형상화했다는데 있다.
평범함 고향과 동심의 추구를 통해 보편성의 감각을 일깨워 줘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푸른 안경’의 비유를 들어 우리가 기억하고 아는 모든 것은 정신이 구성한 현상이라 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푸른 안경’을 쓰고 있어서, 우리가 보는 ‘푸르름’은 세계로부터 오질 않고 태어날 때부터 쓰고 나온 그 ‘푸른 안경’에서부터 온다는 것이다.2) 환언하면, 우리의 모든 지식과 기억은 그 어떤 것이든 ‘푸른 안경’으로 쓰고 본 경험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좀 더 자세하게 부연하자면, “어느 사람이 날 때부터 벗어버릴 수 없는 푸른 안경을 쓰고 태어났다면, 그는 세계가 푸르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러므로 그는 ‘세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영원히 알수가 없다”3) 라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과 오롯이 대면하는 수감이 바로 어린 시절이다. 그런데 이런 어린 시절에 겪은 삶과 오롯이 대면하는 푸른 체험이 생활 현실 속에 없을 때, 즉 현실적으로 느낄만한 그런 푸르름이 결여되었을 때 드러나는 심리적인 현상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요 어린아이의 마음 곧 동심이라는 것이다. 이용대 시인은 서상한 바와 같이 ‘푸른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며 자랐다. 그는, 그가 본 아주 흔한 일상적인 풍경들, 하늘과 땅, 산과 냇물, 외나무다리, 까치집, 꽃, 간이역, 가곡천 등에서, 그러한 사소한 일상의 구중함과 하나하나의 생명들이 갖는 경시할 수 없는 가치와 그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그 내미랗 우주 에너지와 숭엄한 정신을 찾아내 면밀하게 엮어 짜 우리에게 보편성의 감각이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맨 먼저 「처음 만난 그날처럼」이라는 시를 보자.
울밑에 몰래 핀 채송화같이
포플러숲 노래하는
매아미 같이
아무도 엿볼 수 없는 미소 있었네
벼이삭 여무는 갈 햇살같이
마주보고 도란이는 눈사람같이
아무도 엿들을 수 없는
이야기 있었네
개여울 돌다리마다 별이 내리고
하나 둘 건져 보는 것은 가믓에
어찌하다 익지 못한
풋살구 하나
문득 뒤돌아서 너를 찾으면
고요한 재 너머로
산 메아리 외로운데
처음 만난 그날처럼 보고 싶어라
처음 만난 그날처럼 심어두고 싶어라
어둔 밤 홀로 가는
조각 달 따라
마음 풀어 띄어 봐도 남은 가슴이
채울 수 없어 하늘만큼 비어 있구나
- 「처음만난 그날처럼」 전문
이 시는 5연으로 구성된 어린 시절에 보고 느꼈던 인상들을 기억속에 축적해 두었다가 뒤돌아보면서 새록새록 다시 떠오르는 체험과 서정을 푸른 안경을 통해 그려낸 제1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울밑에 몰래 핀 채송화나 포플러 숲을 노래하는매미가 그들 나름대로 영혼의 속삭임이고 영원의 음파인 것처럼, 어린이로 페르소나 된 화자에게도 그 누구도 엿볼 없고 엿들을 수 없는 그만의 미소의 속삭임이 있다는 것이다(제1연). ‘미소(微笑)’는 일반적으로 인간에게는 즐거움을 나타내는 표정이지만, 불안을 표현할 때도 씁쓸하게 짓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엿볼 수 없는’이라는 어구다.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처럼 다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눈’을 가지면, 대상을 ‘좋다’ ‘나쁘다’라고 구분하거나 식별하는 가치판단에 좌우되지 아니하는 훨씬 더 통합적인 관계로 엮어 짜게 되지만, 어른이 되면 사리분별력에 따라서 ‘좋다’ ‘나쁘다’를 분별하기 때문에 복잡해져서 사는 게 그렇게 녹녹하지만은 않고 즐겁지도 않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지 않고 통합적인 인식을 할 수가 있지만, 어른이 도면, 자의식이 분명해지면서,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지 않고 볼 수가 없게 되며 그 양자가 분리되면 될수록 다른 존재를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양극적 이원성 때문에 상충하고 갈등하며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고향을 떠난 지 50년이나 외지에서 살다가 시를 쓸 때 떠오른 그 인상은 푸른 안경을 끼고 본 그대로여서 그에게 있어서는 남의 전혀 모르는 자기만이 아는 즐거운 일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만이 아는 즐거움이란 어른들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아주 하찮은 것일 수도 있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보물이나 신품 같은 그런 것 곧 미소가 된다. 이처럼 시인은 고향의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보편성의 감각을 일깨워준다.
제2연에서는 ‘벼이삭’을 여물게 하는 것이 가을 따사로운 그 ‘햇살’을 마주보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도란거리는 ‘눈사람’이 있는 것처럼, 화자에게도 누구도 엿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벼이삭’을 여물게 하는 ‘햇살’과 ‘눈사람’이 도란거린다는 것은 너무나 상상의 거리가 멀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볼 때에만 가능한 그런 표현이다. 통합적인 감수성으로써 네 계절을 분리하지 않고 유기적인 통일체로 보지 않고서는 ‘가을 햇살’과 ‘겨울 눈사람’이 마주하고 어이 도란거릴 수가 있으랴. ‘가을’과 ‘겨울’은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계절의 순환 속에 잘 섞여서 흘러가는 것으로 볼 때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푸른 안경’을 벗어버린 동심을 잃은 어른들에게는 아무리 엿듣고 싶어 귀를 기울여도 들을 수 없는 그런 환상적인 것이다.
제3연은 “개여울 돌다리마다 별이 내리고/하나 둘 건져 보는 것은 가슴에/어찌하다 익지 못한/풋살구 하나”로 돼 있다. 어른의 감수성으로서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얘기를 스스럼없이 제2연에서 하다가 제 3연에서는 앞의 두 연과는 딴판으로 다른 풍경으로 전환시킨다. 일종의 반전 또는 발견하는 전환이 일어난다. 현실적으로는 ‘개여울 돌다리’에 ‘별’이 내려올 수가 없지만, ‘돌다리’나 ‘별’을 의인화시키면 오작교 다리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것처럼 ‘돌다리’와 ‘별’은 만날 수 있다. ‘돌다리’는 화자의 의인화된 변용이고 ‘별’은 이상이나 꿈을 상징하는 대유다. ‘돌다리마다’라 한 것은 돌다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의미도 되지만 ‘꿈’과 ‘이상’이 많은 어린 시절을 가리키는 표상이라 할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가 문맥상 더 적합할 것 같다. 많은 ‘꿈’과 ‘이상’이 화자가 갖게 되는 것을 시인은 물체가 여울물에 빠지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마치 귀중한 것이 물에 빠져 건져 보는 것처럼 별 하나 둘을 건져 보면 가슴에 품었지만 성숙되지 못한 것들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꾸밈은 일종의 극적장면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반전’은 사건을 예상 밖의 방향으로 급전시켜 충격을 줌으로써 독자에게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라 했다. 그의 시학에 따르면 한 사건에서 완전히 다른 사건으로 넘어간 반전 같지만 어린아이의 심안(心眼) 안에서는 남모른 미소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과 개여울에 내려와 빠지는 별들을 건져서 덜 성숙된 이상이나 꿈을 보는 것은 달리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독자들은 무지에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기는 하지만, ‘어린아이의 눈’에는 결국 그것을 두 사건이 아니라 그저 그 시절에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래서 좋고 나쁜 것이 없다. 어린아이 때는 좋고 나쁘고를 가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 돌이켜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제일 아쉬운 것이 그런 것이다. 시인의 소년 시절의 모습이 역력히 떠오르게 하는 반전이요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이 연에 이르면, 꿈과 일상의 경계마저 무너진다. 수많은 별에 비유된 꿈과 이상들이 빗방울이나 눈송이처럼 여울 다리로 떨어져 뒹굴지만 돌이켜 보면 풋살구 같은 미숙함이 보여 아쉽다는 것이다.
제4연에서는 고향 떠나 오래도록 고향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문득 되돌아 고향을 찾으면 고요한 재 너머로 메아리만 울려 외롭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이미 지나간 세월은 과거로 묻히고 그리워 고향을 찾으면 울려 퍼지는 것은 추억의 메아리뿐이어서 더욱 아쉽고, 그래서 처음 만난 그날처럼 보고 싶고 심어두고 싶다는 것이다. 오래 오래 기억 속에 심어 두고 싶고 외롭다는 말이다. 외로우니까 더욱 그립고 보고 싶고 품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제5연 종연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제5연 “어둔 밤 홀로 가는/조각 달 따라/마음 풀어 띄어 봐도 남은 가슴이/채울 수 없어 하늘만큼 비어 있구나” 어둔 밤 홀로 가는 조각 달 따라 마음에 얽히고설킨 매듭들을 풀어 달게 띄어 하소연해 봐도 채우지 못하고 비어 있는 남은 가슴이 하늘만큼이나 넓고 공허 하다고 한다. ‘ 채울 수 없어 하늘만큼 비어 있는 가슴‘을 그 무엇인 가로 채우고 싶다는 것이다. 채우고 싶은 그 무엇이란 앞에서 이미 표현한 것들, 아무도 엿들을 수 없는 이야기와 익지 못한 풋살구, 옛날 그때처럼 보고 싶은 것으로 채우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한다. 남이 모르는 어린 시절의 사연이나 꿈 또는 이상 또는 미련 같은 것으로 채우고 싶다는 고백일 것이다. 그런 것으로 채우고 싶은데 정작 채우려고 하면 그 사람 이야기나 이상 또는 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푸른 안경을 벗어버려 더욱 아쉽고 더욱 그리운 것이다. 부재 과거를 현재 속에 편입시켜서 보상받으려는 디펜스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안도감과 그리움을 충족시키는 ’헌 것‘과 놀라움을 주는 ’새 것‘을 만나게 해 독자에게 보편성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것이 문학이요 시인 것이다. 「외나무다리」라는 시를 다시 보자.
산골마다 참꽃 피우는/고향 가곡천(柯谷川) 물에/외진 들산 앵두도 볼이 붉는 밤//달무리 비치는 거랑 길 따라/아른아른 찾아오는/소꿉동무들//냇버들 깨금발로 키를 재는데/눈감고도 나비처럼/건너는 다리//봄 각시 버선발로/사뿐 사뿐 건너오면/달밝골 비비골물 모두 모여 와/외나무다리 타고 봄이 흐르고//흐르는 봄 물 위로/꽃잎 하날 띄우네
- 「외나무다리」 전문
이 시는 5연으로 구성된 고향 가곡천에 높인 외나무다리에 얽힌 풍경을 형상화하고 있는 제1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제1연에서 시인은 자신의 고향 가곡천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용대 시인의 고향은 선대로부터 유업을 이어온 강원도 삼척 가곡천 상류 탕곡이다. 이곳은 우선 물이 맑고 산천 경계가 수려한 곳이다. 이 시의 시점은 산골마다 참꽃 피는 계절이다. 참꽃은 먹는 꽃이라는 뜻으로, ‘진달래’를 개꽃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진달래는 남부 지방을 기준으로 꽃이 3월 초 무렵부터 피는데, 이 무렵 산에 핀 진달래는 분홍색 빛깔을 띤다. 이용대 시인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 ‘가곡천’ 상류다. 이는 가곡천 물에서 외지게 떨어져 있는 들에 ‘산앵두’가 빨갏게 익는 모양을 화장한 처녀의 볼에 빗대서 묘사한 것인데, ‘산앵두’가 빨갛게 익는 때도 진달래가 피는 춘삼월이다. 제1연은 춘삼월 고향의 산골마다 피는 진달래와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인 가곡천, 그리고 그 시냇물로부터는 조금 외진들에서 빨갛게 익은 산앵두나무의 열매 앵두가 아우러져서 이루어내는 풍광을 회상하는 정경 묘사다. 우리가 흔히 지나칠 수 있는 ‘헌 풍경’ 속에서 새로운 놀라움을 찾아내는 탁월한 보편성의 감각을 보여주는 시연이다.
제2연 물이 하고 맑아서 사람이 거울에 비춰 보듯이 달무리기 환하게 비치는 몹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의 시내를 일컫는 ‘거랑 길’을 따라서 늘 거기서 뛰어놀던 소꿉동무들이 찾아오는데, 그 찾아오는 모습이 아른아른 하다는 것이다. ‘아른아른’하다는 부사는 무엇이 희미하게 보이다 말다 하는 모양이나 잔무늬나 희미한 그림자 따위가 물결 지어 자꾸 움직이는 모양 또는 물이나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자꾸 흔들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다.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오래된 친구들, 즉 소꿉동무들이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을 그린 의태어라고 할 수 있지만 고향의 소꿉동무들을 그려보는 정황이 하고 오래되어서 가물가물 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인가? 시인은 이런 보편적인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보편성의 감각을 일깨워준다.
제3연에 나오는 내는 물론 가곡천을 가리킨다. 가곡천 가에는 키가 고만고만한 버드나무들이 많은 듯하다. 꼬마들이 저마다 자기키가 크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한 발을 들고 한 발로 서는 깨금발의 방언 깨끔발로 서서 조금이라도 키가 더 크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다투는 모양에다 고만고만한 키의 냇버들을 비유하고 있다. 가곡천에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는데 올망졸망한 소꿉동무들이 일시에 와르르 건너는데 너무나 익숙해서 눈을 감고도 나비처럼 가볍게 건너오는 모습으로 박진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봄이 와 소꿉동무들이 건너오는 모습을 새 색시가 신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사뿐 사뿐 건너오는 듯 묘사한다. ‘달밝골’, 그 움푹 패인 골짜기의 물이 모여와 외나무다리 타고 흐르듯이 봄이 흘러넘친다는 것이다(제4연).
제5연은 “흐르는 봄 물 위로 꽃잎 하날 띄우네”로 되어 있다. 흐르는 봄의 물 위로 꽃잎 하나를 띄운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오지 않은 세월을 잡아당겨 봄 속에서 꽃을 피우게 한다. ‘꽃잎 하나’를 흐르는 봄 물 위로 띄우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화자 시인 자신이다. 화자는 이제까지 도시에서 미세먼지와 각종 공해로 찌들어 살면서 잊어버렸던 영혼의 ‘참된 소망’, 즉 ‘내적인 외침’을 느끼게끔 표현해준 말이다. ‘외적인 성공’만 추구하다 보면, 영혼을 잊게 되지만 내적 외침에 따라 살면 봄을 넘쳐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참된 내면의 소리인 희망을 흐르게 할 수도 있다.
봄이 돌아가 가곡천 외나무다리를 새 색시가 버선발로 뛰어나오듯이 소꿉동무들이 건너오면 시인도 봄을 향해 가슴을 열고 근원적인 창작 소망과 의지를 띄워 보낸다는 조금은 특수한 보편성의 감각을 열어 일깨워주고 있다. 이런 보편성의 감각을 일깨워 보게 하는 것은 철을 맞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앞으로 나아갈 통로를 열어준다. 보편성의 감각을 일깨워 주어 시인은 지금까지 일상과 흐르지 않는 겨울을 끌어들여 영원과 잇대어지도록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다시 「초등학교」라는 시를 보자.
모목(母木)에서 돋아난/티 없는 새 순들이다//노란 소망 가득 담고 어린 별들이/운동장 가득히/옷 바람을 일으킨다//화동(花童)들이 뜀뛰는 넓은 마당에/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득한 합창소리/가진 것은 없어도/부러운 것 전혀 없다//제멋대로 소리치고/머리를 부딪쳐도/아무도 저희를 꾸짖지 않는다//나도 병아리 땐/이름표를 단 꽃이었지/생각이 꿈처럼 길고 또 멀어/목청껏 질러 봐도/내 목소리가 나지 않는다//봉우리를 못 다 피우고/키만 큰 나무로/운동장 모퉁이에 너무 오래 서있었나
- 「초등학교」 전문
이 시는 6연으로 구성된 시인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겪었던 입학식 때인 듯한 모습을 형상화한 제2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제1연에서는 새로 입학하는 꼬마 애들을 나무의 줄기에서 돋아나는 새순에다 비유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새순이 돋는 시기는 대개 봄이니까 새 학기가 시작되는 춘삼월에 있었던 행사를 스케치 하듯이 그린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입학생들을 새순에다 비교함으로써 티 없이 맑은 동심을 또한 그려내고 있다. 제 2연에서는 항상 가슴을 설레게 하는 미지의 풍성한 소망을 가슴에 담고 별들에 비유된 어린이들이 운동장에 가득히 모였는데 그들이 옷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옷 바람’을 일으킨다고 한 것으로 봐서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천방지축으로 뛰어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행사 때마다 꽃을 선사하거나 꽃을 목에 걸어주거나 하며 행사의 흥을 돋우기 화동들이 띔 뛰듯 뛰는 넓은 운동장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부르는 합창소리가 넘치는 가운데 모여 있는 초등학생들은 가진 것은 없어도 무서운 것은 전혀 없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무서운 것이 많은 법이고 경계도 많이 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의 순수무구를 내비치는 묘사인 동시에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보편성의 감각이 돋보이는 시구다.
제4연에서는 입학식에 진열해 서 있는 아이들이야말로 앞뒤를 가리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제멋대로 소리치고 머리를 부딪쳐도 아무도 야단치거나 꾸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싸움이거나 사고를 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순수한 놀이이기 때문이다. 시인 자신도 병아리 때 즉 초등핚 입학생일 땐 혹시라도 집을 잃을까 싶어 또는 길을 잃을까 싶어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꽃이었다는 것이다. 그때의 생각이란 사실 생각이랄 것도 없지만 있다고 언제 제대로 생길지 모를 만큼 길고 멀어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 봐도 자기의 고유한 목소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제5연에서는 꽃으로 말하자면 봉오리에 해당되는 생각이나 꿈 또는 이상 같은 것을 다 ㅣ우지도 못한 채 키만 큰 나무로 자라서 운동장 모퉁이에 너무 오래 서 있은 것 같다고 한다. 면구스러운 듯한 표현이지만 실상은 모교에 대한 기나긴 그리움과 사랑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표현이 아닌가 한다. 해설을 더할 것이 없는 아주 쉽고 담담한 표현이다. 그러나 고향을 그리는 향수가 의 시적인 원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 상태 그래도 원시적인 장난과 놀이가 이루는 체험은 보편성의 감각을 일깨워 주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학습이다. 이를 통해 시인의 인지능력을 크게 성장하였고 그 인지능력을 통하여 그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장력과 자연의 질서에 얌전하게 따르는 풀과 나무들과 모든 생물들의 순응에 도리를 알게 된다. 그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깨달았다는 것은 큰 은혜라 아니 할 수 없다. 사람이 우준(愚蠢)해져 지각이 없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하였는데(렘 5:21), 어린 시절부터 이용대 시인의 지각은 우준하지 않아서 만물 속에서 거룩한 숨결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다양한 그 색채와 모양 속에서 우주 섭리의 장인 솜씨를 보았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그는 기독교 신자임이 틀림없다.
자연이 빚어내는 생명 에너지를 돋보이게 형상화 해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어떤 진리나 교훈적인 의미 또는 균형과 조화를 찾아내고 싶어 하지만, 감수정이 예민하고 정서와 상상의 세계를 향유하려는 시인들은 ‘생명’을 찾아내고자 한다. 시인들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자연 만물’이란 ‘고정되어 있는 자연’이 아니라 ‘유동적인 자연’이다. 본질적으로 자연 만물은 ‘정체’되어 있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같이 흐르고 돌고 도는 ‘유동성’과 ‘반복적 순환성’과 ‘지속성’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자연 만물은 ‘고립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리(chain)'나 ’그물망(net)'으로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통일체(organic unity)’다. 자연 만물 중 무기적(無機的)인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전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환치’나 ‘변용’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렇다고 ‘변용’이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음 「꽃밭에서」라는 시를 보자.
바람이 돌아다니며
꽃 점을 꼭꼭 찍은 후
비 먹은 풀잎에 물 구슬이 맺혔다
어디서 배어났을까
눈 시림 물채들은
하나님이 지나가다가 꽃물에 반하시고
그냥 가시기가 아쉬워
향기 솔솔 뿌리셨나
나비는 향기에 취해서
봄 지도를 모두 잃어버리고
온 마을은
꽃밭에
흠뻑 빠져들었다
- 「꽃밭에서」 전문
이 시는 5연으로 구성된 자연이 빚어내는 생명의 역동성을 형상화한 제2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제1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연의 환유인 ‘바람’은 돌아다니며 어느 꽃은 어느 달 어느 날에 꽃이 피리라는 점을 꼭꼭 찍고 다니는 아주 역동적인 ‘점쟁이’로 묘사한다. 이렇게 ‘의인화된 점쟁이’로 변용된 ‘바람’이 꽃마다 피어날 날짜를 점찍듯이 찍으면, 그 날에 맞춰서 ‘비’가 내리고, 그 내린 비를 밥 먹듯이 ‘먹은 풀잎’에는 방울방울 ‘물 구슬’이 맺힌다는 것이다.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보통은 자연의 끊임없는 변용의 의미를 의식하지 못하지만, 마음의 눈을 뜬 시인은 상상력으로써 자연의 모든 것을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사슬’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순환하고 있음을 읽어낸다. 모든 생명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변화하고 지속을 가능케 하고 새로운 유기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시연이다.
제2연에서는 비를 먹은 풀잎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면서 물의 빛깔과 같은 연한 ‘파알 색깔’이 이디서 스미어 나오는 지가 궁금해서, 화자는 설의의 형식으로 의물을 제기한다. 그 다음 행에서 시인은 마치 햇살을 바라보면 눈이 부시듯이, 물색들도 눈 부셔한다는 것이다. 이 짧은 두 생 가운데서 풀잎과 물 구슬, 바람과 햇살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종합하고 동화하여 ‘눈부신 물색’이라는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만들어내는 유기체의 통일 원리와 변용을 읽어 형상화한 것이 놀랍다.
제2연에서 ‘풀잎에 맺힌 물방울’이 조화를 이루어 드러나는 물색이 어디서 배어난 것인가라고 설의하고 나서, 제3연에서는 스스로 또 다른 설의의 형태를 띤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꽃물에 반해가지고 그냥 가시기가 아쉬워 향기를 솔솔 뿌리셨는가 보다라 한다. 설의지만 이 설의는 좀 더 적극적인 긍정의 부정이니까 강한 긍정으로써 ‘꽃 색을 비록한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과 그 조화’를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우연히 그저 지나치기가 아쉬워서 하신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 묘사는 우연의 행위가 아니라 웅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역설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4연에서는 꽃 옆을 지나가시다가 하나님께서 그저 지나치기가 너무 아쉬워 꽃마다 솔솔 뿌려놓은 그 ‘향기’에 ‘나비’는 취해서 ‘봄 지도’로 환유된 ‘봄에 다닐 길’과 ‘지경’을 다 잃어버리고 꽃들에 흠뻑 젖어 도취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의 만상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사슬에 묶여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동화하고 변용을 이루면서 새로운 존재양태로 전환되는 것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5연에서는 좀 더 꽃향기에 취해서 꽃들에 빠져 있는 범위를 나비에게만 국한하질 않고 온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게로 확대한다. 바람과 비, 풀잎과 물방울, 꽃과 물색,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모두가 고리로 연결되어 영향을 미치는 유기체적인 생명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작용을 하면서 순환되고 변화하고 보존하며 다른 생명 유기체를 만들어낸다는 유기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시다. 「바람이 숲에 들면」이라는 시를 더 보자.
바람은 명지휘자/숲에 들어가기만 하면/크고 작음 음악회가 열린가//구름을 펼쳐 천막을 치고/가지를 모아 악단을 만든 다음/잎을 깨워 춤판을 벌인다//때로는 은하수를 흔들어/비를 내리게 한 후/안개를 피우며 무대를 꾸민다//사진을 찍어도 자신은 찍히지 않지만/그가 펼치는 연주회에 입장하는 날에는/귀가 뚫리고/머리가 맑아진다//청중의 숫자에/전혀 개의치 않는 연출자/그는 지휘하고/나는 느낀다
- 「바람이 숲에 들면」 전문
이 시는 5연으로 구성되어 있는 제7시집에 들어 있는 시로서 바람을 지휘자로 의인화시킨 ‘바람’이 숲으로 불어 들어오지만 하면 크고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는 아주 신나고 재미있는 상상적인 가정을 형상화한 시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무슨 지휘봉을 들고 지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제1연 첫 행에서 바람은 ‘명지휘자’라는 의인적인 명시를 한다. ‘바람’이 ‘지휘자’로 의인화되니까, ‘숲’은 음악을 올려 연주해내는 ‘무대’가 되고, 바람이 강하고 크게 불면 큰 음악회가 열리고, 약하고 작게 불면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것이다(제1연). 여기서도 바람과 숲, 지휘자와 숲의 나무와 나뭇가지들이 크고 작게 상응하여 살아 숨 쉬는 그런 역동적인 음악회가 열리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제2연에서는 지휘자 ‘바람’ 자신이 ‘구름’을 모아 펼쳐서 천막을 쳐 ‘연주장’을 만들고 ‘나뭇가지들’을 모아 ‘악단’을 구성한 다음, 각종 ‘악기들’을 불게하고, 잠자고 있는 ‘잎들’을 깨워 ‘춤판’을 벌이게 한다. ‘바람’을 의인화해서 ‘지휘자’로 변용한 것이나, ‘구름’을 변용시켜 ‘천막’을 만드는 것이나, ‘가지들’을 변용시켜 ‘악단’을 만든 것, ‘잎’을 깨워 춤을 추는 ‘춤꾼’으로 변용시킨 것, 모두가 기발하고 그 표현 솜씨가 신기하고 놀랍다. 형이상시적인 컨시트 같은 기발한 기법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제3연에서는 ‘바람’이 때로는 ‘은하수’를 흔들어 비를 내리게 하고, ‘수증기’를 일게 하기도 하고, ‘안개’를 내리게도 하여 무대를 꾸민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람’은 ‘지휘자’도 되고, 무대를 만드는 ‘무대 장치가’도 되며, 악단원이나 춤꾼을 선발하는 ‘연출자’도 되고, 때로는 ‘조명장치가’도 되어, 무대를 꾸미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잘 아우러지게 꾸민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한 바람이라는 지휘자가 다양한 페르소나로 변용되어 멋지게 역할을 분담하며 음악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역동성 있게 묘사해서 생명력을 더하게 한다.
제4연에서는 연주를 연속시키면서도 좀 더 새로운 차원으로 눈을 옮기게 한다. 대개 음악회나 연극 공연이 끝나면 사진을 촬영하는데, 사진을 촬영해도 주인공인 ‘지휘자 바람’은 보지 않는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지휘자’란 유령이 아니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주 음악을 자아내고 지휘하시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연상시킨다. 더구나 ‘ 그 음악회에 입장하는 날’이라는 가정법을 쓴 것을 보면 누구나나 다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입장권을 구입해야 입장하게 됨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렇게 해 입장하게 되면 ‘귀가 뚫리고 머리가 맑아지는’ 감동과 깨달음을 받게 된다고 한다. 이런 묵시적인 비유와 변용을 통해 시인은 여기서 벌이는 음악회는 지상의 음악회가 아니라 선택된 자들만이 들어가 천국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기독교적인 종말적인 잔치로 환유된 세계관을 보여준다고 유추하게 된다.
제5연에서 시인은 더욱 청중의 숫자에 개의치 아니하는 연출자 하나님은 ‘지휘’하고, 시인인 나는 그가 연출하는 자연 음악회와 무도회를 보며 다양하게 느끼는 체험을 갖게 되는 ‘관객’이라는 것이다. 시의 소재를 거기서 얻고 그 느낌과 체험을 담아 시를 쓰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하늘’과 ‘땅’, ‘그’와 ‘나’가 자연을 통해 조응하고 협동해서 예술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4시집에 들어 있는 「참새」라는 시를 더 보자.
작은 솔방울 몇 개가/대문간에 앉아있다//여차하면 포로롱 날아갈 태세면서/총총대는 두 다리는/툇마루로 올라설 기색이다//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참새들을 등진 채/낱알 한 톨 없는데도 조석으로 찾아와/누가 왔나 안 왔나/인기척을 살피는 듯//태어난 집에서 긴 겨울을/이상스럽게 지내며/눈비 고스란히 맞고도/토박이로 사는 진짜 새//기울어지는 처마지만/떠나지 않는 텃새이다
- 「참새」 전문
이 시는 6연으로 구성된 ‘참새’의 생태적 현상을 형상화한 제4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제1연에서는 참새가 대문간에 날아와 앉아 있는 풍경을 작은 솔방울로 변용시켰다가 사람의 모습으로 재차 변용시켜 작은 솔방울만 한 새지만 살아 있는 사람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제2연에서는 사람으로 의인화 했지만 슬금슬금 남의 것을 훔쳐 먹으려는 밥도둑 같이 그린다. 그것은 여차하면 포로롱 날아갈 태세라는 묘사를 통해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사람이 나타나 살피며 불안한 듯 두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도 뒷다리로는 툇마루나 어디로인가 올라서려는 기세라고 묘사한다.
제3연에서는 대부분의 새들이 대문 안을 들락날락하며 모이를 주워 먹고 살다가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데, 이 참새는 그들과는 달리 등을 돌린 채 낱알 한 톨 없는 데도 조석으로 찾아와 누가 왔나 안 왔나 인기척을 살핀다는 것이다. 제4연에서는 다른 데로 날아가질 않고 이상스럽게 태어난 집인 처마에서 긴 겨울을 지내며 눈비 고스란히 맞고도 대대로 그 땅에서 나서 오래도록 살아 내려오는 사람처럼 그 집 처마에서 살아오는 토박이로 사는 ‘진짜 새’라고 한다. 1차적으로는 방울만한 참새 몇 마리가 자기등리 태어난 보금자리인 처마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1차적으로만 해석하고 끝나면 제5연과의 의미적인 연결이 아주 어색하고 어딘가 모르게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특히 “기울어지는 처마지만/떠나지 않는 텃새이다”라는 기술에 있어서 ‘기울어지는 처마’ 단순히 참새들이 둥지를 만드는 초가지붕의 처마만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정말 새들이 날아들지 않는 처마라고 해도 ‘기울어지는’이라는 수식어를 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처마’는 ‘초가지붕’의 환유고, ‘초가지붕’은 한 ‘농가’를 비유하는 대유다. 그렇다면 ‘기울어지는 처마’란 기우는 ‘가세’ 또는 ‘농촌’을 대유 한 비유라 할 수 있다. ‘농촌’과 ‘농가’들이 기울어져도 떠나지 않고 지키는 ‘텃새’로 대유된 소중한 ‘농민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한 차원 고양시켜 유추하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신’이 없다거나 죽었다고 호언하는 ‘현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과 신실함을 절대적으로 믿는 소수의 신앙인들이 있어서 지붕으로 대유된 ‘교회’를 지켜가고 있다는 것으로 승화시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차원을 지양 승화시켜서 보면 이 시에도 시인은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참새’와 ‘처마’, ‘텃새’와 ‘철새’, ‘진짜’와 ‘가짜’를 대치시켜 긴장과 충돌의 변증적인 과정을 거쳐 유기적인 생명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명의 고통을 넘어 오히려 생명력의 조화로운 아우러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절실히 느끼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언 : 시인의 오메가 포인트 : 서정을 넘어서 선비정신으로
가촌 이용대 시인은 강원도의 토종시인이자 선비정신이 몸에 배인 크리스천 휴머니스트라 할 수 있다. 제5시집 『붉은 입술을 샘에 씻고』 뒷날개 표지에 있는 김영탁 수필가의 추서(追書)에 따르면, 누에가 파란 잎뽕을 먹고 흰 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이용대 시인은 추한 물상도 아름다운 꽃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가촌 이용대 시인 자신이 때 묻지 않은 꽃향기를 지닌 선비정신으로 연마된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선비정신’이란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예부터 학식이 높고 지조를 지키는 자를 선비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비는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부정과 부패에 타협하지 않으며 관직과 재물을 탐하지 않는 한편 의로운 일이라면 죽음도 불사하였다. 조선 사람의 피 속에 흐르는 이 숭고한 정신을 이른바 ‘선비정신’이라 일러왔다.4) 이용대 시인의 많은 시 속에는 선비정신이 깔려있다.
차령산맨 기슭에
뿌리한 선비정신이
충청의 고을마다 끊이지 않고 흐른다
푸른 능선 곳곳은 빼어난 명당이고
굳은 절개 뻗어 내린 장엄한 산에 따라
『청양문집』이 이제 막
침묵에서 깨어나
힘에 찬 첫발을 당당하게 내딛는다
칠갑산의 정기와
유구한 금강의 흐름을
만방에 펼쳐나갈 대쪽 같은 부대들이여
면암의 후예답게 민족을 혼을 이끌며
글로써 삶의 이치를
고고히 이르리라
- 「선비의 정신으로-청양문학 창간호 축시」 전문
이 시는 4연으로 구성된 제7시집인 『상흔(傷痕)을 꽃으로 여기여』에 들어있는 부제 그대로 한국문인협회 청양지부에서 발간하는 『청양문학』 창간호 축시다. 차령산맥(車嶺山脈)은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충청도, 경기도를 남서 방향으로 뻗어 보령, 서천까지 이어진 매우 낮은 산맥이다. 이 차령산맥 기슭에 자리한 청양을 비롯해서 충청의 고을마다 ‘선비정신’이 흐른다는 것이다. 흐르는 물에 비유되는 ‘선비정신’은 흔히 말하는 ‘충직함’, ‘정직함’, ‘너그러움’, ‘검소함’, ‘성실함’, ‘현명함’, ‘강직함’, ‘청렴함’ 같은 선비정신 가운데서도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하고 너그러우면서도 맑고 깨끗한 정신을 가리킨다. 충청도 양반을 흔히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하는데, 이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으로 결백하고 온건한 인품을 이르는 말로써 선비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제2연에서는 푸른 능선 곳곳은 빼어난 명당이고 굳은 절개 뻗어 내린 장엄한 산에 따라 『청양문집』이 이제 막 침묵에서 깨어나 힘에 찬 첫발을 당당하게 내딛게 되었다는 것이다. 차령산맥의 산세가 좋은 기운을 모으는 곳으로 청풍명월 같은 선비가 태어날 명당인 이 고장에서 ‘청양문집’이 아제 막 출간되었는데, 새로운 각오와 깨달음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선비정신으로 출발하여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제3연은 “칠갑산의 정기와/유구한 금강의 흐름을/만방에 펼쳐나갈 대쪽 같은 붓대들이여”로 되어 있다. 칠갑산(七甲山)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는 산이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칠갑산(七甲山)’이라 경칭하여 왔다. 금강은 한강, 낙동강에 이은 대한민국 3대 강이다. 전라북도 장수군의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무주, 진안, 금산, 영동, 옥천, 보은, 청주, 대전, 세종, 공주, 청양, 논산, 부여, 서천, 익산을 지나 군산 만에서 황해로 유입된다. 금강은 호강(湖江), 적벽강, 백마강(白馬江) 등과 같은 다양한 이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호강은 잔잔한 물결이 마치 호수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적벽강은 금산군 강 일대가 붉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의 다른 이름 중 가장 유명한 백마강은 하류 지역인 부여군ㆍ서천군 일대에서 불리는 명칭이다. 이런 칠갑산의 정기와 유구한 금강의 흐름 즉 민족정기와 역사의식을 세계에 널리 알려나갈 대쪽 같은 지조와 절개 즉 선비정신을 가지고 올곧은 글을 쓸 문인들의 환유인 붓대들이 청양문집을 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제4연에서는 선비정신을 가지고 나서는 청양문인들을 면암 최익현의 후예들로 보고 면암이 그러했던 것처럼 민족혼을 이끌며 글로써 삶의 이치와 도리를 외롭고 가난하지만 검소하고 누추하지 않고(儉而不陋)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華而不侈) 하게 말하라는 것이다. 청양문인들은 면암의 후예로서 칠갑산 정기와 백마강의 역사적 흐름 곧 선비정신을 청양문학에 담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펼치자고 한다. 「감자」라는 시를 더 보자.
돌밭일말정 가꿔온/알뜰한 가문이다//한 눈 한 눈 싹을 따/올망졸망 심은 소망//누가 뭐래도/지심(地心) 항상 이른 대로/알알이 토실토실 송송히 보람으로/이랑마다 돋워가며/빌어 거둔 응답이다//실히 맺혀 가득 열린/텃밭의 푸른 기쁨//고단함과 설친 잠도 밭둑에 깊이 묻고/허리 펴며 너를 보고 웃는 하루/꽃 마음//어머니는 농심(農心) 하날/ 내눈에도 심으시고/하얀 꽃 자주 꽃 그릇마다 고인 감사를/조석으로 무릎 꿇고/하늘에다 올린다
- 「감자」 전문(제1시집)
이 시는 6연으로 이루어진 ‘감자’를 소재로 해서 시인 자신의 소박한 생활 배경과 어머니의 농심을 통해 선비정신을 보여주고 있는 제1시비에 실려 있는 시다. 시인 자신의 가문이 돌밭일망정 가꿔온 알뜰한 가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제1연). 남에게 기대지 아니하고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정갈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 건비가문이라는 것이다. 감자를 심을 때는 감자의 튼 싹 눈을 하나하나 잘라 따서 올망졸망 심어 놓고 풍성하게 열리기를 바라는 소망을 갖고 기다린다고 한다(제2연). 누가 뭐라고 하던 간에 천명(天命)에 다라 밭을 갈아 골을 타서 두두룩하게 흙을 쌓아 만든 이랑을 만들며 알알이 토실토실 송이 송이로 감자가 여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그렇게 되기를 빌어 거둬드리는 것이 ‘푸른 기쁨’이 된다고 한다(제3연). 제4연에서는 그런 기대감과 희망 때문에 고단함과 설치는 잠도 밭둑에 깊이 묻고 허리를 굽혀 일을 하다 허리를 펴며 감자의 성장을 보며 웃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면 꽃 마음처럼 아름답고 생명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소박하고 근면하며 심으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선비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농심 한 알을 시인의 눈에다 심고서는 하얀 꽃 자구 꽃이 핀 그릇마다 감자가 담기는 감사를 조석으로 무릎 꿇고 앉아서 가도에 담아 하늘로 올릴 뿐 아니라, 눈으로 환유된 시인의 미래 세계관에도, 감자가 하얀 꽃 자주 꽃을 피워 감자알을 풍성하게 맺는 것처럼, 크나큰 성취와 성숙의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는 기도를 매일 조석으로 드려 하늘에 올린다는 것이다. 어머니 자체가 농부 선비요 선비정신의 구현자라 할 수 있겠다. 어머니는 성숙된 크리스천 휴머니스트에 아주 가깝고 이용대 시인도 또한 그러하다. 「촛불」이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보자.
치솟는 용암 같은/붉은 함성이 아니다//허공을 휘저으며/활활 타는 횃불이 아니나//제 몸 삭이며 속으로 녹는/심지 끝/맑은 눈물//캄캄한 창문 밖에 화점(火點) 하나 지펴 놓고/태워야 곧게 갈 수 있는/나의 곤한 지도 위에//한천(寒天)을 같이 나는(飛)/소리 없는 기러기로/어머니는 평생을 살라/촛불이 되어 주셨다
- 「촛불」 전문
「촛불」이라는 이 시는 5연으로 구성된 제3시집에 실려 있는 시로서, 자기 몸을 태워서 불을 밝히는 희생과 사랑을 형상화한 시다. 촛불은 아주 실낱같이 힘이 없는 연약한 대상이다. 어머니의 대유인 촛불의 그 연약함을 좀 더 돋보이기 위해서 제1연에서는 이글거리며 함성처럼 요란하게 솟구치는 ‘용암의 분철’에 대비하였고, 제2연에서는 횃불에 대비시켜 힘도 없이 소박하게 자기 몸을 태워 녹이는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유연성을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해주고 있다. 제3연에서는 그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아무리 아파도 스스로 참고 제 몸을 녹여 불을 밝히는 희생과 맑은 자의적인 ‘연소(燃燒)’의 미를 형상화해 주고 있다. 제4연에서는 캄캄한 창문 밖 곧 어두운 세상에서 시인이 올곧게 바르고 정직하고 밝게 가도록 단련시키고 연단시켜 정금(精金)으로 만들기 위해 어머님이 화점이 되어주신다는 것이다. 제5연에서는 싸늘한 하늘을 고달프면서도 숭엄하게 나는 기러기처럼 고달픈 삶을 사시면서도 시인의 삶의 좌표와 방향을 달구어 올곧고 귀하여 쓰이도록 화점으로 상징되는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옳음과 바름이라면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고 내놓는 선비정신을 어머니가 구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어머님의 희생과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와 자기 몸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고 죽은 아가페 사랑에 지상에서는 가장 흡상하다.
이용대 시인은 제7시집 후기라 할 수 있는 「시집을 낸다는 것은」이라는 글에서 시를 쓰는 근본 목적이 선비정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시 한 편, 책 한 권으로 뜬 구름 같은 명성을 바라겠는가? 분에 넘치는 부귀를 바라겠는가? 그렇지 않다. 비록 남루하더라도 정갈하게 의관을 정비하여 앉고 걸으며 속세에 기만당하지 않고 한결같은 지조로 관통하면 되는 것이다. 이게 시인의 길이라면, 그래서 시집을 낸다는 것은 책 속에 나의 정신과 영혼을 돌에 새기듯 영원히 남기는 일이다.” 가촌은 이런 맑고 올곧은 정신과 영혼을 시를 통해 추구한 태생적 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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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용대, 『처음만난 그날처럼』(서울 : 조선문학사, 2008), 7.
2) 이남희, “박종규 수필집 ‘꽃섬’ : 꽃섬은 선인가, 괴물인가.”
『하나로 선 사상과 문학』 2020년 여름 42호, 379-380
3)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ike1976&logNo=221013331968.
4)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rislee0115&logNo=222190516671.
《조선문학》 2021년 3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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