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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광향리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법경헌
이자겸(李資謙)과 영광굴비(靈光屈非)
▲ 고려사 高麗史 卷一百二十七 列傳 卷第四十 叛逆 一 李資謙
영광군이 이자겸의 유배지를 고증하여 관광 콘텐츠(contents)화 할 모양이다.
지역 신문에 따르면 이자겸기념사업을 합리화하기 위해 강진의 다산까지 비유하였던데, 다산(茶山)과 이자겸은 비유대상이 아니다.
예전에 영광은「사상문예(士尙文藝) 민무농상(民務農桑)」이라 하여 ‘선비들은 문예를 숭상하고 백성들은 농사와 누에치는 일에 힘썼다.’는 고장인데 어쩌다 이자겸이 까지 동원하는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잘 알려진 대로 이자겸은 비록 사후에 신원이 복원되었지만 고려시대 천하간신으로 역사의 단죄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자겸 열전
지금부터 900여 년 전인 1083년 7월에 고려 문종이 승하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는데 재위 3개월만인 10월에 순종마저 세상을 떴다. 그런데 순종이 죽고 나서 이자겸의 누이동생인 순종 비, 장경궁주가 궁 안의 노예와 간통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덕분에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이르렀던 이자겸(李資謙)도 여동생인 순종 비(妃)의 이와 같은 간통사건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순탄치 않은 세월을 보내다가 그의 둘째딸이 예종 비(妃)인 순덕(順德)왕후가 되자 익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사위인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예종의 아우들을 물리치고 외손자인 14살의 어린 태자, 인종을 옹립하여 권세를 잡았다.
이렇게 외손자를 옹립하여 인종으로 등극시킨 이자겸은 인종 2년(1124년) 8월에 그의 외손자와 그의 3째 딸인 인종의 친 이모를 짝지어 왕비로 삼았고, 이도 모자라 셋째 딸을 시집보내고 5개월 만인 그 이듬해 인종 3년(1125년) 1월에 또 다시 그의 4째 딸을 조카인 인종에게 시집보내 조카와 친 이모사이인 두 여식을 해만 바뀌었지 5개월 사이에 인종에게 바쳐 촌수마저 헤아리기 헷갈리게 한 인물이다.
이 후 이자겸은 자기 일파를 요직에 기용하고‘십팔자위왕[十八子(李)爲王]’설에 혹신(惑信)하여 사위이자 친 외손자인 인종을 자기 집으로 옮겨 감금하고, 독살을 기도하는 등 왕위까지 넘보며,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게 하고 관직을 팔아 축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 이자겸의 유배관련 기록
인종 4년(1126년) 2월, 드디어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대궐에 난입하였다. 그러나 인종의 권유로 뜻을 바꾼 척준경에 의해 체포되어 동년 5월에 그의 아내 최(崔)씨, 그리고 아들 이지윤과 함께 영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었고 왕비가 되었던 그의 두 딸도 모두 폐위되었다.
이후 인종은 이자겸의 아내 최씨를 인종 7년(1129년)에 개경으로 불러들였고, 1136년, 인종 14년에 혈연을 생각하는 뜻에서 이자겸을 검교태사 한양공으로 추증하였다.
이렇게 이자겸은 영광으로 귀양 와 소금에 절여 햇볕에 바짝 말린 석수어(石首魚)를 진상하여 굴비(屈非)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7개월 만에 죽었다.
굴비(屈非)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가지설이 전래되고 있다. 그 하나는 이자겸이 그의 외손자이자 사위인 인종에게 ‘자신이 결코 비굴하게 살지는 않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비굴(非屈)」을「굴비(屈非)」라고 바꿔 써서 보낸데 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굴비(屈非)를 처음 먹어 본 인종이 ‘이렇게 맛있는 고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전상궁이 ‘영광에서 유배중인 이자겸의 진상품인데, 이름은 굴비(屈非)라 고 하옵니다.’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이렇듯 이자겸의 유배지가 영광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영광 땅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위와 같은 굴비(屈非)의 어원과 연관하여 예전부터 굴비의 산지가 법성포였기 때문에 그저 ‘법성포 주변 어디일 것이다.’ 라는 정도였다.
법성포 주변의 고려 때 유배지로는 한시랑 마을로 알려져 있다. 즉 시랑벼슬을 한, 한(韓)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귀양살이를 했던 마을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한시랑’이라 했다는 것이다. 고려 때 시랑은 정4품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고려 때, 개경에서 삼천리 떨어진 곳으로 귀양을 보냈던 ‘유(流)삼천리’ 유배형의 중죄인들은 대개 섬에서 귀양살이를 많이 했다. 이런 사실들로 유추할 때 이자겸이 그의 처와 아들을 데리고 법성포 주변에서 귀양살이를 할 수 있을만한 섬은 한시랑 마을 앞 소드랑섬(鼎島)과 법성포구 뒤 홍농의 박도(泊島) 밖에 없다.
▲조선 영조 때 법성진 (1760년)
▲조선 고종 때 법성진(1895년)
▲일제강점기 법성포(1917년)
▲ 박도로 추정되는 월봉마을
따라서 이자겸의 유배지를 굴비와 연관하여 법성포 주변으로 만 압축하면 옛 어르신들로부터 들었다는 홍농 촌로들의 이야기대로 월평마을이 된 포구 뒤 박도 나 포구 앞 소드랑섬 중 한곳일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그곳을 찾아 굳이 사적지로 만들어 영광군을 홍보하는 문제는 제고되어야 한다.
▲ 위성에서 본 도래지 주변 현황
내 허물을 감추고자 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거늘 어찌 이리 폐륜까지 들쳐 내어 지역홍보를 하려는지 ?
이자겸이를 위해 쓸 돈이 있으면 목넹기 제방에서 칠곡리에 이르는 담수지역에 수변공원을 조성하고, 지금 있는 도래지와 꽃동산을 연계하여 칠산대교 개통 후를 대비하여 법성-홍농 사이의 이 지역을 테마 화하여야 한다.
이자겸이를 내 세우지 않아도 굴비 원조가 법성포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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