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가 바뀌면서 최근에 쏟아지는 시들은 어느 때보다 과도하게 불거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비록 새로운 시도가 출현해도 대개는 이전 작품들과의 관련과 영향하에 놓이게 마련인데 근래들어서는 그러한 맥락 밖으로 튀어나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떠한 흐름에서 파생되고 분기되는 것인지 적절한 주소를 찾기가 쉽지 않은 작품들이 동시에 여러 자리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은 서구의 20세기 중엽, 우리의 경우 그 후반을 현대시 중에서도 특별히 후가 현대시라 지칭한다. 모더니즘을 현대시로,모더니즘 이후를 후기 현대시로 간주하면서 후기 현대시가 '예술의 역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일정한 미적 규범, 가치, 세계관에 구속되지 않는다"한다 여기서 예술의 역사에 속하지 없는다는 말은 꽤나 파격적으로 들린다. 지금까지 물려받거나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역사의 회로에서 벗어나 시가 그야말의로 자유와 해방을 구가하는 것으로 이겨지는 까닭이다. 물론 이 자유는'역사적 방향을 상실하고 제멋대로 표류 하는 것과 크게는 다르지 않다. 자유는 분명 표류와 가깝다. 이승훈이 생각하는 후기 현대시는 해체와 기표들의 연쇄는 텍스트의 성격에 근거하여 우리의 1980-90년대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 세기가 바뀌면서 더 자유를고 과감하게 진행되는 것을 생각하면 2000년대 시까지 지칭하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것이다. 사실상 1980-90년대를 통과하면서 최근 시는 만화방창적 면모를 보이며 역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화두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세심하게 재고해야 할 점도 있다.
1. 우성이들- 비아 혹은 무아
현대시가 전통적 서정시와 구별되는 명확한 지점은 주체의 위상이다.동화나 투사를 통해 세계를 안정된 주체의 상태로 포괄해가는 전통적 주체의 지위는 의심할 나위 없이 확고한 것이었다. 여기서 확고하다는 것은 구성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애초에 이미 구축된 결정적인 주체라는 것을 뜻한다.
낭만적 전제 위에 놓이는 이러한 서정적 주제는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과 구조주의를 거치면서 부서지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현대시에서는 주체가 전면화되기보다는 소외,분열, 욕정, 타락,소멸, 대체 등의 모습으로 언뜻언뜻 비쳐질 뿐이다. 이것은 세계와 맞서고 투쟁하거나 세계를 끌어안는, 이전의 투사적이거나 대지적 주체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거의 주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파편적인, 흔적에 가까운 것이다, 감각과 인지면에서 불가피하게 혼란스러운 상태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체의 난맥상이 불교에서는 매우 적절한 통찰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주체, 즉 이에 준하는 자아가 애초에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존재라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이우러진 하나의 집항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또한찰나적이기 때문에 자기동일성을 지니는 상주 불변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생각이아. 비아나 무아는 초기 붓다 사상의 핵심었으며 바로 불교의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관점에서 입각하면, 전일적 주체를 전제한 가운데 이 전일성이 교란되는 현대의 주체를 해명해야 하는 곤란을 피할 수 있다. 현대시의 다양하고 비결정적인 존재의 모습들이 실체가 없는 불교식의 순간적 상태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즉 서정적 주체가 지니고 있던 자기동릴성의 회로가 부서진 현대시들은 불교의 비아나 무아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주체가 없거나 무수히 많거나 일시적 집합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2000년대의 많은 시가 불교적 상상력과 상통 가능하게 된다
사람들/ 이우성
나는 나에게서 나왔다 예전에 나는 나로 가득 차 있었다 입안에서 우성이를 몇개 꺼내 흔든다 사람들은 어떤 우성이를 좋아하지
우성이는 어둠이라고 부르는 곳에 살았다 그때는 우성이가 다를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미남일 필요조차 그러나 가장 다양한 우성이는 우성이었다
공기의 모양을 추측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이 서 있다 우성이가 사실인지 어리둥절하다 우성이를 만진다 우성이가 자신과 똑같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우성이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나는 내가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수십 수백만 개의 우성이가 떠오를 거라고 말했다
이우성의 시에는 주체의 터널이 향성되지 않는다. 주체의 감정, 인식의 통로로서의 세계가 드러나지 않는다.주체는 통일있지도 통일될 수도 없다. 처음부터 명사적이라기보다는 동사적이거나 형용사적인 어떤 상태에 불과하기에, 낯선 것은 세계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주체이다. 이의 결과로서의 사유나 감정을 제시할 수 없다. 다양하게 어수선한 발화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우성이 무엇인가. 우성이'는 없고 '우성이'들로 가득한 그러한 우성이 무엇인가. '우성이를 몇개 꺼내 흔드'는 일이 존재가 할수 있는 전부일진대, 사람들은 우성이가 사실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할 뿐이다. 그들은 '우성이를 만지고 '우성이가 자신과 똑같다는 사실이 놀랍고 우성이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즉 그들이 '어떤 우성이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우성이가 사실인지, 현상인지, 감각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가장 다양한 우성이는 우성이'라는 것이다. '우성이'는 다양함.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우성이'의 의미를 추문해볼 수 있다. 우성이가 모든 곳에 있다는 것. 우성이'로 모두가 '똑같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우성이라는 것이다. 같지만 다르다는 이 모순적인 진술이 우성이의 부실한 내용이다.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순간순간 이동중인 우성이는 일시적인 혼합물에 불과하다. 모였다 흩어지는수십 수백만 개의 우성이일 뿐이다. 셀 수 없는 것이며, 찰나적 운집이며,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비아이면서 무아이다. 이것이 2000년대를 10여 년 넘어선 최근 시의 지각계 중의 하나라 할 수우성이 현상이 갖는 의미이다.
2 누군가를 '대신'하기 - 연기와 불이(不二)의 세계
정합적이지 않은 주체는 존재의 고유한 내용을 구성할 수 없다. 고유한 내용이라는 것은 단순한 차원에서 보면 구별 가능한 것 즉 생일과 이름 관계 등 주체를 알아보게 만드는 여러 표시들이다.' 정적 주체에게는 이런 표시들이 궁금하지도, 문제되지도 않는다. 주체가 안정되고 확고한 상태에서는 이런 것들을 새삼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체의 동일성이 붕괴되고 특히 200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레테르가 갑자기 밀물처럼 시단에 떠올랐다. 생일이나 이름에 대한 시들이 급속도로 번져나간 것이다. 자기동일성을 지시하는 말들의 범람은 역으로 이 말들이 2000년대의 주제들에겐 생소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아니다. 「생일/소 연), 「생일축하(하재인), 「생년월일 (이장욱) 등과 간이 생일이 소재가 되거나 시의 제목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이름이라는 말이 들어간 시들도 쏟아졌다. '들이 죽고 나면 셋이 남고 셋이 죽고나면/더없이 많은 숫자들이 다시 헤아려야 하는 이름 때문에서/이 물질의 이름은 부적합하다"(김언, 「이 물질의 이름) "토요일이라는 누구누구의 이름까지(김행숙, 「일요일」), 오늘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꽃은 내일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다"(김경주, 「연두의 시제) 또한 관계를 드러내는 언니라는 말이 유행을 했는데 조연호에게 언니는 항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네 개의 문조 알. 달력의 순서, 아르카디아의 광견, 사라진 그녀들)이영주는 시집 제목으로 쓰기도 하였다(언니에게), 많은 시인에게 이러한 말들은 그들의 비주체성을 새삼 확인하게 만드는 일상화된 보통명사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2000년대 시의 주체 아닌 주체들에게 문제시되었던 이름, 생년월일, 관계 등의 지시성은 구별과 정체성에 대한회의이자 불신의 징표다. 이들 지시성은 주체를 더 낯설게 하는 데 일조한다, 이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실체를 증명하려드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본질을 암시하는 실체를 부정하고 연기를 주장한다. 연기는 "궁극적 싱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일체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연기는 존재의 독립성, 궁극적인 실재성, 구별을 힌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름과 탄생일과 같이 존재를 구별하고 확정짓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개별적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순간적으로 의존, 연결되어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연기와 관련해서, 구별을 꺼리는 불교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으로 불이가 있다. 불이는 모든 이분법에 대한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부정이다 ,유와 무, 생과 사, 법과 상, 진과 속이 둘이 아니다, 불교에서 "집착은 분별에 기인한다. 분별은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식(識)이다. 이에 반하여 지(智)는 분별함이 없다. 연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것은 분별할 만한 자성이 없으므로 분별은 그 절대적 근거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바로 무분별이다. 결국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의존되어 있는데, 이들을 구별하고 자립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끝나니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신해욱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 누군가의 웃음을 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 때론느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
신해욱의 시는 존재른 무엇인가에 대한 200년대 식의 감각을 보여준다. 여기서 "나"는 결코 독립적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라고 시작하는 이 시는 죽음이 절대적 종말이 아니라 어떤 과정과 관련의 일부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나'는 '누군가'와, "누군가의 꿈: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이고 '물'과 '얼음'에 동시에 어른거린다, 볼교적 아공법공과 연기로 보면 이것들은 독립적 자성이 없는 무와 공으로 연결되어 있다. 얼음은 물이며 얼음이고, 얼음 역시 마찬가지다. "얼음의 공포"는 곧 물의 공포다, 그리고'나;는 이러한 사물들이기도 하다.'나'는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내가 속한 시간과/나를 벗어난 시간"에 걸쳐져 있다. 그때그때 바뀌면서, 의존하면서 흩어지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제'대신'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훌러나온다 "나는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누군가의 웃음을'대신 웃으며"존재한다. 누군가를 대신하면, '나'는 '나'인가, 누군가인가 아마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나'는 누군가와 결국 다르지 않게 된다. 그야말로 '불이'다. 나아가'나'라는 존재가 확정적이지 않기에 '나'는 '나'를 대신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인간 존재뿐이 아니다.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실물에 대한 기억"을 가지는데, 이 말은 곧 내가 사물에서 건너왔음을 시사한다.'나'는 사물이었다가"인간이 되어가는 슬품"을 경험한다. 대신한다는 것, 존재의 교환과 변이라는 끊임없는 변수는 그야말로 연기와 불이라는 불교적 사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모든 것이 다 그저 그런것' - 평상심과 선의 일상화
최근에 나타난 현대시의 징후 중에서 인상적인 대립이 있다, 부정과 변형이 두드러진 난해한 미학적 탐색과, 반대로 미적 자의식을 되도록 투사하지 않고 현상을 그대로 옮기듯이 하는 경향이다. 한쪽은 손질과 공작성, 실험을 과도하게 진행하고, 다른 한쪽은 가능한 한 대상과 세계를 내버려두고 손을 대지 않으려 한다. 과잉적 극대화와 미니멀한 최소화가 거의 동시에 생산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자못 흥미로운 일이다. 대개는 이 상반된 예술의 태도가 순차적으로, 혹은 번갈아 나타나기 마련인데, 두 경향의 시들이 출발에서의 근소한 차이는 있어도 크게 보아 2000년대를 함께 채우고 있는 것이다.
다소의 무리가 있지만 이를 불교적 영역에 투사하면 중국 선종에서의 임제선과 마조선의 대비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임제는 달마로부터 시작된 중국 선종의 6조 혜능에서 성립된 조사선의 남악-마조-백장-황벽-임제의 계열에 속하니, 마조의 제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임제와 마조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된다. 예컨데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는 임제의 말에 잘 나타나 있듯이, 부처든 경전이든, "임제종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성은 일체의 전통과 권위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모든 구속에서 벗어날 것을 지시하는 임제선의 충격, 파격, 비약을 시쓰기에 적용하면 어떠한 형식이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이를테면 초현실주의의 시쓰기를 연상하게 된다. 2000년대 초에 특히 과도하게 분출된 우리 시의 부정과 파괴의 시도는 얼핏 임제선과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예의 마조선은 한마디로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도"라는 사상, 즉 평범한 일상생활이 도여서 "도가 일상으로부터 이탈이 아니라 일상으로의 회귀"라는 사상이다. 평상심이 그냥 도여서 선의 일상화를 강조하고 마음을 닦지도 않는다.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청정한 것이고 도의 삶인 것이다.
마조선을 시학에 적용하면 일종의 "곧장 말하기"다, 조작과 시비를 하지 않는 "곧장 말하기는 문체가 건조하고 일체의 장식이 없고, 일체 시적 기법이 없다" 즉 현상세계 너머의 의미를 궁구하기 위해 여러가지 문학적 수사나 기법을 도용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임제선적인 방식으로 비약과 파격을 활용하여 현상 세계를 일그러뜨리지도 않는다. 마조선은 이러한 복잡한 형식적 기법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접촉하기를 권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식으로 얼핏 매우 싱겁고 평범한 방식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일상과 생활의 이러저러한 모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핀란드 / 김이강
어디로 가고 싶다고 했었죠? 네? 어딘가로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난번에? 제가 그랬나요? 스칸디나이바반도 근처였던 것 같은데요 아, 핀란드요? 아, 핀란드
맛도 없는 싸구려 와인을 몇 곱절의 값을 내고 마시던 저녁이었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놀이터나 앉아서 맥주를 마셨을 거였다
핀란드에는 왜 가고 싶어요? 그냥요, 겨울만 있잖아요 추운 게 좋아요? 예전에는요
하필 휴가 나온 날, 날씨 참 아, 내 인생에 저주 같은 게 걸려 있는 게 아닐까 최병사가 앉은 창가 자리로 계속해서 비가 들이치고 있었고 나는 와인잔을 퉁겨보며 핀란드가 아닌 지중해의 이탈리아가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국땅을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고국을 그리워하는 편이 더 행복할 거라 생각하듯이
난 사실은 이제 겨울도 핀란드로 무엇도 다 그저 그래 모든 것이 다 그저 그런 것 같아 그래? 겨울도? 응, 겨울이 너무 추워졌어 여긴 남쪽이 아니잖아 서울 겨울은 너무 추워 아. 정말 날씨 짜증나 전엔 비 오는 거 정말 좋아했는데, 홍대 이 거리로 돌아오면 너무 가슴이 설레고 벅찰 것 같았는데, 옛날처럼 거닐어보고 싶었는데, 모든 게 다 한때인 것 같아 그날 나는 결국 상심해하는 최병사와 핀란드를 기억하는 그와 또 누구인가 말수가 적었던 한둘을 빗속에 두고, 홀로 귀가했다 춥고 허탈했다 다시 오지 않을 계절의 다시 입지 않을 옷처럼 핀란드를 떠올리며
김이강의 시를 읽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방법 없이 읽는 것이다. 시에 방법이 들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이 시에는 그야말로 어떠한 장식도 없다, 비유나 비약도, 의미나 심연도, 복잡한 외관이나 틀도 없다.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대화나 이야기, 시선의 이동, 잡힐 듯한 사실과 현상들, 훤히 들여다보이는, 표면에서 찰랑이는 감정의 기복 같은 것이 어떠한 가림판도 없이 노정되어 있다. "어디로 가고 싶다고 했었죠?" "네?" "제가 그랬나요?" "아, 핀란드요?" "아, 핀란드" "핀란드에는 왜 가고 싶어요?" "그냥요"와 같은 무심을 넘어 방심의 경지다. 말들은 의미의 고리를 형성하지 않고 간신히 표면에서 접촉할 뿐이다. 그리고 표면으로 흘러간다.
김이강의 시는 그야말로 마조선적인 "곧장 말하기"다. 그는 아무 에두름도 없이 "곧장 말하'고 있다.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평범한 일상의 만남, 대화, 감각, 회상 같은 것들이 어떠한 의미로의 경유도, 간섭도 경험하지 않은 채 즉석에서 떠다닌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 한가운데 들어서 있는 것이 도라 생각했던 마조선과 겹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난 사실은 이제 겨울도 핀란드도 무엇도 다 그저 그래 모든 것이 다 그저 그런 것 같아"라는 발화에는마조선의 이치니, 평범한 일상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담담하게 전해진다. "모든 것이 다 그저 그런" 일상, 여기에 마조선의 핵심이 놓이는 것이다.
첫댓글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