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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 순례길 코스안내
가톨릭 도보성지 순례단
모임밴드: https://band.us/band/78833682
순례단 단장. 신인철(스테파노) .010-3892-3299
1. 국제 성지란?
성지(순례지)는 많은 신자들이 교구 직권자의 승인 아래 특별한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성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를 뜻합니다.(제 1230조)
교회법전이 말하는 것처럼(제 1231조, 제1232조 참고),
성지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교구장이 승인하는 교구 성지
둘째, 주교 회의가 승인하는 국가 성지
셋째, 교황청이 승인하는 국제 성지가 그것입니다.
선포된 국제 성지
① 역사적 장소(3곳): 이스라엘(예루살렘) · 이탈리아(로마) · 스페인(산티아고)
② 성모 발현지(20곳): · 멕시코(과달루페) · 포르투칼(파티마) · 아일랜드(크녹) · 프랑스(기적의 메달 성당) · 프랑스(루르드) · 이탈리아(로레토) · 폴란드(체스토코바) · 아르헨티나(성모대성당) · 프랑스(라 살레트) · 이탈리아(폼페이) · 이탈리아(제나차노) · 일본(아키타) · 프랑스(퐁맹) · 이탈리아(시실리) · 벨기에(보랭) · 벨기에(바뇌) · 스페인(필라) · 바바리아(알토팅)· 멕시코(오코트란). 미국(산타페)
③ 성인 관련 순례지(5곳): · 이탈리아(카시아, 성 리타) · 이탈리아(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 이탈리아(마테르 도미니, 성 제랄드 마젤라) · 이탈리아(산 지오반니 로톤 도, 성 비오) · 프랑스(리지외, 성 데레사)
④ 한국의 성지, 순례지(2곳): 서울 순례길 . 해미 국제성지
‘천주교 서울 순례길’이 2018년 9월 14일, 아시아 최초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로 선포되었습니다.
1. 말씀의 길(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어땠을까? ‘말씀의 길’을 따르다 보면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은 한국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된 김범우의 집터와 천주교 세례식이 처음으로 거행된 이벽의 집터를 둘러보며 시작하는 길입니다.
‘말씀의 길’은 한국 천주교회가 이처럼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발적으로 복음 말씀을 받아들인 평신도 신앙 공동체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한 최초의 외국인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성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석정보름우물과 그의 활동지로 알려진 계동 일대의 가회동성당을 둘러보며, 타지에서 순교를 택한 그의 희생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 생명의 길(천주교 서울 순례길 2코스)
조선 왕조는 임금의 명령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선시하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여러 차례의 박해를 가했습니다.
이러한 박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생명의 길’은 특히 가장 많은 신자가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포함하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깊습니다.
순교는 신앙에 대한 최상의 증거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희망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고귀한 진리를 찾았습니다. 이 길은 박해 시기 주요 관청 터와 형장을 잇는 길로, 순교자들이 순교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러 가는 길이었기에 ‘생명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지금은 그 형태를 볼 순 없지만, 이 길 위에서 이루어졌던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각해보고 순교자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3. 일치의 길(천주교 서울 순례길 3코스)
서울의 대표적인 순교성지들을 잇는 이 길은, 순례자들 모두가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실천하자는 취지로 ‘일치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당고개 순교성지, 첫 외국인 선교 사제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첫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 순교성지를 지나 한강을 마주합니다.
한강 변을 따라 많은 순교자의 목이 잘려나간 절두산 순교성지를 지나면, 이 길은 순교자들이 매장되었던 노고산, 왜고개, 삼성산 성지로 이어집니다.
순교자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지들을 순례하는 여정을 통해 진정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실천하는 모습은 무엇일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서울 성지(순례길)를 4회에 걸쳐 완주할 수 있도록 순례 코스를 조정
하여 편성된 서울 순례길 코스 일정표입니다.
서울 도보성지순례길 A 코스 | |||
도보순례 일자: 매월, 첫째 주 목요일 | |||
집결지 | 10:00 시 | 2.4.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출구 건너편, 광희문성지 | |
구 분 | 시간 | 출발 지 | 도착 지 |
1코스 | 광희문성지 | 명동성당 | |
2코스 | 명동성당 | 김범우집터 | |
중식 | 13:00 | ||
3코스 | 김범우집터 | 우포도청터 | |
4코스 | 우포도청터 | 시복 터 | |
5코스 | 시복 터 | 형조 터 | |
6코스 | 형조 터 | 경기감영터 | |
7코스 | 경기감영 | 서소문성지 | |
8코스 | 서소문성지 | 약현 성당 | |
해 산 | 17:00 |
서울 도보성지순례길 B 코스 | |||
도보순례 일자: 매월, 둘째 주 목요일 | |||
집결지 | 10:00 시 | 4호선혜화역1번출구 직진.혜화동 성당 | |
구 분 | 시간 | 출발 지 | 도착 지 |
1코스 | 가톨릭신학대 | 석정보름우물 | |
2코스 | 석정보름우물 | 가회동성당 | |
중식 | 13:00 | ||
3코스 | 가회동성당 | 의금부 터 | |
4코스 | 의금부 터 | 전옥서 터 | |
5코스 | 전옥서 터 | 수표교 터 | |
6코스 | 수표교 터 | 좌포도청 터 | |
7코스 | 좌포도청 터 | 종로 성당 | |
8코스 | 전철이동 | 종로 성당(을지4가역) | 시성 터(여의도역) |
해 산 | 17:00 |
서울 도보성지순례길 C 코스 | |||
도보순례 일자: 매월, 셋째 주 목요일 | |||
집결지 | 10:00 시 | 6호선.경의 중앙선효창공원역 5번출구 앞 | |
구 분 | 시간 | 출발 지 | 도착 지 |
1코스 | 효창공원역 | 당고개성지 | |
2코스 | 당고개성지 | 옛용산신학교 | |
중식 | 13:00 | ||
3코스 | 옛용산신학교 | 용산성직자묘 | |
4코스 | 용산성직자묘 | 새남터성지 | |
5코스 | 새남터성지 | 왜고개성지 | |
해 산 | 17:00 |
서울 도보성지순례길 D 코스 | |||
도보순례 일자 : 매월, 네째 주 목요일 | |||
집결지 | 10:00 시 | 2호선 신흥역6번,경의 중앙선서강대1번, 6호선 대흥역1번.서강대정문 | |
구 분 | 시간 | 출발 지 | 도착 지 |
1코스 | 서강대정문 | 노고산성지 | |
2코스 | 노고산성지 | 절두산성지 | |
중식 | 13:00 | ||
3코스 | 서울대벤처타운역2 | 삼성산 성지 | |
4코스 | 삼성산성지 | 벤처타운역 | |
해 산 | 17:00 |
성지 해설
서울 도보성지순례길 A 코스 | |||
도보순례 일자: 매월, 첫째 주 목요일 | |||
집결지 | 10:00 시 | 2.4.5호선 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출구 건너편, 광희문성지 | |
구 분 | 시간 | 출발 지 | 도착 지 |
1코스 | 광희문성지 | 명동성당 |
A-1 광희문성지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8.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출구
광희문은 태조5년(1396년) 한양 도성을 창건할 때 세운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위치한 4소문 중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가 숙종37년(1711년)문루를 증건하고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청계천을 흐르는 도성의 물이 한강으로 빠지는 오간수문, 이간수문에 가까웠기에 수구문이라고 불린다. 또 한양 도성 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문으로 사용되어 시구문(屍軀門)으로도 불렸다.
광희문 밖은 수많은 성인·복자들과 무명의 순교자들이 묻히고 버려졌던 곳이다. 단순히 조선의 죄수와 무연고자들의 시신이 방치되었던 곳이 아닌 순교자들의 주검과 피를 통해 성화(聖化) 된 중요한 성지라 할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한양 도성 내 중부에 위치한 좌·우포도청, 형조, 전옥, 의금부옥 등에서 병사, 장살 또는 교수형으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은 그 가족 친지들이 즉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할 경우, 중부서원(中部書員) 등에 의해서 광희문 밖으로 운반되어 버려졌다. 광희문은 이때부터 순교자의 영광이 빛나는 문이 되었다.
조정의 문서에 천주교신자들 794위의 시신이 이곳에 버려졌다고 기록되어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시신은 수습하여 수리산에 이장하였으나 이성례 마리아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다.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가운데 54명은 신유박해(1801)~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740명은 병인박해(1866)~기묘박해(1879) 시기에 각각 서울의 좌·우포도청 옥과 형조의 전옥 등에서 순교하였다. 대부분 병인양요(1866), 남연군묘 도굴 사건(1868), 신미양요(1872) 등으로 거듭 박해가 격화되던 때에 순교한 신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중 거주지가 확인되는 750명 가운데 서울 신자는 309명, 충청도 신자는 213명, 경기도 신자는 158명 순이었다. 이어 강원도 신자가 39명, 황해도 신자가 13명, 경상도 신자가 12명, 평안도 신자가 3명, 함경도 신자가 2명, 전라도 신자가 1명이었다. 이처럼 서울·충청도·경기도 순으로 거주자가 많은 것은 박해를 격화시킨 병인양요의 진원지가 서울이었고,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 충청도 덕산에서 발생했으며, 병인양요가 경기도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 아가다·최경환(프란치스코)·민극가(스테파노) 등 13위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가롤로)·한이영(라우렌시오)·정철염(가타리나)·김임이(데레사)·이간난(아가다)·우술임(수산나) 7위 도합 20위가 성인품에 올랐다.
이어 신유박해 때 순교한 심아기(바르바라)·김이우(바르바라) 2위와, 1867년 순교한 송 베네딕도 가족 3위, 도합 5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황석지(베드로)·최영수(필립보)·이윤일(안토니오)·피 가타리나·최지혁(요한)·이병교(레오) 등 1833~1879년에 순교한 25위가 ‘하느님의 종’에 올라 시복·시성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A-2. 명동성당
(명동주교좌 성지성당). 2호선,을지로입구역 5번 출구.
1780년 1월 주어사, 천진암에서 권철
신 등이 강학회 개최.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
받고 귀국.
한국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이 1784년 가을, 수표교(水標橋) 인근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년)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사도 요한) 등에게 세례식을 베풀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인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가 성당 터를 매입하였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체결.1887년 5월. 대지 추가 구입, 가을부터 정지작업 시작하였으나 조선조정의 반대로 4년 지연 1892년 5월 8일 기공식.1898년 5월29일 안공. 축성식 거행
1839년 9월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유해가 노고산-삼성산에 이장 되었다가 1901년에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모셨다. 1924년 시복을 앞두고 다시 발굴하여 로마와 파리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 되 일부만 남아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김성우 안토니오,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유해 베르뇌 주교 등 7명의 순교자 유해. 일본으로 보내졌던 다불뤼 주교 등 4명의 유해. 남종삼 요한, 최형 베드로 유해가 모셔져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사관(명동 성당 내)
2호선,을지로입구역 5번출구.
운영시간 : 화요일~일요일 09:00~17:00
위치 :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사도회관
(서울대교구청 본관 건물 앞 벽돌건물)
1890년 한국 천주교회 주교들의 숙소와 업무공간을 위해 지어지고, 이듬해인 1891년 4월 19일 뮈텔 대주교(제 8대 조선대목구장)에 의해 축성된 이래 주교관으로 사용되었던 이곳은 2018년 6월 25일‘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사관’으로 개관되었다.
서울대교구의 탄생과 변천을 아우르는 230여 년의 공간과 시간의 역사를 확인할수 있다.
A-3. 김범우 집터(장악원 터)
(서울시 중구을지로 66.(KEB 하나은행 본점 앞(장악원터 앞)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로 불리었고 최근에는 순교자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토마스)는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처음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이승훈(李承蒸)이벽의 권고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1784년 3월 말경 귀국하면서부터였다.
이승훈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여러 천주교 서적을 이벽과 함께 깊이 연구하여 교리에 통달하게 되자 친척과 친구들을 대상으로 선교에 나섰다.
이벽도 경기도 광주 땅의 마재(지금의 남양주시 와부음 능내리)에 살고 있던 정약전. 약용 형제 에게 천주교를 전하였으며,당대의 남인 소장 학자들로부터 널리 추앙을 받고 있던 양근의 권철신 집에도 찾아가 선교하였고, 아울러 서울 지역의 중인들에게도 천주교를 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은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어 천주교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신앙 공동체, 즉 교회를 탄생시켰다.
교회가 창설된 후 이벽의 집은 신앙의 집회 장소가 되어 그의 권고로 입교한 정약전. 약용 형제 . 최창현 . 김범우 등이 1784년 겨울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김범우(토마스 1751~1787) 1784년 가을.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벽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이후 자신의 가족과 역관 친구들을 가르쳐 입교시키고, 윤지충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서적들을 빌려주어 권면하였으며. 또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재공하여 “명례방공동체”가 탄생되였다.
1785년 봄. 명례방집회 중 이승훈. 이벽. 정약용. 권일신. 권철신 등과 함께 형조관리들에게 적발되어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을 ‘명례방 사건’, 또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라 한다.
체포되었다가 양반들은 방면되고 중인인 김범우 만 충북 단양으로 도배되어 강제노역을 당하다가 형벌의 여독으로 3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석은 없지만, 중구 을지로 66 KEB 하나은행 본점 앞 장악원 터 표석 앞쪽을 김범우의 집터로 보고 있다.
A-4. 우포도청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6 . 종로6 (광화문 우체국 앞 화단)
좌포도청 : 종로3가 단성사 앞 광장 담장 좌측
우포도청 : 광화문 우체국 정문 앞 인도 화단
포도청의 실제기능은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이 독립적으로 편제되면서 각각 한양의 동·남·중부의 좌변과 서·북부의 우변으로 나누어 포도 등 치안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관할지역은 도성 안팎과 경기도를 포함했으며, 기능상 권력집단·권력자와 밀착되어 있었다.
천주교 신자 색출에 앞장선 포도청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6년)의 집에서 있은 첫 세례식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해 내는 일은 좌 · 우 포도청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체포된 신자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때로는 매질 아래 목숨을 던지고, 목에 오라를 걸고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1878년 좌포도청에서 신자들과 함께 옥살이를 하던 리델 주교는 건장한 신자 2명이 굶주림과 학대로 옥사하고, 고열에 시달리던 한 신자가 물을 좀 달라고 청했다가 옥졸에게 쇠침을 박은 몽둥이로 가슴을 죽도록 맞아 숨을 거둔 것을 목격했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 찬 감옥에 빈 자리를 만들기 위해, 세상 그 누구보다 평화롭고 온순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고 항상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조용한 천주교 신자들을 매일 상당수 목 졸라 수백 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그 옥졸에게 들었다고 했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은 옥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기도를 바치며 서로 순교의 의지를 북돋아 주어 다른 죄수들과 옥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옥은 더 이상 고통스런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준비하는 영신의 수련소였고, 외교인들마저 회개시키는 복음의 전파소가 되었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기록상 분명히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 있으며, 병오박해 때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가 우포도청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혹독한 매질 아래 순교하였다.
‘기해일기’를 쓴 현석문 가롤로 성인도 우포도청에 갇혔는데, 신자들을 위로하고 순교로 나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년 드게트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 수감되었던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가 이곳에서 아사하여 한국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다.
A-5. 124위 시복 터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 광장 북측 광장 바닥, 제단 위치)
1784년 천주교회가 전래된 이 후 거의 100년 이상 한국 교회는 모진 박해에 시달렸고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만 했고, 이러한 박해를 통해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 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되었으며, 그 순교자들 가운데 103위의 순교자들이 1984년 시성되었다.
103위 시성식은 한국 천주교회의 큰 기쁨이요 영광이었다. 그러나 시성식이 끝났으나 한 가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의 순교자들이 아직도 시복 시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교회의는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해인 2001년 10월 18일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안건을 통합적으로 추진해 온 결과, 윤지충과 동료 123위의 시복 시성 조사가 완료되고 이 시복 조사 문서들은 2009년 6월 3일에 교황청 시성성에 정식 접수되었고, 시복을 위한 절차도 완결되어 2014년 2월 7일 교황 성하의 재가를 얻었다.
광화문 광장은 조선 시대 의금부, 포도청, 서소문 형장 등 한국 교회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가까운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한국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순간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보통 시복 미사는 교황청 시성성 장관이 교황을 대리하여 거행하는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의 땅 한국에 와서 직접 시복 미사를 집전하였다.
박해 시기별 순교자는,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5년 을묘박해 3위, 1797년 정사박해 8위, 1801년 신유박해 53위로 124위 중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낳은 박해는 역시 신유박해이며, 1815년 을해 박해 12위 1827년 정해박해 4위, 1839년 기해박해 18위, 1866년 병인박해 19위, 등이다
앞서 일제 강점기인 1925년(79위)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8년(24위)에 열린 시복식은 모두 로마에서 열렸다. 이때 복자품에 오른 순교자 103위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에 직접 방문하여 시성하였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1주년을 맞아 시복식이 거행됐던 서울 광화문 광장에 2015년 8월 23일 기념 표석(바닥돌)이 설치됐다.
기념 표석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8월 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놓습니다.”라는 문구가 한글과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다.
A-6. 형조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문화회관 앞 바닥)
법을 담당하는 부서. 오늘날의 법무부와 유사하며, 법의 집행과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6조 : 조선시대 행정실무기관인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를 일컫는 말입니다. '조'(曹)는 치사(治事:일을 처리함)를 뜻하는 말이며, 오늘날의 정부부처의 부 (部)에 해당한다.
6조의 서열도 처음에는 고려의 서열을 따랐으나 세종이 즉위하면서 '주관'대로 이·호·예·병·형·공의 순서로 바꾸었다.
이조 - 지금의 행정자치부 같은 일을하며 주로 인사를 담당하는 부서이다. 인사와 함께 행정을 총괄하기도 하니까 6조내에서도 상대적으로 위상이 높았으며 6조 중에서 서열1위였다.
형조 - 법을 담당하는 부서 , 오늘날의 법무부와 유사 하며, 법의 집행, 형벌 업무를 보는 부서였다
6조의 수장인 판서는 오늘날의 장관이고 그 아래인 참판(종2품)은 차관, 그리고 그 다음인 참의(정3품 당상관)는 차관보라 할수 있었다.
형조는 조선 시대 중앙 관서인 육조(六曹)의 하나이다. ‘추관’또는 ‘추조’라고도 하였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부르기도 하였다. 형조는 한성부 서쪽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 9년(1785년)에 발생한 ‘을사 추조 적발 사건’으로,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신자들이 집회를 하는 중에, 금리(禁吏)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형조 터는 세종로 세종 문화 회관 앞 버스 정류장 바닥에 설치한 바닥돌이 매립된 자리이다.
A-7. 경기 감영터.(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9
(적십자병원앞. 5호선 서대문역 3번 출구)
감영(監營)은 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관청을 말한다. 관찰사(감사)는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관할 지역 내에서 군사 · 행정 · 감찰 · 사법권을 행사했다. 경기감영은 경기 관찰사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서대문 적십자 병원 일대는 조선 시대에는 서대문 밖으로서 경기 감영이 있던 곳이다. 태조 2년(1393년)에 설치되었으며 속칭 포정사(布政司)로 부르기도 하였다.
박해로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음에도, 점점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잡혀 온 경기 지역의 신자들은 한성 서대문 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특히 가난하고 몸이 부실하며 배움도 부족했던 조용삼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 신앙을 배우며 따르다가 체포되어 11개월 동안 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는데,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옥에 갇힌지 며칠 지난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 지역에서 탄생한 신유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조용삼 베드로를 시복하였다.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金耆良, 1816~1867, 펠릭스 베드로)도 이곳에서 문초를 받은 적이 있었다. 뱃사람인 그가 중국에 표류하게 된 상황을 조사받았다. 표류 후 1858년 1월에 귀국한 뒤 그는 의주와 경기 감영, 강진 등에서 표류 전말에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의심할 만한 점이 아무것도 없어서 즉시 석방되었다.
124위 중 38위가 피를 흘린 서울대교구 관할지역 순교지는 서소문 밖과 포도청, 당고개, 새남터, 경기감영 등이다.
서소문 밖에서 25위, 포도청에서 5위, 당고개와 새남터, 경기감영 등에서 각각 1위가 순교했다.
A-8.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서울시 중구 칠패로 5.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는 조선 시대 공식 사형 집행장으로,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과 최종 사형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다는 편의성,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칠패 시장’이 있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처형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 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래, [한국 천주교회사],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신원이 확인된 이만도 100여 명이 된다. 이 가운데 44위가 시성 되어 단일 순교지로는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한국 교회는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순교자의 시복을 추진 중에 있다. ‘하느님의 종’ 133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신유박해 때 ‘백서’를 작성한 황사영 알렉시오를 비롯하여 서소문 순교자 6위가 포함되어 있다.
1984년 이 땅에는 103위 순교 성인의 탄생이라는 세계 교회사상 드문 하느님의 역사가 나타났다. 순교자들의 피로 세운 신앙의 터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가슴속에 굳건히 살아 있다. 이들 103위 순교 성인들 중 44명의 성인과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가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이다. 2014년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된 124위 순교 복자 중에서도 27위가 바로 이곳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성인품에 오른 이만도 44명으로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희광이의 칼 아래 스러져 갔다.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운영시간 : 화요일~일요일 09:30~17:30
A-9. 약현 성당 (서울시 중구 청파로 447-1)
1891년 박해가 끝나고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약현 성당이 세웠졌다. 중림동 약현 성당은 본래 1887년 수렛골(현 순화동)에서 한옥공소로 출발하였다.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래 무수한 박해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던 교우들이 도성 문 밖만 해도 수백을 헤아렸다.
이에 제7대 조선대목구장(교계제도 설정전의 교구를 대목구라 한다) 블랑 주교는 1887년 지금의 중구 순화동 지역인 남대문 밖 수렛골에 집 한 채를 마련해 교리 강습을 위한 강당을 차렸는데, 이것이 약현본당의 시작인 약현 공소 이다. 공소가 설립된 뒤 신자가 나날이 늘어나자, 종현 본당(현 명동성당)의 두세 신부는 뮈텔 주교의 허락을 얻어 1891년 약초가 많아 약초고개, 즉 약현이라고 불리던 언덕을 매입해 성당 건축의 터전을 마련했다.
1891년 10월 27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설립 기념일에 성당 정초식이 거행되고, 같은 해 11월 9일 두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약현본당이 정식으로 설정되었다. 종현(명동)본당에서 분리되어 서울에서 2번째, 전국에서 9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1898년 종현에 세워진 명동성당 보다 6년 먼저 세워진 약현성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교회 건축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사적 제252호). 당시 교구장이신 뮈텔주교님께서는 견고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좋은 흙이 필요했었는데, 당시에 가장 좋은 흙은 왕궁의 기와를 굽던 와서현(지금의 국군 중앙성당)의 흙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해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신 남종삼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의 시신이 약 43년간 묻혀있던 곳이다. 그곳의 흙으로 세워진 약현 성당은 바로 순교성인의 살과 피로 세워진 성당이며 서소문 형장을 바라보는 서소문 성지 기념 성당이다. 그리고 이후에 건축되는 벽돌식 성당의 원형(prototype)이 되었다.
완공된 지 4년 뒤인 1896년 4월 26일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 두 차례 거행되어 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학생 3명이 사제로 서품되고, 1년 뒤인 1897년 12월 18일에는 두 번째 사제 서품식이 거행되어 한기근 바오로, 김성학 알렉시오, 이내수 아우구스티노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1991년 김수환 추기경이 주례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복식에서 약현성당이 서소문 성지 순례 기념 성당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를 통해 무관심에 방치되어 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새로운 관심과 기대 속에 성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중림동 약현성당은 순교자들을 더욱 현양할 수 있는 성지 순례 기념 성당으로서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울 도보성지순례길 B 코스 | |||
도보순례 일자: 매월, 둘째 주 목요일 | |||
집결지 | 10:00 시 | 4호선혜화역1번출구 직진.혜화동 성당 | |
구 분 | 시간 | 출발 지 | 도착 지 |
1코스 | 가톨릭신학대 | 석정보름우물 |
B-1.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296-12)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성 요셉 신
학당 건립.
1866년 병인박해로 페쇄
1882년 21명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 낭신학교로 보냄
1885년 강원도 여주 밤골(부엉골)에 예수성심학교 건립
1887년 서울 용산 함벽정으로 신학 교 이전
1914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 함경도 덕원. 덕원 신학교
1942년 일제가 강제로 용산신학교 페교
1945년 혜화동에 경성 천주공교 신학교로 개칭, 다시 설립
성신대학으로, 가톨릭신학대학으로 개칭
2005년 신학교 개교150주년 기념행사로 김대건 신부 부조상 제작 설치.
가톨릭 대학교. 지금은 서초동의 성의 교정(의학 대학), 그리고 역곡의 성심 교정과 함께 명실 상부한 종합 대학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성신 교정)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뼈 일부가 모셔져 있다.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의 효시는 어쩌면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이 처음 시도된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을 비롯한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시키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 보낸다. 그중 김대건과 최양업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한 명은 피의 순교를 다른 한 명은 땀의 순교를 했던 것이다. 그 후 1855년 충청도 제천 배론에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신학 교육을 시작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됐다.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에는 21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낸 바 있고, 드디어 1885년 강원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서 현 가톨릭 신학 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엶으로써 최초로 국내 신학교의 설립을 보게 된다. 그러나 2년 뒤인 1887년에 신학교는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다.
그 후 1914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 덕원 신학교 등이 연이어 설립되지만 1942년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1945년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개칭, 다시 설립되고 그 후 성신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가톨릭 신학대 교정은 신학생들의 방학 기간 일부를 제외하고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성당 순례 안내 :학기 — 토요일 13:00~18:00 / 공휴일 09:00~18:00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신학생 피정으로 방문 불가. 방학 — 매일 09:00~18:00 방문 기간 사전 전화 확인 : 총무팀(02-740-9707~8). 대성당 외 타 장소 방문 불가 : 성지순례 목적 외 이동 일체 불가 방학 중17:30까지 도착, 18:00 이전 귀가
※가톨릭 신학대 교정은 신학생들의 방학 기간 일부를 제외하고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성당 순례 안내 :학기 — 토요일 13:00~18:00 / 공휴일 09:00~18:00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신학생 피정으로 방문 불가. 방학 — 매일 09:00~18:00 방문 기간 사전 전화 확인 : 총무팀(02-740-9707~8). 대성당 외 타 장소 방문 불가 : 성지순례 목적 외 이동 일체 불가 방학 중17:30까지 도착, 18:00 이전 귀가
B-2. 석정 보름우물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110)
북촌에 있는 오래된 우물은 물맛이 좋아 궁궐에서도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돌로 만들어진 이 특이한 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동안은 흐려지곤 했기 때문에 보름우물이라 불렸다고 한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 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선교활동을할 당시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3. 가회동 성당(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7)
가회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한국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이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북촌에 있던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머물면서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가회동은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 거점으로서 한국 초기 교회의 신앙 중심지였다. 1955년 8월 9일,
병인박해를 일으켰던 흥선 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가회동 성당의 관할 구역인 안국동 별궁에서 임종 1주일 전에 세례받기를 원하여, 당시 보좌 신부였던 박병윤 신부에게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고 입교 동기를 밝혔다.
B-4. 의금부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47. (SC 제일은행 본점 앞)
의금부는 조선 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으로 금부, 금오, 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 박해 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과 군, 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곧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순교한 이래, 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승훈 베드로와 주문모 야고보 신부, 최창현 요한 회장도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였고, 성 라우렌시오 범 앵베르 주교, 성 베드로 나 모방 신부, 성 야고보 정 샤스탕 신부, 성 정하상 바오로 등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의금부에서 혹독한 국문과 문초를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 도리 김 베드로 신부,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와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정의배 마르코 성인이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면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켰다.
의금부에서 국문(鞫問)을 받은 것으로 기록된 천주교 신자 가운데 성인과 복자 명단
박해(연도) | 성명 | 세례명 | 순교지 | 비고 |
신유박해(1801년) | 주문모 신부 | 야고보 | 새남터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최창현 | 요한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정약종 | 아우구스티노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홍교만 | 프란치스코하비에르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최필공 | 토마스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홍낙민 | 루카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강경복 | 수산나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유항검 | 아우구스티노 | 전주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윤지헌 | 프란치스코 | 전주 | 복자 |
기해박해(1839년) | 앵베르주교 | 라우렌시오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모방 신부 | 베드로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샤스탕신부 | 야고보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유진길 | 아우구스티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정하상 | 바오로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조신철 | 가롤로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남이관 | 세바스티아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김제준 | 이냐시오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베르뇌주교 | 시메온제4대교구장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브르트니에르신부 | 유스토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볼리외신부 | 베르나르도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도리신부 | 베드로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남종삼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최형 | 베드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정의배 | 마르코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전장운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B-5. 전옥서 터
(종로구 종로 1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화단)
전옥서는 형조 아래에서 감옥과 죄수를 관리하던 관서였다. 박해 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103위 성인 가운데 전옥서에서 순교한 성인은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이다.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이소사 아가타 성녀의 동생으로, 1835년 이소사와 함께 체포되어 1839년까지 4년 동안 혹독한 옥살이로 얻은 병으로 순교하였다. 김 바르바라 성녀도 포도청으로 끌려가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고, 전옥서에서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도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형조 아래의 감옥인 전옥서는 1785년 명례방 사건(을사 추조 적발사건) 때 김범우 토마스가 형조에 끌려가 신앙을 증언한 이래,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장소이다.
B-6. 이벽의 집터(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전태일 기념관 앞 도로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은 북경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해 음력 9월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요한 세례자)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요한)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벽은 다시 최창현(요한), 최인길(마티아), 김종교(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어 신자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신앙 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이벽의 집터는 ,한국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신앙으로 받아들여 실천의 길을 연 곳이고, 이승훈(베드로)이 베이징에서 들여온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해 신앙실천에 필요한 내용을 두루 알게 된 곳이며, 한국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선교한 곳이고,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는 일을 막으려는 유학자들, 곧 이가환이나 이기양 등과 토론을 벌여 승리를 거뒀던 곳이며,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베풀어 신앙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신앙집회를 가졌던 곳이다. 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해 음력 9월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요한 세례자)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요한)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벽은 다시 최창현(요한), 최인길(마티아), 김종교(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어 신자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신앙 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이벽의 집터는 ,한국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신앙으로 받아들여 실천의 길을 연 곳이고, 이승훈(베드로)이 베이징에서 들여온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해 신앙실천에 필요한 내용을 두루 알게 된 곳이며, 한국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선교한 곳이고,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는 일을 막으려는 유학자들, 곧 이가환이나 이기양 등과 토론을 벌여 승리를 거뒀던 곳이며,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베풀어 신앙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신앙집회를 가졌던 곳이다.
B-7. 좌 포도청 터
종로구 돈화문로 28 (종로5가 파출소 종로3가 치안센터 앞)
조선시대 도둑과 같은 일반 범죄를 수사하여 범인을 체포하던 관청. 줄여서 포청(捕廳) 이라고도 한다.
성종(成宗) 때 공식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이 있었다. 좌 · 우 두 포도청의 우두머리는 종2품(從二品)의 무관인 포도대장(捕盜大將)이었고, 그 아래에 정6품(正六品)의 종사관(從事官) 3명, 포도부장(捕盜部將) 4명, 무료부장(無料部長) 26명, 가설부장(加說部將) 12명, 그리고 다수의 포도군사(捕盜軍士, 일명 捕卒)와 교외도장군사(郊外都掌軍士) 31명이 있었다.
좌포도청은 한성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현 종로구 단성사 일대)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 서울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으며,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한 것은 1795년 북산 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다.
박해 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천주교와 포도청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임무는 서울을 포도청을 비롯하여 지방의 진영(鎭營)이나 수영(水營) · 병영(兵營) 등에서 담당하였다. 이 중 포도청은 관할 구역인 서울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신자들을 체포하여 압송하였다. 포도청 소속의 포졸들이 다른 지역에서 신자들을 체포해 올 때는 우선 해당 지역 수령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은 뒤, 그 고을을 포졸들과 함께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또한 지방의 진영이나 수영 및 병영에서 신문을 받은 신자들 가운데 상급 기관의 조사가 더 필요한 사람들도 서울의 좌 · 우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이와 같이 포도청에서 직접 체포한 신자들과 지방에서 이송된 신자들은 좌 · 우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은 뒤 사안의 경중에 따라 상급 기관인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다시 신문을 받고서 확정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신자들의 처형은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교수형이나 백지사형(白紙死刑)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좌 · 우 포도청에서 신자들을 심문할 때 형조보다도 매질을 더 심하게 하였기 때문에,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많았다.
이렇게 볼 때 좌 · 우 포도청 자리는 박해시기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표지석은 단성사 광장 좌축 담장 앞에 있다.
B-8. 종로 성당
(서울시 종로구 동순라길 8)
서울대교구는 2013년 2월 28일 서울 좌 · 우 포도청을 관할구역에 둔 종로 성당을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하고, 본당의 수호성인 또한 ‘포도청 순교 성인들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로 변경해달라는 청원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100년에 가까운 박해 기간 중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던 서울 좌 · 우 포도청 순교지가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설치한 좌포도청 표석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묘동 56번지(옛 단성사 자리) 종로 3가역 9번 출구 앞에, 우포도청 기념 표석은 종로구 종로 1가 89 일민미술관 앞 화단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된 종로 성당은 구내에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마련하여 2013년 9월 2일 염수정 대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으며, 성당 외벽에 포도청 순교성인들을 기념하여 설치한 청동부조 ‘수난과 영광’(김일영 교수 작) 제막식도 가졌다.
B-9. 103위 시성 터
(여의도공원 세종대왕상 좌측 300m. 잔디마당 언덕)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으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순교복자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및 동료 101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전 교회에서 그들을 경건히 공경해야 함을 선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사적인 시성 선언으로 한국 천주교회 103위 성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100년이 넘도록 계속된 박해 중에 만 여명이 순교하였지만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대박해 때 순교한 분들중에서 1925년에 79위, 1968년에는 24위, 모두 103위가 시복되었고 이들이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모두 시성의 영광을 입게 되었다.
서울 도보성지순례길 C 코스 | |||
도보순례 일자: 매월, 셋째 주 목요일 | |||
집결지 | 10:00 시 | 6호선.경의 중앙선. 효창공원역 5번출구 앞 | |
구 분 | 시간 | 출발 지 | 도착 지 |
1코스 | 효창공원역 | 당고개성지 |
C-1. 당고개 성지.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139-26(신계동 56).
용산 당고개(堂峴)는 1839년(헌종5년, 기해박해) 12월 27-28일(음) 이틀간 10명의 교우들이 순교했던 곳이다. 당시 설을 앞두고 대목장에 방해받지 않으려는 상인들의 요청으로, 서소문 밖에서 한강 가로 나아간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27일에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 권진이 아가타, 이경이 아가타, 손소벽 막달레나, 이인덕 마리아,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 7명이, 다음날에는 홍영주 바오로, 최영이 바르바라, 이문우 요한 3명이 순교하였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편, 증언에 따르면 1846년 9월 16일(헌종 12년, 병오박해) 최초의 조선인 사제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로 향한 참수 길에 잠시 쉬어 갔던 곳이기도 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0명의 순교자 중 9명을 1984년 5월 6일에 시성 하였다. 어린 자식들 때문에 한때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던 이성례는, 뒤늦게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기해박해 순교자의 시복 조서를 꾸밀 때 왜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젖먹이 자식이 아사(餓死)를 당함으로써, 나머지 네 아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에 잠시나마 배교를 범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당한 어머니는 자칫 네 자녀를 모두 죽이고 말 것만 같아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하고 옥을 나왔다. 지극한 모성애와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아이들과 문전걸식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남편 최경환이 홀로 감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동냥 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갇힌 몸이 되었다.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맏이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이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들고 희광이를 찾았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나라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C-2. 옛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9길 49 .(성심 여고 내)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인 성심 성당은 조적조 양식으로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였다. 일반 교구 성당과는 달리 평면 형식을 가진 이 성당은 지형의 특성을 잘 이용하여 지은 아담한 성당으로 현재 성심 기념관(옛 용산 신학교 생활관)과 더불어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조선 후기까지 수목이 울창했던 이곳은 '용산 8경'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박해 선풍이 일게 되면서 용산 일대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고,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는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요람지인 신학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함벽정(涵碧亭, 현 원효로 성심여고 위치) 터에 마련된 예수 성심 신학교와 예수 성심 성당(일명 원효로 성당)은 현재 사적 제 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1866년의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교구장 블랑 주교는 용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한 뒤 여주군 강천면의 오지 부엉골에 있던 소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중 신학교 건물은 1892년에 벽돌조 2층으로 건립되었고,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되었다. 또 1890년에는 용산의 삼호정(三湖亭) 언덕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그 인근에 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됨으로써 사적지로서의 의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삼호정 공소는 1942년 1월 용산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까지 그 복음의 끈이 이어져 오고 있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 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었었고,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성당, 절두산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했다.
축성 100돌 맞은 서울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성당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의 전신인 서울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1887년 3월 설립)내 성당이 2002년 4월 14일로 봉헌 100주년을 맞았다. 현재 성심 여고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성당은 1902년 4월 14일 봉헌된 후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예수 성심 신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40년간 사제양성 교육을 받던 신학생들이 하느님과 가장 긴밀하게 만났던 성소로 사랑을 받았다.
C-3. 용산 성직자 묘지 (용산 성당 내)
용산 성당 내 성직자 묘지에는 1890년 이래로 4위의 주교, 67위의 신부, 2위의 신학생, 1위의 치명자 등 모두 74위의 시신이 모셔져 있다.
특히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1792~1835, 바르톨로메오) 주교의 유해가 조선교구 설립 100주년이 되던 1931년 10월 15일에 이곳으로 이장됨으로써 성직자 묘지로서의 뜻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
8대 교구장이자 초대 서울교구장(대목구장)을 지낸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묘도 바로 옆에 있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바르 텔 레미 (Bruguiere, Barthe1emy 1792 ~ 1835) 주교
파리외방전교회원이며 초대 조선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국 성은 소 (?)이다. 1792년 2월 12일 프랑스의 레사크 (Reissac) 지방에서 태어나, 카르카손 (Carcassone) 신학교에 들어가 1815년 12월 1일에 신품을 받고, 모교에서 10년간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1825년 33세의 나이로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태국으로 건너 가, 그 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1829년 5월에 보좌 주교로 선정되었다.
바로 이때에 자발적으로 창설된 조선 교회로부터 성직자 파견을 요청받은 로마 교황청은, 파리외방전교회와 논의하는 가운데, 제 254대 교황으로 즉위한 그레고리오(Gregorius) 16세 가 1831년 9월 9일에 두 가지 교서(敎?)를 통해, 조선 교회를 북경 교구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이 독립된 대목구(代牧區)를 창설하는 한편, 초대 감목으로, 조선 전교를 자청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 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창설 46년 만에 북경 교구에서 독립되어 고유한 조직을 갖춘 교구로 발전하게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황청의 이러한 결정을 알게 된것은 1832년 어느날 7월 25일 이후의 일이 었는데, 그는 1831년에 이미 조선 입국을 위한 장도에 올라 마카오에 와 있었다. 1832년 어느날 10월 21일 교황청의 사령장을 받은 그는 더욱 마음이 급해져 조속한 조선 입국을 위해 중국으로 들어가 갖은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서만자 (西?子)까지 다다랐다.
그리하여 10월 19일에는 오늘의 열하성(?河省)의 뻬리쿠라는 교우촌에 도착하였으나 20일에 갑자기 뇌일혈을 일으켜, 그리운 조선 땅을 눈앞에 바라보며 선종하였다. 그 때 주교의 나이 43세였다. 조선을 향하여 페낭을 떠난 지 4년간, 오로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희망만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한 불요불굴의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상적인 성직자였다. 그의 개척한 길을 따라 곧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등이 조선 입국에 성공함으로써 조선 교회는 드디어 모든 조직을 갖춘 완전 독립된 교회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C-4. 새남터 성지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8)
1호선 전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보면 말끔하게 단장된 커다란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한 이 집이 순교 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이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4세기를 건너뛴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열네 명 가운데 열한 명이 순교한 곳으로 이 가운데 여덟 명과 교회 지도자급 평신도 세 명이 성인 반열에 오른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이곳에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부터이다. 주 신부가 입국한 지 6년만인 1801년(신유박해), 자신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주 신부는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사제인 주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 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가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들이 지켰다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가, 7년 뒤인 1846년 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기해일기’를 작성한 현석문 가롤로가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사제가 순교하였다.
새남터가 다른 성지와 다른 점은 사제들의 순교지라는 것이며,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성인이 군문효수형을 당한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에서 한국천주교회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C-5. 왜고개 성지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40길 46 . (국군 중앙성당 내)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예수성심신학교를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박순집 베드로와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 볼리외 · 도리 · 프티니콜라 ·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왜고개로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 또한 찾아내어 이곳에 모셨다.
1899년 10월 30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왜고개에 묻혀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잠시 모셨다가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삼성산에 모셨던 세 성직자의 유해 또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모셨다. 1909년 5월 28일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형의 유해가 발굴되어 역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복을 앞둔 1924년 명동 성당 지하묘지가 개봉되어 유해 일부가 로마와 파리 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되었고, 1967년 절두산에 순교 기념성당이 건립되면서 명동 성당에 안장되었던 순교 복자들의 유해 대부분이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로 옮겨졌다.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에는 총 27위의 성인 유해와 성명 미상의 순교자 유해 1위가 모셔져 있다. 103위 순교 성인 중에서 현재까지 유해가 전해지는 분은 27위뿐이다.
이렇듯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위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2위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이다.
또한 왜고개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서울 도보성지순례길 D 코스 | |||
도보순례 일자: 매월, 넷째 주 목요일 | |||
집결지 | 10:00 시 | 2호선 신흥역6번,경의 중앙선서강대1번, 6호선 대흥역1번.서강대정문 | |
구 분 | 시간 | 출발 지 | 도착 지 |
1코스 | 서강대정문 | 노고산성지 |
D-1. 노고산 성지
서울시 마포구 백범로 35 .(서강대 정문 안쪽 가브리엘관 앞)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는다.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 모두 이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낸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노고산 성지는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이후, 사형을 당하고 그대로 형장에 내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관가의 눈을 피해 모셨던 곳 가운데 하나로, 여러 처형장과 가까워 많은 순교자들이 임시로 매장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 곧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6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신은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다. 그 뒤 이십 일가량 지나서 7-8명의 신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시신을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신자들은 시신을 큰 궤에 넣어 현재 서강대학교가 자리한 노고산에 매장하였다.
4년 뒤, 시신을 훔쳐낸 신자 가운데 한 명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하였다. 그 뒤 유해는 다시 이장하여, 1901년부터 현재까지 명동 대성당 지하 묘소에 모셔져 있다.
서강대학교는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자 2009년 6월 15일 가브리엘관 앞에 순교 현양비를 봉헌하였다.
D-2. 절두산 성지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절두산(切頭山)은 예로부터 가을두(加乙頭), 잠두봉(蠶頭峯), 용두봉(龍頭峰) 등으로 불리어 왔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을 통과해 서울 근교까지 침범해 오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로 더럽혀진 한강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겠다며 이곳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목을 잘라 죽이는데(병인박해) 그때부터 이곳의 지명을 절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병인년 10월 22일 부인 김이쁜 마리아와 아들 이붕익 베드로가 함께 참수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렇듯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는 22명과 단지 이름만 알려진 2명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5명을 합해 29명 외에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1966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절두산에 기념관을 건축했는데, 기념관에는 성당을 비롯하여 27위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성인 유해실,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특히 순교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 이가환 ·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특히 박물관에는 교회의 귀중한 사료들과 순교자들의 유품, 형구(刑具) 등 3,500여 점 이상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그 수나 규모 면에서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자료 4,5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절두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은 전시실을 최대한 ‘열린 공간’으로 살려 특별전, 기획전 및 초대전까지 유치할 수 있는 가변적 시설로 설계해 보다 다양한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박물관 아래 광장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일행이 앉아 쉬었던 ‘오성바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흉상, 십자가의 길 등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순례자들은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 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 가문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공적비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절두산 성지에 모셔졌던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朴順集, 1830-1911년)의 유해 일부는 2001년 인천교구 갑곶 성지로 이장되었다.
- 한국 천주교 순교자 박물관
운영시간 : 화요일~일요일 9:30~17:00
위치 :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절두산 순교성지 내
D-3. 삼성산 성지
(서울시 관악구 호암로 545)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한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鄭)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사흘 동안 이들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그 동안 교우들이 그들의 시신을 찾아오기 위해 노력하다가 몇 명이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20여일 만에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몇몇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해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인 1943년 당시 유해를 훔쳐 낸 교우들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에 세 성직자의 시체를 다시 옮겨 모시고, 후에 그 사실을 어린 아들 박순집(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가톨릭 도보성지 순례단
모임밴드: https://band.us/band/78833682
순례단 단장. 신인철(스테파노) .010-3892-3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