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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집 제5권 / 잡저(雜著) / 방장산 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8) 가을에 부사야옹(浮査野翁)이 두류산을 유람하려 하였는데, 함께 가기로 약속한 사람은 옥봉(玉峰) 정희숙(鄭熙叔),능허(凌虛) 박행원(朴行遠),매촌(梅村) 문여간(文汝幹)이고, 따라나선 사람은 성박(成鑮)과 성순(成錞)이고, 소문을 듣고 좇아온 사람은 봉학대(鳳鶴臺) 강사순(姜士順)과 동정호(洞庭湖) 이근지(李謹之)가 바로 그들이다.
9월 24일 신묘. 나는 부사정(浮査亭)에서 느린 말 한 필, 동자 한 명, 대지팡이 하나, 짚신 한 켤레, 시집 한 권을 준비하고, 종이ㆍ벼루ㆍ붓ㆍ먹 등의 도구와 옷ㆍ이불ㆍ베개ㆍ자리 등은 모두 문매촌의 말에 싣고 출발하였다. 문매촌은 한 줄기 검푸른 털이 어깨를 두르고 네 다리는 모두 누런 얼룩말을 타고, 짐 실은 노새를 끌고 종 셋을 거느렸다. 성순은 먼저 박행원의 집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성박은 다음 날 부사정에서 출발하여 낙천와(樂天窩)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나는 문여간과 함께 사천(泗川)으로 갔는데, 문여간이 서숙(庶叔) 문발(文勃)을 위해 구암동(龜巖洞)에 볼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방(嘉坊)에서 출발하여 검호(劍湖)를 지나고, 이천(伊川)을 건너 정촌(鼎村)을 지나 관율(官栗)의 제방 아래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려 시냇가에 앉아 매사냥을 구경하였다. 그러고 나서 구암동에 이르러 이차일(李次一)을 만나고 사우(祠宇)에 배알하였다. 봉사(奉事) 하영견(河永堅)의 초정(草亭)에 투숙하였는데, 하군(河君)이 우리를 맞아들여 정성스레 대접하였다. 이때 국화가 한창 만개했는데, 대청과 방안에 화분이 놓여 있어 짙은 향기가 사람에게 스며들었다. 등불 아래에서 술잔을 나누며 실컷 즐긴 뒤에 마쳤다. 이어변(李魚變)과 이차일이 와서 인사하고 갔으며, 문발도 함께 하였다.
25일 임진. 김대성(金大成)과 윤방(尹芳)이 와서 인사하였다. 이차일이 술을 가지고 왔다. 벽에 시가 걸려 있었는데, 주인이 화운(和韻)을 청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몸이 천지간에 한가로운 사람이 되니 / 身爲天地一閒人
가는 곳곳 산과 계곡 새롭게 보이네 / 到處溪山入眼新
동성에서 한없이 술에 잔뜩 취해 / 醉殺東城無限酒
비스듬히 누워 흰 두건을 거꾸로 썼네 / 頹然倒着白綸巾
- 여러 사람들이 지은 시가 많지만 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와 같다. -
또 오언 절구를 지어 이차일에게 주었다.
동성에 가을 해 저무는데 / 東城秋日暮
백발로 국화를 마주 대하네 / 白髮對黃花
술잔 드니 도리어 한스러움 더할 뿐 / 把酒還添恨
산양의 친구 생각 가득히 밀려오네 / 山陽舊意多
아! 이차일은 곧 세상을 떠난 나의 벗 상사(上舍) 백인재(百忍齋) 이자거(李子擧)의 서자이다. 백인재는 본처의 자식이 없어 이차일이 그 집안일을 주간하였다. 지금 문 앞에 이르니 옛 집은 황량하고 사당만 서 있는데, 나무는 늙고 마을은 텅 비어 낙엽만이 개울에 가득하였다. 서성거리며 둘러보니 자못 옛 친구 생각이 났다.
조반을 먹은 뒤에 강주(江州)를 지나 진현(晉峴)에 이르러 소나기를 만났다. 박행원의 집에 도착하니, 박행원은 이청(李淸)을 위문하는 잔치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 성순만 있었다. 저녁에 박행원이 와서 함께 낙천와(樂天窩)에서 잤는데, 주인에게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주었다.
한가한 마음으로 고인을 배우는 사람 / 心事休休學古人
집안 가득 친한 벗들이 모여 정겹네 / 一堂簪盍摠情親
참된 성품은 꾸밈없음을 이제야 알아 / 始知良性無矯餙
여기저기 심은 황국이 자연스럽네 / 散植黃花却任眞
26일 계사. 낙천와에서 출발하였는데, 다섯 사람이 동행하였다. 총각 강이원(姜以源)이 따라가기를 원해 허락하였다. 수곡(樹谷)에 도착하여 강사순(姜士順)을 방문하였는데, 강사순 또한 따라가기를 원해 허락하였다. 다음날 아침 술병을 가지고 송림(松林)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주인에게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찾아오니 / 爲訪故人來
동쪽 울타리에 국화꽃이 피어 있네 / 東籬菊正開
내일 송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 明有松林約
그대는 이 약속을 저버리지 말게나 / 君須無負哉
말을 달려 송림에 들어가 류경지(柳景祉)의 모정(茅亭)에서 잤다. 류경지의 동생 류경진(柳景禛)은 곧 우리 중형(仲兄)의 사위이다. 그는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처 성씨(成氏)가 과부로 살면서 어린 고아 삼형제를 거두어 키웠으니, 류지억(柳枝億)ㆍ류지만(柳枝萬)ㆍ류지천(柳枝千)이다. 류지만은 나에게 글을 배우기 때문에 지금 부사정에 있어 류지억과 류지천만이 있었다. 우리 세 부자와 박행원은 먼저 그 집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밥을 먹고 서쪽 집 초정(草亭)에서 함께 잤다. 곤양(昆陽)으로 가는 도중에 절구 두 수를 읊었다.
나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 / 我是寰中人
애초 세상 밖 사람 아니었네 / 初非物外人
가을바람에 높은 흥취 이니 / 秋風動高興
신선을 배우는 사람이 되리 / 將作學仙人
곤산 서쪽 언덕에 송림이 있는데 / 昆山西畔有松林
그 아래 긴 버들 푸른 그림자 짙네 / 林下長楊翠影深
비로소 알겠네 도잠이 문 밖에 버들 심고 / 始知陶潛門外植
갈건을 공연히 저버리고 국화꽃 딴 마음을 / 葛巾空負掇英心
27일 갑오. 이웃에 사는 강우주(姜遇周)ㆍ강익주(姜翊周)ㆍ정지제(鄭之悌)ㆍ강동립(姜東立) 등이 와서 인사를 했으며, 강사순도 도착하였다. 아침을 먹은 뒤 출발하여 봉계(鳳溪)를 지나 맥동촌(麥洞村) 앞에 이르자, 바람은 세차게 불고 날씨는 추워져 촌집에 들어가 편안히 쉬고 싶었으나, 전날 출발할 때 정희숙(鄭熙叔)에게 편지를 보내 횡포(橫浦)에서 함께 자기로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황현(黃峴)에 이르기 전에 멀리 북쪽에서 오는 자가 보였는데, 누런 얼룩말을 모는 세 명의 종과 서로 손을 흔들어 호응한 뒤에야, 정희숙의 일행임을 알고 의심치 않았다. 마침내 맥동촌에 되돌아가기로 약속을 정하고, 박능허의 종 명생(命生)으로 하여금 길에서 기다리다 정희숙 일행을 맞이해 오게 하였다. 우리는 말에서 내려 햇볕을 등지고 앉아 기다렸다. 명생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저 분들의 행차가 거의 고개 허리쯤 이르렀는데 제 목소리를 듣고 다시 십여 보 내려와 답하기를 ‘노새를 채찍질하여 높이 올라가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고개를 넘어 갈 테니, 횡포촌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자.’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도 저들이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 다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날씨가 매우 추우니, 거센 바람을 맞으며 높은 재를 넘는다면 감기라도 걸릴까 두렵습니다. 앞마을에 들어가 묵고 내일 출발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모두 “그럽시다.”라고 하였다.
28일 을미. 아침에 날씨가 매우 추워서 일찍 움직일 수 없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황현(黃峴)을 넘고 횡포(橫浦)를 지났으나, 정희숙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공돌원(公突院)을 지나 계동(桂洞)으로 찾아 들어 하홍의(河弘毅)의 집에 도착하니, 정희숙이 먼저 와 있었다. 기쁘게 마주 대하니, 눈썹이 누런 이가 정희숙임을 알 수 있었다. 정희숙이 눈썹을 찌푸리고 나에게 말하기를 “며칠 전 감기에 걸려 거의 몸을 지탱할 수 없었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말렸으나, 내가 소매를 뿌리치고 왔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믿음직한 선비일세. 우리들의 산행은 신선의 유람으로 이름하여 모두 ‘선(仙)’ 자를 붙여 호를 지었네. 그대도 ‘선(仙)’ 자로 일컬어지면 세속에서 생긴 병이 저절로 나을 걸세.”라고 하니, 정희숙이 말하기를 “말은 참 좋다마는, 내 병이 낫지 않으면 약속한 대로 되지 않을까봐 걱정되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말을 들으니, 내 병이 이미 나은 듯하네.”라고 하였다.
이에 서로 의논하여 절구 한 수씩 지었는데, 정희숙이 우리 일행에게 주어, 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이 한 몸 이미 늙고 쇠약하여 / 一身已潦倒
온갖 계책은 긴 탄식만 자아낼 뿐 / 百計入長嗟
소매 떨치고 신선 찾아 나서는 길 / 拂袖尋眞路
아름다운 약속 어기지 않아 기쁘네 / 佳期喜不差
날이 저물어 나는 박행원과 같이 잤다. 한밤중에 우리 집 종 숙남(肅男)이 매우 급히 불러 그 까닭을 물어 보니 “말이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성박과 강사순이 가서 보니, 말이 코에 병이 생겨 거의 치료할 수 없었다. 강사순이 말을 치료하는 법을 대략 알고 있어, 코끝과 꽁무니에 침을 놓았다. 잠시 후에 말이 스스로 일어나 풀을 먹더니, 그 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집에서 곤히 잠들어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어서야 그 얘기를 듣고서 강사순에게 사례하기를 “그대의 솜씨가 말의 병을 잘 고치면서도 자신의 병과 다른 사람의 병은 고치지 못하며, 그대의 솜씨가 말에는 능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자신에게는 능하지 못하구려. 나의 단잠은 종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벗이 말을 치료하는 것도 알지 못했으니, 나의 단잠은 진단(陳摶)에게 알맞구려.”라고 하고서, 서로 함께 크게 웃었다.
29일 병신. 아침에 하영견의 초정(草亭)에 다시 모였다. 각각 안부를 물으니, 모두 “편안하오.”라고 하였다. 문여간은 “간밤에 갈증이 매우 심했는데, 물을 가져다 줄 사람이 없었다면 난감했을 것이네.”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경장을 한 번 마시면 온갖 감정이 생기네.’라고 하는 것이다. 잠시 뒤에 정희숙이 왔다. 모두가 밤새 감기 증세가 어떠했는지를 묻자, 정희숙이 말하기를 “가래가 전보다 배나 심하니, 그대들을 따라 산에 들어갈 수 없을 듯하네.”라고 하고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모두들 정희숙은 병으로 따라갈 수 없으리라 여겨 저마다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모두 그의 시에 차운하였는데, 나의 시는 다음과 같다.
신선 세계 어느 곳에 신선 누각이 있는가 / 仙區底處有仙樓
부구의 어깨를 치는 좋은 유람 마련하였네 / 擬拍浮丘辦勝遊
유후는 무슨 일로 병을 핑계 삼아 물러났나 / 何事留侯徑謝病
옥퉁소가 공연히 학암의 가을을 저버렸네 / 玉簫空負鶴巖秋
정희숙과 작별하고 섬진강을 향해 달려 손유경(孫裕卿)의 정사(亭舍)에 이르렀다. 손유경은 아직 오지 않았고 정사를 지키는 하인 필동(畢同)이 있었다. 그 주인의 소식을 물으니,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필동이 맑은 술을 내와 여러 사람이 각자 서너 잔씩 마셨다. 편지를 써서 필동으로 하여금 급히 주인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그 편지에 “내가 그대에게 편지를 보냈고, 정옥봉(鄭玉峰)도 좋은 소식을 전했었는데, 그대는 듣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나 속세에서의 심사를 알 만합니다. 섬진강 가 정사에 이르렀을 때 필동이 술을 내어 대접하니, 하인이 주인보다 낫습니까? 주인이 하인보다 낫습니까? 이번 그믐날 뒤따라 석문(石門)으로 오십시오. 석문까지 올 수 없다면 호정(湖亭)에서 머물러 기다려 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자 위에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소쇄한 높은 정자에서 맑은 호수 굽어보니 / 高亭瀟灑俯澄湖
호남과 영남 사이의 별천지로구나 / 湖嶺中間別一區
몇 곡의 노랫소리 나그네를 붙드는데 / 數曲纖歌留遠客
푸르스름한 산 희미하여 있는 듯 없는 듯 / 依微山翠有而無
오후에 강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구름의 형세가 매우 험악해졌다. 흥룡(興龍)을 향해 달려가다 도중에 눈을 만나 촌가에 들어갔다. 잠시 구름이 걷혀 흥룡에 있는 하응일(河應一)의 집으로 달려갔다. 새로 지은 기와집은 높은 누각과 온돌방이 있었는데, 온돌방은 매우 넓었다. 정희숙이 병이 조금 나아 뒤따라 왔다. 나는 시를 지어 읊었다.
누각은 푸른 풀 우거진 언덕을 바라보고 / 軒臨靑草岸
대문은 흰 구름에 싸인 봉우리를 마주하네 / 門對白雲峯
하룻밤 신선 세계에서 자고 가게 되면 / 一宿壺中去
지팡이가 용이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 應看杖化龍
30일 정유. 이웃에 사는 노인 이혜(李蕙)ㆍ김숙남(金淑男)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인사를 하였다. 이혜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문여간이 그와 두 판을 두어 모두 패하였다. 조반을 먹은 뒤 출발하여 군산(君山) 앞에 이르니, 삽암(鍤巖) 위에 천막을 치고 앉은 이가 보였는데, 그가 분명 적선(謫仙) 이근지(李謹之)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삽암에 도착해 보니, 그는 이근지가 아니고 이상(李祥)이었다. 이상은 무인(武人)으로, 계미년(1583, 선조16) 별시에 합격하였는데, 강 장기(姜長鬐)와는 같은 해에 급제한 사이이다. 우리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술 두 동이와 안주 여섯 광주리는 산해진미였는데, 모두 둘러앉아 술을 마셨는데도 다 마시지 못했다. 해가 이미 기울어 서둘러 마시고 떠났다. 나는 삽암의 옛 자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은 고려 말 사람으로, 고려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견하고 이 산 속으로 숨어들어 삽암 위에 터를 잡고 살았다. 뒤에 조정에서 대비원 녹사(大悲院錄事)로 부르자 시 한 구절을 벽에 썼는데, “한 조각 임금의 명령 산골까지 찾아오니, 내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음을 비로소 알겠네.〔一片絲綸來入洞 始知名字落人間〕”라고 하였다. 드디어 담을 넘어 달아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
시인이 백발머리로 고적을 찾아 / 訪古騷人雪滿頭
선철의 옛 숲 언덕에 올라왔네 / 來登先哲舊林丘
아래위로 닿은 하늘 상강 물가 같고 / 天連上下猶湘浦
동남으로 열린 땅 악양과 흡사하네 / 地坼東南似岳州
세상 피한 맑은 기품 푸른 산처럼 우뚝했고 / 遁世淸標靑嶂立
담을 넘은 높은 자취 흰 구름처럼 떠갔네 / 踰牆高躅白雲浮
한 줄기 긴 피리 소리에 강산은 짙어가고 / 一聲長笛江山老
갈대꽃 억새꽃 흩날려 가을이 깊어 가네 / 蘆荻花飛入晩秋
이때 술잔을 돌리며 시를 읊조린 지 얼마 안 되어, 옛 화개현(花開縣)을 나와 악양현(岳陽縣)을 지나서 평사역(平沙驛)을 거쳐 군산(君山)으로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멀리 바라볼 때는 누군지 몰랐는데, 잠시 동안 얘기를 나눠보니 바로 이근지(李謹之)였다. 이근지의 이름은 중훈(重訓)인데, 고 상국(相國) 이준민(李俊民)의 조카이다. 집이 한양에 있으나 현달을 지향하지 않고, 푸른 산 속에 들어와 살고자 하였다. 일찍이 계동(桂洞)에서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술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신 뒤, 도탄(陶灘)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 정여창(鄭汝昌) 선생은 연산군 때 도탄 가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뒤 점필재(佔畢齋)의 문인으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었다. 남명 선생(南冥先生)은 “이곳은 삽암(鍤巖)과 10리 거리이다. 명철(明哲)의 행(幸)ㆍ불행(不幸)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관포(魚灌圃)의 시에 “대 숲이 정공의 집을 가렸으니, 당시에 길이 살 곳으로 정했음을 알 수 있네. 중년에 연좌되니 원숭이와 학이 원망했고, 늙어서는 이 강의 고기도 먹지 못하였네.〔竹林半掩鄭公廬 想得當時卜永居 正坐中年猿鶴怨 老來不食此江魚〕”라고 하였다. - 나는 도탄을 지날 때,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정 선생은 유림의 종장이신데 / 鄭先生是儒林匠
만년에 시내 서쪽에서 은거해 살았네 / 晩卜幽貞溪水西
석양에 말 세우고 지난 일에 상심하니 / 落日停驂傷往事
구름도 물빛도 온통 처량하구나 / 雲容水色共悽悽
도탄을 출발하여 가정(柯亭)에 이르니, 날이 벌써 저물었다.
단교(斷橋) 주변에 이르자, 아랫마을ㆍ윗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왔는데, 횃불을 든 자가 거의 20여 명이나 되었다. 앞서 흥룡에 있을 적에 하응일(河應一)ㆍ최기(崔屺)에게 유람 도중 필요한 사람ㆍ말ㆍ음식 등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군과 최군 두 사람이 마을 사람들에게 미리 기별하여 불을 밝히고 나와 맞이하게 한 것이다. 단교는 곧 쌍계사(雙磎寺)ㆍ신응사(神凝寺)ㆍ칠불사(七佛寺) 세 골짜기의 물이 합류하여 내려오는 곳이다. 시내는 넓고 돌은 험한데, 예전의 다리가 지금은 허물어졌으므로 ‘단교(斷橋)’라고 한다. 말을 탄 사람이건 걸어서 건너는 사람이건 한 사람도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사람 없이 모두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불을 밝혀 나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군과 최군 두 사람이 부지런히 일을 주관했다 할 만하고, 마을 사람들의 선량함도 생각할 만하다.
화개현 앞의 시내를 건너 석문(石門) 앞에 당도하니, 쌍계사 수승(首僧) 삼보(三寶) 등의 승려가 나와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팔영루(八詠樓)에 이르니, 절의 승려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요학루(邀鶴樓) 앞에서 말에서 내려 누각에 올라 둘러앉으니, 절의 승려들이 등불을 밝히고 연회를 베풀며 합장을 하면서 위로하였고, 후추차ㆍ홍시ㆍ다래ㆍ잣 등의 과일을 대접하였다. 그러고 나서 저녁밥을 먹었다. 사운시(四韻詩) 한 편을 지었다.
가정 마을 가는 도중 취기가 돌더니 / 柯亭道上帶微醺
신선 세계 찾아 드니 들판은 어둑어둑 / 尋到仙區野色昏
횃불 밝혀 단교 건널 때 큰 바위는 울퉁불퉁 / 束火渡橋危石露
옷자락 잡고 누각 오르니 저녁 종소리 들리네 / 攝衣登閣暮鐘聞
저녁 안개 내려앉아 삼신동은 어렴풋하고 / 煙霞縹緲三神洞
이끼 낀 석문의 네 글자는 희미하네 / 苔蘚微茫四字門
선원으로 가고픈 데 어느 곳인가 / 欲泝仙源何處是
향로봉 위에서 최고운을 불러 보네 / 香爐峰上喚孤雲
10월 1일 무술. 아침 해가 떠올라 비단 창이 환해질 즈음에 요학루에 나갔는데, 높다란 난간은 공중에 높이 솟아 있어 아찔하였다. 서성거리다가 발길을 돌려 법당에 들어갔는데, 빽빽이 있는 방은 고요했고 붉고 푸른 단청은 눈이 부셨다. 먼저 봉래전(蓬萊殿)을 찾았는데, 옛날에는 온돌이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비어 그 안에 경판(經板)만 소장되어 있었다. 이곳은 내가 옛날 독서하던 곳이다.
지난 을축년(1565, 명종20) 가을에 강득희(姜得熙) 문경(文卿)과 함께 와서 거처했고, 그 해 겨울 11월에는 류대명(柳大鳴) 이원(而遠), 강검(姜儉) 희약(希約), 하조종(河朝宗) 달원(達源) 등과 다시 와서 거처하다가, 다음 해 병인년(1566) 정월 그믐에 각자 헤어졌다.
또 정묘년(1567) 가을에 최순흠(崔舜欽) 여일(汝一), 권세인(權世仁) 경초(景初), 류장(柳璋) 여옥(汝玉), 하천주(河天澍) 해숙(解叔) 등과 응석사(凝石寺)에서 출발하여 광제사(廣濟寺)ㆍ단속사(斷俗寺)ㆍ덕산사(德山寺) 등을 두루 탐방하고, 남명 선생을 알현하려고 했으나 선생께서 김해(金海)로 가시어 뵙지 못하였다. 시냇가에 초정(草亭)이 있었는데, 정자 기둥에 선생이 손수 쓰신 시 한 수가 있었다.
천 석이나 되는 큰 종을 보게나 / 請看千石鐘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네 / 非大扣無聲
어찌하면 나도 저 두류산처럼 / 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게 될까 / 天鳴猶不鳴
우리들이 처음에는 그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읊조리고 음미한 한참 만에 그 뜻을 조금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서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생의 모습을 뵙지는 못했으나, 선생의 역량은 이 시를 통해 상상할 수 있겠네. 이번 걸음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도천(桃川) 가 - 지금의 덕천서원 터이다. - 를 거닐다가 번천동(樊川洞)을 지나 숙묵암(宿黙菴)을 거처서 설봉(雪峰)을 넘어 불일암(佛日菴)에서 묵었다. 쌍계사로 내려가 겨울 석 달 동안 역사서를 읽고, 다음 해 봄에 산을 나왔다.
아! 을축년과 정묘년의 일이 벌써 50년이나 지났고, 그 때 함께 노닐던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이 즐비한가.’라고 한 격이다. 난리와 많은 전쟁으로 사찰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지금 새로 지은 절에 나 홀로 다시 와 옛터를 둘러보니, 이른바 ‘늙은 신선 죽지 않고 흥망을 다 보았네.’라는 격이었다.
또 영주각(瀛洲閣)에 들렀다. 영주각은 법당 뒤에 있는데, 평소 동방장(東方丈)ㆍ서방장(西方丈)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옛날의 옥천사(玉泉寺)이다. 내가 일찍이 노승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옛날에는 ‘쌍계(雙磎)’라는 이름이 없었다. 최치원이 옥천사에 와 거처하면서 진감선사(眞鑑禪師)와 도우(道友)가 되었다. 이곳에 두 줄기 시냇물이 흐르기 때문에 최치원이 바위에 ‘쌍계석문(雙磎石門)’이란 네 글자를 썼다. 그 뒤 이 절의 승려가 옥천사 앞에 큰 사찰을 지어 ‘쌍계사(雙磎寺)’라 이름하였고, 옥천사를 동ㆍ서 방장으로 삼았다. 이 절에 ‘쌍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뒤에 또 팔영루(八詠樓)를 지었는데, 심약(沈約)의 시에 “쌍계사를 비추는 밝은 달, 팔영루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고 한 데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내가 오늘 와서 유람하니, “젊은 시절 나그네로 머물던 곳, 오늘은 그대들 떠나보내고 노니네.”라는 것이었다. 팔영루는 이 절의 승려 중섬(仲暹)이 지었다. 팔영루에 걸린 시는 어관포(魚灌圃)가 먼저 짓고, 제현들이 이어서 화운(和韻)하였는데, 황필(黃㻶)의 시만 기억하고 그 나머지는 잊어버렸다. 팔영루의 현판은 승려 영지(靈芝)가 쓴 것이라 한다.
정오 무렵 여러 벗들과 무너진 섬돌 주변을 배회하다가 변생(卞生)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닐었다. 마침 이 창원(李昌原)의 종 일원(一元)이 술을 가지고 와서, 모두들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셨다. 비전(碑殿) 문 밖에는 돌로 된 비석이 있는데, 곧 최고운이 짓고 쓴 것이다. 진감선사를 위하여 지은 것인데, 절묘한 문장은 간간이 난해한 곳이 있었지만, 줄줄이 이어진 빼어난 글씨는 글자마다 정신이 깃들어 있고 기력이 있어서 어루만지며 아낄 만하였다. 내가 옛날 노닐던 감회를 시로 한 편 지었다. - 시집에 보인다. - 또 과객 - 정승 기자헌(奇自獻) - 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가소롭구나 반구옹의 산수벽이여 / 可笑鷗翁山水癖
두류산을 반평생 몇 번이나 찾았던가 / 頭流半世幾來來
난새 타고 삼청에 오르고자 하니 / 驂鸞欲向三淸去
누가 학을 타고 나와 함께 가려는가 / 駕鶴何人共我廻
보심(寶心)이라는 승려가 시축(詩軸)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일대의 이름 있는 벼슬아치들이 지은 것으로, 진양(晉陽) 사람 향장(鄕長) 남태형(南泰亨), 생원(生員) 하위보(河魏寶), 밀양 부사 하진보(河晉寶), 봉산 군수(鳳山郡守) 김대명(金大鳴), 진사 정대함(鄭大咸), 생원 공인박(孔仁博), 죽원(竹院) 이인민(李仁民) 등이 이 승려에게 지어 준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남긴 시와 글씨는 완연히 어제의 일 같으니, 참으로 슬프도다.
요학루(邀鶴樓) 벽 위에 여덟 신선의 이름을 썼는데, 부사소선(浮査少仙)ㆍ옥봉취선(玉峯醉仙)ㆍ봉대비선(鳳臺飛仙)ㆍ능허보선(凌虛步仙)ㆍ동정적선(洞庭謫仙)ㆍ죽림주선(竹林酒仙)ㆍ매촌낭선(梅村浪仙)ㆍ적벽시선(赤壁詩仙)이다. 또 두 신선을 추가하였는데, 용담수선(龍潭睡仙)은 하응일(河應一)이고, 학동후선(鶴洞後仙)은 최이(崔圯)이다. 강이원(姜以元)은 약 찧는 아이로 삼고, 정시특(鄭時特)은 단약(丹藥) 만드는 아이로 삼았다. 글씨는 성박(成鑮)이 썼다.
2일 기해. 날씨가 화창하고 좋아서 명승지를 유람하기에 알맞았다. 모두들 청학동(靑鶴洞)을 찾아갈 계획이 있어 절의 승려로 하여금 남여 네 대를 준비하게 하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남여 네 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여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늙은이와 병든 이가 타고나니, 네 명의 신선은 탈 수 없었다. 늙은 성부사와 병든 정옥봉과 살찐 이동정은 모두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양보하여 타게 하였다. 남여 한 대만 남았는데 박능허는 문매촌보다 나이가 많고, 문매촌은 박능허보다 걸음이 느릿해서 두 사람이 서로 타려고 하였다. 내가 이에 번갈아 타도록 약속을 정하여 한 사람이 먼저 타고 20여 보를 가서 내려 쉬게 하고, 다른 사람이 타고 이르게 하였다. 이와 같이 번갈아 타고 가면, 걷는 수고가 없을 것이다.
드디어 신선을 찾는 유람을 하기로 정하고, 아침밥을 먹은 뒤 영주각(瀛洲閣) 동쪽 문에서 출발하였다. 보심(寶心)으로 하여금 길 안내를 하게 하였다. 남여 네 대에 나눠 타고 가는데, 젊은 승려 10여 명이 번갈아 가며 남여를 메었다.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걷다가 쉬다가 하였다. 수십 보쯤 가니 큰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을축년 가을. 이언경(李彦憬)ㆍ홍연(洪淵)’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대개 유람할 때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영구히 전하고자 한 것이다. 남명 선생이 유산록(遊山錄)에서 이미 기롱하였으니, 내가 어찌 다시 말하겠는가.
또 10여 보쯤 가다가 남여를 세우고 내려서 붉은 낙엽을 깔고 땅에 앉기도 하고, 푸른 이끼 낀 바위 옆에 기대기도 하였다. 동복을 시켜 나무 끝에 올라가 후도(猴桃)를 따게 하여 모두 후도를 먹었는데, 그 맛이 달고 향기로웠다. ‘후도’는 세속에서 ‘월라(月羅 다래)’라고 하는 것이다. 그 열매가 서리를 맞아 익은 채 줄기에 달려 있었는데, 나뭇가지 끝을 흔들자 익은 것이 저절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다투어 주웠는데, 많이 주운 사람은 바구니에 가득 찼다. 또 누런 배와 홍시가 떨어져 낙엽 속에 묻혀 있었는데, 낙엽을 헤치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종들이 다투어 주워 먹다가 싫증이 나자, 서로 던지며 장난을 하였다.
피리 부는 두 종으로 하여금 앞서 인도하게 하고,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갔다. 오시(午時)가 채 되기 전에 비로봉(毘盧峰) 북쪽에 도착하였는데, 학암(鶴巖)이 남쪽에 있고, 잔도(棧道)가 그 동쪽에 있어 남여를 두고 걸어갔다. 이곳은 내가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 꿈속에서 찾아왔던 곳이다. 꿈 이야기는 나의 서술에 상세히 적어 놓았으므로,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바위 중간 길이 끊긴 곳에 나무를 잘라 걸쳐놓았는데, 그 아래는 억만 길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자가 아니면 태연히 지나갈 수 없었다. 완폭대(翫瀑臺) 소나무 밑에 이르러 줄지어 앉아 쉬었다. 완폭대는 백 척이나 되는 낭떠러지를 마주하고 동쪽에는 폭포가 있으며, 그 앞으로 폭포수가 흘러가기 때문에 완폭대라고 한다. 폭포가 흘러내려 학연(鶴淵)이 되고, 학연의 아래에 용추(龍湫)가 있다. 완폭대 아래에 좁은 길이 있는데, 부여잡고 수직으로 내려가 이끼를 긁어내면 ‘삼선동(三仙洞)’ 세 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지만, 몸이 가볍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다.
얼마 뒤에 불일암(佛日菴)에 이르렀는데, 암자는 텅 비어 먼지만 절에 가득하였다. 문매촌이 한 구절 읊기를 “학 떠나니 둥지 튼 소나무는 늙었고, 중 떠나니 옛 절은 텅 비었네.〔鶴去巢松老 僧歸古寺空〕”라고 하여, 내가 두 구를 채워 “신선을 찾던 옛날 꿈 속, 이 산중에 와 있었지.〔尋眞他日夢 應在此山中〕”라고 읊었다. 마침내 벽에 이 시를 써 붙였다.
잠시 뒤 향로봉(香爐峰)에 오르려는데, 아들 성박이 옷깃을 당기며 말리기를 “저희들이 봉우리 위에 올라가겠으니, 이곳에 앉아서 구경하시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위험한 산봉우리에 부디 오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말하기를 “네 아비 나이가 백 살도 되지 않았는데, 어찌 향로봉에 오르지 못하겠느냐.”라고 하고서, 이에 오죽장(烏竹杖)을 짚고 짚신을 매고서 여러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꿴 듯이 줄지어 올라갔다. 세 번 쉬고 나서야 봉우리 꼭대기의 고령대(古靈臺)에 도착하였다. 승려 신섬(信暹)이 대추와 후추를 넣고 달인 차 한 통을 가지고 먼저 봉우리에 올라와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 몇 잔을 따라 주고, 바구니에 가득 담은 홍시와 다래 등 과일을 내어 먹이니, 갈증이 절로 해소되었다. 봉우리는 깎아 세운 듯이 높았다. 모두 줄지어 앉아 있다가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눕기도 하고, 늘어서 있다가 소나무 가지를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가벼이 낭풍(閬風)에 올라 상제가 사는 곳에 가까이 온 듯하고, 공동산(崆峒山)에 올라 광성자(廣成子)을 방문한 듯하였다. 드디어 〈선유사(仙遊辭)〉1장을 지었다.
산이 높고 높음이여 푸른빛을 모았고 / 山矗矗兮攢碧
물이 차디참이여 푸른 물결 흘러가네 / 水冷冷兮下綠
신선 무리들이 옷소매를 나란히 하였는데 / 有仙曹兮袂聯
정갈한 여덟 밥그릇에 푸른 옥 지팡이 있네 / 八飯靑精兮杖綠玉
호랑이와 표범에 걸터앉고 용을 타며 / 踞虎豹兮登虯龍
붉은 난새에 올라타고 백학을 끌어당기네 / 驂紫鸞兮控白鶴
왼쪽엔 홍애요 오른쪽엔 부구이고 / 左洪崖兮右浮丘
고운을 불러 참된 비결을 묻노라 / 喚孤雲兮問眞訣
적송자을 잡아당겨 붉은 퉁소를 부니 / 挽赤松兮弄紫簫
머리 위 지척은 옥황이 사는 곳이네 / 頭邊咫尺兮玉皇攸宅
3일 경자. 날씨가 또 화창하였다. 아침밥을 먹은 뒤 신응사(神凝寺)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석문 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둘러보았다. 두 개의 큰 바위가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서쪽엔 ‘쌍계(雙磎)’, 동쪽엔 ‘석문(石門)’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글자마다 크기가 사슴 정강이 만하였는데 바위에 깊이 새겨져 있어 어제 쓴 글씨처럼 뚜렷하였다. 사람들이 두 바위 사이로 지나다니기 때문에 ‘석문’이라고 한다. 석문 가에는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 놓았는데, 떼를 입혀 자리를 펴놓은 것 같았다. 그 옆에는 큰 소나무가 우뚝 서 있고 흰 돌이 즐비하였으며, 푸른 이끼가 얼룩덜룩하였다. 한 줄기 시내가 청학동으로부터 흘러오다가 고여 맑은 못을 이루었다. 못 가의 한 바위에 ‘진주(晉州)’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이 쓴 글씨인지 알 수 없었다.
손유경(孫裕卿)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 왔다. 내가 답하기를 “그대의 서찰을 받아 보니, 일의 전말이 상세히 진술되어 있습니다. 그대의 신의가 남다름을 알겠으니, 고마움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편지를 보내면서 만날 기일을 정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이 서촌(西村)을 경유하게 되면 그대가 반드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유(仙遊) 소식만 전했던 것입니다. 그대가 길에서 전하는 말만 믿고 정군(鄭君)에게 묻지 않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옛날 흥공(興公)이 천태산(天台山) 적성(赤城)을 밟아 보지도 않고, 천태산을 그리고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벗에게 ‘이 부를 땅에 던지면 금석 소리가 날 것이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천고(千古)에 전합니다. 그대가 우리들의 선유에 끼지 않은 것은 반드시 그 성명(姓名)을 빌미로 삼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보낸 8장의 시는 흥공의 〈유천태산부〉와 함께 세상에 전해질 것입니다. 어제는 향로봉에 올랐고, 오늘은 신응사(神凝寺)에 들어왔습니다. 내일은 작은 배를 타고 섬진강에 닿을 것이니, 그대는 천천히 오십시오. 선유의 흥취를 읊은 많은 시편들을 다 써서 보내 줄 수는 없습니다. 이만 줄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시를 지었다.
무릉도원 들어오니 또 다른 세상 있어 / 路入桃源別有天
동구 밖은 운무에 속세와 단절되었네 / 雲煙鎖斷洞門邊
속세 소식을 그 누가 나에게 전하리 / 塵間消息誰傳我
기별 줄 어부는 낚싯배를 매어놓았는데 / 報道漁郞繫釣船
시를 짓고서 옛 화개현(花開縣) 앞을 지나 무지개다리가 드리워진 곳에 다다랐다. 옛날에는 물가에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신응사 승려 태능(太能) 등 5, 6명이 나와 맞이하였다. 모두 말에서 내려 외나무다리를 건넜는데, 다리 머리에는 수침(水砧)이 있었다. 절 문에 이르렀다. 옛날에는 능파각(凌波閣)이 있었는데, 임진ㆍ계사년 난리 때 왜적들에 의해 불타버려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곧바로 법당에 들어가니, 옛날에는 텅 비었던 불전이 지금은 온돌을 깔았다. 전각의 모퉁이는 구름을 찌를 듯 높고, 금빛 푸른빛 단청은 눈을 부시게 하였다. 법당 안은 수백 명을 수용할 만큼 넓었다. 절 터는 깊고 깊숙한 곳에 있어 인간 세상과 아득히 떨어져 있으니, 마치 몸이 요지(瑤池)에 이르러 몸소 옥황상제의 궁궐을 보는 듯 황홀하였다. 발길을 돌려 법당을 나온 뒤 기수(琪樹) 밑에 둘러앉아 산세를 훑어보니, 뭇 봉우리가 사방을 둘러싸고 두 줄기 시내가 합류하며, 임궁(琳宮)의 찬란한 모습이 물속에 비쳐 절이 기이하고 빼어난 곳에 있다고 할 만하였다. 여산(廬山)의 호계(虎溪)와 서호(西湖) 가의 영은사(靈隱寺)도 이와 같은지 모르겠다.
또 절에서 걸어 나와 시내를 따라 1리쯤 올라가서 푸른 시내의 바위 가에 앉았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 가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소나무에 기대어 위아래를 훑어보니, 잎이 떨어져 산의 모습은 황량하였고, 물이 줄어 시내의 돌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내는 흰 물결을 뿜어내며 옥 같은 소리를 내고, 산은 구름을 비집고 우뚝 솟아 있어 까마득히 선원(仙源)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 수 없었다. 수석의 기이한 모양과 유람의 고아한 정취에 대해서는 선현들의 기록에 남김없이 다 묘사해 놓았으니, 거친 내 솜씨로 어찌 그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있겠는가. 단지 난리가 끝난 뒤 산하는 옛날 그대로인데 누각은 모두 허물어졌고, 영웅은 새처럼 지나가 버렸고, 옛 일은 구름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서성이며 바라봄에 어찌 감회가 없으랴.
절의 서쪽에 또 ‘사당(社堂)’이란 한 암자가 있었다. 옛날 나는 벗과 함께 이 암자에 와서 공부할 적에, 그윽하고 고요함을 사랑하여 몇 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암자 앞에는 큰 대나무 천여 그루가 있었는데, 그 그림자가 창문에 아른거렸다. 문 밖에는 넓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 가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푸른 잎과 붉은 꽃봉오리가 문 밖까지 그늘을 드리웠었다. 신응사 승려에게 물었더니, 그 암자가 아직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찾아갈 수 없었다. 돌아와 법당에 들어가 나란히 누워 한숨 잤다. 어두워지자 등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절의 승려 태능이 절구 두 수를 지어 보여주기에, 내가 그 시에 차운하였다.
산수를 보는 것은 내 능히 잘하지만 / 觀水觀山是我能
현묘와 적멸 담론함은 내 어찌 능하리 / 談玄談寂又何能
이 집에 저절로 진여의 법 있으니 / 渠家自有眞如法
태능은 이 법에 능한가 불능한가 / 爲問太能能不能
청허당 노승을 예전에 만났었고 / 淸虛堂老曾相見
을축년에 여기서 글을 논하였지 / 此地論文乙丑年
오늘밤 선사 만나 옛 일을 담론하니 / 今日逢師談舊事
청아한 시 백여 편이 눈앞에 선하구나 / 淸詩照眼百餘篇
4일 신축.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와 온 나무가 산을 울렸다. 날씨가 매우 추워 갖옷을 겹쳐 입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출발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고 싶었지만, 30여 명이나 되는 일행의 식량과 말의 먹이를 조달하기도 매우 어려운데다, 이미 서 도장(徐都將)과 동정호(洞庭湖)에서 배를 띄우기로 한 약속이 있었고, 손유경도 편지를 보내 “초 8일쯤 조수(潮水)가 높지 않으니 행장을 꾸려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침을 먹은 뒤 추위를 무릅쓰고 억지로 출발하였다. 절 문을 나서며 손유경의 시에 차운하여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여산의 일주문에서 웃으며 작별하고 / 笑別廬山一柱門
머리 들어 호계의 구름 우두커니 바라보네 / 擡頭黯倚虎溪雲
멀리 산 밖에는 풍파가 세찬 줄 알겠으니 / 遙知山外風波急
누가 배를 대 놓고 푸른 술통 끼고 있을까 / 誰繫蘭舟擁綠罇
말을 타고 가면서 아홉 개의 ‘교(橋)’ 자로 운을 달아 절구 세 수를 지었다.
냇물에 꽃잎 떠오던 옛 무지개다리 / 落花流水舊虹橋
오늘은 어찌하여 외나무다리 되었나 / 今日胡爲一木橋
봄바람 불 때 천태산 길 들어가려 하니 / 春風擬入天台路
누가 다시 내가 석교 건너는 것 보려나 / 誰復看余渡石橋
- 이 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지은 것이다. -
야윈 말 채찍질 하며 다리를 건너는데 / 懶鞭羸馬過溪橋
단풍잎 바람결에 다리 위에 흩날리네 / 紅葉颼颼亂颭橋
절경 만나 읊조리니 어깨 절로 들썩이는데 / 遇景沈吟肩自聳
옆 사람은 호연교에 잘못 비유하네 / 傍人錯比浩然橋
- 이 시는 석문교(石門橋)를 지나면서 지은 것이다. -
산 속의 해 뉘엿뉘엿 끊긴 다리 비추는데 / 山日依微照斷橋
시인은 어느 곳 단풍 든 다리에 머무는가 / 詩人何處泊楓橋
강가의 고깃배 불빛에 흥취 무궁하여 / 江天漁火無窮興
섬진강 호수 가의 다리에 와 있구나 / 知在蟾津湖上橋
- 이 시는 화개교(花開橋)를 건너면서 지은 것이다. -
가정촌(柯亭村) 앞에 이르자, 마을 사람들이 장막을 치고 맞아들여 점심을 대접하였다. 음식상이 약소하지만 정갈하였으며 맛이 좋았다. 음식을 준비한 사람은 이름이 ‘지귀(智貴)’로, 호남의 부자 나치리(羅致里)의 외손이라고 하였다. 덕천 전곡(德川典穀) 손득전(孫得詮)이 찾아와 인사하고 인도하여 평사(平沙)로 가서 묵었다. 오후에 도탄(陶灘)을 지나 삽암(鍤巖)에 도착하니, 바람이 더욱 거세어져 배가 역풍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만나기로 약속한 손 상사(孫上舍)와 서 도장도 배를 저어 올라올 수 없어 섬진강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평사역 촌가로 달려가서 편히 쉬었다. 나는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아침에 화개동을 출발했는데 / 朝出花開洞
오후에 강바람이 더욱 매섭네 / 江風晩更尖
석양 무렵 옛 역에 투숙하여 / 斜陽投古驛
한가히 앉아 바람 자길 기다리네 / 閒坐待波恬
저녁에 소촌 찰방(召村察訪)정윤목(鄭允穆)이 이웃집에 와서 묵었다.
5일 임인. 바람이 잠잠하고 하늘이 맑아 날씨가 화창하니, 배를 타기에 적합하였다. 아침밥을 서둘러 먹었다. 소촌 찰방도 두류산을 유람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서,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 시집에 보인다. - 소촌 찰방이 출발하려다 내 시를 보고 곧바로 찾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떠났는데, 그가 화답시를 지어 보내 왔다. - 원운(原韻) 아래에 붙어 있다. -
아침밥을 먹은 뒤에 흥룡촌(興龍村)을 향해 달려갔다. 마을 앞에 장막을 치고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고성 군수(固城郡守) 윤삼락(尹三樂)과 이혜(李蕙)ㆍ김숙남(金淑南) 등이었다. 윤 고성(尹固城)이 술 한 잔씩 다 돌리고 이혜가 술잔을 반쯤 돌렸을 때, 뱃사람이 와서 고하기를 “손 진사께서 앞 여울에 배를 대어놓고 여러분들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시(午時)에는 조수가 점점 낮아지고 얕은 여울이 앞에 있어, 배를 늦게 띄우면 운행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술자리를 파하고서 일행을 거느리고 뱃머리로 향하였다. 뱃머리에 꽂아 둔 노란 국화가 그대로 꽂혀 있었다. 손 진사가 북치는 사람, 피리 부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춤추는 기생들을 데리고 왔다. 호숫가에 세 척의 배가 매여 있었는데, 그중에 배 한 척을 보내 우리들을 맞이하여 태웠다. 우리들이 다투어 배에 오르니, 손 상사는 뱃전에 기대어 시를 읊조리고 있었고, 서락(徐落)ㆍ성수명(成守命) 등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이에 세 척의 배를 연결하여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잔잔한 물결은 일지 않아 수면은 거울을 닦아 놓은 듯하였고, 강 양쪽 산 언덕의 모습은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울긋불긋하였다. 강 중간쯤에서 돛을 올렸는데, 돛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술 한 잔씩 마시며 시 한 수씩 읊조렸고, 북소리와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 노래하고 춤추며 술잔을 수없이 주고받았다. 나는 배 위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읊조리며 시를 쓰는 붓은 짧고 / 吟裏詩毫短
뱃머리에 춤추는 소매는 길구나 / 船頭舞袖長
석양에 무한하게 이는 흥취를 / 斜陽無限興
모두 고인의 술잔에 부치노라 / 都付故人觴
이때 석양이 산에 걸려 강물에 비치고, 푸른 산은 강물에 그림자 드리우고 먼 숲엔 연기가 깔리니, 어스름한 저녁 풍경을 한 자루 붓으로 그려내기 어려웠다. 이에 술 한 잔씩 더 돌리고 풍악을 재촉했다.
손 진사의 강가 정자에 다다랐을 때 날은 이미 저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나왔으나, 오히려 모래톱에 배를 대지 못하여 그대로 남쪽으로 내려가서 장터 옆 나루까지 갔다가 돌아와 손 진사 정자 밑에 배를 대었다. 윤 고성은 동정적선(洞庭謫仙)을 데리고 먼저 내려가고, 여러 사람들도 모두 각자 흩어졌다. 나머지 일곱 신선과 손유경은 배를 돌려 노닐다가 한참 뒤에 배에서 내렸다.
강가 정자로 들어가 등불을 밝히고 다시 술을 마셨다. 내가 일행에게 약속하기를 “오늘 유람은 기쁨과 즐거움이 이미 흡족하지만, 문자음(文字飮)을 하지 않을 수 없네. 술이 한 순배 돌 때까지 시 한 수를 짓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니, 모두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반에 술잔 하나를 놓아 가운데 두고, 시 한 편을 짓고 술 한 잔씩 마셨다. 돌아가며 왕복하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마쳤다. 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동빈이 날아서 동정호 물가 지날 때 / 洞賓飛過洞庭潯
소매 속의 청사검 얼마나 울었을까 / 袖裏靑蛇幾浪吟
배 안에서 흥 일어 풍악이 울려 퍼지고 / 興入舟中歌笛響
강가에서 시 지으니 새들의 노래구나 / 詩成湖外鷺𪆁音
공부는 명예에 골몰하지 않았으니 / 工夫不向名間沒
평생 계획 어찌 이익을 좇는 데 빠지리 / 計較寧隨利上沈
오늘의 신선 유람 우연이 아니니 / 此日仙遊非偶爾
그대들은 세한의 마음 저버리지 말게 / 請君休負歲寒心
6일 계묘. 곤히 자고 늦게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홀로 호수 가 정자로 나와 나무에 기대어 둘러보니, 아침 해가 막 떠올라 호수와 하늘은 맑고 아름다웠으며, 경치는 짙고 옅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술꾼들이 손 진사의 종 필동(畢同)의 누추한 방에 모여, 술통을 가득 채워 진탕 마셨다고 들었다.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보냈다.
먼 나무에 남기 서려 산의 모습 고요하고 / 嵐橫遠樹山顔靜
높은 봉우리에 해가 뜨니 맑은 수면 붉네 / 日上高峰鏡面紅
범부들은 이 빼어난 아침 풍경 모른 채 / 凡骨不知朝景勝
술에 취해 누추한 방안에 널브러져 있네 / 觥絃徑倒陋房中
이에 술꾼 손유경과 매촌낭선(梅村浪仙), 죽림주선(竹林酒仙) 등이 깜짝 놀라 헐레벌떡 나와 술이 깨었다고 하면서 불민함을 사죄하였다. 또 정자 위에 술자리를 벌여 술잔을 주고받으며 각자 내 시에 화답하였다. 내가 다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누대 안에 술이 있어 사람들 먼저 취하였고 / 臺中有酒人先醉
호숫가엔 바람 없으나 낙엽은 절로 떨어지네 / 湖上無風葉自飛
배회하는 늙은이는 시를 짓지도 못했는데 / 徙倚老査吟未了
물새 떼 다시 남쪽 바다를 향해 날아가네 / 群鷗又向水南歸
아침밥을 먹은 뒤 각자 작별하고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었다. 모두 말하기를 “이번 유람은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뒷날 다시 유람하게 된다면, 만나서 그 기일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매촌낭선으로 하여금 약속하는 글을 짓게 하였는데, 그 글에 “청학동의 신선 유람은 맑은 흥취가 흡족하지 못했다. 가을에 다시 거행하기는 어려우니, 봄으로 기약하여 내년 3월 보름에 이곳에서 다시 모이기로 한다. 손유경으로 하여금 후일 선유의 예(禮)를 행하게 하여, 뱃놀이에 필요한 도구와 관현의 악기를 책임지고 준비하여 빠짐없이 갖추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동정적선과 매촌낭선은 악양(岳陽)으로 가고, 손유경은 강가의 정자에 남고, 부사소선ㆍ옥봉취선ㆍ봉대비선ㆍ능허보선ㆍ죽림주선ㆍ적벽시선은 말을 타고 줄지어 돌아왔다. 우현(牛峴)을 넘고 하천(霞川)을 건너 공돌원(公突院) 시냇가에 이르렀다.
아들 성박으로 하여금 작은 산머리에 올라가 하 지평(河持平)의 묘를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지평의 이름은 충(漴)으로, 나의 증조모 하씨의 부친이다. 묘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산머리에 세 개의 큰 무덤이 세발솥처럼 줄지어 있었으나, 묘갈(墓碣)이나 묘지(墓誌)도 없고, 또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찾을 수 없어 돌아왔다.
하중오(河重吾)ㆍ성수명(成受命) 등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먼 곳까지 배웅해 주었다. 이에 여섯 신선이 모두 술에 취하였고, 피리소리와 노래가 함께 울려 퍼지자, 일제히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들판에서 벼를 베던 사람들이 낫을 들고 서서 바라보았다.
횡포(橫浦)를 지나 황현(黃峴)을 넘고, 대야천(大也川)을 경유해 동곡(桐谷)에 도착하여 옥봉(玉峰) 정희숙의 집에서 묵었다. 조여헌(趙汝獻)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7일 갑진. 흰죽을 먹고 아침 일찍 출발할 즈음에 곤산(昆山)의 성명은 강숙(姜叔), 자는 백양(伯陽)인 사람이 술을 가지고 와서 인사하였고, 조여수(趙汝秀)도 찾아와서 인사를 하였다. 후방(後方)을 지나 원당(元堂)을 거쳐 곤명(昆明)을 지나면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세 신선이 삼선동을 두루 구경하고서 / 三仙歷覽三仙洞
천풍을 옆에 끼고 학을 타고 돌아가네 / 腋挾天風駕鶴廻
잠깐사이 군산 북쪽 땅을 날아 지나면서 / 須臾飛過君山北
곤명을 보니 병화에 거의 재가 되었네 / 看送昆明幾劫灰
저물녘에 능허보선의 낙천와(樂天窩)에 도착하여 묵었다.
8일 을사. 약동(藥洞)의 고개를 넘으면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산중에서 열흘 동안 신선세계 찾으며 / 山中十日窮探討
계곡의 좋은 경치 소매에 가득 담았네 / 滿壑煙霞拾滿裾
종들도 산수가 이름난 것을 아니 / 僮僕亦知山水號
구름 속의 닭과 개 거짓이 아닐세 / 雲中鷄犬不爲虛
임천탄(林川灘)을 건너 수우당(守愚堂)을 지나면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숲 밖의 서풍은 나뭇잎을 쓸어 가고 / 林外西風吹葉去
구름 가 북녘 기러기는 서리를 불러오네 / 雲邊北鴈帶霜來
황량한 옛 집에는 지키는 이 없고 / 荒凉古宅無人守
마른 대 찬 매화에 슬픔만 끝없네 / 枯竹寒梅不盡哀
황류탄(黃柳灘)을 건너면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명승 찾는 마음은 붕새가 북해로 떠나는 듯했고 / 探勝心如鵬徙北
환속하는 몸은 자고새가 남으로 돌아가는 듯하네 / 還塵身似鷓還南
평생토록 경세제민을 꿈꾸지 않았으면 / 平生倘不懷經濟
학과 난새를 타고 오를 수 있었으리 / 鶴可駕兮鸞可驂
해 질 녘에 부사정(浮査亭)에 도착하였다.
산 속에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자는 모두 선인(仙人)이었고, 산 밖으로 나오니 만나는 자는 모두 범인(凡人)이었다. 한 몸이 산으로 들어가고 나오느냐에 따라 선인과 범인이 달라지는 것은 곤붕(鵾鵬)이 북해로 날아가는 것과 자고(鷓鴣)가 산 남쪽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한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어찌 높게 기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선비의 한 몸은 그 계책을 경세제민에 두고, 선비의 온 마음은 그 뜻을 천하 사람과 선을 행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산에 어찌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신선을 어찌 배우지 않을 것인가.
명도 선생(明道先生)의 유산시(遊山詩)에 “옷소매의 티끌을 삼일 동안 끊었다가, 남여 타고 머리 돌려 돌아가려 하노라. 평생토록 경세제민의 뜻을 두지 않았다면, 등한시 하여 어찌 산을 나오랴.〔衿裾三日絶塵埃 欲上藍輿首更回 不是平生經濟志 等閒爭肯出山來〕”라고 하였으니, 이는 산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회암 선생(晦庵先生)의 〈감흥시(感興詩)〉에 “유유히 떠나 신선이 되기를 배워서, 세상을 버리고 구름 속에 노니는구나. 선약 담은 숟가락 입에 한번 들어가면, 환한 대낮에도 날개가 돋는다네. 세속을 벗어나긴 어렵지 않으나, 구차하게 사는 삶 어찌 편안하리.〔飄飄學仙侶 遺世在雲間 刀圭一入口 白日生羽翰 脫屣諒非難 偸生詎能安〕”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선을 배우는 것이 불가함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선유(仙遊)는 이름은 ‘선유’이지만, 실제는 ‘선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유람록 끝에 그 지취(志趣)를 드러낸다. 같이 유람했던 벗들이 내가 산수벽(山水癖)이 있고 또 산 속에서 있었던 일을 잘 안다는 것으로 기록하게 하였다.
내가 보건대, 여덟 신선 가운데에는 노소(老少)가 있고, 부자(父子)가 있고, 형제가 있다. 그러나 명승을 찾아 무리 지어 다닐 때는 노소ㆍ선후의 순서를 잊었고, 흥에 겨워 시를 지을 때는 부자ㆍ형제의 차례를 잃었다. 좋은 경치를 만나면 다투어 달려가 어른에게 양보하지 않았고, 시구를 얻으면 곧바로 써 보여 부형(父兄)보다 뒤에 하지 않았다. 이 유람을 하면서 형체를 잊고 구속을 버리고서 태고의 순박한 세계로 자연스레 흘러 들어가 모두 ‘팔선(八仙)’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서문을 지으면서 아비로서 자식을 돕고, 더욱 흥에 미치고 장난하고 농담하여 격이 없는 대목은 읽는 사람들이 너그럽게 봐주기를 바란다. 부사야옹(浮査野翁)이 기록한다.
정사년(1617, 광해군9) 봄에 진주 목사 구암(耈巖) 이삼성(李三省)이 단성 현감(丹城縣監) 및 진양 사람들과 두류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하였다. 내가 이 산을 옛날 유람한 적이 있다고 하여, 편지를 보내어 같이 가자고 청했다.
4월 초순에 나는 큰 아들을 데리고 구암 및 두세 고을 사람을 따라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길을 떠났다. 일행이 이날 칠송정(七松亭)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행차가 진주 서쪽 광탄(廣灘) 가에 이르렀을 때, 검은 구름 한 조각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몰려오더니, 바람이 몰아치고 소나기가 퍼붓고 우레가 치고 번개가 번쩍였는데, 모자를 쓰고 도롱이를 걸칠 틈도 없었다. 잠시 후에 날씨가 갰는데, 긴 무지개가 하늘에 걸리고, 붉은 기운이 동쪽과 북쪽 사이에 자욱하게 끼니, 일행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의아해 했다. 나는 이 일은 실로 비상한 이변으로 아마도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1일 동안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두 박민(朴敏)의 침류정(枕流亭)에 도착하였다. 물에 밥을 말아 먹고 밥상을 물리고서 술상을 차리려 할 때, 갑자기 전 관찰사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의 부음(訃音)을 듣고 헤어졌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광탄 가에서 우레와 번개가 치던 때가 바로 곽공이 세상을 떠나던 시각이었다.
아! 공은 의리에 따라 의병을 일으켰고,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섬멸하였다. 그리하여 공적은 사직(社稷)에 있고 이름은 역사에 드러났으니, 어찌 감히 한두 마디 말로써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공이 중년에 도인술(導引術)을 하고 반평생 솔잎을 먹고 산 것에 대해서 공을 아는 사람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곽공은 타고난 자질이 평범한 사람보다 특이한 점은 매우 많지만, 마음속의 은미한 생각에 대해서는 또한 일반인들이 그 전말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바람에 옷깃을 날리고 달빛에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은거한 것은 후한(後漢) 때의 수경(水鏡) 사마휘(司馬徽)와 같았고, 명성과 벼슬을 얻은 것은 전한(前漢) 때의 유후(留侯) 장자방(張子房)과 같았다. 병도 없던 고사(高士)가 갑자기 구름을 타고 비바람을 몰고 우레를 재촉하여 떠나기를 이처럼 신비롭고 기이하게 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소하(蕭何)가 묘성(昴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것과 부열(傅說)이 기성(箕星)을 타고 승천한 것을, 이를 통해 더욱 믿을 수 있겠다. 그리고 무지개다리는 후일 북두칠성과 견우성 사이에 걸쳐져 일월(日月)의 광명(光明)을 도우리라는 것을 또한 저승에서도 상상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한 마디 말을 써서 기이한 자취를 기록하고, 또 공사(公私) 간의 애통한 마음을 붙여 둔다.
[주-D001] 옥봉(玉峰) 정희숙(鄭熙叔) : 정대순(鄭大淳, 1552~?)으로, 옥봉은 그의 호이고, 희숙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창의하여 최기필(崔琦弼)을 도와 왜적을 토벌하였고,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중건하는 데 앞장섰다.[주-D002] 능허(凌虛) 박행원(朴行遠) : 박민(朴敏, 1566~1630)으로, 능허는 그의 호이고, 행원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태안(泰安)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27년(인조5) 진사가 되었다. 저술로 《능허집》이 있다.[주-D003] 매촌(梅村) 문여간(文汝幹) : 문홍운(文弘運, 1577~1610)으로, 매촌은 그의 호이고, 여간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금산(琴山)의 가방(嘉坊)에 거주하였다. 부친은 진사 문할(文劼)이다. 1612년(광해군4) 진사가 되었다. 저술로 《매촌집》이 있다.[주-D004] 성박(成鑮) : 1571~1618.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선(而善)ㆍ흡여(翕如),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성여신(成汝信)의 장남이다. 조식의 제자인 모촌(茅村) 이정(李瀞)에게 배웠다. 저술로 아들 성한영(成瀚永)의 문집과 합본으로 나온 《매균양세고(梅筠兩世稿)》가 있다.[주-D005] 성순(成錞) : 1590~1659.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진(而振), 호는 천재(川齋)이다. 성여신의 넷째 아들이다. 저술로 《천재집》이 있다.[주-D006] 봉학대(鳳鶴臺) 강사순(姜士順) : 강민효(姜敏孝)로, 봉학대는 그의 호이고, 사순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진주의 인담(仁潭)에 거주하였다. 효종 때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주-D007] 동정호(洞庭湖) 이근지(李謹之) : 이중훈(李重訓)으로, 동정호는 그의 호이고, 근지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조식(曺植)의 자형인 이공량(李公亮)의 손자로, 벼슬을 구하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주-D008] 낙천와(樂天窩) : 박민의 정자 이름이다.[주-D009] 구암동(龜巖洞) : 현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구암리이다.[주-D010] 가방(嘉坊) : 현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이다.[주-D011] 검호(劍湖)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에 있는 금호지(琴湖池)이다.[주-D012] 정촌(鼎村)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에 속한 마을이다.[주-D013] 관율(官栗) : 현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두량리에 있는 마을이다.[주-D014] 사우(祠宇) :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위패를 모신 구계서원(龜溪書院)의 구산사(龜山祠)를 가리키는 듯하다.[주-D015] 동성(東城) : 현 경상남도 사천시의 옛 이름이다.[주-D016] 산양(山陽)의 친구 생각 : 진(晉)나라 상수(向秀)가 혜강(嵇康)과 산양(山陽) 땅에서 절친하게 지냈는데, 혜강이 죽은 뒤에 그곳을 지나다가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옛 추억을 생각하며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49 向秀列傳》 이곤변이 살던 사천에 와서 그를 그리워 한다는 의미이다.[주-D017] 백인재(百忍齋) 이자거(李子擧) : 이곤변(李鯤變, 1551~?)으로, 자거는 그의 자이고, 백인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다. 구암 이정의 손자이다.[주-D018] 강주(江州)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 강주 마을이다.[주-D019] 진현(晉峴) : 현 경상남도 진주시 가좌동에 있는 진치령인 듯하다.[주-D020] 수곡(樹谷)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水谷面)이다.[주-D021] 송림(松林)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송림리이다.[주-D022] 중형(仲兄) : 성여효(成汝孝)이다. 임진왜란 때 향교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진양성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위판을 안은 채 죽었다.[주-D023] 곤양(昆陽)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이다.[주-D024] 갈건(葛巾)을 …… 마음을 : 갈건은 갈포로 만든 두건이다. 도잠(陶潛)의 〈음주(飮酒)〉에 “만일 다시 유쾌히 마시지 않는다면, 공연히 두상의 건을 저버리게 되리라.〔若復不快飮, 空負頭上巾.〕”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도잠은 항상 갈건(葛巾)을 쓰고 다니다가 술을 만나면 즉시 갈건을 벗어서 술을 걸러 마시고는 다시 그 갈건을 쓰곤 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그리고 《음주시(飮酒詩)》에 “동쪽 울타리 국화꽃 꺾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離下, 悠然見南山.〕”라고 한 구절이 있다.[주-D025] 강우주(姜遇周) : 조식의 문인인 만송(晩松) 강렴(姜濂, 1544~1606)의 맏아들로, 찰방을 지냈다.[주-D026] 강익주(姜翊周) : 자는 배중(棐仲), 호는 송은(松隱)이다. 조식의 문인인 만송(晩松) 강렴(姜濂, 1544~1606)의 셋째 아들이다.[주-D027] 봉계(鳳溪)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봉계리이다.[주-D028] 횡포(橫浦) : 현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이다.[주-D029] 황현(黃峴) : 황토재이다. 현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과 북천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길이다.[주-D030] 계동(桂洞) : 현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계동 마을이다.[주-D031] 하홍의(河弘毅) : 자는 중오(重吾)이다. 《덕천원생록(德川院生錄)》에 등재되어 있다.[주-D032] 진단(陳摶) : 송(宋)나라 박주(亳州) 진원(眞源)사람으로, 자는 도남(圖南)이다. 그가 화산(華山)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곡식도 먹지 않고 한 번 누우면 100일 동안 일어나지 않고 잤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列傳》[주-D033] 경장(瓊漿)을 …… 생기네 : 경장은 선인(仙人)의 음료이다. 당(唐)나라 때 배항(裵航)이 선녀인 운교부인(雲翹夫人)을 만났을 때, 운교부인이 배항에게 시(詩)를 주어 “경장을 한번 마시면 온갖 감정이 생기고, 현상을 다 찧고 나면 운영을 만나리라. 남교가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어찌 꼭 기구하게 옥경을 오르려 하나.〔一飮瓊漿百感生, 玄霜搗盡見雲英. 藍橋便是神仙窟, 何必崎嶇上玉京.〕”라고 하였다. 뒤에 배항이 남교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한 노구(老嫗)의 집에 들어가 물을 요구하자, 노구가 처녀 운영(雲英)을 시켜 물을 갖다 주었다. 그래서 배항이 그 물을 마시고는, 앞서 운교부인의 예언을 생각하여 운영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자, 노구가 “옥저구(玉杵臼)를 얻어 오면 들어 주겠다.” 하므로, 뒤에 배항이 옥저구를 얻어서 마침내 운영에게 장가들어 신선이 되어 갔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古今事文類聚前集 卷34 仙佛部》[주-D034] 부구(浮丘)의 …… 치는 : 세속을 떠나 신선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다는 말이다. 부구는 신선의 이름으로, ‘부구의 어깨를 친다’는 것은 《문선(文選)》 〈유선시(遊仙詩)〉에 “왼쪽으로는 부구의 소매를 당기고, 오른쪽으로는 홍애의 어깨를 친다.〔左挹浮邱袖, 右拍洪厓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35] 유후(留侯) : 한(漢)나라 개국 공신 장량(張良)의 봉호(封號)이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의 신발을 흙다리 밑에서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고, 한 고조(漢高祖)의 작전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뒤에 유후의 봉작을 받고 나서 “바라건대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신선인 적송자를 따라 노닐고 싶다.〔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遊耳.〕”라고 말하고는 벽곡(辟穀)과 도인(導引)의 술법을 행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55 留侯世家》[주-D036] 손유경(孫裕卿) : 손작(孫綽, 1577~?)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경, 호는 완매당(玩梅堂)이다. 부친은 직장(直長) 손경례(孫景禮)이다. 하항(河沆)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5) 진사가 되었다.[주-D037] 석문(石門) : 쌍계석문(雙磎石門)을 가리킨다.[주-D038] 흥룡(興龍) : 현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흥룡 마을이다.[주-D039] 신선 세계 : 원문의 ‘호중(壺中)’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를 뜻한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선인(仙人) 호공(壺公)의 총애를 받아 그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선경인 별천지(別天地)가 펼쳐져 있었다 한다. 《後漢書 卷72下 費長房列傳》[주-D040] 지팡이가 …… 되리라 :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선인(仙人) 호공(壺公)을 따라 호리병 속의 별천지에 들어가자 옥당(玉堂)이 화려하고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가 그득하여 함께 술을 실컷 마셨다. 그가 돌아올 때에는 자기 집에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하자, 호공이 대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이것만 타면 저절로 집에 갈 수 있다.”라고 하므로, 비장방이 그 지팡이를 타고 조는 듯한 순간에 홀연히 집에 당도해서는 그 지팡이를 갈피(葛陂) 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보니, 그것이 금방 청룡으로 변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神仙傳 壺公》[주-D041] 군산(君山) : 군산은 중국 호남(湖南) 동정호(洞庭湖) 가운데에 있는 산 이름인데, 현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동정호 주변의 산인 듯하다.[주-D042] 강 장기(姜長鬐) : 강덕룡(姜德龍, 1560~1627)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중(汝中), 호는 매촌(梅村)이다. 성여신과 동서지간이다. 일찍이 무예를 익혀 정기룡(鄭起龍)ㆍ주몽룡(朱夢龍) 등과 함께 무용(武勇)으로 ‘삼룡(三龍)’으로 불렸다. 1583년(선조16) 무과에 급제하여 함창 현감, 장기 현감을 지냈다. 제1차 진주성전투 때 군기 관리를 맡아 왜병 격퇴에 공을 세웠고,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을 도와 성주(星州)의 화원현(花園縣), 고령(高靈)의 안림역(安林驛), 삼가(三嘉)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주-D043] 상강(湘江) : 중국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에 있는 상수(湘水)를 가리킨다.[주-D044] 악양(岳陽) : 중국 호남성 악양을 가리킨다. 동정호의 경치를 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예로부터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주-D045] 잠시 …… 나눠보니 : 원문의 ‘경개(傾蓋)’는 경개여고(傾蓋如故)의 준말로,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서로 마음이 맞아 옛날부터 사귀던 사이와 같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했지만 오랜 벗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白頭如新, 傾蓋如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46] 이준민(李俊民) : 1524~1590.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이다. 조식(曺植)의 자형인 이공량(李公亮)의 아들이다. 1549년(명종4)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 좌참찬 등을 지냈다.[주-D047] 도탄(陶灘)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던 여울이다. 정여창이 거처하며 학문을 강론하던 악양정(岳陽亭)과 추모하는 사당인 덕은사(德隱祠)가 있다.[주-D048] 이곳은 …… 아니겠는가 : 조식(曺植)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나오는 구절이다.[주-D049] 어관포(魚灌圃) : 어득강(魚得江, 1470~1550)으로,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순(子舜), 호는 자유(子游)ㆍ관포당(灌圃堂)ㆍ혼돈산인(渾沌山人)이다. 1492년(성종23)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곡강 군수(曲江郡守), 산음 현감 등 외관직을 거쳐 장령, 대사간 등을 지냈다. 진주에 은거하였다. 저술로 《동주집(東洲集)》이 있다.[주-D050] 원숭이와 학이 원망했고 : 남북조 때 제(齊)나라의 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혜장(蕙帳)이 텅비어 밤 학이 원망하고, 산인(山人)이 떠나감에 새벽 원숭이가 놀란다.〔蕙帳空兮夜鶴怨, 山人去兮曉猿驚.〕”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51] 하천주(河天澍) : 1540~?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해숙(解叔), 호는 신계(新溪)이다. 남명(南冥) 조식에게 배웠고, 후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공부했다.[주-D052] 응석사(凝石寺)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 집현산(集賢山) 기슭에 있는 절이다.[주-D053] 광제사(廣濟寺) : 현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광제산(廣濟山)에 있던 절이다.[주-D054] 단속사(斷俗寺)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었던 사찰이다.[주-D055] 덕산사(德山寺) : 현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에 있는 절이다. 신라 말기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여 덕산사(德山寺)라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59년에 중건되어 내원사(內院寺)라고 하여 오늘에 이른다.[주-D056] 초정(草亭) : 산천재(山天齋)를 가리킨다.[주-D057] 번천동(樊川洞) : 현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反川里)를 가리킨다. 일명 ‘번내’라고도 한다.[주-D058] 어찌 …… 즐비한가 : 요동(遼東) 사람 정 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고 나서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을 찾아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華表柱) 위에 내려앉았는데, 소년 하나가 활을 쏘려고 하자 허공으로 날아올라 배회하면서 “옛날 정 영위가 한 마리 새가 되어,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이제 처음 돌아왔소.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모두 바뀌었나니,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 즐비한가.〔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탄식하고는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搜神後記 卷1》[주-D059] 늙은 …… 보았네 : 소식(蘇軾)의 〈주중청대인탄금(舟中聽大人彈琴)〉에 나오는 구절이다.[주-D060] 심약(沈約)의 …… 바람 : 심약은 남조(南朝) 양(梁)의 문학가이다. 심약이 동양 태수(東陽太守)로 부임하여 원창루(元暢樓)에 대해 팔영시(八詠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 “쌍계를 비추는 밝은 달, 팔영루에 부는 맑은 바람.〔明月雙溪水, 清風八詠樓.〕”이라고 하였다. 훗날 원창루는 팔영루로 이름을 고쳤다. 《天中記 卷14 樓》[주-D061] 젊은 …… 노니네 : 당(唐)나라 엄유(嚴維)의 〈송인입금화(送人入金華)〉에 “쌍계를 비추는 밝은 달, 팔영루에 부는 맑은 바람. 젊은 시절 나그네로 머물던 곳, 오늘은 그대들 떠나보내고 노니네.〔明月雙溪水, 清風八詠樓.少年為客處, 今日送君遊.〕”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62] 어관포(魚灌圃) : 어득강(魚得江, 1470~1550)으로,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순(子舜)ㆍ자유(子游), 호는 관포당(灌圃堂)ㆍ혼돈산인(渾沌山人)이다. 1492년(성종23)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곡강 군수(曲江郡守), 산음 현감 등 외관직을 거쳐 장령, 대사간 등을 지냈다. 진주에 은거하였다. 저술로 《동주집(東洲集)》이 있다.[주-D063] 황필(黃㻶) : 1464~1526. 본관은 덕산(德山), 자는 헌지(獻之), 호는 상정(橡亭)이다. 아버지는 황귀수(黃龜壽)이다.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웠다. 1486년(성종17) 약관의 나이로 생진과에 합격하였고, 1492년(성종23)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 교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의 난정이 심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저술로 《상정일고(橡亭逸稿)》가 있다.[주-D064] 절묘한 문장 : 원문의 ‘황견유부(黃絹幼婦)’는 매우 뛰어난 시문(詩文)을 뜻한다. 동한(東漢)의 채옹(蔡邕)이 유명한 조아비(曹娥碑)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라고 써 두었는데, 삼국 시대 조조(曹操)의 주부(主簿) 양수(楊脩)가 이를 보고 파자(破字)하여 “황견은 ‘색이 있는 실〔色絲〕’이므로 절(絶) 자가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므로 묘(妙) 자가 되고 외손은 ‘딸의 아들〔女子〕’이므로 호(好) 자가 되고 제구〔虀臼〕는 ‘매운 것을 받아들이는〔受辛〕’ 것이므로 사(辭)가 된다. 따라서 ‘절묘호사(絶妙好辭)’ 즉 절묘한 좋은 글이란 뜻이 된다.”라고 풀이하였다. 《世說新語 捷悟》[주-D065] 시집에 보인다 : 《부사집》 권2 〈쌍계사팔영루감구음(雙磎寺八詠樓感舊吟)〉이 실려 있다.[주-D066] 삼청(三淸) : 도교(道敎)의 이른바 삼동교주(三洞敎主)가 거처하는 최고의 선경(仙境)이다. 삼청경(三淸境)의 준말로,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을 말한다.[주-D067] 남태형(南泰亨) :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길(元吉)이다. 진주의 진성리(晉城里)에 거주하였다.[주-D068] 하위보(河魏寶) : 1527~? 본관은 진주, 자는 미재(美哉)이다. 진주 단목(丹牧)에 살았다. 1558년(명종13) 생원시에 합격하였다.[주-D069] 하진보(河晉寶) : 1530~1585.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재(德哉),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1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병조 좌랑, 장령, 선산 부사, 밀양 부사, 김해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주-D070] 김대명(金大鳴) : 1536~1603. 본관은 울주(蔚州), 자는 성원(聲遠), 호는 백암(白巖)이다. 1558년(명종13) 생원이 되고, 1570년(선조3) 식년 문과에 장원하여 도사(都事)를 거쳐 풍기 군수, 봉산 군수, 괴산 군수 등을 지냈다.[주-D071] 정대함(鄭大咸) : 자는 희선(希善)이다. 1570년(선조3) 진사가 되었다.[주-D072] 공인박(孔仁博) : 자는 여약(汝約)이며, 현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모곡(茅谷) 마을에 거주하였다.[주-D073] 이인민(李仁民) :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원(子元),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이준민(李俊民)의 아우이다.[주-D074] 부사소선(浮査少仙) …… 적벽시선(赤壁詩仙) : 부사소선은 성여신(成汝信)이고, 옥봉취선은 정대순(鄭大淳)이고, 봉대비선은 강민효(姜敏孝)이고, 능허보선은 박민(朴敏)이고, 동정적선은 이중훈(李重訓)이고, 죽림주선은 성박(成鑮)이고, 매촌낭선은 문홍운(文弘運)이고, 적벽시선은 성순(成錞)이다.[주-D075] 남명 …… 기롱하였으니 :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史官)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혀질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 버린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찌 알겠는가? 두예(杜預)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속에 가라 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주-D076] 꿈 …… 않는다 : 《부사집》에는 이 꿈에 관한 글이 없다.[주-D077] 낭풍(閬風) : 신선 세계를 말한다.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의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주-D078] 광성자(廣成子) : 중국 상고 때의 선인(仙人)이다. 공동산(崆峒山) 석실에 은거했는데, 황제(黃帝)가 찾아가서 도를 물었다고 한다. 《莊子 在宥》[주-D079] 왼쪽엔 …… 부구(浮丘)이고 : 신선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다. 홍애(洪崖)와 부구는 고대 전설 속의 신선이다. 곽박(郭璞)의 〈유선시(遊仙詩)〉에 “왼손으로 부구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오른손으로 홍애의 어깨를 어루만진다.〔左挹浮丘袖, 右拍洪崖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80] 적송자(赤松子) : 고대 전설상의 신선이다.[주-D081] 정군(鄭君) : 정희숙을 가리키는 듯하다.[주-D082] 흥공(興公) : 진(晉)나라 손작(孫綽)의 자이다.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었다.[주-D083] 벗에게 …… 것이네 : 훌륭한 글을 말한다. 손작(孫綽)이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를 지어 그의 벗 범영기(范榮期)에게 보이면서, “경은 땅에 던져 보시오. 금석 소리가 날 것이오.〔卿試擲地. 當作金石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孫綽傳》[주-D084] 성명(姓名)을 …… 것입니다 : 손유경(孫裕卿)의 이름은 ‘작(綽)’이고, 유경은 그의 자이다. 진(晉)나라 손작과 성명이 똑같기 때문에 한 말이다.[주-D085] 요지(瑤池) :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다는 신화 속의 못 이름인데,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주 목왕(周穆王)을 영접하여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穆天子傳 卷3 古文》[주-D086] 기수(琪樹) : 구슬을 드리우고 있다는 선경(仙境)의 옥수(玉樹)이다.[주-D087] 임궁(琳宮) : 신선이 거처하는 곳인데, 여기서는 신응사 절을 가리킨다.[주-D088] 호계(虎溪) : 중국 강서성 구강현 여산의 동림사(東林寺) 앞에 흐르는 시내의 이름이다.[주-D089] 영은사(靈隱寺) : 중국 절강성(浙江省) 황주 서호 가에 있는 절이다.[주-D090] 청허당(淸虛堂) : 서산대사 휴정(休靜)이다. 청허당은 그의 법호이다.[주-D091] 을축년 : 1565년(명종20)을 가리킨다. 이해 가을에 성여신은 쌍계사에 와서 독서하였다.[주-D092] 호계(虎溪) : 중국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개울 이름이다. 혜원이 손님을 전송할 때 호계를 절대로 건너지 않았는데,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할 때에는 서로들 뜻이 맞아 무심코 호계를 건너 버렸으므로,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주-D093] 평사(平沙) : 현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이다.[주-D094] 손 상사(孫上舍) : 손유경을 가리킨다.[주-D095] 소촌 찰방(召村察訪) : 찰방은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관직이다. 소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진주의 동쪽 24리에 있었다고 한다. 현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소촌리 문산초등학교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주-D096] 정윤목(鄭允穆) : 1571~1629.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ㆍ노곡(蘆谷)ㆍ죽창거사(竹窻居士)이다. 아버지는 정탁(鄭琢)이다. 정구(鄭逑)ㆍ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술로 《청풍자집》이 있다.[주-D097] 시집에 보인다 : 《부사집》 권1 〈두류귀로우정찰방윤목음증일절(頭流歸路遇鄭察訪允穆吟贈一絶)〉을 가리킨다.[주-D098] 원운(原韻) …… 있다 : 《부사집》 권1 〈두류귀로우정찰방윤목음증일절(頭流歸路遇鄭察訪允穆吟贈一絶)〉 아래에 차운시가 붙어 있다.[주-D099] 문자음(文字飮) : 술을 마시면서 시문을 짓고 담론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시 한 수를 짓고 술 한 잔을 마시는 놀이를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취증장비서(醉贈張秘書)〉에 “장안의 여러 부호의 자식들은, 비린 고기와 훈채를 가득 벌여 놓고, 문자를 논하며 마실 줄은 모르고, 오직 기생에 취할 줄만 아는구나.〔長安衆富兒, 盤饌羅羶葷, 不解文字飮, 唯能醉紅裙.〕”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100] 동빈(洞賓)이 …… 때 : 동빈은 8선(仙)의 하나로 불리는 당(唐)나라 여암(呂巖)의 자(字)이다. 그의 시에 “악양루에서 세 번 취하여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맑게 읊조리며 동정호를 날아 지나네.〔三醉岳陽人不識, 朗吟飛過洞庭湖.〕”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101] 청사검(靑蛇劍) : 보검의 이름이다.[주-D102] 세한(歲寒)의 마음 : 의지를 굳게 가져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주-D103] 하중오(河重吾) : 하홍의(河弘毅)로, 중오는 그의 자이다.[주-D104] 대야천(大也川) : 현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지역이다.[주-D105] 동곡(桐谷) :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 있는 동곡 마을이다.[주-D106] 조여헌(趙汝獻) : 조경(趙璟, 1563~?)으로, 여헌은 그의 자이다.[주-D107] 곤산(昆山)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의 옛 이름이다.[주-D108] 후방(後方) :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를 가리키는 듯하다.[주-D109] 원당(元堂)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내리 원당 마을이다.[주-D110] 곤명(昆明) : 현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이다.[주-D111] 약동(藥洞)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주약동 약골 마을이다.[주-D112] 구름 …… 개 :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한다.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임종할 때 먹고 남은 단약 그릇을 뜰에 놓아두었다. 이에 그 집의 닭과 개가 핥아먹고 모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천상에서 닭이 울고 구름 속에서 개가 짖었다.〔犬吠于天上, 鷄鳴于雲中.〕”라고 하였다. 《神仙傳 劉安》[주-D113] 수우당(守愚堂) :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이 거처하던 곳으로, 진주 도동촌(道洞村)에 있었다.[주-D114] 황류탄(黃柳灘)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송백리에 있던 황류진(黃柳津) 앞 여울인 듯하다.[주-D115] 곤붕(鵾鵬)이 …… 것 : 북명(北溟)에 길이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큰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이 곤(鯤)이다. 이 곤이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이 붕(鵬)이다. 이 새가 남명(南溟)으로 옮기려면 물 위를 3천 리를 치고 달리다가 날아올라 6개월 동안 9만 리를 날아가 쉬게 된다. 《莊子 逍遙遊》[주-D116] 자고(鷓鴣)가 …… 것 : 자고는 꿩과에 속하는 메추라기 비슷한 새로, 따뜻한 남쪽 지방에만 산다고 한다. 진(晉)나라 좌사(左思)의 〈오도부(吳都賦)〉에 “자고새는 남쪽으로 날아가 그 속에 그냥 머물고, 공작새는 오색 날개 펼치고서 높이 날아 올라간다.〔鷓鴣南翥而中留, 孔雀綷羽以翶翔.〕”라는 말이 있는데, 그 주(註)에 “자고새는 항상 남쪽으로 날지 북쪽으로는 날지 않는다.”라고 하였다.[주-D117] 명도 선생(明道先生) : 북송(北宋) 때의 학자 정호(程顥)로, 자는 백순(伯淳)이고, 호는 명도이다.[주-D118] 옷소매의 …… 나오랴 : 시 제목은 〈하산우성(下山偶成)〉이다. 인용된 시가 《이정문집(二程文集)》의 원문과 달라 전문을 싣는다. “襟裾三日絶塵埃, 欲上籃輿首重迴. 不是吾儒本經濟, 等閒爭肯出山來.”[주-D119] 회암 선생(晦庵先生) : 남송(南宋) 때의 유학자 주희(朱熹)로, 자는 원회(元晦)이고, 호는 회암이다.[주-D120] 유유히 …… 편안하리 : 〈재거감흥이십수(齋居感興二十首)〉중 열다섯 번째 시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飄飄學仙侣, 遺世在雲山. 盜啓元命祕, 竊當生死關. 金鼎蟠龍虎, 三年養神丹. 刀圭一入口, 白日生羽翰. 我欲徃從之, 脱屣謀非難. 但恐逆天道, 偷生詎能安?”[주-D121] 이삼성(李三省) : 1564~1624.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희성(希聖), 호는 구암(耈巖)이다. 아버지는 직장 이춘란(李春蘭)이다. 1599년(선조32) 별시에 을과로 합격하여 형조 좌랑, 울산 판관 등을 지냈다.[주-D122] 칠송정(七松亭) : 현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水谷面) 원계리(元溪里)에 있던 정자이다. 조정(趙珵)이 세운 것이다.[주-D123] 광탄(廣灘) : 덕천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주-D124] 도인술(導引術) :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으로, 몸과 수족을 굴신(屈伸)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주-D125] 사마휘(司馬徽) : 삼국 시대 촉(蜀)나라 사람으로, 자는 덕조(德操), 호는 수경(水鏡)이다. 제갈량(諸葛亮), 방통(龐統)과 교유하며 은거하였다.[주-D126] 장자방(張子房) : 한(漢)나라 개국공신인 장량(張良)으로, 자방은 그의 자이고, 유후(留侯)는 그의 봉호(封號)다. 장량이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의 신발을 흙다리 밑에서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고, 한 고조(漢高祖)의 작전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뒤에 유후의 봉작을 받고 나서 “바라건대 인간 세상의 일을 버리고 신선인 적송자를 따라 노닐고 싶다.〔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遊耳.〕”라고 말하고는 벽곡(辟穀)과 도인(導引)의 술법을 행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55 留侯世家》[주-D127] 소하(蕭何)가 …… 것 : 소하는 한 고조(漢高祖)의 참모로, 한나라를 개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소하는 묘성(昴星)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라고 하였다.[주-D128] 부열(傅說)이 …… 것 :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훌륭한 정승이다. 부열이 죽은 뒤에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타고 하늘에 올라 별이 되었다고 한다. 《莊子 大宗師》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정현섭 김익재 (공역) | 2015
浮査集 卷五 / 雜著、疑 / 方丈山仙遊日記
萬曆丙辰秋,浮査野翁,將遊頭流,約與同之者,玉峯鄭熙叔、凌虛朴行遠、梅村文汝幹,而從之者,鑮也、錞也,聞風而興起者,鳳鶴臺姜士順、洞庭湖李謹之,其人也。
九月二十四日,辛卯。翁由浮査亭,啓行款段一、髫童一、竹一杖、芒一鞋、詩一卷,紙硯筆墨之具、衣衾枕席之類,共載梅村之卜馬。梅村蒼一連臂,黃四足,牽騎駁卜驢,而帶率三奴。錞先往行遠家,相待,鑮明發浮査,期會於樂天窩。翁與汝幹,偕往泗川,以汝幹爲其孼叔文勃,有所事於龜巖洞,故也。
路出嘉坊,徑劍湖,渡伊川,歷鼎村,至官栗堤下。下馬坐溪上,觀放鷹。仍抵龜巖,見李次一,謁祠宇。投宿于河奉事永堅之草亭,河君迎而入待之款。時菊花方盛開,廳上及房中,咸置花盆,香氣襲人。明燈酌酒,歡洽而止。李魚變、李次一來見而去,文勃亦偕焉。
二十五日。壬辰,金大成、尹芳來見。李次一携酒來。壁上有題詠,主人請和之,遂次其韻曰:“身爲天地一閒人,到處溪山入眼新。醉殺東城無限酒,頹然倒着白綸巾。” 【諸公詩多,不盡記。後倣此。】 又吟五言絶句,贈李次一。“東城秋日暮,白髮對黃花。把酒還添恨,山陽舊意多。” 吁!次一,乃亡友百忍齋李上舍子擧,庶子也。百忍無適嗣,次一幹其家。今到門前,舊宅荒涼,祠宇獨立,樹老村虛,落葉滿溪。徘徊瞻眺,頗有感舊之意也。
食後,過江州,至晉峴,逢驟雨。抵行遠家,行遠往李淸慰筵,未還,惟錞在。夕行遠來,同宿樂天窩,贈主人一絶。“心事休休學古人,一堂簪盍摠情親。始知良性無矯餙,散植黃花却任眞。”
二十六日,癸巳。發自樂天窩,五人同行。總角姜以源願從,許之。到樹谷,訪姜士順,士順又願從,許之。以明朝佩酒到松林爲約,贈主人一絶曰:“爲訪故人來,東籬菊正開。明有松林約,君須無負哉。” ○馳入松林,宿於柳景祉茅亭。景祉有弟景禛,乃吾仲氏之壻也。不幸早世,其妻成氏,寡居率育孤幼三人,曰枝億、枝萬、枝千。枝萬學書於我,故方在浮査亭,枝億、枝千在矣。吾三父子及朴行遠,先投其家,敍話,喫夕飯,仍同宿於西家草亭。昆陽道上,吟二絶句曰:“我是寰中人,初非物外人。秋風動高興,將作學仙人。” “昆山西畔有松林,林下長楊翠影深。始知陶潛門外植,葛巾空負掇英心。”
二十七日,甲午。隣人姜遇周、姜翊周、鄭之悌、姜東立等,來見,姜士順亦來到及之。朝飯後,發過鳳溪,到麥洞村前,風聲怒號,日色寒凜,欲入村家安頓,而前日發行時,致書於鄭熙叔,有橫浦同宿之約,故排風抗寒而西。
未至黃峴,望見自北而來者,黃駁其馬御者三奴,相與揮手以應之,然後知鄭行之無疑。遂定還入麥洞之約,使朴奴命生,迎于路上,使之邀來。吾等下馬,負暄坐以待矣。命生還報曰:“彼行幾至嶺腰,聞吾聲,還下十餘步,答之曰:‘鞭駑上高,更爲下來,非計也。故今方越嶺,相待於橫浦村家云矣。’” 吾等相謂曰:“彼已知吾等之來,吾等亦知彼之來。兩不失期,不亦樂乎?然日氣甚寒,若帶狂風,越峻嶺,寒疾可畏。莫若入前村止宿,而明日發行也。” 僉曰:“諾。”
二十八日,乙未。朝甚寒,不得早動。朝飯後,發逾黃峴,過橫浦,不知熙叔所在。過公突院,尋桂洞,到河弘毅之家,熙叔先已在此矣。欣然相對,黃眉可知熙叔。皺眉謂余曰:“曩者得寒疾,幾不能支吾,故家人止之,余乃絶袖而來。”云。余笑而謂之曰:“子眞信士也。吾等之行,以仙遊目之,而皆號以仙。君亦得稱仙字,則塵間俗病,自然去矣。” 熙叔曰:“言則好矣,吾病不瘳,則恐不能如所約也。然得見好人,得聞好言,吾病已歇矣。”
於是相與論,作一絶韻,贈余一行,余次曰:“一身已潦倒,百計入長嗟。拂袖尋眞路,佳期喜不差。” 日暮,余與行遠,同宿矣。夜將半,翁之奴肅男,呼聲甚急,問之則曰:“馬病而臥不起。”云。鑮與士順,往見,馬患鼻病,幾不能救。士順略知醫馬之法,針其鼻端及尾肉。須臾,自起吃草,其病永瘳。
然翁在他家睡美,不能知。及朝聞之,致謝於士順曰:“公之手,能醫於馬,而己病與人病,不能醫,君之手,能於馬,而不能於人與已歟。翁之睡,不聞奴之呼聲,不知友之救馬,翁之睡,可適於陳摶歟。” 相與大噱。
二十九日,丙申。朝還聚河君草亭。各問氣味何如,僉曰:“安矣。” 汝幹曰:“今夜渴證太甚,倘無導水人,難矣。”云。此所謂“一飮瓊漿百感生”者也。俄而熙叔來。僉問夜來證候何如,熙叔曰:“痰盛倍前,似不能隨群入山。” 遂吟一絶。僉君皆料熙叔病不能從,各有缺然之懷。咸次其韻,余詩曰:“仙區底處有仙樓?擬拍浮丘辦勝遊。何事留侯徑謝病?玉簫空負鶴巖秋。”
別熙叔,馳向蟾江,到孫裕卿亭舍。裕卿不來而守亭奴畢同,在矣。問其主消息,則不知云。畢同進秋露,僉君各飮三四杯。裁書令畢同,急傳於其主。其書曰:“査仙致招書,玉峯傳好音,君若不聞。然塵臼中,心事可知。行到蟾亭,畢同進秋露,奴勝主耶?主勝奴耶?今晦,追到於石門。而石門如不及,留待湖亭,幸甚。” 亭上作一絶曰:“高亭瀟灑俯澄湖,湖、嶺中間別一區。數曲纖歌留遠客,依微山翠有而無。”
午後,江風漸高,雲勢甚頑。馳向興龍,中路逢雪,投入村舍。須臾雲霽,馳入興龍河應一家。新作瓦家,有高樓,有溫堗,堗甚恢。鄭熙叔病少間,追到焉。余詩曰:“軒臨靑草岸,門對白雲峯。一宿壺中去,應看杖化龍。”
三十日,丁酉。隣翁李蕙、金淑男等,佩酒來見。李善着棋,汝幹再戰再北。朝飯後,發到君山前,望見鍤巖頭,張幕而坐者,謂必是李謫仙謹之也。及到鍤巖,則非謹之也,乃李祥也。祥武人,中癸未別擧,與姜長鬐同年者也。聞吾等至,爲設酒肴來待之。酒兩鐏、肴六笥,水陸山海之味,無不有飮未盡。日已晩,促觴而行。詠鍤巖舊跡。【韓錄事諱惟漢,麗季人,見麗室將亂,來隱此山中,卜居鍤巖上。後以大悲院錄事徵之,書一句於壁曰:“一片絲綸來入洞,始知名字落人間。” 遂踰墻而走,不知所之。】 “訪古騷人雪滿頭,來登先哲舊林丘。天連上下猶湘浦,地坼東南似岳州。遯世淸標靑嶂立,踰墻高躅白雲浮。一聲長笛江山老,籚荻花飛入晩秋。”
時觴放未半,有一人出舊花開,過岳陽縣,經平沙驛,掠君山而來者。望之不知誰何,迨傾蓋,則乃李謹之也。謹之名重訓,故李相國俊民之猶子。家在京城,不向朱門,求來入碧山,棲其中。可知曾於桂洞,已結同遊之約,故佩酒而來。與之飮,飮旣,發向陶灘。【鄭先生諱汝昌,燕山朝,卜居陶灘上。其後以佔畢齋門人,罹戊午禍。南冥先生所謂“此去鍤巖十里地。明哲之幸不幸,豈非命耶?” 魚灌圃詩曰:“竹林半掩鄭公廬,想得當時卜永居。正坐中年猿鶴怨,老來不食此江魚。”】 過陶灘時,有吟曰:“鄭先生是儒林匠,晩卜幽貞溪水西。落日停驂傷往事,雲容水色共悽悽。” 遂發行,到柯亭,日已沒矣。
至斷橋邊,上下村人,束炬出迎,擧火者,幾二十餘人。前在興龍時,令河應一、崔屺,主管一路人馬供饋等事。故河、崔兩君,預通村人,使之明火出候也。斷橋,卽雙溪、神凝、七佛三洞之水,合流而下者也。川廣石險,舊橋今毁,故曰“斷橋” 上下人馬,咸得利涉,無一顚躓者,無非明火所致。兩君可謂勤幹,而村人之良善,亦可想矣。
渡花開縣前川,抵石門前,則雙磎寺首僧三寶等僧,出迎之。至八詠樓,寺僧多出來。下馬於邀鶴樓前,登樓列坐,寺僧明燈設筵,叉手以勞之,饗以胡椒茶、圓紅杮、獼猴桃、海松子等果。仍喫夕飯。作四韻一篇,詩曰:“柯亭道上帶微醺,尋到仙區野色昏。束火渡橋危石露,攝衣登閣暮鐘聞。煙霞縹緲三神洞,苔蘚微茫四字門。欲泝仙源何處是?香爐峯上喚孤雲。”
十月一日,戊戌。旭日初昇,綺疏瑩朗,出邀鶴樓,危欄聳空眩亂。徙倚旋入法堂,蜂房窈窕,丹碧耀目。先尋蓬萊殿,古有溫突,今爲空殿,經板藏其中。是査翁昔日讀書處。
往在乙丑秋,携姜得熙文卿,來棲焉,冬十一月,柳大鳴而遠、姜儉希約、河朝宗達源等,亦來棲,丙寅,正月之晦,各散焉。
又於丁卯秋,與崔舜欽汝一、權世仁景初、柳璋汝玉、河天澍解叔等,步自凝石寺,歷探廣濟、斷俗、德山等寺,欲謁南冥先生,先生往金海,未拜。溪上有草亭,亭之柱,有先生手題一絶曰:“請看千石鍾,非大叩無聲。爭似頭流山,天鳴猶不嗚?” 吾等初未識其意,撫翫沈吟,良久,乃得小寤。仍竊相嘆曰:“先生儀形,雖未得拜,先生力量,憑此可想,豈非今行之一大幸乎?” 遂散步於桃川上 【卽今書院基也。】,仍過樊列洞,越宿默菴,踰雪峯,宿佛日菴。下雙磎,讀三冬史,翌年春,出山焉。
噫!乙丑、丁卯等年,已過五十歲,而當日同遊人,皆不在,世所謂“何不學仙塚纍纍”者也。亂離百戰,寺刹皆入灰燼,而今乃新營,翁獨重來而訪舊,所謂“老仙不死閱興亡”者也。
又入瀛州閣。閣在法堂後,常稱東方丈、西方丈者,卽古之王泉寺。余嘗聞老僧之言,古無“雙磎”之名。崔致遠來棲玉泉寺,與眞鑑爲道友。以此地有雙磎之流,書“雙溪石門”四字於巖石。其後寺僧作巨刹於前,而名之曰“雙磎寺”,以玉泉爲東西方丈。寺之有“雙磎”名,始此。
其後,又作八詠樓者,取沈約詩,“明月雙磎寺,淸風八詠樓。”之意。翁之今日來遊,“少年爲客處,今日送君遊”者也。樓則寺僧仲暹所建,題詠則魚灌圃首題,續和諸賢,唯記黃㻶而忘其餘。扁額則僧靈芝所書云。
午,與諸友徘徊於頹砌之邊,令卞生吹笛以遊之。適李昌原奴一元者,持酒而到,諸君皆酬飮之。碑殿門外,有石碑,乃崔孤雲所撰而所書者也。爲眞鑑禪師而作,黃絹幼婦,間有難解處,銀鉤玉索,字字有精神,有氣力,摩挲可愛。余作感舊遊一篇 【見詩集】,又次過客 【奇相自獻】 韻曰:“可笑鷗翁山水癖,頭流半世幾來來?驂鸞欲向三淸去,駕鶴何人共我廻?” 有一衲曰寶心,進詩軸,皆一代名卿所題。晉陽人南鄕長【泰亨】 、河生員【魏寶】 、河密陽【晉寶】 、金鳳山【大鳴】 、鄭進士【大咸】 、孔生員【仁博】 、李竹院【仁民】 所贈。斯人皆已下世,而遺詩遺墨,宛然如昨,良可悲夫。
遂題八仙于邀鶴樓壁上曰“浮査少仙”、“玉峯醉仙”、“鳳臺飛仙”、“凌虛步仙”、“洞庭謫仙”、“竹林酒仙”、“梅村浪仙”、“赤壁詩仙”。又添二仙曰“龍潭睡仙”,卽河應一也,“鶴洞後仙”,卽崔圮也。以姜以元爲搗藥兒,以鄭時特爲鍊丹童。書之者,鑮其筆也。
二日,己亥。日氣和姸,可愜探討。諸君皆有尋鶴洞計,令寺僧辦藍輿四。僧曰:“有藍輿四座,可無憂。” 諸君喜之。然老者、病者乘之,四仙不得乘。蓋浮査之老、玉峯之病、洞庭之肥,皆不得步,故推以與之。唯一輿餘,而凌虛年多於梅村,梅村足重於凌虛,二人爭之。余於是爲遞乘之約,使一人先乘,過二十餘步,下而休之,又一人乘之至。如此遞乘,則可無徒步之勞。
遂定尋眞之遊,食後,出自瀛洲閣東門。令寶心爲前導。四藍輿分占而行,年少僧十餘名,相遞而擔。諸君或步或憇。至數十步許,有一巨石,刻曰“乙丑秋。李彦憬、洪淵” 蓋遊覽之際,鑱諸不朽,欲傳永久者也。南冥先生遊山錄,已譏之矣,何敢復爲之言乎?
又至十餘步,止輿而下,或藉紅葉而坐地,或傍綠苔而倚石。令㒒僮上木末,摘猴桃,諸君皆噉之,其味甘香。猴桃俗所謂“月羅”也。其實受霜而熟,懸於其蔓,擺其木梢,則熟者自落。人爭拾之,多者至於傾筐。又有金梨紅杮,自落而埋在葉中者,披其葉則多積焉。僮子等爭拾食之,至於厭飫,則相投以爲戱。
令笛奴二人,前導之,徐徐焉緩緩焉。日未午,已到毗盧峰北,鶴巖在其南,棧道經其東,捨藍輿而徒步焉。是査翁,甲寅秋,夢到之地。夢說詳在敍中,故此不云云。巖腰路絶處,斫木橫之,其下億萬丈,自非辦命者,不得晏然而過經。投翫瀑臺松樹下,列坐而休憩焉。臺臨百尺,東有瀑布,有流過臺前,故謂之翫瀑。瀑之流下而爲鶴淵,鶴淵之下,有龍湫。臺之下,有線路,攀緣直下,括剔苔封,則“三仙洞”三字,刊在石面,而非輕身傑脚者,不得尋矣。
俄入佛日菴,菴空而塵滿室。梅村吟一句曰:“鶴去巢松老,僧歸古寺空。” 浮査足之曰:“尋眞他日夢,應在此山中。” 遂書于壁。
俄而欲上香爐峰,鑮挽衣止之曰:“吾等遊於峯上,坐此觀之,亦一好事。危峯願勿升焉。” 余拂衣而起曰:“汝父年未百歲,烏得不上香爐乎?” 於是策烏竹杖,繫芒鞵,與諸君魚貫而上。三息而到峯頭古靈臺。僧信暹持棗椒茶一灌,先在峯頭矣。各進數椀,又以紅杮猴桃等果,盈笥饋之,喉渴自解。峯之高,如削立。諸君列坐而或枕松根,羅立而或挽松梢。飄然若登閬風而近帝居,上崆峒而訪廣成矣。遂作《仙遊辭》一章曰:“山矗矗兮攢碧,水冷冷兮下綠。有仙曹芳抉聯,八飯靑精兮杖綠玉。踞虎豹兮登虯龍,驂紫鸞兮控白鶴。左洪崖兮右浮丘,喚孤雲兮問眞訣。挽赤松兮弄紫簫,頭邊咫尺兮玉皇攸宅。”
三日,庚子。日氣又和。食後,發向神凝,抵石門邊,下馬遊覽。有兩大石,峙立東西,西曰“雙磎”,東曰“石門”。字字大如鹿脛,刻入石骨,宛如昨書。人由兩石間行,故曰“石門”。石門邊,築石爲臺,莎草如茵。長松屹立,白石齒齒,碧苔班斕。一溪流自鶴洞來,渟滀爲澄潭。潭上一石,刻“晉州”二字,不知何年代而何人筆也。
孫裕卿致伻書。余答曰:“卽承華札,細陳顚末。知君信義異凡,慰謝曷堪?送書不定其期者,路由西村,君必聞之。故只報仙遊消息而已。豈料君徒信路傳,而不問於鄭君也哉?昔者興公不踏天台赤城,而圖畫作賦。徒使“擲地金聲”,千古流傳。君之不及仙行,必爲姓名所祟。而所寄八章之詩,應與《天台賦》,幷傳於世也。昨上香爐,今入神凝。明可乘竹葉泊蟾江,君其遲之。許多仙興詩,旣不能盡書可傳乎。不宣謹復。”
又有詩曰:“路入桃源別有天,雲煙鎖齗洞門邊。塵間消息誰傳我?報道漁郞繫釣船。” 仍過花開舊縣前,迫垂虹橋。舊有水閣,今毁矣。神凝寺僧太能等五六,來迎之。皆下馬,渡獨木橋,橋頭有水砧。抵沙門。古有凌波閣,壬癸之變,爲賊所焚,只存遺礎。
直入法堂,則昔之空殿,今爲溫突。觚棱逼雲,金碧耀目。中可容數百人。地界深邃,人間逈隔,怳若身到瑤池上,親見玉皇家者然。旋出法堂後,環坐琪樹下,周視山勢,衆峯遶匝,二溪流合,琳宮輝煥,俯壓波心,可謂蘭若之奇絶處。不知廬山中虎溪,西湖上靈隱,亦如此否。
又步出沙門,緣溪而上一里許,坐於綠磻巖邊。長松一株,獨立巖畔。倚其松,通望上下,則葉脫而山容淡瘦、水落而溪石露形。噴珠嗚玉,漏雲穿山,邈不知仙源之所從來也。水石之奇狀、遊賞之雅趣,先賢所錄,極盡而無餘蘊,荒拙一筆,安得形容其萬一?但亂離之後,山河依舊,而樓閣盡毁,英雄鳥過,古事雲消,徘徊瞻眺,烏得無懷?
寺之西,又有一菴,名曰“社堂”。昔余與友,來棲此寺,愛其幽靜,仍留數月。前有鉅竹千挺,影搖軒窓。門外有廣石,石邊有冬栢一樹,翠葉紅英,掩映門外。問於寺僧,則其寺猶在云。而日暮,未得尋。還入法堂,連枕而宿。昏明燈敍話。寺僧太能,投進二絶句,余次其韻曰:“觀水觀山是我能,談玄談寂又何能?渠家自有眞如法,爲問太能能不能?” “淸虛堂老曾相見,此地論文乙丑年。今日逢師談舊事,淸詩照眼百餘篇。”
四日,辛丑。狂風轉海,萬木鳴山。日氣凜烈,重裘失暖。欲留不發,而上下人馬,凡三十餘口,桂玉之資甚難,而已與徐都將,有艤船洞庭之約,孫裕卿又致書曰:“日近初八,潮信不長,莫若束出。”云。故食後,衝寒强出。出門時,次孫裕卿韻一絶曰:“笑別廬山一柱門,擡頭黯倚虎溪雲。遙知山外風波急,誰繫蘭舟擁綠鐏?”
馬上口占三絶,押九橋字曰:“落花流水舊虹橋,今日胡爲一木橋?春風擬入天台路,誰復看余渡石橋。” 【右渡一木橋】 “懶鞭贏馬過溪橋,紅葉颼颼亂颭橋。遇景沈吟肩自聳,傍人錯比浩然橋。” 【右過石門橋】 “山日依微照斷橋,詩人何處泊楓橋?江天漁火無窮興,知在蟾津湖上橋。” 【右渡花開橋】
到柯亭村前,村人張幕邀入,餉午飯。盤餖約而潔,多滋味。辦之者,智貴其名,湖南富人羅致里外孫云。德川典穀孫得詮來見,携宿平沙。午過陶灘,至鍤巖,則風氣益烈,江船又不得逆風而上。所期孫上舍、徐都將,不能刺船以上,留在蟾江云。吾等馳入平沙驛村家,安頓焉。對酒有詩曰:“朝出花開洞,江風晩更尖。斜陽投古驛,閒坐待波恬。” 向夕,召村察訪鄭允穆,來宿隣家。
五日,壬寅。風殘日朗,天氣和暢,正合乘舟。促朝食。聞召村亦欲遊覽頭流,投贈一絶。【見詩集】召村將發而見詩,卽來見,敍話小間而去,和送之。【附原韻下】
食後,馳向興龍村。村前設帳幕,羅酒肴以候之者,尹固城三樂、李蕙、金淑男等也。尹固城行酒畢,李蕙行酒將半,舟人來控曰:“孫進士繫舟前灘,以待僉行。而午潮漸落,淺灘在前,若緩解纜,定難行舟。”云。於是輟酒肴,携向船頭。頭上所揷黃花,猶未拔去。孫子具鼓笛歌兒舞客而來。繫三船於湖邊,送一船邀吾等以乘之。吾等爭上之,孫上舍倚船,而詠詩,徐落、成守命等,翩然而舞矣。
於是緣結三船,順流而東。纖波不興,江面鏡磨,兩邊山容,錦繡交雜。中江擧帆,帆影遲遲。一觴一詠,鼓笛爭聲,載歌載舞,觥籌無數。舟上吟一絶曰:“吟裏詩毫短,船頭舞袖長。斜陽無限興,都付故人觴。” 于時,夕陽在山,返照入江,蒼山倒影,遠林煙橫,蒼茫暮色,一筆難模。於是添酒籌,促歌鼓。
迫近江亭,日已昏矣。村人擧火,猶不泊洲,縱舟南下,到場邊渡頭而還,繫纜於亭下。固城携謫仙先下去,諸客亦皆各散。七仙與裕卿,回棹盪槳,良久乃下。
入江亭,明燈更酌。浮査約曰:“今日之遊,歡娛已洽,文字飮不可不爲。酒一巡,詩一篇,可乎。” 僉曰:“諾。” 於是設一杯盤,置于中,詩一篇,酒一巡。輪回往復,夜分始罷。余詩曰:“洞賓飛過洞庭潯,袖裏靑蛇幾浪吟?興入舟中歌笛響,詩成湖外鷺𪆁音。工夫不向名間沒,計較寧隨利上沈?此日仙遊非偶爾,謂君休負歲寒心。”
六日,癸卯。困睡晏起,盥濯精神。獨出湖亭,倚樹遊觀,則旭日初昇,湖天明媚,景致濃淡,一樣畵圖中。聞酒徒聚在畢同陋室中,崇酒瀝飮。作一絶以送曰:“嵐橫遠樹山顔靜,日上高峰鏡面紅。凡骨不知朝景勝,觥絃徑倒陋房中。”
於是酒徒裕卿、浪仙、酒仙等,驚倒出來,托以解醒,以謝不敏。又置盞盤於亭上,因爲酬飮,各步其韻。余又今一絶曰:“臺中有酒人先醉,湖上無風葉自飛。徙倚老査吟未了,群鷗又向水南歸。”
朝食後,各有辭歸之意。僉曰:“今之一遊,實非偶然。他日重遊,面定其期,可乎。” 於是令浪仙製約文曰:“鶴洞仙遊,淸興未足。秋難再擧,春以爲期,約於明年暮春之望,重會此地。令孫裕卿,行後仙禮,主辦船遊之具、管絃之盛,無不備擧云云。”
謫仙與浪仙,向岳陽,裕卿留江亭,少仙、醉仙、飛仙、步仙、酒仙、詩仙,聯鏕而來。踰牛峴,越霞川,至公突院溪上。
令鑮兒,升小山頭,欲尋河持平墳墓,而不得。持平諱漴,乃翁曾祖妣河氏之考也。聞有墓在此,而山頭三大墳鼎足而列,旣無碣誌,又無知人,故不得的尋而來。
河重吾、成受命等,持酒肴,遠于將之。于時,六仙皆醉,笛歌偕發,齊起亂舞。野中刈稻者,擧鎌立觀之。過橫浦,越黃峴,經大也川,到桐谷,宿于玉峯家。趙汝獻來見。
七日,甲辰。嚥白鬻,早發之際,昆山姜淑,字伯陽者,佩酒來見,趙汝秀亦來見。過後方,經元堂,歷昆明,吟一絶曰:“三仙歷覽三仙洞,腋挾天風駕鶴廻。須臾飛過君山北,看送昆明幾劫灰。” 暮抵步仙樂天窩,宿焉。
八日,乙巳。踰藥洞嶺,吟一絶曰:“山中十日窮探討,滿壑煙霞拾滿裾。僮僕亦知山水號,雲中鷄犬不爲虛。” 渡林川灘,過守愚堂,有一絶曰:“林外西風吹葉去,雲邊北雁帶霜來。荒涼古宅無人守,枯竹寒梅不盡哀。” 涉黃柳灘,吟一絶曰:“探勝心如鵬徙北,還塵身似鷓還南。平生倘不懷經濟,鶴可駕兮鸞可驂。” 暮入浮査亭。
入山中也,所見皆仙;出山外也,所遇皆凡。一身出入,仙凡不同,有如鵾鵬之徙北海、鷓鴣之還山南。一心所向,如何不高養也?然士之一身,經濟其策;士之一心,兼善其志。不然,山何可不入?仙何可不學?
明道先生遊山詩曰:“衿裾三日絶塵埃,欲上藍輿首更回。不是平生經濟志,等閒爭肯出山來?” 此言入山之不能也。晦庵先生《感興詩》曰:“飄飄學仙侶,遺世在雲間。刀圭一入口,白日生羽翰。脫屣諒非難,偸生詎能安?” 此言學仙之不可也。然則今我仙遊,名雖仙也,實非仙也。故於其尾也,以見其志。同遊諸伴,以翁有山水癖,又知山中事者,令記之。
余觀,夫八仙之中,有老少焉,有父子焉,有兄弟焉。而及其探勝而群行也,忘老少先後之序;寓興而題詩也,迷父子兄弟之倫。遇勝則爭趣之,不須讓於長老;得句則輒寫之,不待後於父兄。此遊覽中,忘形骸,棄拘檢,自然流入於洪荒朴略之天地,而總名之曰“八仙”。故於其撰序也,父而贊子,尤是興狂戱劇嘲諧之無方處,觀者恕之。浮査野翁誌。
丁巳春,州牧耉巖李三省,約丹城倅及晉陽人,將遊頭流。以余爲玆山舊遊,邀書同往。
淸和初旬,余率伯兒,從耉巖及數三鄕人,幷轡。約會於七松亭。行至州西廣灘上,黑雲一片,自北而南,風顚雨急,雷震電閃,㡌不及開,蓑不暇披。須臾開霽,長虹亘天,紫氣沖綴於東北間,一行人相顧嗟訝。余以爲此實非常之變,意者其有異事乎。
遊十一日而歸,齊到朴公敏枕流亭。水飯纔撤,酒肴將設,忽聞觀察使忘憂郭公訃而散。以日計之,則廣灘上,雷霆之變,乃其乘化之時也。
嗚呼!公之仗義而起兵,出奇以殲賊。則功在社稷,名顯竹帛,何敢一二以陳?若其中年導引,半世松葉,則知公者,謂之非凡骨,不知者,亦以爲非凡骨。則稟賦之異於常人者萬萬,而至於微意之所在,亦豈衆人之所可測其端倪哉?
風襟月袍,後漢之水鏡司馬;名稱爵位,前漢之留侯子房。豈意不病高人,遽爾乘雲,駕風雨,策雷霆,若是之神且異也?蕭何之孕昴、傅說之乘箕,從此益信。而虹梁他日,橫駕斗牛,以助日月之光明者,亦可想於冥冥之中矣。因書一語,以誌異蹟,且寓公私之痛焉。
[주-D001] 叩 : 《南冥集ㆍ 題德山溪亭柱 》에는 “扣”.[주-D002] 更 : 《二程全書ㆍ下山偶成》에는 “重”.[주-D003] 平 …… 志 : 《二程全書ㆍ下山偶成》에는 “吾儒本經濟”.[주-D004] 間 : 《朱子大全ㆍ齋居感興二十首》에는 “山”.[주-D005] 諒 : 《朱子大全ㆍ齋居感興二十首》에는 “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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澗松先生續集卷之一 / 詩○五言絶句 / 雙溪唱酬
萬象渾寂寥。淸溪聲不絶。襟懷轉颯爽。坐對西峯月。
附諸賢詩
仙歸餘故山。地與人世絶。淸遊亦佳辰。正當秋八月。浮査成汝信
秋風方丈山。遊賞政淸絶。終宵宜且談。中庭又好月。蘆坡李屹
千古孤雲仙。一去消息絶。我亦象外客。淸溪弄明月。凌虛朴敏
洞僻宿雲歸。林深人跡絶。淸風亦有情。噓送晴巒月。滄洲河橙
名區多故人。此遊誠奇絶。團團一片心。共指中天月。思湖吳長
地是孤雲棲。飄然煙火絶。吾輩辦佳遊。好得淸秋月。鳳岡趙㻩
山深人不眠。萬籟共寥絶。庵禪莫催燈。天晴山有月。東溪權濤
興與山共深。山外歸心絶。山中復何有。團團巖上月。松臺河璿
萬壑皆白雲。塵煙自隔絶。夜話不用燭。多意前峯月。東山權克亮
佳節雙溪會。勝遊千古絶。夜久興轉淸。醉倒松牕月。林谷林眞怤
浮嵐影有無。寒鍾聲接絶。終宵淸不眠。共銜杯中月。滄洲許燉
溪淸山更深。禪家轉幽絶。相看皆好人。話到三更月。釣隱韓夢參
方丈三韓外。煙霞擅奇絶。勝遊天借否。溪樓來霽月。疆齋成好正
一躡神仙窟。蕭然塵慮絶。淸風入詠樓。共賞雙溪月。梅村文弘運
身如入淸都。幽興何時絶。把杯各相吟。中天又好月。謙齋河弘度
楓桂丹如錦。秋高景益絶。禪臺淸可話。不妨下山月。秋潭鄭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