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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 전우(田愚) 1841년(헌종 7)~1922년
난곡 송병화(蘭谷 宋炳華, 1852~1916)
陽齋 權純命 1891년(고종 28)~1974년
여암(厲菴) 정도현(鄭道鉉, 1895~1977)
24세 1918년 2월 부친의 명을 받들어 간재 전우를 계화도로 찾아가 폐백을 드리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 ― 1912 임자 ― ― 72 3월, 왕등도에서 군산도의 安陽書室로 옮겨 머물다. ○ 9월, 군산도에서 繼華島 壯子洞으로 移居하다. ○ 11월, 1906년에 刪定해 두었던 文稿 36책에, 成璣運이 1906년 이후 수집해 둔 草稿를 합하여 前稿 25책을 冊定하다.
― ― 1913 계축 ― ― 73 2월, 長孫 田鎰孝가 公州에서 家廟의 神主를 모시고 계화도로 들어오다. ○ 계화도 陽里에 집을 정하고, ‘繼華齋’로 講舍의 편액을 걸다.
― ― 1914 갑인 ― ― 74 〈海上散筆〉을 짓다.
― ― 1915 을묘 ― ― 75 8월, 宋炳華를 곡하다. ○ 〈達德最後論〉, 〈自誌〉, 〈服人白笠說〉, 〈海屋病語〉를 짓다.
― ― 1916 병진 ― ― 76 9월, 〈性尊心卑的據〉를 짓다.
― ― 1917 정사 ― ― 77 1월, 아들 田敬九를 哭하다. ○ 4월, 아들 田華九가 와서 모시다.
― ― 1918 무오 ― ― 78 〈兩家心性尊卑說〉을 짓다. ○ 12월, 高宗이 崩御했다는 소식을 듣고 成服하다.
― ― 1919 기미 ― ― 79 ‘巴里長書’에 署名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서명을 거절하다. ○ 11월, 日警 십여 명이 집에 찾아와 文書를 수색하다.
― ― 1920 경신 ― ― 80 〈曺兢燮答韓氏書辨〉을 짓다. ○ 5월, 각지의 同志들에게 글을 보내 朴泳孝가 先聖을 모독한 죄를 聲討하다.
― ― 1921 신유 ― ― 81 6월, 1913년 이후의 글을 刪定ㆍ編次하여 ‘後稿’라고 하다. ○ 〈華島漫錄〉, 〈大學記疑〉, 〈中庸記疑〉, 〈朱子大全標疑〉를 완성하다.
― ― 1922 임술 ― ― 82 1월, 〈讀論語〉, 〈讀孟子〉를 짓다. ○ 7월 4일, 졸하다. ○ 9월 13일, 益山 玄洞의 先塋에 장사 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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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田愚) 1841년(헌종 7)~1922년
艮齋先生文集後編卷之七 / 書 / 與趙瀚奎,鄭道鉉,鄭源根 戊午
朱子眼中。只見得人私意礙公。栗翁眼中。只見得人氣稟害理。故曰人惟有私意。聖賢所以由千言萬語。以掃滌人私意。使人人全得惻隱羞惡之心。裏面著一點私意不得。又曰。聖賢千言萬語。只要人撿束其氣。使復其氣之本然而已。氣之本然者。道心浩氣是也。彼嘲侮栗翁以眼中只見得一氣字而已者。亦將譏笑朱子以眼中只見得一私意而已耶。可謂全然無所知識。亦可謂全然不自省察者矣。聞嶺儒中欲翻栗翁定案者。自謂氣上無一半分修爲。吁何自誤而誤人。至此之甚也。後來又安知無翻朱子定案者。自謂私意無一半分掃滌云爾耶。噫。人之立言。惡可不用十分戒愼之功也耶。賢輩于啓口宣言時。必要禁止躁妄之疾也。只此便是撿氣滌私之法。千萬記取勿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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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先生文集後編卷之九 / 書 / 答鄭道鉉 戊午
心如門扇。道如臼門。扇植在臼內。可以開闔。心出于道外。如何運用。此以道不可離心常敬畏之敎。觀之。的然矣。子之名道而字以敬。正合此意。宜顧名思義。日夕洞屬。無敢少自肆也。近日乃有其心自認爲道者。所見如此。則所發無非此心。而亦皆自以爲道矣。是庸有別於異說矣乎。釋氏陸氏。認心爲性爲道。故以心之自然發見者。皆謂之性謂之道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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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先生文集後編續卷之三 / 書 / 與鄭道鉉 戊午
曰須是低下著這心。以順他道理。曰要小著心。順箇事理去做。謂心當順理。不當直指心爲理。 曰須是軟著心。貼就佗去做。佗亦指道理言。 是皆晦翁先生敎人將心順理功夫。而何不令擡著心侈著心硬著心。而乃曰云云耶。緣此箇心。元來是氣分上物事。易至自高自大。又多硬強急迫。以求速得。故先生之敎。每云虛心遜志。退步徐觀。此意。學者不可不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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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先生文集後編續卷之五 / 雜著 / 示鄭道鉉,趙元奎 庚申
鄙人平生所得有一言。曰心學性。性是當然之理也。心有能然之才者也。凡經傳所載。如明善誠身。閑聖闢異。也是心學性。進賢退邪。尊華攘夷。也是心學性。天下有道則見。無道則隱。也是心學性。平居無事。則無傷髮膚。亂世遇變。則不惜性命。也都是心學性。橫看縱看。左來右去。何者非此箇道理彼世之惡聞此三字者。不知其心學箇甚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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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先生文集後編卷之一 / 書 / 與鄭大卿 奭采○庚申
如聞尊兄曾至灆溪書院。有所問於
鄭道鉉者。信然乎否。誠如是也。是理外之事。愚未敢知。而請質焉。夫尊兄所聞八箇字。淵齋不過童子之見。 豈士者之所可道也。亦豈智者之所可疑也乎。理已躍如。而志且惑焉。此愚之所未曉者。一也。使傳者是忠信不欺之人。亦須徐審明覈而後。移書。於愚。責其妄罵長德壞破分義之罪。豈非所以仰體先丈眷愛之至情。而不此之爲。乃爾輕信輕發。外而傷友道。內而取人侮也。此愚所未曉者。二也。愚之多仇。兄之所知也。顧雖瞑迷。能不懔懔度日。乃敢肆口饒舌。以促其垂盡之殘命乎。是不難知。而兄且宣露於稠廣之中。是何異於見病羊之被逐。縱虎以助之搏噬乎。此愚之所未曉者。三也。見今外寇爲利慾而肆虐於我邦。以冀吾民之靡有孑遺。世儒爲名利而造謗於國中。以幸士流之自相呑噬。此最大患。兄且無畏而自墮於其術中。此愚之所未曉者。四也。凡此云云。非直爲賤子一身而發。實爲斯文世敎而布此衷蘊也。右八箇字之虛實。勿論。其於尊門。獨非可厭可恥之辭乎。 尊兄若見此無悔。而只啞然一笑曰。我之絶彼久矣。彼乃向我忉怛若是。是亦爲無腸公子者。則愚敢謂高明自害其仁義之性。而甘心於流俗之科矣。於是乎愚之憮然而沮。惻然而悲。亦人情之所不能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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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先生文集後編卷之九 / 書 / 答鄭道鉉 壬戌
嶺人有云。臼山言必稱心學性。而學性之門。亦有背師而投世者。豈非學性無實之所致乎。
甚矣。嶺人之不重性也。昔汪長孺問尊德性。朱先生敎以將這性。做一件重事。莫輕忽它。祇此是尊。彼背師而爲夷者。正爲不學性。豈心學性三字之誤乎。孔子歷言禮義。而曰以此坊民。此敎人學性。 民猶有弑君弑父者。是豈以禮義坊民之罪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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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厲菴) 정도현(鄭道鉉)의 생애와 학문세계
The Life and Scholarly Realm of Ryeoahm(려菴) Jung, Do-hyeon(鄭道鉉)
이의강 ( Eui Gang Lee )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 발행년도 : 2009
-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18권 0호
- 페이지 : pp.227-255 ( 총 29 페이지 )
정도현鄭道鉉
려암집
전우 田愚
심성론 心性論
예론 禮論
Jung-dohyeon
Ryeoahm-jib
Jeon-woo
Shimsungron
Yehron
초록(한국어)
본고는 려菴 鄭道鉉(1895-1977)의 저술과 부록으로 이루어진 『려菴集』의 내용을 분석하여 그의 생애와 학문세계를 규명하였다. 정도현은 학자로서의 가치체계를 구축하고 그에 입각하여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라는 지극히 왜곡된 사회를 살아야만 하였다. 개인이 만약 사회적 요구와 자신의 가치체계가 부합하지 않을 경우 과연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의 해답을 탐색하는 데 있어, 정도현의 생애와 학문에 대한 연구는 일정한 참고를 제공해준다. 정도현은 고종 32년(1895) 7월 22일 함양의 薇川에서 鄭在沃과 豊川 盧氏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河東이고, 조선조 5賢의 한 분으로 성리학의 대가였던 鄭汝昌은 그의 14대 조이다. 정도현은 정여창의 삶과 학문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정도현은 7세부터 서당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20세에 이르기까지 덕행을 지닌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정도현의 본격적인 학문 행보는 田愚(1841-1922)를 스승으로 섬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정도현은 전우로부터 性理學을 전수받았고, 전우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성리학을 심화시켜나간다. 정도현의 학문 세계는 心性論과 禮論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로 구축되어 있다. 그의 심성론은 `心卽氣`의 입장에 서있는데, 이는 전우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性을 높이고 心을 낮추어야 한다는 `性尊心卑說` 및 性을 스승으로 받들고 心은 제자로서 性을 따라야 한다는 `性師心弟說`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정도현은 禮의 실천을 심성론 못지않게 중요시하였다. 예의 각 조항에 대하여 타당한 이론적 근거를 탐구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 그에게 있어 禮란 사교상의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을 말하는 `에티켓` 정도에 그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예론은 규범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는 `心卽氣`의 심성론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왜곡된 사회에 대한 개인의 대응 자세는 세 가지 유형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가치체계에 맞도록 왜곡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유형, 둘째는 자신의 가치체계를 지키며 왜곡된 사회가 바로잡히기를 기다리는 유형, 셋째는 자신의 가치체계를 바꾸어 왜곡된 사회에 영합하는 유형의 세 가지이다. 첫째 유형은 가장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고, 셋째 유형은 가장 비굴한 삶의 자세로 모두에게 지탄받아 마땅하다. 정도현은 자신의 삶을 "텅 빈 산에 알아주는 사람 없지만, 홀로 차가운 가을바람 속에서 향기를 보존하고 있는" 蘭에 비유하였다. 그 자신 性을 높이고 禮를 지키며 왜곡된 사회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蘭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蘭이 과연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토양이 없다면 홀로 향기를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일까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초록(외국어)
This paper shows studies on the life and scholarly realm of Ryeoahm Jung-dohyeon(1895-1977) by analyzing 『Ryeoahm-jib(려菴集)』which consists of his writing and appendixes. As a scholar Jung-dohyeon established a value system, by which he lived whole the colonial period of Japanese imperialism. What kind of life should one lead when the social needs do not accord with his value system? To search answers of this question, studying on his life and studies furnishes some guidance. Jung-dohyeon was born at Micheon in Hamyang on July 22, 1895(Kojong 32) as a first son of Jung-jaeok and Nho from Pungchoen family. His family origin is Hadong. Jung-yeochang, one of the five wise in the Joseon Dynasty, is his fourteenth-upper-generation ancestor, by whose life and studies Jung-dohyeon was deeply influenced. At the age of 7 Jung-dohyeon starts to study in a village school. By the age of 20 he deepens his studies keeping company with virtuous scholars. His full-dress scholarly steps start when he has Jeon-woo(1841~1922) as a teacher. Jeon-woo`s studies on Sungrihak(性理學) was handed down from him to Jung-dohyeon, who concentrates on studying deeper in obedience to Jeon-woo`s will after his death. Jung-dohyeon`s scholarly realm is established on the two wheels. One is Shimsungron(心性論); and the other is Yehron(禮論) His Shimsungron stands on the perspective of Shimzukki(心卽氣) that derives from Jeon-woo. Jeon-woo consistently argued that Sungjonshimbiseol(性尊心卑說) and Sungsashimjaeseol(性師心弟說). The former means that Sung(性) should be place higher and Shim(心) lower. The latter means that Sung(性) should be regarded as a teacher and Shim(心) should follow obey Sung(性) as a disciple. Jung-doHyeon is devotedly following Jeon-woo`s theory of Shimsungron. Jung-dohyeon considered practice of Yeh(禮) to be as important as the theory is. He was very thoughtful and scrupulous on searching every proper theoretical basis on each item of decorum. For him `Yeh(禮)` meant more than etiquette that only indicates the formal rules of correct of polite behavior in society. His theory of Yeh(禮) holds a very normative feature, which is related to the Shimsungron of Shimjukki(心卽氣). Three types of reaction of individuals can be shown against a perverted society. The people from the first type are those who try to correct the society according to their value system. Secondly, there are people who await the change of society sticking on their value-system. The last type is who converts his value-system to adjust himself to the society. People from the first type deserve to be valued highly for the most positive way to live while the one who is from third type deserves to be denounced. He compared his life to an orchis that preserves its fragrance against cold wind of autumn even though nobody appreciates it. Like orchis he devoted his life to heighten his Sung(性) and preserve his Yeh(禮) awaiting the change of society. However it should be concerned carefully that an orchis could live with its fragrance if the soil where it roots does not exist.
논문정보
- 주제 : 어문학분야 > 국문학
- 발행기관 : 한국한문고전학회
- 간행물 : 한문고전연구, 18권 0호
- 발행년도 : 2009
- 페이지 : pp.227-255 ( 총 29 페이지 )
- UCI(KEPA) : I410-ECN-0102-2012-720-000865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