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말과 행위를 통하여 다른 사람과 단순히 다르다는 것을 넘어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한다. 말과 행위는 인간이 물리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이다. … 이 창발성은 인간이면 누구나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활동적 삶의 다른 활동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행위에만 고유하다. ...
성서적 의미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모든 허영과 현상을 경멸했던 유일한 삶의 방식인 말과 행위가 없는 삶은, 문자 그대로 세계에 대해서 죽은 삶이다. 더이상 인간 사이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아닌 것이다.
말과 행위로서 우리는 인간세계에 참여한다. 이 참여는 제2의 탄생과 비슷하다. 이 탄생에서 우리는 신체적으로 현상하는 우리의 본래적 모습을 확인하고 받아들인다. … 이 참여는 우리가 결합하기를 원하는 타인의 현존에 의해 자극받는다. … 참여의 충동은 태어나서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그 시작의 순간에 발생하며, 우리 자신의 주도로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함으로써 이 시작에 대응한다.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행위한다는 것은 … ‘시작하다‘ …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다‘...를 의미한다. (236-237쪽)
말과 행위는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근본적이고 특별히 인간적인 행위는 동시에 새로 오는 자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 ‘너는 누구인가‘에 답해야만 한다. 이 새로 온 자의 존재를 해명할 수 있는 단서는 그의 행위와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238쪽)
말 없는 행위는, 행위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더이상 행위가 아니다. 행위자는 그가 동시에 말의 화자일 경우에만 행위자일 수 있다. ...행위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말을 통해서만 즉 현재 행하고 이전에 행했고 장차 의도하는 것을 알려주는 말을 통해서만 행위는 적절한 것으로 된다. (239쪽)
행위에서 행위자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 행위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행위의 수단화는 공동존재가 상실되었을 때 즉 사람들이 단지 타인을 위해서만 또는 대항해서만 존재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근대의 전쟁이 그 예이다. … 이런 예에서 말은 ‘단순한 공론‘이 되고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즉 그것은 적을 기만하거나 선전을 통해 모든 사람을 현혹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말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업적은 … 그의 인격을 현시할 수 없다. (240-241)쪽
언어와 행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인격의 표현은 그것이 아무리 뚜렷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말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누구‘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 우리의 어휘는 혼란되어 그가 ‘무엇‘이다라고 말하고 만다. 우리는 자기와 유사한 타인과 필수적으로 공유하는 성질들을 애써 묘사하게 된다. 우리는 유형 또는 이 단어의 오래된 의미의 ‘성격‘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우리는 그의 특별한 유일성을 놓쳐버린다. (242쪽)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구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