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밤에 사진과 함께 카톡을 보내왔다. 잠결에 무심코 열었다 닫았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딸아이 사진이 변했다. 머리를 붙였단다. 5~6개월 전 분위기를 바꾼다고 조금 긴 단발머리로 변신하더니 이내 또 바뀌어 긴 머리 여인이 된 사진을 보내왔다.
“뭐야 또.. 왜 또 머리가 이렇게 되었어?”
“아빠, 나 예쁘지?”
“예쁜 거보다도...”
“아빠는 나 머리 기르는 것을 좋아하잖아?”
“그래도.. 머리를 붙였다 뗐다.. 그게 뭐야...”
“나는 긴 머리가 더 예쁜 것 같아.. 아빠도 올리비아 핫세가 좋다고 머리 기르라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예쁘면 돼..”
“남자 친구는 뭐라고 해?
“예쁘데.. 그런데 자기는 단발머리가 좋대”
“그럼 나도 단발머리가 좋아”
“뭐야.. 배신”
“몰라.. 아빠 자야 해. 내일 얘기 해”
“알았어..ㅎㅎ 머리 예쁘다..아빠 잘 자~~”
“엉. 잘 자”
어렸을 때부터 단발머리와 긴 머리 간에 딸아이와 늘 논쟁이었다. 아빠는 항상 긴 머리를 수호했다. 엄마는 단발머리였기에 단발머리 선호경향이었고, 딸아이는 긴 머리와 단발머리를 오갔으나 대체적으로 몇 년간은 긴 머리의 시간이 길었었다.
기나 긴 머리길이 신경전이 끝나나 했었는데 나이 24살 들어 길었던 머리를 싹둑 자른 사진을 보낸 지 몇 달 만에 다시 붙임머리로 길어진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마음속으로 살짝 ‘좋아라’ 했었지만, 딸아이의 머리를 둘러싼 변신에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하는 마음이 잠깐 스쳤으나, 아빠는 이내 까까머리 어릴 적 꿈나라에 깊이 빠져든다.
까까머리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초반을 보냈던 아빠는 선화동 호수돈여고 날맹이 집에서 출발, 중앙중학교와 보문고등학교, 이렇게 6년의 중·고등학교를 걸어서 등하교 했다.
학교를 가다 보면, 우선은 호수돈여고앞 당시 보성전파사 앞에서 29번 버스(829번을 거쳐 현재는 603번)를 타려고 기다리는 대전여중·고 여학생들을 스쳐 지나치고, 옛 법원관사 위 29번 버스 정거장에서 내리는 호수돈여중·고 여학생들의 눈을 애써 피해 걷다가, 옛 법원 앞길을 지나며 충남여중·고 여학생들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보다리(대전여상과 보문고등학교 사이의 대교에 대한 별칭)위에서 중앙여중과 대전여상 학생들을 슬쩍 곁눈질하며 지나치곤 했었다.
사춘기 때문이었을까, 나의 까까머리가 부끄러웠는지 검정 교모를 푹 눌러쓰고 서둘러 길을 걷지만 아침마다 등굣길은 제법 재미있는 나만의 상상공간이었다. 늘 보던 길에서 마주쳐야 할 여자애가 안보이면 은근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도 되고, 며칠 만에 얼굴이 보이면 반가운 표정을 애써 숨기기도 했다.
그런데 중학교 3년에 고등학교 3년, 6년을 같은 길로 등교하며 만났던 여학생들은 늘 단발머리다. 검은 교복에 귀가 보일랑 말랑 짧은 단발머리, 거기에 머리에 예쁘게 치장을 했다고 해봐야 머리핀이 전부다. 그래서 내 초등학교 동창처럼 보이는 여학생도, 매일 거의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여학생들도 까까머리에 모자 푹 눌러쓴 나를 괜히 못 본 척 지나가는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때인 1980년 조용필 1집의 <단발머리>가 히트를 쳤음에도, 현실의 내 아침 등굣길의 소녀들은 가사처럼 ‘반짝이는 눈망울이 내 마음을 되살릴’지는 몰라도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로 다가오진 않았다.
매일의 등굣길 단발머리 소녀들을 만나기에 그 반발이었는지, 나는 1975년 발표된 둘다섯의 <긴머리소녀>를 늘 입에 달고 다녔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를 부르라 하기에 이 노래를 부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긴머리소녀는 ‘눈먼 아이처럼 귀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건너 작은집의 긴머리소녀’이기에 선화동 날맹이 집과 학교 사이에선 만날 수 없었던, 사춘기 아빠에겐 동화나라 이상속의 소녀였다.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만날 수 없는 그리움 속 소녀였다.
이렇게 지금까지 아빠는 딸아이의 머리에 아빠의 로망을 담은 것 같다. 어느덧 딸아이는 긴머리소녀를 좋아하는 아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한밤, 딸아이는 내게 자신의 긴머리소녀 모습을 보내온 것이다.
아빠는 이제 조금 달라져야겠다. 남자친구가 긴 머리도 좋아하지만 단발머리를 좋아한다니 다행이다. 아빠도 긴 머리를 좋아하지만 단발머리도 좋아할까 한다. 더 이상 어린 소녀로서가 아니라 25살 현실에서 만나는 딸아이니까. 긴 머리건 단발머리건 딸이 좋아하는 머리를 아빠도 좋아할까 한다.
다만 딱 하나, 딸을 위해
‘눈감고 두손모아 널위해 기도하리라’의 긴머리소녀 마지막 가사는 마음에 남겨두며.
<강영환의 어의운하 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