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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국조인물고 / 정희보[ 鄭希輔 ]
정희보의 묘지명(墓誌銘) / 저자 노진(盧禛)
이명 자 : 중유(仲猷)
국조인물고 권40 사자(士子)
공(公)의 휘(諱)는 희보(希輔)요, 자(字)는 중유(仲猷)이다. 성(姓)은 정씨(鄭氏)로, 그 선계(先系)는 남해현(南海縣) 사람이다. 공부터 함양(咸陽)에 이사하여 살았다.
가정(嘉靖)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 5월에 병이 들어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였다. 그해 겨울에 문인(門人)들이 부의(賻儀)를 모아 장차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시기(時機)가 좋지 않은 까닭에 제대로 장사를 지내지 못하다가 이듬해인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년) 12월 모갑(某甲)에 비로소 장사를 치루었으니, 장지(葬地)는 성황산(城隍山) 동네에 있는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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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 1 | 1546 | 병오 | 嘉靖 | 25 | 29 | 매부 泰仁 縣監 申潛의 권유로 井邑에 가서 別擧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이어 會試와 殿試에 합격하다. ○ 승문원 권지 부정자가 되다.玉 |
명종 | 2 | 1547 | 정미 | 嘉靖 | 26 | 30 | 5월 당곡(唐谷) 별세 |
정희보(鄭希輔) | 1488 | 1547 | 남해(南海) | 중유(仲猷) | 당곡(唐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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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집(玉溪集) 노진(盧禛)생년1518년(중종 13)몰년1578년(선조 11)자자응(子膺)호옥계(玉溪), 우재(迂齋)본관풍천(豐川)시호문효(文孝)
玉溪先生文集卷之三 / 墓碑誌 / 處士鄭公墓誌銘
公諱希輔。字仲猷。鄭姓。其先南海縣人也。自公徙居于咸陽。四世祖諱可願。官至安州道兵馬團鍊使兼判德州事。祖確。父孝忠。皆不仕。母夫人晉州鄭氏。嘉靖大夫,漢城府尹訥生之孫。司醞署直長漢元之女。公幼聰警不羣。能刻意問學。及長。益自植立。爬羅搜剔。摛藻日進。聲名遂大振。連擧于有司。竟不售。白首固窮。人甚惜之。居第湫隘。僅蔽風雨。蔬糲或不給。猶怡然不以爲意。性不與人苟合。不喜交遊。杜門端居。淡泊自守。然遇事剛果。不以人言有所屈撓。晩歲。以訓迪後進爲己任。誨誘諄至。終日答問。略無倦色。學徒聞風遠來者甚衆。結茅齋于公之宅南百步許。常群聚而講習焉。未十年。稍稍登科第仕于朝。通經綴文。方業擧子者不可選記。嘉靖丁未五月。疾終于家。得年六十。其年冬。門人聚賻將葬之。因時不利。不克葬。越明年戊申十二月某甲。始襄事。實城隍山之同內原也。娶羅州朴氏忠順衛諱桂幹之女。生四子二女。長曰業。次曰乘。次曰栗。次曰棄。皆成就有行。唯棄未有室。女長適朴德昭。次適崔應福。嗚呼。以公之文行。必且爲世用。而竟不位以終。或者其有後乎。將葬。業等請銘于盧禛。念禛實賴公誘掖。得至今日。無所報效是嗛。於銘 其可辭。銘曰。
窮也者。吾不知其可惡。達也者。吾不知其可慕。窮而守義。君子維則。達而無善。其死誰籍。維彼唐谷。人儗白鹿。躋躋蹌蹌。靑衿滿堂。湖嶺之濱。半是門人。功存啓後。萬古不朽。
金安國 1478 1543 義城 國卿 慕齋, 恩逸 文敬
鄭希輔 1488 1547 南海 仲猷 唐谷
옥계집 > 年譜
嘉靖十一年 我中宗恭僖大王二十七年 壬辰。先生十五歲。嘗讀大學章句輯釋。悉皆硏精熟複。則頗有疑晦處鄕有鄭君希輔。以詞學名於南中。晩不利於場屋。以訓後生爲事。先生首以大學就問。則鄭君從先生唯唯。先生是時。已見大義於聖門之學。而顧無名師可從以問。遂有悵然之志。從衆學科文於其門。仍受韓文等書。
*중종 27 1532 임신 嘉靖 11 15 處士 鄭希輔에게 「大學」 등을 배우고, 그 문하에서 科文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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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집(玉溪集) 노진(盧禛)생년1518년(중종 13)몰년1578년(선조 11)자자응(子膺)호옥계(玉溪), 우재(迂齋)본관풍천(豐川)시호문효(文孝)
玉溪先生文集卷之三 / 墓碑誌 / 處士鄭公墓誌銘
公諱希輔。字仲猷。鄭姓。其先南海縣人也。自公徙居于咸陽。
四世祖諱可願。官至安州道兵馬團鍊使兼判德州事。
祖確。
父孝忠。皆不仕。
母夫人晉州鄭氏。嘉靖大夫,漢城府尹訥生之孫。司醞署直長漢元之女。公幼聰警不羣。能刻意問學。及長。益自植立。爬羅搜剔。摛藻日進。聲名遂大振。連擧于有司。竟不售。白首固窮。人甚惜之。居第湫隘。僅蔽風雨。蔬糲或不給。猶怡然不以爲意。性不與人苟合。不喜交遊。杜門端居。淡泊自守。然遇事剛果。不以人言有所屈撓。晩歲。以訓迪後進爲己任。誨誘諄至。終日答問。略無倦色。學徒聞風遠來者甚衆。結茅齋于公之宅南百步許。常群聚而講習焉。未十年。稍稍登科第仕于朝。通經綴文。方業擧子者不可選記。嘉靖丁未五月。疾終于家。得年六十。其年冬。門人聚賻將葬之。因時不利。不克葬。越明年戊申十二月某甲。始襄事。實城隍山之同內原也。娶羅州朴氏忠順衛諱桂幹之女。生四子二女。長曰業。次曰乘。次曰栗。次曰棄。皆成就有行。唯棄未有室。女長適朴德昭。次適崔應福。嗚呼。以公之文行。必且爲世用。而竟不位以終。或者其有後乎。將葬。業等請銘于盧禛。念禛實賴公誘掖。得至今日。無所報效是嗛。於銘 其可辭。銘曰。
窮也者。吾不知其可惡。達也者。吾不知其可慕。窮而守義。君子維則。達而無善。其死誰籍。維彼唐谷。人儗白鹿。躋躋蹌蹌。靑衿滿堂。湖嶺之濱。半是門人。功存啓後。萬古不朽。
국역 국조인물고 / 정희보[ 鄭希輔 ]
정희보의 묘지명(墓誌銘)
저자 노진(盧禛)
이명 자 : 중유(仲猷)
국조인물고 권40 사자(士子)
공(公)의 휘(諱)는 희보(希輔)요, 자(字)는 중유(仲猷)이다. 성(姓)은 정씨(鄭氏)로, 그 선계(先系)는 남해현(南海縣) 사람이다. 공부터 함양(咸陽)에 이사하여 살았다.
4대조는 정가원(鄭可願)으로 벼슬은 안주도 병마단련사 겸판덕주사(安州道兵馬團練使兼判德州事)를 지냈고, 할아버지 정확(鄭確)과 아버지 정효충(鄭孝忠)은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모부인(母夫人)은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가정 대부(嘉靖大夫) 한성 부윤(漢城府尹) 정눌생(鄭訥生)의 손자이자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정한원(鄭漢元)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총민하여 범상치 않았고, 능히 마음을 다잡고서 학문에 힘썼으며, 자라서는 더욱 스스로 뜻을 굳게 세워 온갖 서적들을 폭넓게 공부하여 글솜씨가 나날이 향상되었으므로 명성이 마침내 크게 떨치어 유사(有司)에게 연이어 천거(薦擧)되었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지도록 곤궁하게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었다. 사는 집도 누추하고 비좁아서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고 나물 반찬과 거친 밥조차도 더러 끼니를 잇지 못하였는데, 그래도 느긋하게 여기고서 개의하지 않았다. 성품이 남들과 구차하게 어울리지 않아서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문을 닫아걸고 단정하게 지내면서 담박하게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그러나 무슨 일을 당해서는 강단지고 과감하게 대처하여 남의 말 때문에 소신을 굽히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만년(晩年)에는 후진(後進)들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고서, 자상하고 지극하게 타이르고 훈계하였으며, 온종일 제자들과 문답(問答)하면서도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공에게 배우려는 자들이 그 소문을 듣고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공의 집에서 남쪽으로 1백 묘(畝)쯤 되는 곳에 집을 짓고서 항상 무리를 지어 모여서 강습(講習)을 하였는데, 채 10년이 되기도 전에 제자들이 점차로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벼슬을 하게 되었고, 경서를 외우고 글짓기를 연습하면서 한창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자들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가정(嘉靖)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 5월에 병이 들어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였다. 그해 겨울에 문인(門人)들이 부의(賻儀)를 모아 장차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시기(時機)가 좋지 않은 까닭에 제대로 장사를 지내지 못하다가 이듬해인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년) 12월 모갑(某甲)에 비로소 장사를 치루었으니, 장지(葬地)는 성황산(城隍山) 동네에 있는 언덕이다.
공의 부인은 나주 박씨(羅州朴氏)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박계간(朴桂幹)의 딸인데,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정업(鄭業)이고, 차남은 정승(鄭乘)이고, 셋째는 정율(鄭栗)이고, 넷째는 정기(鄭棄)인데, 네 아들 모두가 학업을 성취하여 행실이 있고 막내인 정기만 아직 아내가 없다. 맏딸은 박덕소(朴德昭)에게 시집갔고, 작은딸은 최응복(崔應福)에게 시집갔다.
아! 공의 글재주와 행실로 볼 때 반드시 장차 세상에 쓰여졌어야 하는데도 끝내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으니, 혹시 그 후손이 영달하려는 것일까? 장차 장사를 치루려 하면서 공의 아들 정업 등이 나 노진(盧禛)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생각하건대, 나는 실로 공이 이끌어준 덕분에 오늘날에 이를 수가 있었는데, 공에게 보답해드린 바가 아무 것도 없어서 안타까웠으니, 명(銘)을 짓는 일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곤궁(困窮)한 사람일지라도 나는 그를 혐오할 만한 것을 알지 못하겠고 영달(榮達)한 사람일지라도 나는 그를 흠모할 만한 것을 알지 못하겠도다. 곤궁하게 살면서도 의리를 지키면 군자(君子)들이 모범으로 삼아 본받고, 영달했을지라도 선행(善行)이 없으면 그가 죽은 뒤에 누가 기록하겠는가? 저 당곡(唐谷)을 사람들이 백록동(白鹿洞, 송대(宋代)의 주자(朱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임)으로 여기고서 줄줄이 모여들어 배우려는 선비들이 집에 가득 들어찼네. 호령(湖嶺)의 물가 지역이 절반은 공의 문인(門人)들이네. 공의 공로는 후진(後進)들을 계도(啓導)한 일에 있으니, 먼 후세에까지 영원히 전하리라.
[네이버 지식백과] 정희보 [鄭希輔]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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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谷鄭先生實紀下 [附錄] 墓誌銘幷序 盧玉溪禛
公의諱希輔오字仲猷며鄭姓이니其先은晉陽人也라公 이自南海로徙居于咸陽하다四世祖諱可願은號淸溪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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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至安州牧使兼判德州事요祖諱確이요父諱孝忠이니皆 不仕오母夫人海州鄭氏는嘉靖大夫漢城府尹訥生之 孫이요司醞署直長漢元之女라公이幼聰警不群하야能刻 意問學하고及長에益自植立하야爬羅搜剔에摛藻日進하니 聲名遂大振이라連擧于有司나竟不售하야白首窮困하니人 甚惜之라居第湫隘하야僅蔽風雨하고蔬糲或不給이나猶怡 然不以爲意하다性이不與人苟合하고不喜交遊하며杜門端 居에淡泊自守니然遇事剛果하이不以人言으로有所屈撓 하고晩歲以訓迪後進爲已任하야誨誘諄至하야終日答問호대 略無倦色하니學徒聞風遠來者甚衆이라結茅齋于公之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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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百步許하야常群聚而講習焉하니未十年에稍稍登科第 하야仕于朝하고通經綴文하야方業擧子者不可選記라嘉靖 丁未五月에卒終于家하니得年六十이라其年冬에門人이 聚賻將葬地라가因時不利하야不克葬하고越明年戊申十二 月某甲에始襄事하니實城隍山之同安原也라娶羅州朴 氏忠順衛諱桂幹之女하야生四男二女하니男長曰業이요次 曰乘이요次曰栗이요次曰棄니皆成就有行이라惟棄은未有 室이라女長은適朴德昭요次는適崔應福이라嗚呼라以公 之文行이必且爲世用而竟不仕以終하니或者其有後乎 은저將葬에業等이請銘于盧禛커늘念禛이實賴公誘掖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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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至今日이라無所報效하니是嗛이라於銘에其可辭아銘曰 窮也者는吾不知其可惡이요達也者는吾不知其可慕라 窮而守義는君子維則이라達而無善는其死誰藉오維彼 唐谷은人擬白鹿이라濟濟蹌蹌에靑衿滿堂이라湖嶺之濱 이半是門人이라功存啓後에萬古不朽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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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溪先生文集卷之二 / 祭文 / 祭鄭公 希輔文
踰海有鄕。實同甌越。旣荒而阻。俗瞢于學。公奮其間。出類拔萃。聰明俊逸。洽聞彊記。摛華發藻。沛若川增。遊于學庠。嘉聲聿興。先進嗟賞。儕友惶駭。甲科之榮。擬拾地芥。命不我謀。而此窮躓。一畝之宮。一簞之食。澹如泊如。絶彼外榮。斂德于躬。惠我後生。誨我諄諄。不遺昏明。縫掖于于。自遠方來。縛茅東澗。左右其齋。載絃載歌。以問以考。人各其材。蔚乎有造。鄕多髦上。冠佩濟濟。雖有淺深。皆其抽啓。昔余幼眇。亦廁門後。誘我誨我。刔其蔽覆。繄敎之賴。以有今日。荷德惟深。報恩靡力。前歲之夏。余在漢濱。承凶千里。繫官莫奔。徂秋南覲。乃始一哭。慙負幽明。慟結胸臆。今此匍匐。踰歲且暮。誠衰物菲。詎暴情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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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溪先生文集卷之一 / 詩○五言律詩 / 輓鄭公 希輔其名。唐谷其號。先生少時受業。
少昔才名大。相傳萬口傾。靑雲收羽翮。白首掩紫荊。絃誦遺風遠。詩書舊業淸。門人封馬鬣。寒日共呑聲。
又
歲晩耒縫掖。慇懃任發蒙。承恩唯我最。報德竟何窮。原草空蕭瑟。山花自滿紅。傷心遽如許。哀淚灑西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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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집(巖棲集) 조긍섭(曺兢燮)생년1873년(고종 10)몰년1933년자중근(仲謹)호암서(巖棲), 심재(深齋)본관창녕(昌寧)초명인섭(麟燮)초자노견(魯見)
巖棲先生文集卷之二十 / 記 / 雲谷精舍記
兢燮少聞咸陽有鄭唐谷先生。以潛德奧學。爲一時師表。諸甞學於先生者。如盧玉溪,梁九拙,姜介庵諸賢。皆以名儒稱焉。竊以爲咸故文獻先生鄕也。自文獻之世。至鄭先生未久。遺風尙不斬。宜其取斯哉。日南海士人鄭君暘驥,李君基俊以其鄕中諸章甫書。北走四百里。踵門而告曰吾鄕舊有鄭先生祠。以先生之生。實在玆土也。祠毁而鞠且五十年矣。某等相與合力。以築一舍于其地。冐祠之故號而顔之曰雲谷精舍。將以時會于是而講先生之道焉。幸子之無惜一言以爲記。兢燮發書而歎曰嗟乎。南海之爲邑。踔遠荒阻。雖當隆化之時。聲明文物之被。常後乎中土。而先生乃奮起於是。其不可謂豪傑之士也哉。然今聞玆邑四境。絃誦相達。又能知慕前賢。不忍荒廢其地。如此則因響求聲。循名責實之務。將於是乎在。百世之下。安知不有如先生者相輩而出乎。是可以記也。若夫所講之道則有先生之緖言。可抽而繹。又能溯而上之。以尋先生之所未盡得者。是則區區所望於諸君子者也已。
암서집 제20권 / 기(記) / 운곡정사 기〔雲谷精舍記〕
긍섭(兢燮)이 어릴 때 듣기를, 함양(咸陽)에 정당곡(鄭唐谷) 선생이 깊은 덕과 학문으로 일시의 사표가 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선생에게 배웠던 노옥계(盧玉溪)ㆍ양구졸(梁九拙)ㆍ강개암(姜介庵) 같은 제현들이 모두 이름난 선비로 일컬어졌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기를, “함양은 고(故) 문헌(文獻) 선생의 고향이다. 문헌 선생의 시대에서 당곡 선생에 이르기까지 오래되지 않아 유풍(遺風)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문헌 선생의 유풍을 취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하루는 남해(南海)의 선비 정양기(鄭暘驥) 군과 이기준(李基俊) 군이 그 고을의 여러 선비들 편지를 가지고 북쪽으로 4백 리를 달려 나의 집에 이르러 고하기를, “우리 고을에 옛날 정당곡 선생의 사당이 있었던 것은 선생이 태어난 것이 실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당이 허물어져 폐허가 된 지 50년이 되어 갑니다. 모(某) 등이 서로 힘을 합하여 그곳에 한 채의 집을 짓고, 사당의 옛 이름을 그대로 써서 편액을 ‘운곡정사(雲谷精舍)’라 하고, 장차 때로 이곳에 모여 선생의 도를 강론하려 합니다. 그대는 일언(一言)을 아끼지 말고 기문을 지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긍섭은 편지를 열어보고 탄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남해 고을은 내륙에서 매우 멀고 아득히 막힌 곳에 있어서 비록 교화가 융성한 때에 있어서일지라도 성명(聲明) 문물(文物)의 영향이 항상 내륙보다 뒤졌다. 그런데 당곡 선생이 여기에서 분연히 흥기하였으니 ‘호걸(豪傑)의 선비’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듣건대, 이 고을의 사방 경계에 문교(文敎)를 익히는 소리가 서로 들리고, 또 능히 전현을 사모할 줄 알아 차마 그 유지(遺址)를 황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 한다. 이와 같다면 메아리로 인하여 그 소리를 구하고 이름을 따라 그 실상을 바라는 일이 장차 여기에 있을 것이니, 백대의 후에 선생 같은 사람이 이어서 배출됨이 있지 않을 것인가? 이것을 기록할 만하다.
강론할 도와 같은 것은 선생이 남긴 말씀이 있으니 미루어 연역(演繹)할 수 있고, 또 능히 소급하여 올라가서 선생이 다 얻지 못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곧 내가 여러 군자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주-D001] 정당곡(鄭唐谷) : 정희보(鄭希輔, 1486~1547)를 말한다. 자는 중유(仲猷), 호는 당곡(唐谷), 본관은 진양(晋陽)이다. 관련 자료로는 《당곡정선생실기(唐谷鄭先生實紀)》가 있다.
[주-D002] 노옥계(盧玉溪) : 노진(盧禛, 1518~1578)으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ㆍ자용(子庸), 호는 옥계(玉溪)이다. 1546년(명종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이조 판서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옥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주-D003] 양구졸(梁九拙) : 양희(梁喜, 1515~1580)로,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구이(懼而), 호는 구졸(九拙)이다. 1546년(명종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용성세고(龍城世稿)》 권1에 《구졸암고(九拙菴稿)》가 전한다.
[주-D004] 강개암(姜介庵) : 강익(姜翼, 1523~1567)을 말한다.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 또는 송암(松庵),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경상남도 함양(咸陽)에서 살았다. 1549년(명종4)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52년(명종7)에 남계서원(藍溪書院)을 건립하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제향하였다. 뒤에 남계서원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개암집》이 있다.
[주-D005] 문헌(文獻) 선생 :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말한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경상남도 함양(咸陽)에서 살았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인으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관련 자료로는 《일두집》이 있다.
[주-D006] 남해(南海) : 경상남도의 군읍(郡邑) 이름이다.
[주-D007] 호걸(豪傑)의 선비 : 재덕이 출중한 선비를 말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문왕을 기다려 흥기하는 사람은 평범한 백성이니, 재덕이 출중한 선비의 경우는 비록 문왕이 없더라도 오히려 흥기한다.〔待文王而後興者, 凡民也, 若夫豪傑之士, 雖無文王, 猶興.〕”라고 하였다. 《孟子 盡心上》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김홍영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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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谷鄭先生實紀下 / [附錄] / 雲谷書院新創記
書院之設이尙矣라古之賢人이飭躬勵行하고覃思經傳 하야菀爲士林之師表요矜式後人이면仰止尊慕하야卽其讀 書之地하야建院而俎豆之故로謂之書院이니益自唐宋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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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로已是通行之禮也라式至我東에名賢輩出하야其儀 愈繁이라苟有功德이施於民國者와及發揮聖學者면或 於生長之鄕과杖屨之所와莅宰之邑에設祠屋以餟之 하니有國學鄕祠之別이나皆所以致崇報而尊尙之義也라 唐谷鄭先生은其先는晉陽人也라先生이生蘭浦에天 稟卓異하고氣質敦確하야見義不撓에賁育이失其勇하니其 所守를可知矣라早寓咸陽之唐谷하야屢擧功令이나連屈 於有司하야退而爲爲己爲人之學하야推衍經義에嘉惠後 人하고沈潛性理하야毫分縷析이若河決下流而東湊요至 於格致誠正四端七情에皆逐字立說하며尤深於易學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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推本說卦之義而著圖經若干言하야以敎學者하니湖嶺章 甫의束脩及門하야親炙講論에擧皆學透精微요位至淸 顯하야爲世所推重者二十餘賢이요通一藝而名未達者殆 難以遍擧라如盧玉溪李靑蓮蘇暘谷姜介庵吳德 溪는皆享國學이요梁九拙鄭梅村은竝餟鄕祠라其開繼 衛道之功이不下昌黎之倡明이요服膺造詣之功이可將 安定之門人則平生蘊蓄之美와啓迪之深이寔儒林之 宗匠也라是宜立祠호데顧時有未集하야未遑克擧라歲辛 卯에士論齊發하고本裔致力하야創鄕祠於溏洲國學之右 하야始揭虔而擧縟儀하야遂百年闕失之禮하고伸士林抑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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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歎하니實斯文大幸也라其後에南海縣後孫曁鄕士同 辭合議하야又設新祠하니是旣桑梓之鄕則于此妥靈이允 愜於神理人情이니後生之所開口而活頭攢喜가宜無過 於是矣라惟我末學이徒慣耳聞이요惜其遺集이失於兵 燹이라祗憑寂寞文字은顧何能形容其德微哉아輒以舊 所聞者及實錄中所在者로擧梗槪而爲之記라
上之四年癸丑(1853,철종4)端陽嘉善大夫前行戶曹參判兼五衛都 摠府副摠管豐川盧光斗1772~1859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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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谷鄭先生實紀 ( 당곡정선생실기 )저자:鄭希輔 ( 정희보 ) 생몰년 : 1486 - 1547자 : 仲猷(중유) 호 : 唐谷(당곡) 본관 : 晋陽(진양) 거주지 : 咸陽(함양)
唐谷鄭先生實紀下 / 追錄 / 雲谷精舍記
兢燮이少聞咸陽에有鄭唐谷先生이以潛德奧學으로爲 一時師表하니諸嘗學於先生者如盧玉溪梁九拙姜介菴 諸賢이皆以名儒로稱焉하니竊以爲咸은故文獻先生鄕 也라自文獻之世로至鄭先生이未久하야遺風이尙不斬 하니宜其取斯哉인저日에南海士人鄭君暘驥와李君基俊 이以其鄕中諸章甫書로北走四里하야踵門而告曰吾鄕 에舊有鄭先生祠하니以先生之生이實在玆土也라祠毁 而鞠이且五十年矣라某等이相與合力하야以築一舍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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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地하고冒祠之故號而顔之曰雲谷精舍라하고將以時會于 是而講先生之道焉하노니幸子之無惜一言以爲記라커늘兢燮 이發書而歎曰嗟乎라南海之爲邑이踔遠荒阻하야雖當 隆化之時라도聲明文物之被常後于中土而先生이乃奮 起於是하시니其不可謂豪傑之士也哉아然이나今大陸이己 沈에中州北方은古所謂文明之區者라도日趨於椎魯而 聞玆邑은四境에絃誦이相達하고又能知慕前賢하야不忍 荒廢其地如此하니則因響求聲하고循名責實之務將於是 乎在라百世之下에安知不有如先生者丨相輩而出乎 아是可以記也라若夫所講之道則有先生之諸言이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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抽而繹이요又能溯而上之하야以尋先生之所未盡得者 是則區區所望於諸君子者也已라
歲丁巳(1917)季丑昌山曺兢燮(1873~1933)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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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谷鄭先生實紀下 / 追錄 / 雲谷書院廟庭碑
南海治西二十里許望雲山下中峴村에有雲谷祠하니卽 唐谷鄭先生祠也라其始創建하야幾年而廢하고廢而復建 하니世間平陂循環이蓋有如此歟져先生以我朝成宗 十九年으로生于南海二東草谷里第하시니以間世挺生之資 로濡染家庭而培根旣厚러시니爲博學無方而事賢友仁也 하야就于咸陽하니咸은故文獻先生鄕也라其遺風이尙爲 不斬하니宜多取則故也라仍而受室于朴春堂之門하야乃 爲定居하시니時則國家政亂에士林이罹禍酷甚이라先生이 絶意仕進하고隱居唐谷하사不懾不沮하고卓乎深造하야以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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徒成物로爲己任하사乃於宅南百步許에構一小齋하야日 與諸生으로講習하니遠邇之士騈趨而承學焉하니湖嶺之俊 髦聚于函丈하야親炙講論할새隨其材器하야咸至于成하니出 而通顯於世者甚多하고其餘以文學丁義로通一藝而 備一行者不可數計라惟先生이天賦卓異하사其於聖 賢經傳어不由師傳而超然獨得하사能通乎性命之深奧 하고察乎人事之當務하사卽自信愈篤하야不易乎世하고不求 乎人而囂囂焉하시다先生所著嘗有六經註釋八局而失 於兵火하고其幸存者는性理象畵等若干篇而與北溪字 義와濂溪圖說로相爲表裡하고其詩文이淸澹和厚하시니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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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鄕之詩와稽山之詠에可見其戀戀乎父母之國과斷 斷乎愛君戀闕之衷矣라槪擧前賢之所述則盧玉溪撰 先生之誌에曰維彼唐谷人擬白鹿湖嶺之濱半是門人 功存啓後萬古不朽라하고吳思湖撰其集錄에曰一代名儒 皆出其門하니其功이不在韓昌黎之下라하고奇蘆沙謂儒學 淵源은先生이居首列이無疑라하고曺深齋謂先生은豈不 誠豪傑之士也哉라하니諸君子豈阿好而稱道哉아實爲千 古定評이라粤在純祖辛未에道論이齊發하야立享于溏 洲祠하고越二十二年哲宗癸丑에南海士林及後裔同 辭合議하야創建祠宇于此地하니實以先生桑梓之鄕則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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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妥靈이允合神理人情故也라又不幾年而高宗五 年戊辰에邦禁下而見撤하고五十年間에只有空墟而荒 草茂沒하니過者指點이러니歲丁巳에鄕士林及後裔相與 合力하야重建祠宇及講堂而每當春秋에行釋菜禮하고講 誦先生之道焉하니於是에郡內外有志諸氏獻納土地 或誠金하야立基本則産而充當享禮及諸般行事經費하야 自是以來로年久歲深하야累次隨毁修補而往在乙丑年 度에祠宇未免滲漏傾頹之境이라必爲大加補完修理而 事鉅力綿하야不得己而上申于政府하야得鉅金修理完了 하니於是에廟貌苟完하다先生의諱는希輔요字는仲猷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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號는唐谷이니其先은晉陽人이니麗朝丨僉正諱仲恭之後 요累傳至諱可願號淸溪하야本朝에中生員하야官至左贊 成兼安州道兵馬使判德州事하니是爲先生之高祖也오 王考의諱는確이요仕顯信校尉하니太宗이是置南海縣하고 選隣邑士族中備百行者하야以訓導之하니公이其敎授官 이요考의諱는孝忠이요號는蘭洲老人이니才行文章이一世 師儒之最요兄의諱는希哲이요號는豊溪니以孝로聞하고 從遊金自菴先生하다惟南海之爲邑이踔遠荒阻하니俗瞢 于學而先生이能奮起于是하사倡明斯道하야啓我後人하시니 豈不偉哉며豈不偉哉아今自本祠享會時에多士發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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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立廟庭碑而明記本祠治革하야使入是廟者로皆有所 肅恭하고有所慕焉케한대郡內儒林이咸爲贊同而成之하다石 旣具에責文于余하니余竊念後生末學이生于先生易簀 四百年之後而愚陋淺劣하니豈敢容喙리오但據實記中撮 其槪要而俾刻之于石하다系之銘曰
欹歟先生은挺生南服이라不惟質美라亦學之力이로다父有 蘭洲로兄有豊溪라濡染家庭에蒙養整齊라博學無方 에早己擇隣이라就于天嶺에事賢友仁이라文獻遺風을私 淑與聞이라道與時違에固窮隱遁이라主敬守約하니上達天 德이라沈潛性理에毫分縷析이라湖嶺章甫丨束脩及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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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炙講論에春風其薰이라隨其材器에各底于成이라出爲 通顯이요處亦名碩이라倡明斯道하야啓我後學이라先生之德 은永永無斁이로다
檀紀四千三百二十五年壬申(1992)十月日
後學成均館敎導員鄭喆基撰
檀紀四千三百三十一年戊寅(1998)正月日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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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谷鄭先生實紀下 / 追錄 / 重刊跋
古之君子丨其道行於時則足以黼黻王猷요澤潤生民 而不幸時不遇矣요道不行矣則立言著書하야以垂訓於 後世하나니唐谷鄭先生이果非其人歟아先生이自南海蘭 浦로移寓咸陽唐谷하야因爲自號焉이라與一蠹鄭文獻先 生으로幷世差後而雖未束脩執策이나其向道慕仰之誠이 深且切矣라戊甲禍後에士氣沮喪하고斯道沈晦하야士之 學問이爲世大禁而所謂士者丨或自放於規矩之外而 苟爲全身遠害之計者丨衆焉則豈不爲世道而深歎也 哉아是時에先生이確立其志하야不懾不撓而惟以倡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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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學으로爲己任하니遠近學者丨聞風坌集而如玉蓮暘拙 介德桃梅諸賢이幷出其門而顯達於世하니人物之盛이 丨 莫過於此時則其啓迪之功이大而倡絶學傳後者非 先生而誰與哉아所著仁義禮智心性理氣格致誠正四 端七情에皆逐字立說하고又於易經에推本說卦之義而 著圖詳明하니其羽翼斯文之功이亦大矣라咸陽七林이 建溏洲鄕賢祠而俎豆하고南海章甫丨建雲谷祠於桑鄕 而虔奉하니此好賢之彝性而先生之盛德光輝丨愈久不 泯則先生은亦可謂身雖窮而道不窮者矣라往昔己丑 에十代孫松隱公大翊이與弟大永과族姪顯楙로拔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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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刊出實記若干帙하야未能廣布러니今大永之孫埈益이 詢議宗中하야以國文懸吐하야使讀者易解하고又附追錄文 字하야重刊廣布하니其追先之孝思丨可尙矣라蓋文者는 載道之器也라先生之道丨載在實記하니是集之行에讀 者沈潛反復하야詳味玩索則豈不知先生之道歟아役 垂訖에埈益이請跋文於不佞커늘固辭不獲而敍之如右 하고亦寓高山景行之忱焉이라
歲戊寅(1998)閏五月日后學礪山宋瓊煥謹跋
唐谷鄭先生實紀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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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谷鄭先生實紀下 / 追錄 / [刊記]
一九九八年七月日
一九九八年七月日
發行處:咸陽郡咸陽邑雲林里
成均館儒道會咸陽支部
發行人:咸陽郡休川面木峴里
成均館典學 鄭埈益
印刷:晉州市鳳谷洞四八二-二九
東洋印刷社
電話(○五九一)四三-四○○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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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可願 晉州人 字敬甫 號淸溪 正統丙辰(1436,세종18)登文科 官牧使 居郡東大樹
고대일록 제2권 / 갑오(甲午, 1594) / 겨울 10월
○ 10월 18일 임술(壬戌)
나는 상주 목사(尙州牧使) 정기룡(鄭起龍)을 만났다. 정기룡은 나와 동성(同姓) 8촌이다. 한 번 보았는데도 이전부터 아는 사이 같아,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덕주 현감(德州縣監) 정가원(鄭可願)의 동모제(同母弟)인 모(某)의 파(派)이다.]
고대일록 제4권 / 정미(丁未, 1607) / 겨울 11월
○ 11월 9일 무술(戊戌)
백토(栢吐)에 가서 정덕옹(鄭德翁)을 찾아갔다. 그래서 서계철(徐繼哲)을 만났다. 서군(徐君)이 《이천세보(利川世譜)》를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한번 보기를 청했다. 세보(世譜) 중에 난포 정씨(蘭浦鄭氏)의 세계(世系)가 있었다. 서군 집안과 우리 집안은 같은 근원에서 나누어졌다. 선군(先君)께서 참의(參議) 서예원(徐禮元)과는 10형제였다. 그리고 서군이 박맹검(朴孟儉)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맹검은 하대련(河大連)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대련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정모(鄭某)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연파(連派)와 세계(世系)를 명백하게 상고하여 볼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눈가에 가득했다. 이로 인하여 세보(世譜)를 만들고자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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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谷鄭先生實紀 ( 당곡정선생실기 ) 저자:鄭希輔 ( 정희보 ) 생몰년 : 1486 - 1547 자 : 仲猷(중유) 호 : 唐谷(당곡) 본관 : 晋陽(진양) 거주지 : 咸陽(함양)
唐谷鄭先生實紀上 / 詩 / 練鋪臺玩瀑 二首
札札聲休織女機하니期將匹練沈汀磯라河西忽報牽牛信하니流下人間也不知라
白練橫斜翠障圍하니劈開山骨減雲肥라漲時河落深舂地요急處雷奔下激磯라何許靈源連海窟기幾多餘沫散林霏라雄觀未遂爐峯勝하니且向前山欲拂衣라
盧光斗 1772 1859 豐川 淸之 感慕堂
盧光履 1775 1856 豐川 胤之 勿齋
盧光懋 1808 1893 豐川 舜嘉 松坡, 懼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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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谷鄭先生實紀下 / [附錄] / 題儒行錄 盧雲堤亨弼
博學眞君子는開來古聖風이라千秋唐谷裡에遺業永無蹤이라
先生所著六經註釋八卷盡失於兵燹故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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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谷鄭先生實紀 ( 당곡정선생실기 ) 저자:鄭希輔 ( 정희보 ) 생몰년 : 1486 - 1547 자 : 仲猷(중유) 호 : 唐谷(당곡) 본관 : 晋陽(진양) 거주지 : 咸陽(함양)
門人錄
盧玉溪諱禛字子膺豐川人官吏判謚文孝享溏洲書院賜額
盧禛 1518 1578 豐川 子膺 玉溪, 迂齋, 則庵, 養休 文孝
李靑蓮諱後白字季眞延安人官判書謚文 淸建院海南
李後白 1520 1578 延安 季眞 靑蓮, 松巢 文淸 延陽君
梁九拙諱喜字懼夫南原人官判書建祠 龜川
梁喜 1515 1580 南原 懼而 九拙庵
姜介庵諱翼字仲輔晉陽人官昭格署參奉 配享灆溪書院
姜翼 1523 1567 晉州 仲輔 介庵, 松庵
吳德溪諱健字子强咸陽人官弘文館典翰 享西溪書院
吳健 1521 1574 咸陽 子强 德溪
蘇暘谷諱世讓字彦謙晉州人官贊成謚文正享益山花山書院
蘇世讓 1486 1562 晉州 彥謙 陽谷, 退休堂, 淸心子, 謙齋, 竹西 文靖
鄭梅村諱復顯字遂初瑞山人立祠居昌
鄭復顯 1521 1591 瑞山 遂初 梅村, 敬齋
曺梅庵諱湜字幼淸昌寧人
曺湜 1526 1572 昌寧 幼淸 梅庵, 梅巖
林灆溪諱希茂字彦實羅州人官禮曺正郞
임희무(林希茂) (1527~1577) 언실(彦實)남계(灆溪)
盧徙庵諱裸字子將豐川人官察訪
노관(盧祼) (1522~1574) 자장(子將) 사암(徙菴)
都養性諱希齡字子守星州人官著作
都希齡 1539 1566 星州 子壽 養性軒
梁竹庵諱弘澤字浩然南原人
양홍택(梁弘澤) 호연(浩然) 죽암(竹庵)
禹愚泉諱績字功叔丹陽人官掌隷院習讀 贈工曹參判
우적(禹績 자(字): 공서(功敍)·호(號): 우천(愚泉)·좌승지(左承旨))
禹 績 愚泉堂 1509~1582
誠菴 禹治洪 성화7신묘1471,성2생 가정27무신1548,명종3졸 78세
愚泉 禹績 정덕4기사1509,중종4생 만력10임오1582,선조15 2월졸 73세
鄭竹軒諱摯字仲尹瑞山人
鄭摯字仲尹瑞山人
邊桃灘諱士貞字□□□□人建祠玄溪
邊士貞 1529 1596 長淵 仲幹 桃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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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灘邊士貞[주:字仲幹長淵人 子判典毉事永仁七世孫 李一齊門人官參奉○以砥行名壬辰爲義兵將○享雲峯龍岩院]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 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 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 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 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현계서원(玄谿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이능간(李凌幹)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ㆍ정염(丁焰) 호는 만헌(晩軒)이며 광주 목사이다. ㆍ변유(邊瑜) 호는 정묵재(靜默齋), 추향되었다. ㆍ정견(丁涀) 호는 육졸(六拙), 추향되었다.
운봉(雲峯)
용암서원(龍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박광옥(朴光玉)ㆍ황일호(黃一皓)ㆍ변사정(邊士貞) 호는 도탄(桃灘), 첨정(僉正)을 지냈다. ㆍ노형필(盧亨弼) 호는 운제(雲堤), 벼슬은 사부(師傅)이다. ㆍ서식(徐湜) 호는 명암(銘巖), 효자(孝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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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부(林眞怤)1586년(선조 19)~1657년(효종 8)
林谷先生文集卷之三 / 詩○七言律詩 / 寄鄭梅村
鄭復顯 1521 1591 瑞山 遂初 梅村, 敬齋
此地休嫌谷口深。生生足處卽安心。魚鱗犬吠冥翁句。溪笱山樽鄭老吟。
甲盛乙衰參往古。家詩戶禮幸來今。秋霖滴碎思鄕夢。一榻蕭然卧病林。
南冥詩。溪聞犬吠緣開戶。山帶魚鱗灌作田。
湖陰詩。山樽釀秫常看滿。溪筍承魚屢得肥。
林谷先生文集卷之三 / 詩○七言律詩 / 謝龍游潭遊人
數十年前過此潭。滿山楓樹葉初酣。深深洞府三千界。曲曲巖崖百二凾。龍蹴禹斤伸更屈。水承堯璧吐還含。吾衰孤負重尋約。回首歸雲面發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