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시즌 2, 팟 캐스트 영성 여덟 번째 에피소드
구원: 고통(1)
이번 에피소드는 지난 창조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짧게 정리합니다
창조에 관련한 세 가지 주제중에 첫 번째가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로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고 일체된 견해를 가지게 하는 믿음의 고백이며 교리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세 위격이시며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스스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드러내셨다는 말은 계시하셨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신학의 기본입니다.
초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아들과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거룩한 일을 행하신 것을 알려주시고 그래서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남을 토대로 삼위일체 즉 세 위격인신 한분 하나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삼위일체론은 조직신학적인 어떤 교리이기는 하지만 초대교회 때부터 중요하게 여겼던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초창기부터 하나님을 세 위격의 한 분이시다는 고백과 성경적영성은 내재적 삼위일체 즉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 어떻게 이렇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드러내심으로 인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어떻게 구원하시고 인도하고 계시는 가에 집중하는 경륜적 삼위일체 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삼위일체에 바탕을 둔 성경적 영성은 온전히 비움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관계 맺으며 살아갈 수 있고, 인격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은 것입니다.
영성이라는 것이 우리 경험이란 부분과 떨어질 수 없으며 기독교인들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경험이 기독교영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영성을 삼위일체에 바탕을 둔 성경적영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성경적 영성의 주인공은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경험이라는 부분 때문에 우리 인생에서도 중심적인 주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살을 맞대고 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적 영성, 기독교영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삶의 경험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갈 것인지(하나님과 우리의 경험이 하나님 자신이 드러내심에 대한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 이 모두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펼치시는 그 창조와 구속의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그분과 함께 언약적 관계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지를 다루는 것이 성경적 영성인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영성이 경험이란 부분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 영성의 주체가 되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드러내심 가운데에서 우리의 잘못된 욕구를 잘 다루어야 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교 영성이 세워집니다.
지난 몇 십년동안 우리가 누구인지를 잘 이해하게끔 발달된 심리검사와 인성검사가 있는데 이과 같은 심리검사나 인성검사라는 것이 우리에게 유용한 정보를 준다는 것은 인정이 됩니다만, 그 내용들 중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일일이 해체하고 조사함으로서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정체성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만 온전한 존재로서 무엇인지 알고 온전한 존재로서 되어져 가는 일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물세례와 성령세례)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세상을 향하여 잘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포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주시는 선포입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말씀으로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사도요한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야기 하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포된 말씀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한 무엇이 있었다는 느낌과 삶의 현장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들이 온 세상에 생명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요한복음1장)
아들 예수님이 먼저 나음을 받고 그 뒤에 세상과 우주 모든 것들이 창조하셨다는 것이 기독교는 항상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서 만이 우리가 온전히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는 우리가 오직 예수님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다고 얘기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와 창조 이야기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참 매혹적인 부분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끝은 비극적인 이야기로 막을 내립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상이 하는 이야기들은 그 안에 창조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다르게 복음 (구원의 기쁜소식) 에는 끝이 없으며 비극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리고 모든 이들이 계속해서 새롭게 살리시는 그 거룩한 삶의 이야기가 오직 복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 이야기는 단순히 세상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창조가 있음은 복된 소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에서 바로 복음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경이로움을 인지하며 품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을 잃어버리게 가로막는 이단이 누구이며 위험은 무엇이냐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이런 영지주의로부터 우리가 온전하게 안전하려면 안식을 지키면서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경이로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우리가 안식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한 번 더 구원과 관련해서 고통이란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지난 창조주와 관련된 구원의 세부적인 부분들을 나눈 것입니다.
삼위일체에 바탕을 둔 우리의 경험이 온전하게 하나 되어야 한다는 주제를 담은 여러 가지 이야기 가운데 성경적 영성의 한부분인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바탕을 둔(삼위 하나님의 자기드러내심) 그 영성을 온전히 회복하고 온전한 존재로 회복되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구원과 또한 공동체와 관련해서 모든 분들의 마음과 생각가운데 어떤 회복과 도전이 삶에 풍성한 열매로 남는 일들이 계속해서 있으시길 간절히 바라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