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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열한 번째
♣ 프뉴마틱코스에서 드리는 영성 :~
어린이를 환대하는 일로서의 공동체 영적 훈련
성도는 삼위하나님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성도는 각 개인별로 독립적으로 환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한몸으로 하나되게 연합되어 그렇게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 모든 환대는 삼위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는 분 사랑으로 낳음을 받으신 분 사랑 그 자체 성부 성자 성령 삼위하나님이 그렇게 한몸이루셔서 서로를 사랑으로 하나되셨던 것처럼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말하는 우리에게라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되게끔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되게 하소서 라고 요한복음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한 아들이 성령을 받았던 것처럼 저들도 즉 교회공동체의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아버지 하나님과 한몸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 교회공동체의 핵심은 바로 환대에 있습니다. 환대받음이 있으며 그 환대를 받으면 한 몸이루게 하신 한 몸이신 삼위하나님으로부터 나온것이다는 것을 성도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기억함으로서 성도들은 그것을 세상나라에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용어는 세상나라는 비기독교인들중 어떤 분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거북하게 여기고 불편하게 여깁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체적으로 성도나 즉 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 다 이 땅에서 즉 우리가 보고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고 마치 다른 세상에 속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다른 나라를 얘기하느냐는 것입니다. 구별을 짓는다. 더 나아가서 왜 성도들은 자신들이 더 낫게 고귀하고 된 존재인 것처럼 표현하느냐 함과 왜 비기독교인들을 가르켜 마치 하등한 존재로 여기는가 하는 이유로 세상사람이다는 용어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여깁니다.
물론 성도가 그 용어를 세상에서 비 기독교인과 차별을 두고 아니면 그들을 무시하는 용어로서 세상나라 용어를 쓴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져 주신 은혜로 환대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주신 것이고 결국 그분의 나라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하나님의 환대하심을 더 증거하고 나누고 선포하라는 의미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성도를 거룩하게 구별하신 이유는 그들만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거룩한 존대로 다시 회복되는 일을 위해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나라라는 용어를 자신이 더 나은 존재로 비유하기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성도가 하나님나라 세상나라 세상사람들 하나님나라 사람들이란 용어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세상이라는 눈으로 보고 발로 땅을 딛고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지만 이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서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록된대로 아들과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회복되고 갱신되는 일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 침투한 존재들과 하나님 나라와 구별되는 세상나라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선포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지 않고 아직도 하나님의 환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그리고 환대를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로서 한몸 한 동체를 이루는 일에 그래서 한 공동체에서 주님께서 환대하심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또한 환대해야 하는 일들을 행해야 합니다.
다른말로 한다면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님이 초청하심에 모일 때마다 주님이 그곳의 한사람 한사람을 환대하셨던 것처럼 그 은혜로 우리는 환대함을 받았으니 내가 당신을 또한 환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요 우리는 그 환대를 매일같이 누리고 나누는 것으로 실제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고 나누는 모습들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와같은 일들이 어린이들에게 전달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각기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들에 그 부모들을 통해서 태어난 하나님의 어린아이들이 진실로 공동체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환대받았다는 것을 그 어린이들의 삶을 통해 증거될 수 있게 해야만 합니다. 특별히 주님의 몸된 공동체는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그 날에 함께 모여 주님을 송축하고 말씀을 듣고 주님이 초청하는 축제의 장인 식탁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모두가 다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환대함을 받아서 주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다짐함을 공동체가 확증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그래서 물세례를 받은 그들이 다 주님의 식탁으로 모이게 됩니다. 성도라는 사람은 이렇게 물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주님의 식탁으로 나올 때 주님의 몸과 보혈을 빵과 포도주로 서로 먹고 마시며 나누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이 일에 헌신해야 하며 이 일을 통해서 주일예배가 무엇인지를 주님이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축제에 초청하고 계시고 함께 하라고 환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합니다.
그것을 공동체의 어린이에게도 동일하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빛 교회에서는 매주일 이 교회에 속한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에게도 주님의 몸과 보혈을 모든 성도들과 같이 하기를 원하는 어린이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줍니다. 그 때 어린이들에게 볼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가 받을 때 아멘으로 화답해야 해 하고 알려 주지 않아도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처럼 ‘아멘’ 하며 고백하는 것이 ‘네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의 사랑으로 환대받는 존재로서 이 잔치에 더불어 참여하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환대하며 섬김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아멘을 어린이들도 고백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비록 어린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형제요 자매로 부르며 주님의 거룩한 몸이요 보혈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그들이 아직은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이 환대받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일이되고 그 분위기에서 그 어린이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신앙으로 더욱더 성숙해지며 주님안에서 한몸 이루게 되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팟 캐스트를 들으시고 이 글을 보게 된 모든 분은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예배에 환대 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송축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여 잔치상을 같이 나누는 그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에서 말씀의 예전만 있고 성례전으로 주님의 식탁이 계속해서 차려지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공동체를 위하여 중보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에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공동체로 확증된 그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축제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잔치상에 앉아 같이 먹고 마시며 주님의 환대를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도록 그 일이 공동체 안에 일어나도록 중보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적훈련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린이만을 위한 영적인 훈련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위한 영적훈련이다고 말합니다.
♣ 코포스에서 드리는 일 :~
지구에서 탈출로부터의 일인가 아님 지구를 변혁하시고 완전히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참여하는 것으로서의 일인가
엘론 머스크와 제프 베조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전세계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개인이 주도하여 운영하는 민간 우주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로켓도 만들고 우주선도 만들어 조만간 화성에 사람들을 이주시킬려고 계획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쏟아붇는 돈이 어머어마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에 이야기중 화성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지구의 법에 영향도 받지 않으며 그들 나름의 자치권을 가지고 알아서 살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궁인들은 그 일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어린시절에 읽었던 우주과학공상만화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현실의 사람이 실현가능하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화성이주 계획을 보면 지구에서 사는 것을 그들은 왕복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일은 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전부 화성에 가면 그곳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아마존의 CEO인 제프 베조스는 몇 년전에 우주탐사에 열광적으로 투자도 하고 했지만 지금은 우주를 탐험하는 것보다 지구환경 보존을 위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이 환경이 어지러워지고 망가지고 단 다음에 이 지구에서 우리가 살수 없을 때 이주가 가능한 횡서이 있는가 하여 열심히 탐사를 했다고 합니다. 조사를 한 결론은 이 우주에는 지구만한 횡성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합니다. 더 이상 지구의 환경은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지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합니다.
두 명의 사업가가 지구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들이 일에 사활을 걸고 있다면 엘로 머스크의 경우는 이 땅으로부터 탈출하여 어디론가 이주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닐찌라도 기독교안에도 분명한 대비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서 탈출 즉 이 땅에서 벗어나 저 천국에 가기위한 그리고 그곳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고 칭찬을 받기 위하여 하게되는 일로 인식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성도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와 온 우주세계를 포함하지만 그 중에서도 지구를 변혁시키시고 아름답게 회복하신다 그리고 완성하신다는 그 일에 우리가 함께 합력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하는 거룩한 일이다고 말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탈출로서 일이냐 아니면 이 땅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것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합력으로서의 일이냐 이 두 가지의 관점이 대립된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 땅으로 탈출로서의 일, 그런일은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주어지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 예루살렘안에서의 삶과는 연속성이 부과될 수가 없습니다. 불연속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땅을 변혁시키시고 완성하시며 우리와 함께 그 일을 하신다 것으로 이야기하는 성도들에게는 지금 이 땅에서 하는 일과 또한 새 하늘 새 땅에서 일어나는 삶 가운데 연속성이 있다고 정의 내립니다.
불연속성이냐 연속성이냐 이런 이야기들을 생각하는 성도들은 많지 않지만 이번에 다시한번 여러분들이 지금하고 있는 일이 연속성으로 보시나요 아니면 불연속한다고 보십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생각보다 이런 것에 생각해 볼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우리는 다시 한번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불연속한다 연속한다는 식의 개념들이 이제는 조금 더 현실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명의 유명한 미국의 갑부들이 인류문명을 이끌어 간다고 얘기를 듣는 사람들입니다. 이중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단초를 가지고 극명하게 대립되는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15:58, 계시록14장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것들이 헛되지 않는다는 얘기로서 그 단어를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는 수고 노동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의 연구소의 이름도 코포스라고 지은 것입니다. 이 단어가 결국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하고 있는 일이 헛되게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는 얘기를 성경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은 연속하는가 아니면 불연속하는가 탈출로서의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이 땅을 변혁시키시고 완성하시는 것에 우리가 순종함으로 합력하여 참여하게 되는 일인가. 우리가 어떤일인가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포이에오에서 드리는 예술 :~
창조적 예술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일의 중요성
지난 이천 년도를 생각해보면 교회에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설교 부흥회를 뛰어넘는 여러 가지 행사나 모임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함께 준비한 것을 주변의 친구들을 초청하고 발표하는 문학의 밤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목요일마다 목요경배와 찬양이라는 것을 통하여 그 지역의 젊은이와 학생들을 섬기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조 전도사님은 기독교 음악계에서 인지도가 있는 분으로 기억합니다. 그분을 사역자로 청빙하여 전적으로 찬양을 맡겨 진행된 일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교회는 최집사님이 그 당시 교회를 섬기시면서 기독교 음악계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끼치는 분이셨는데 그분을 중심으로 금요일마다 CCM 가수분들을 초청해서 찬양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악보집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한 권을 사서 그 내용을 다시 편집해서 찬양대에도 사용하고 경배와 찬양 집회에서 사용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작권이라는 것이 분명하지도 않았지만 잘 지켜지지도 않는 시절인 것 같습니다. IMF 이전엔 그나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던 시기라 CCM 가수분들이 저작권 보호를 굳이 받지 않았어도 어느정도 생활이 가능했던 그런 시기가 아닌가 봅니다. 하지만 IMF 가 경제계를 흔들면서 교계에서는 많은 예술적인 부분과 음악적인 부분도 초교파적으로 CCM 가수분들을 초빙하여 집회를 하기보다는 교회 자체적으로 팀을 꾸려서 그들로 하여금 봉사하게끔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초교파적으로 사역하여 나왔던 앨범도 거의 사지 않고 방송도 있는 것도 아니니 자연스럽게 초청이 줄어들고 교회도 관심이 적어져서 교회음악을 하고 예술활동을 하는 예술가에 대한 지원이 많이 감소하였던 시기가 IMF이후입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저작권에 대한 부분이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그냥 사용하던 것이라면 이제는 구입하여 사용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작권에 대한 인식과 예술활동을 하는 분들의 저작권보호를 통하여 그분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지원을 받고 생계를 이어가게 되던 부분들이 어느정도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저작권 보호를 받는다 또는 그런 일을 통해서 사용료를 내고 사용해야 한다는 개념이 아직도 낯설게 느끼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가 저작권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그리스도 예술가를 통해서 창작되고 창조된 부분들을 우리가 복제하는 일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예술을 통한 신학‘을 쓴 제레미 벡비(Jeremy Begbie)는 기독교 예술에 대한 창조성과 저작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술가는 주변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관찰력을 기반으로 우리가 감상할 수 있도록 세상에 대한 통찰력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예술가는 바로 그런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술가는 뭐냐하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단순히 지금 우리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만이 아닌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인 것 그 두 영역을 같이 자신의 영적인 관찰력 또는 통찰력을 기반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아직도 타락하고 회복되지 않아 무너질 것들이 많지만 또한 동시에 회복하시고 구속하고 계시며 아름답게 바꿔가시고 계심을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술가들이 표현해 낸다 그래서 성도들은 감동하고 감사하며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플라톤이 주장한 것은 우리가 만약에 복사본을 다시 복사하는 것은 어떤 예술가가 창조하여 내놓은 것을 그것을 복사하고 또 복사하는 일을 하게 되면 결국에 원본을 통한 예술가의 영감과 표현들에 대한 의미가 완전히 희미해지고 불안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술은 우리로부터 한 걸음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예술이 수정되거나 개량하려 한다면 진리가 크게 손상된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저작권을 보호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저작권을 보호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른말로 한다면 한 창작물은 그 작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것을 그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자를 통해서 온 것을 그 사람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다는 이야기를 하는 행동을 멈추는 것이 바로 저작권을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음악가나 예술가가 음악이나 미술 또는 건축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영감을 부여받아 이 땅에서 구속하시고 회복하시며 완전케 하시는 아름다움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낸다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주신 것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주신 것들이 있다는 것으로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에서 결국에는 그 일을 행하는 예술가의 활동을 보호해주고 그 사람이 그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또한 우리가 받은 복을 그도 또한 누리게 되는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또한 우리가 받은 복을 그도 또한 누리게 되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작권을 보호하는 활동이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사람을 통해서주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무시하거나 무턱대고 복제하고 또 복제한다면 정작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움이 그 사람을 통해서 주신 아름다움의 원 의미를 깨달음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냥 그것을 마음대로 해석해내는 일들을 많이 합니다.
예를 보면 얼마 전에 어느 기도원에서 찬양하는 모습을 SNS를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찬양한 곡이 ‘길을 만드신 주’(Way Maker : Osinachi Kalu Okoro) 였습니다. 이곡은 영어권에서 창작되었고 우리나라에 번역되어서 많이 불려지고 있는 찬양입니다. 아마도 거의 많은 교파 교회에서 불려지는 곡은 2006년도에 나왔던 ‘위대하신 주’ 이후에 오랜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기도원에서 원장님 멘트가 이 찬양은 영감받은 찬양이다 그러니 우리도 이 찬양을 통해서 영감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이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찬양을 통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뉴앙스가 묘한 것은 이 찬양이 마치 기도원이 부르는 찬양인양 그 가사가 원래 번역된 것이고 원 가사를 쓰신 분이 따로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여기서 부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앞에서 영감이 되는 찬양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그런 찬양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며 이 찬양의 가사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은 이 기도원의 은혜다는 식의 멘트는 원작자의 교회의 찬양팀이 만들어낸 것과 그것을 번역한 분의 저작권을 보호하지 않는 것이 마치 복제하여 도용하는 느낌이 마치 기도원의 분위기에 맞춰 해석과 박자와 목소리까지 변질됨으로 참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라 말합니다.
문제는 그분들이 원작자가 원래 창작했던 곡을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고 재해석은 재해석일 뿐입니다. 그것은 원래의 해석이요 영감이 우리에게 나는 이렇게 한다는 것으로 나오는 것이지 원래부터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차 창작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 기도원에 있는 찬양팀은 당신이 원 영감을 받아서 찬양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렇게 부르고 메로디 목소리 박자 리듬이 이런 것이다는 식의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면 하나님이 원래 그 곡에 영감을 불러 넣으셨던 그 작가에대한 것은 그 은혜가 온전하게 다시 그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사람은 쓸쓸히 배제되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납니다.
원작자에게 합당한 찬사를 보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원작자를 배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영광을 올려드린다고 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이다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의 원창작 부분인 저작권을 보호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지혜 은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충분히 감동을 받고 그것에 대해서 재 해석을 하는 것은 그래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수 있겠지요. 마치 자신의 것으로 원작자 원창작 예술가는 배제시켜놓고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질서에 비추어볼 때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예술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의 저작을 보호하는 일들에 더 신경쓰고 마음과 뜻을 모아서 사랑하며 지켜주는 행해야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아름다운 예술 활동이 더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얘기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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