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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탑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또 하나의 순직비는 이리역 폭발사고로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경에 일어난 사고로, 개요는, 사고 이틀 전인 11월 9일 11시 인천시 남구 고잔동에 있는 한국화약주식회사 제1공장에서 상기 화약류를 싣고 9시 43분 광주를 향해 출발했다. 화약열차는 그날 밤 11시 31분에 15량의 다른 화차와 함께 이리역에 도착했고 1605호 화물열차에 의해 중개되어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하기 위해 사고지점인 4번 입환대기선에 머물러 있었다.
사고 당시의 철도수송규정 제46조를 보면 화학약품의 수송은 되도록 도착역까지 직통하는 열차를 이용 수송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화약열차는 광주로의 연계수송을 위해 무려 22시간여 동안이나 대기 중에 있었다. 한편 한국화약주식회사의 수송원이던 신무일(38세)은 화약류의 직송 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지연시키는 데 대해 이리역 측에 항의를 하였으나, 묵살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곁들인 식사를 한 뒤 다시 2차로 역전주점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고 얼큰한 취기에 초겨울의 한기를 느끼면서 화약열차에 들어갔다.
화차 속이 어두웠기에 그는 논산역에서 구입한 양초를 찾아 불을 붙여 화약상자 위에 세워놓은 뒤 취기에 한기가 엄습해오자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 사이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피해상황과 신무일 씨 행위에 대한 잘못에만 초점을 맞추었지, 왜 직송열차가 22시간을 대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철도역의 화차 배정 직원들은 급행료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목적지에 빨리 화물을 보내고 싶은 화주는 역 직원에게 늘 뒷돈을 주어왔습니다. 여름에 생선이나 제철 과일류 운송에 특히 부정이 많았는데 급행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늑장운송으로 화물 값이 절반으로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이러한 관행으로 화약열차는 그저 마냥 대기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며 호송원 신무일 씨는 이리 역에서 20시간 이상을 대기하게 되자 화가 나 역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것입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한국화약에 있었습니다.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조차 탑승할 수 없는데도 이를 무시했으며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는 점, 호송원은 총포화약류 취급면허가 있어야 하는 점, 화차 내에 화기를 들일 수 없는 점 등을 깡그리 무시했습니다.
때문에 한국화약 사장을 비롯한 간부, 철도청 직원들이 속속 구속됐고 한국화약은 회장 이하 전 직원 이름의 사과문을 내고 ‘이리 복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폭발참사인 이리 사고는 바로 부정과 부패, 적당주의가 팽배한 당시 사회의 치부가 갑자기 폭발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의 드러나지 않은 실체입니다. 이로 인하여 다친 사람들은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고인의 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 자료들에서 발췌 후 편집
2022년 6월 16일 목요일 저녁. 숙소를 잡고 찾아간 익산역.
[화약사고]하면 이리역 폭발사고를 알 수 있다.
그 당시 폭발사고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비가 익산역에 세워져 있다.
화약류 전산시스템을 연구하면서 익산역 추모비를 알게 되었다.
연구시간들의 중간중간에 이리역의 폭발 추모비를 생각하면서 어젠가는 찾아가서 꼭 참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2022년 6월 16일날 저녁밤에 익산역을 찾아가게 되었다. 저녁에 숙소를 잡고 아침일찍 깨끗한 맑은 정신으로 참배를 하기 위하여 여유가 있는 시간을 활용하여 하루전 늦은 저녁에 익산역으로 갔다. 취침을 하고 이른 아침에 아침식사를 거르고 찾게 된 꽃집들.
17일 추모비 참배를 하기 위해 아침일찍부터 꽃집 6곳을 찾아 다니며,
참배를 위한 헌화꽃을 찾았는데 원하는 꽃이 없었다.
마침 익산역 역사내 꽃집을 발견하여 확인해 보니 원하는 꽃은 있었는데
꽃집 주인이 없어서 결국 꽃은 구할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곧장 네이버 지도에 있는 (이리역 폭발희생자 추모비)를 찾아갔다.
그런데 찾아가는 길 입구에는 관계자외 출입 불가라고 써져 있어서 들어갈까 고민했다.
마침 출근하는 분이 있어서 물어보고 위치안내를 받고 들어갈수가 있었다.
추모비 위치를 찾은 곳은 아무것도 없이 주차장으로만 되어 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작으만한 풀숲으로 감춰진 순직비라는 비석이 있었다.
외롭게 세워져 있는 순직비
익산역 주변에는 추모비가 4개 있습니다. 두 개는 광장에 있으며 1950년 7월 11일 미군이 이리역을 폭격하여 민간인 희생으로 인한 비와 일제 강점기 때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비입니다. 나머지 두 개는 역 내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미군의 폭격에 의한 비와 1977년 11월 11일 화약 폭발사고 때 돌아가신 철도원의 넋을 기리는 순직비입니다. 그 중에 하나인 순직비 입니다. 위 사진은 익산승무사무소 앞에 있는 것으로 1958년 건립되었습니다. 현재, 추모제는 지내고 있지 않으며 승무사무소에서 주관하여 비를 세운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순직비 앞에 당연히 있어야 할 안내문이 없어서 어떤 이유로 순직비가 세워졌는지 익산승무사무소에 질의했더니, 6.25 전쟁 당시 이리에서는 기관고(기관차사무소)가 제일 큰 건물이었답니다. 이 때문에 미군의 폭격 대상이 되어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로 알려져 있습니다.
폭격 사건의 진상
1950년 7월 11일 당시 미군은 천안을 점령하고 남진하려는 북한군에 맞서 천안부근 정의라는 마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와 같은 시기 한국군은 진천-청주지역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뺏고 빼앗기를 거듭하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접전지역과 적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었던 익산은 전쟁의 기운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평온하였다.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들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일상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시간인 11일 오후 2시를 넘어서 비행기 두 대가 이리역을 중심으로 하늘을 2-3바퀴 맴돌았다. 당시는 전시상황이었기 때문에 철도기관사들은 물론 민간인들은 습관적으로 비행기의 국적을 살펴본다. 그날 2대의 비행기는 중앙에 별 모양과 그 양옆으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미공군의 마크가 선명한 미군의 중폭격기 B24 두 대였다. 그 전에도 미군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종종 본적이 있던 철도청 소속직원들은 그 날도 그냥 흘려보내려다 아군임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를 흔들며 미군기를 환영하였다. 그 순간 익산역 일대를 선회하던 폭격기는 시커먼 무엇인가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직원들과 민간인들은 낙하산이 떨어진다고 신기해하며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었다. —(중략)—곧 이어 굉음과 함께 엄청난 화염이 이리역 일대를 삼켜버렸다.
미군폭격기가 이리역 일대에 사재하여 작업 중이던 기관차는 물론 구내시설에 대해서도 가공할 폭격을 가하였다. 이리역 직원들은 폭격을 받으면서도 적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하여 피신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서서 두 손을 저으며 소리소리 외쳤다. — 생각다 못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사무소로 뛰어갔던 직원들은 그대로 폭풍과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지구가 갈라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사람들은 어디론지 없어졌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이리역 일대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고 당시 이리운전사무소에 근무하던 직원들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리거나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이리역 구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은 이리역과 접해있었던 송학동 주변의 50여 채의 민간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50여 채의 민가에는 일가족, 아니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낸 부모들이 일상생활에 전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격으로 50여 채의 민가는 온데간데없었고 민간인들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리역 일대를 무차별 폭격하여 약 2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미군 폭격기는 약 10분 뒤 또 다시 이리역 상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변전소와 전라선 철길 수변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하였다. 변전소 주변에는 5일 만에 우시장이 열려 김제, 군산, 임피 등에서 장을 보러 온 수많은 민간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라선 철도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군에 입대하려는 젊은이들이 김제 방면에서 이리역을 향해 변전소 옆을 걷고 있었다. 2번째 폭격으로 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군에 입대하려던 청년들 약 100여명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미군폭격기에 의한 양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4일 후 익산역 일대의 상공에는 일명 ‘호주기’라 불리는 미 공군소속의 전투기 4대가 나타났다. 전투기들은 편대비행으로 익산역 상공을 상회하며 일대를 살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또 다시 기수를 아래로 돌려 저공비행을 하면서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있던 사람들과 무고한 양민들을 향해 로켓포를 쏘고 기총소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 민간인들을 직접 겨냥한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는 30-40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또 다시 몇 십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었다.(2003년 제4회 1950년 미국 이리폭격 희생자 추모제 자료집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순직비 뒤에 쓰인 비문.
내용도 없고 설명에 관한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인터넷에 보았던 사진과는 다른 추모비라서 분명 다른곳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찾은결과 역사를 통하여 기차길을 넘어 정반대편에 다시 찾은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비).
여기도 역시 입구쪽에는 관계자외 출입불가라고 적혀있어 추모비를 찾는 분들께는 혼돈이 생길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화없이 찾은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비). 먼저 묵념과 함께 "다시는 우리나라 이땅에 이리역 폭발사고 처럼. 화약으로 희생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펴 주세요" 라고 빌었고,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
18년이라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화약류관리시스템. "우리나라 화약류 관리시스템을 적용할 수 있도록 그 희망과 사업을 위해 천운을 주십시오. 이 또한 국민의 생명과 나라 위기관리를 위한 일이며, 또한 화약산업의 발전과 국가를 위한 일이오니 일이 잘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간절한 마음과 염원을 담아 참배를 했다.
기념탑을 돌면서 탑에 쓰여진 글과 사진을 보며, 당시 있었을 고통과 슬픔을 생각했다. 그리고 기록을 위해 나홀로 사진을 찍었고 다시한번 눈을 감고 마지막 기도를 하며, 추모비를 뒤로한채 발길을 돌렸다. 익산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비를 생각해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그것은 누구라도 이리역 폭발사건을 기억하고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추모비를 알리고 1명이라도 추모비를 찾는 이에게 헛걸음 하지 않도록 지도상에 잘못 표기된 위치를 바로 잡는 것이었다. 이 중요한 위치정보를 왜 확인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위치변경이 이고나서 변경을 왜 안했는지? 익산역에서 관리하는 것인지? 익산시청에서 관리하는 것인지? 신경을 안쓴듯 해 보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을 텐데 위치정보가 맞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애석했다.
내가 이 일을 해야 겠다고 다짐하고 정보수집과 익산역 관계자를 찾아 연락을 통하여 다시한번 확인후 지도표기를 바로잡는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사진과 주변건물 기준사진을 증거로 준비했고. 가장많이 쓰여지는 네이버 지도에 잘못된 위치정보를 의례하여 수정작업을 요청 했다. 그 다음 검색포털사이트 다음에 카카오맵에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비) 등록요청을 했고 사진과 정확한 위치정보를 주었다. 이를 계기로 국민들이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비를 찾아서 희생자 영령에 대한 추모와 함께 똑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이리역 폭발로 희생된 영령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추모비를 찾아올 수 있도록 인터넷 지도사이트에 제대로 표시되게 하는 것이었다. 수정요청을 하기 위한 추모후 다음날 바로 작업에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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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위치를 수정하기 위한 증거사진 준비
22.6.18 네이버측에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탑] 검색위치를 변경요청하였다. 아래 그림과 같은 내용을 캡쳐해 보았다.
위치정보를 수정함으로 희생자 추모탑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희생영령에 대한 참배를 통하여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바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