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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직분을 주옵소서
1999년 2월 1일 / 여전도회 총회 / 요 2:1-11
자신의 소유나 지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이 빠지게되는 함정이 비교의식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적용되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이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속담입니다. 하찮아 보일지라도 일단은 자족하는 자세를 생활화하면 자연스럽게 감사의 생활로 연계가 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신분과 축복은 더해 질 것입니다.
● 민수기 4장은 성막이 다른 곳으로 옮겨질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광야의 성막을 요즈음 말로 표현한다면 조립식 이동식 교회입니다. 성막 위에 있는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떠올라서 움직이면 이스라엘 전체가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서 행진하여야 합니다. 조립식으로 되어 있는 성막은 해체작업을 거쳐 고핫 자손,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들에 의하여 운반되었습니다.
고핫 자손은 엘르아살의 감독 하에 해달의 가죽, 수놓은 세마포, 순청색 보자기. 청색보자기. 홍색 보자기 등으로 포장된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들을 어깨로 메어 운반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때 성소의 모든 성물들의 포장은 제사장(아론의 아들들)이 담당합니다. 단지 고핫 자손은 포장되어진 성물들을 어깨로 메어 운반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두 가지 엄한 명령이 주어졌는데 한가지는 어깨에 "메어 운반하라"이며 다른 한가지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를 잠시라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민4:15)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 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민4:20)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
고핫 자손의 입장에서 가지는 불만과 불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레위 지파인데 제사장들은 옷도 멋이 있고 자신들처럼 힘든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어깨로 짐을 나르는 막 노동을 하여야 합니다.
실제로 고핫 자손 중에 "고라"라는 사람이 모세와 아론을 대하여 반역을 일으킨 내용이 민16장에 나옵니다.
(민16:1-3)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 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스스로 높아지려는 생각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불만이 합하여 지면서 교만과 반역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은사를 감사하고 내게 맡겨진 역할에 대하여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투덜거림과 억지봉사는 제2의 고라당을 형성할 뿐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깨달은 고라 자손은 이러한 시를 지었습니다.
(시84:10-11)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 군대는 계급사회입니다. 병들이나 위관, 영관의 입장에서는 별을 단 장군이 하늘처럼 보이게 됩니다. 별을 단 장군도 화장실에 갈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젊은 군목의 전도로 별을 단 장군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교회 청소를 제가 맡아서 하고 싶습니다." 사단장이 교회청소를 하겠다는 말을 들은 목사님은 망설이다가 다른 일감을 이분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사단장님은 매주일 교회 입구에서 들어오는 모든 사병들에게 예배 순서지를 나누어주십시오." 이제까지는 경례를 받는 위치에서 한사람 한사람마다 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모든 부하들을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성전의 문지기가 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게르손 자손도 아다말의 감독 하에서 성막의 부속물을 어깨로 운반하였습니다.
(민4:25-26) 곧 그들은 성막의 앙장들과 회막과 그 덮개와 그 위의 해달의 가죽 덮개와 회막 문장을 메이며 26) 뜰의 휘장과 및 성막과 단 사면에 있는 뜰의 문장과 그 줄들과 그것에 사용하는 모든 기구를 메이며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맡아 처리할 것이라
므라리 자손은 제사장 이다말의 감독 하에서 성막 중에서 제일 무거운 부분들을 운반하게 되었습니다. 므라리 자손은 왜 우리만 무겁고 힘든 일을 해야 하느냐는 항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성실하고 묵묵히 직무를 다 감당하였습니다.
(민4:31-32) 그들이 직무를 따라 회막에서 할 모든 일 곧 그 멜 것이 이러하니 곧 장막의 널판들과 그 띠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32) 뜰 사면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그 말뚝들과 그 줄들과 그 모든 기구들과 무릇 그것에 쓰는 것이라 너희는 그들의 맡아 멜 모든 기구의 명목을 지정하라
이들이 각자의 직무를 감당하는데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성물을 만지거나 들여다보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철저한 겸손). 반드시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정성을 다하는 봉사).
▶ 삼하 6장에는 이러한 원칙을 무시하였던 웃사가 즉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하6:6-7)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법궤가 옮겨질 때는 성직을 위해 구별된 레위지파 중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어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도 아닌 웃사가 감히 하나님의 법궤를 만진 것입니다. 법궤가 다윗 성으로 옮겨진다는 기쁨 때문에 원칙을 무시한 체 열심만 앞서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구별된 성직자들의 어깨에 메어 옮기라는 명령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하게 그리고 귀하게 여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소들이 놀라 뛰고 법궤가 흔들리며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손을 내밀어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열심도, 정성도, 염려해주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직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법궤가 떨어지려고 한들 그것이 떨어지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은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기는 큰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수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기적을 일으킴으로 우상들을 다 때려부순 다음에 블레셋 사람이 모신 수레에 실려 법궤가 되돌아오게 하셨습니다.
▶ 사랑하는 서울지방회 여전도회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곳이요, 하나님을 위해 세워진 곳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교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는 지식과 내가 하는 열심만으로 교회가 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법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만 공연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웃사와 같이 월권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울 왕이나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의 종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자기네들이 하려다가 축복 대신 재앙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복음은 이렇게 많은 학자나 재능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가지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 반면에 무식하고 연약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없이 많은 업적이 남겨졌습니다.
수많은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기초로 해서 살지 아니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산 사람들은 비록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론상으로 잘 몰랐지만 이들은 진리를 위해서 희생하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나 그들의 직업은 보잘 것 없어도 그들이 남긴 신앙적 행위(업적)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책 한 권 없고, 그들이 남긴 명언 한 마디 없어도 그들이 남긴 신앙적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것입니다.
▶ 성경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나의 잔칫집의 하인들이 이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랑 신부나 또는 손님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들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제일 먼저 기적을 베푸신 가나의 잔칫집은 기독교 복음의 위치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잔칫집은 교회를 상징하기도 하는 장소이기도 한데, 이 잔칫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청을 받은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신랑 신부가 있었으며, 손님으로 먹고 즐기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 잔치를 주관하는 연회장도 있었고, 물을 긷고 험한 일을 하는 종들도 있었습니다. 이 중에 오늘 우리가 함께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인물은 물을 길어다 돌항아리에 부은 하인들입니다.
1. 이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수고하고 봉사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잔칫집에서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먹고 노는 손님도 아니며 그렇다고 연회장과 같은 직분자도 아닙니다. 이름도 없이 믿음을 가지고 땀흘려 수고한 하인들이 이 잔칫집에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 누구인가? 목사님만은 아닙니다. 손님처럼 교회 생활에서 교회의 어려움을 모르고 그저 교회에 왔다가 가는 그러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인들처럼 교회의 어려움을 안고, 남 몰래 눈물을 흘리며 기도도 하고, 땀 흘리는 수고하고, 뼈빠지는 봉사도 하는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교회는 더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교회에 오셔서 묵묵히 수고하고 희생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지금도 돌 항아리같이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그곳에 예수님은 축복의 생수를 채워 주시고, 나중에는 귀한 포도주로 변화시켜 남들을 기쁘게 해 주는 큰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2. 이들의 순종으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종들은 주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순종했습니다. 물을 채우라고 했을 때 순종했습니다.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을 때 순종했습니다. 순종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보이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적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이 남들에 비해 부족하고 또는 없을지라도 순종하는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실 때 먼저 순종을 달아보실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많은 재능 중에서도 순종하는 사람을 가장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 돌 항아리는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물이 두말 반정도 들어가는 돌항아리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채운 것은 밥상에 오르는 먹는 깨끗한 물이 아닙니다.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정결한 물이 아닙니다. 발 씻기는 물로 별로 귀한 것이 아닙니다. 천하고 천한 것이 천한 사람들에 의하여 천한 곳에 들어갔을지라도 순종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곳에 기적을 만들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는 종들을 통하여 많은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지금도 그리하실 것입니다. 우리네들도 이렇게 쓰임을 받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하인들과 같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어린양과 같이 순종했을 때가 아닙니까? 오늘날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기 위하여 우리들 중에 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교회에는 바리새인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예수님과 같이 명령만 하고 자기 자신들은 손끝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고 또 마리아처럼 하인들에게 순종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이만큼 하면 됐지’하며 일하던 손을 놓고 손님들처럼 편안히 먹고 즐기려 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의 공생애를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었을 때에 초기, 중기에는 많은 말씀을 전파하시고 기적도 베푸셨지만 말기로 가면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질 것을 명령하시거나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전파하신 말씀을 실천으로 보여 주시는 시청각 교육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인들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이 귀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마당에 놓인 항아리처럼 사람에게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가진 재능이나 환경도 별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순종함으로 귀히 쓰임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 대개 사람들은 순종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종이 물을 항아리에 채우는 것은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요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기 어려워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보다 우리의 불신앙과 불성실이 순종의 장해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떤 축복이던지 반드시 이면에 성도의 순종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으면 좋을수록 늘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어떠한 일에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생활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 가는 생활의 증거입니다.
하인들이 순종했을 때 그들의 수고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처럼 순종하는 사람은 그 열매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 종들은 순종으로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웠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아까 그들이 갖다 채워둔 물을 포도주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을 항아리에 붓는 일보다 사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물을 가져다가 주면서 이것이 포도주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일단 포도주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을 믿었던 것입니다. 현재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지 않았지만 어느 시점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바로 그들 자신이 조금 전에 갖다 부은 물로 말입니다. 물을 가져다 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기적을 믿지 않고는 감히 엄두도 못낼 순종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믿음처럼 쉬운 것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적을 베푸는 것도 아니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인데도 왜 그렇게 나 자신부터가 잘 안 믿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예 종들처럼 처음부터 순종하여 순종으로 끝마칩시다. 히11장에 나온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그분의 명령만을 순종한다면 오히려 기적은 쉽게 일어날 것입니다. 한 번 다시 백부장의 믿음을 생각하며 우리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믿음이 더하여 지기를 기도하십시다.
●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실에 대하여 3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연회장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여 신랑을 불러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는 반응 즉 맛있는 좋은 포도주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탄을 하였습니다. 되어진 사실 즉 기적만을 보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기적을 통하여 더 좋아지는 경우입니다.
▶ 물 떠온 하인은 어디서 포도주가 났는지 알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왜 포도주가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해서, 누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에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진리를 나름대로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결 론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여행을 하던 중 고린도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서신은 비서 더디오가 바울의 구술을 받아 적었고 여집사 뵈뵈가 전달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교회에 쓸 때마다 종이란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전체인구의 절반도 넘는 노예가 살았는데 그들은 전혀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생산수단에 불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노예와 당나귀는 같다. 노예는 말을 할 수 있고 당나귀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다를 뿐이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반나체가 된 노예가 시장에 나와 있으면 지나가던 자유인이 마음에 드는 노예를 손가락으로 지적하고 값을 지불하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노예란 비참하기 그지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종'은 바로 이 노예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에게는 족보도 없고, 이름도 없고, 인격적인 대우는커녕 짐승과도 같은 대우를 받을 뿐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노예가 되기를 자진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분에서 `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이기에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기쁨과 열정에 들떠서 종이 된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세상의 구원자 예수가 핍박자의 괴수이며 살인자인 자기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도의 직분까지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울은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이 경험 때문에 그는 그의 길이 험악한 십자가의 길(행9:16)이며, 멸시와 조롱의 길(고전4:9)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종으로서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이제는 빚진 자(14)가 되어 많은 영혼들을 위해 죽을 각오(행20:24)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에게는 갖추어야 할 자격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3중 부정, `나는 주인이 아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 마음대로 살면 안 된다'가 그것입니다.
어떠한 핍박도 두려워한다거나 피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앞에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갑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맡겨진 일에 기쁨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을지라도 십자가에 못박혀 무덤 속까지 들어갑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이와 같은 충직한 마지막 때의 추수꾼으로 부르시고, 그러한 일꾼들에게 능력을 베푸사 그들을 통하여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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