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
2.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27일 을사 2번째기사 / 조견·한상경·임언충·황거정·한충·민여익 등을 개국 공신에 추록케 하다사에게 교서(敎書)를 내렸다. "상장군(上將軍) 조견(趙狷)·우승지(右承旨) 한상경(韓尙敬)·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임언충(任彦忠)·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황거정(黃居正)·대장군(大將軍) 장사정(張思靖)·한충(韓忠)·병조 의랑(兵曹議郞) 민여익(閔汝翼)은 개국 초기에 또한 각각 공이 있으니, 조견은 윤호(尹虎)의 예에 의거하고, 나머지 사람은 안경공( 安景恭)의...
3.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3월 5일 갑진 1번째기사 / 이승원을 양광도 도절제사로, 조견을 경상도 도절제사로 삼다이승원(李承源)을 양광도 도절제사로 삼고, 조견(趙狷)을 경상도 도절제사로 삼았다.
4.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3월 12일 을사 1번째기사 / 차준과 도만호 안처선 등에게 술과 채단 등을 내려 주다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차준(車俊)에게 술과 채단(綵段)·홍초(紅綃)를 하사하고, 또 도만호(都萬戶) 안처선(安處善)에게도 차준에게 준 수대로 주었으며, 겸해서 도절제사 조견(趙狷)과 도관찰사 최유경(崔有慶)에게도 술을 하사하였다. 차준의 처부(妻父)의 상고(喪故)가 있다는 말을 듣고 쌀과 콩 1백 석을 주었다.
5.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1월 6일 기미 1번째기사 / 대사헌 민여익이 지중추원사 조견과 한성 윤 신효창을 탄핵하려다가 도로 탄핵당하다대사헌 민여익(閔汝翼)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견(趙狷)과 한성 윤(漢城尹) 신효창(申孝昌)을 탄핵하였다. 조견은 합포(合浦)의 절제(節制)로 있었을 때, 왜구(倭寇)를 제어하지 못하였는데, 신효창은 당시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조견을 탄핵하지 못하였다. 이에 민여익이 조견의 형인 조준(趙浚)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성상께서 헌부로 하여금 견(狷)을 탄핵하고 자...
6.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2월 4일 기해 5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판문하부사 조준을 탄핵하다운 일이 있는데도 아우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조견(趙狷)과 사위 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진(鄭鎭)과 더불어 모두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삼성(三省)에서 함께 의논하고서 탄핵하고자 하였는데, 우산기(右散騎) 윤사수(尹思修)는 조준이 천 거하여 발탁한 자이므로, 그 의논을 누설하였다. 삼성에서 윤사수를 탄핵하여 파직하고, 드디어 교장(交章)하여 조준의...
7.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2월 4일 기해 10번째기사 / 조준·조견·정진 등을 용서하다조준(趙浚)·조견(趙狷)·정진(鄭鎭) 등을 용서하였다. 삼성(三省)에서 굳이 간쟁(諫諍)하니, 조준이 전(箋)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조준의 죄가 아니다. 어찌 이것으로 충량(忠良)한 사람을 잘못 해치려고 하는가? 경 등이 만일 굳이 간쟁한다면, 마땅히 충량(忠良)을 잘못 해치는 죄로 연좌(連坐)시키겠다." 하였 다. 임...
8.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2월 13일 무신 4번째기사 / 조준·우인렬 등에게 관직을 주다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삼고, 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에게 추충 보조 공신(推忠輔祚功臣)의 호를 내려 주고, 우인렬(禹仁烈)·조인경(趙仁瓊)으로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삼사 우복야를 삼고, 이천우(李天祐)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삼았다. 우복야(右僕射) 조견(趙狷)과 판중추(判中樞) 정홍(鄭洪)은 파면하였으니, 정홍은 정진 (鄭鎭)의 아버지였다.
9.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6월 26일 계미 1번째기사 / 이무·조영무·이숙번 등 공신에게 내시 2백 명을 차등 있게 내려주다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이무(李茂)·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조영무(趙英茂)·참판의흥삼군부사(參判義興三軍府事) 조온(趙溫), 총제(摠制) 신극례(辛克禮)·이숙번(李叔蕃)·조견(趙狷) 등에게 환자(宦者)를 주기를 차등 있게 하였다. 환자가 모두 2백여 명인데,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에서 갑사(甲士)·패두(牌頭)까지 모두 받았다.
10.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5월 4일 병술 4번째기사 / 병을 핑계로 사은사를 사임한 도총제 조견을 귀양보내다도총제(都摠制) 조견(趙狷)의 직첩(職牒)을 거두고 축산도(丑山島)로 유배(流配)하였다. 조견이 사은사(謝恩使)의 명을 받고, 중로(中路)에 도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병을 핑계하였기 때문에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죄주기를 청했다.
11.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8월 20일 을축 2번째기사 / 최유경을 한성부 판사로, 조견을 좌군 도총제 평성군으로 임명하다최유경(崔有慶)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삼고, 조견(趙狷)으로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평성군(平城君)을, 이문화(李文和)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신유정(辛有定)으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삼았다.
12.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8월 28일 계유 1번째기사 / 좌군 도총제 조견을 보내 명태조와 고황후의 추숭을 하례하다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조견(趙狷)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고황제(高皇帝)와 고황후(高皇后)의 추숭(追崇)을 하례(賀禮)하게 하였다. 임금이 박석명(朴錫命)과 말하기를, "만일 견(狷)에게 도망온 군사[逃軍]의 일을 묻는 자가 있으면, 견(狷)이 마땅히 자세하게 대답하여야 할 터인데!" 하니, 석명이 말하였다. "신이 이미 견(狷)에게 이르기를, ‘의주( 義州)의 강(江)...
13.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12월 18일 신묘 4번째기사 / 진하사 조견이 경사에서 돌아오다진하사(進賀使) 조견(趙狷)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다.
14.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4월 5일 경오 1번째기사 / 윤저·조견·박신·이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윤저(尹柢)를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조견(趙狷)을 개성 유후(開城留後)로, 박신(朴信)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이내(李來)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15.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3월 3일 정사 1번째기사 / 윤저·이귀령·민무질·성석인·조견 등을 새 관직에 임명하다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민무질(閔無疾)로 여성군(驪城君) 겸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성석인(成石因)으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조견(趙狷)으로 충청도 도절제사(忠淸道都節制使)를, 강사덕(姜思德)으로 경상도 도절제사, 임정(林整)으로 전라도 도절제사를 삼았다. 조견 등 세 사 람은 모두 수군 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겸하였다.
16.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7월 2일 무신 1번째기사 / 내사 황엄 등이 의정부와 더불어 경복궁에서 처녀들을 선발하다, "좋습니다." 하였다. 이날 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의 딸은 중풍(中風)이 든 것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하고, 이조 참의(吏曹參議) 김천석(金天錫)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 자감(軍資監) 이운로(李云老)의 딸은 다리가 병든 것같이 절룩거리니, 황엄 등이 매우 노하였다. 헌사(憲司)에서 조견 등의 딸을 잘못 가르친 죄를 탄핵하여 아전[...
17.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2월 20일 정사 1번째기사 / 병을 핑계삼아 서장관을 사면한 성균 주부 김구경을 괴주로 귀양보내다. 신 등은 생각건대, 지난날에 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이 사명(使命)을 받고 병을 칭탁하여 면(免)하기를 구하였으므로,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외방(外方)에 귀양보냈었습니다. 지금 구경이 집에 노친(老親)도 없고 몸에 병도 없는데, 조견의 지난 일을 본받아 전(箋)을 올려 면하기를 구하였으니, 어찌 글을 읽은 유생(儒生)의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놓아 두고 죄주...
18. 태종실록 20권, 태종 10년 9월 28일 임진 2번째기사 / 조견을 보내어 태조의 진용을 완산부에 봉안하다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을 보내어 태조(太祖)의 진용(眞容)을 완산부(完山府)에 봉안하였다.
19.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1일 경자 4번째기사 / 개국 공신들이 정도전 남은을 용서할 것을 청하다서천군(西川君) 한상경(韓尙敬)·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 등도 또한 상언 하였다. "남은·정도전은 개국 초에 죽을 곳에 임박하였다가 다행히 종사의 영(靈)을 힘입어서 면하였으니 , 만일 이 무리가 없었다면 태조가 누구와 더불어 개국하였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미워하는 것은 이치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니, 정도전의 사사로운 원망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쓴...
20.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22일 신해 1번째기사 / 좌정승 성석린이 사직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다공신 조온(趙溫)·안경공(安景恭)·정탁(鄭擢)·조견(趙狷)·한상경(韓尙敬)·유창(劉敞) 등이 말감(末減)을 따르기를 청한 연유를 탄핵하고 상서하였다. "남은(南誾)은 공이 있어 홀로 면하고 손흥종(孫興宗)·황거정(黃居正)이 또한 성명(性命)을 보전하였으니, 이것은 죄는 같은데 벌은 다른 것입니다. 또 조영무가 공신 조온 등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와 감(減)하기를 청하...
21.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9월 24일 임오 1번째기사 / 대간의 탄핵을 받은 개국 공신들을 직사에 나오도록 명하다개국 공신(開國功臣) 흥령군(興寧君) 안경공(安景恭)·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서천군(西川君) 한상경(韓尙敬)·한천군(漢川君) 조온(趙溫)을 불러 모두 직사에 나오게 하였다. 안경공 등이 일찍이 정도전·남은의 죄를 감하도록 청하다가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22.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윤12월 1일 정사 5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평성군 조견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사헌부(司憲府)가 상소하여 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의 죄를 청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 "조견이 과부(寡婦) 표씨(表氏)의 뜻을 빼앗고자 하였으니, 조금도 재상(宰相)의 뜻이 없습니다. 중매한 자인 사직(司直) 박지(朴枝)는, 빌건대, 고신(告身)을 거두고 문죄하소서." 박지는 안율(按律)하여 과죄(科罪)하고, 조견은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공신이었 기 ...
23.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2월 7일 신해 1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평성군 조견·연성군 김정경의 죄를 청하다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하여 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의 죄를 청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 "이제 공신(功臣)이 분주하게 복역(服役)하는 노고도 있지 않고 여러 달을 지내면서 겨우 한두 번 제사를 행하는 일 뿐인데, 마땅히 봉행(奉行)하기를 오로지 삼가야 합니다. 이제 조견과 김정경이 일찍이 산천제(山川祭)에 행향(行香)하 라는 명(命...
24.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 6월 29일 갑오 2번째기사 / 노비 송사의 일로 김효손과 정치를 파직시키다직(職)을 파면하였다. 처음에 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이 노비(奴婢)를 도관(都官)에 송사하였는데, 제군(諸君)이 서제(書題)한 것을 가지고 김익(金翊)으로 하여금 대리 소송하게 하였다. 김익이 방장(房掌) 정치(鄭稚)를 능욕하자, 정치와 김효손이 김익을 때렸다. 이에 조견이 노 하여 형조에 고발하니, 형조에서 탄핵하여 청하기를, "조견은 사사로운 일로 서제...
25.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0월 18일 임오 1번째기사 / 신정을 하례하기 위해 공조 판서 조견·좌군 동지총제 강회중을 중국 서울에 보내다공조 판서 조견(趙狷)·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강회중(姜淮仲)을 중국 서울[京師]에 보내었으니, 신정(新正)을 하례하기 위함이었다.
26.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3일 임오 1번째기사 / 세자 이제를 폐하고 충녕 대군으로서 왕세자를 삼다)·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판좌군 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 이화영(李和英)·이조 판서 이원(李原)·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공조판서 심온(沈溫)·도총제(都摠制) 박자청(朴子靑)·이징(李澄) ·대제학(大提學) 변계량(卞季良)·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김구덕(金...
27.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4월 17일 신묘 5번째기사 / 조견·맹사성·이맹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조견(趙狷)으로 판우군 총제부를, 맹사성(孟思誠)으로 이조 판서를, 이맹균(李孟畇)으로 판한성부사를, 문계종(文繼宗)으로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신상(申商)으로 사헌부 대사헌을, 이흥발(李興發)로 중군 총제를, 홍섭(洪涉)으로 중군 동지총제를, 박초(朴礎)로 병조 참의를, 이간(李暕)으로 형조 참의를, 정진(鄭津)으로 충청도 도관찰사를, 이발(李潑)로 경상 도 ...
28.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4월 19일 계사 6번째기사 / 조견과 민여익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조견으로 평성군(平城君)을 삼고, 민여익으로 판우군도총제부사를 삼았다.
29.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3월 20일 임오 1번째기사 / 세 공신과 공신의 적장들이 상왕께 헌수연을 올리다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여산군(礪山君) 송거신(宋居信)과 적장(嫡長)으로 익평군(益平君) 석근(石根) 등 26인과 왕족· 부마·병조의 당상관·대언 등이 연회에 참석하였다. 아직 상기(喪期)가 끝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임금에게 꽃은 올리지 아...
30.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3월 23일 을유 3번째기사 / 평성군 조견을 불러서 궤장을 주다평성군 조견을 불러서 궤장(几杖)을 주었다.
31. 세종실록 14권, 세종 3년 12월 7일 병신 2번째기사 / 박은으로 하여금 금천 부원군을 삼고, 이원을 좌의정, 정탁을 우의정에 제수하다고, 조연으로 한평 부원군(漢平府院君)을 삼고, 조견(趙狷)으로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을 삼고, 한검(韓劎)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하게 하고, 맹사성(孟思誠)으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를 삼고, 박자청으로 판우군도총제부사를 삼고, 허지로 이조 판서를 삼고, 이발(李潑)로 형조 판서를 삼고, 이담(李湛)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삼...
32.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7월 16일 신미 1번째기사 / 평성 부원군 조견에게 고기를 먹도록 하다임금이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이 늙고 병들었으므로 육식할 것을 명하였다.
33.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1월 10일 정해 1번째기사 / 개국 정사 좌명 공신 성산 부원군 이직 등이 올린 대역자의 징계에 관한 상소문院君) 민여익(閔汝翼)·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여산 부원군(礪山府院君) 송거신(宋居信)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당사(唐史)》를 안찰하여 보니, ‘방현령(房玄齡)이 개국(開國)한 원훈(元勳)으로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더니, 그 뒤에 그 아들 유애(遺愛)가 모반(謀叛)하였다가 베어 죽임을 받게 된 후, 조...
34.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2월 15일 신유 2번째기사 / 양녕 대군을 이천으로 이사하게 한 일에 반대하는 성산 부원군 이직 등의 계院君) 민여익(閔汝翼)·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여산군(礪山君) 송거신(宋居信) 등이 계하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종사의 대계를 생각치 아니하시고 급작히 양녕을 돌아오게 하셨습니까. 양녕의 광패는 다른 사람과 비할 바 아니오니, 신들은 비록 우매하오 나, 태조 대왕으로부터 섬겨서 오늘날까지 이르러 본...
35.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 5월 3일 임신 1번째기사 / 평성 부원군 조견의 졸기평성 부원군 조견(趙狷)이 졸하였다. 견은 조준(趙浚)의 동복 동생으로 일찍이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제수하였다가, 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개국공(開國功)에 등록하고 협찬 공신(協贊功臣)의 공신권(功臣券)을 주고 평양군으로 봉하였다가, 고쳐서 평성군으로 봉하고 부원군으로 승격되었다. 견(狷)은 타고난 성품이 굳세고 곧으나, 다른 특이한 기능이 없고, ...
36.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 5월 8일 정축 4번째기사 / 죽은 평성 부원군 조견에게 제사를 하사하다죽은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에게 제사를 하사하니, 그 제문에 말하기를, "운수를 도와 나라를 세우니 진실로 나라에 어진 신하요, 은택을 미루어 공을 갚는 것은 나라의 아름다운 예전(禮典)이라. 오직 경은 타고난 바탕이 맑고 순박하며, 잡은 마음이 곧고 너그러워 점잖은 집안의 후손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매, 시속을 바로잡고 백성을 잘살게 하기를...
37.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3월 4일 무술 5번째기사 / 김도련에게서 노비를 증여받은 대신들을 벌주다사헌부에서 계하기를, "김도련(金道練)은 지방의 미천한 인물이며, 또한 자식이 있는 사람으로, 자기가 송사한 노비를 각처의 권력가에게 증여하였으니, 그의 본심을 캐어 보면, 자기가 생각하기에 제 힘으로는 소송에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세력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그것을 인연으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정상이 명백하오니 앞에 제시한 증여한 노 비는...
38.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4월 26일 기축 5번째기사 / 김도련의 노비 증여 사건과 관련한 함길도 행대 감찰 이사증의 보고증여하였는데, 돌아간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에게 17명, 돌아간 우의정 정탁(鄭擢)에게 7명, 우의정 조연(趙涓)에게 6명, 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 )에게 7명, 이원(李原)에게 4명, 고 참의(參議) 조숭덕(曹崇德)에게 8명, 조말생에게 36명, 정주 목사(定州牧使) 남궁계(南宮啓)에게 2명, 총제 이흥발(李興發)에게 4명, 지의천군사(知宜川郡事) 윤간(尹...
39. 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 3월 10일 신유 2번째기사 / 조석산의 자손을 충의위에 입속시키게 하다병조(兵曹)에 전지하기를, "개국 공신(開國功臣) 조견(趙狷)의 아들 조석산(趙石山)의 자손도 다른 예(例)에 의하여 충의위(忠義衛)에 입속(入屬)시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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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7권, 정조 3년 2월 29일 갑신 1번째기사 1779년 청 건륭(乾隆) 44년
경기 유생 조항이 조견의 사당에 은액을 청하였으나 거절하다
경기 유생(京畿儒生) 조항(趙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듣건대 고려조(高麗朝) 때 온전히 절개를 지킨 신하들 가운데 월등히 뛰어나다고 칭송할 만한 사람은 오직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狷)뿐이라고 합니다. 남을진은 곧 개국 원훈(開國元勳) 신(臣) 남재(南在)의 숙부입니다. 왕씨(王氏)의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현(沙川縣)감악산(紺嶽山) 아래에 은거하였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누차 정초(旌招)하였으나 끝내 명(命)에 응하지 않자 성조(聖祖)063) 께서 매우 감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거처하고 있는 곳의 둘레에 있는 지역을 봉(封)하여 주고 사천백(沙川伯)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조견은 곧 평양백(平陽伯)조준(趙浚)의 아우입니다. 고려조의 국명(國命)이 바뀌자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갔는데 태조(太祖)께서 그의 거처로 거둥하여 조준을 시켜 데리고 나오게 하였으나 조견은 읍(揖)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태조께서 청계(淸溪) 한 구비를 봉(封)하여 주었습니다. 숙묘(肅廟)임진년064)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사천(沙川) 땅에다 묘우(廟宇)를 짓고 두 신하를 나란히 제향(祭享)하였는데 유독 조정의 은액(恩額)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표양(表揚)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하소서."
정조실록 31권, 정조 14년 10월 14일 신유 3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경기 유생들이 고려조 조견을 숭양 서원에서 제사지낼수 있도록 청하다
경기 유생 김상목(金相穆) 등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고려조의 안렴사(按廉使) 조견(趙狷)은 곧 개국 원훈(開國元勳)인 조준(趙浚)의 아우로서 아이 때부터 경학(經學)에 열중하였습니다. 고려조의 정치가 문란할 때를 당하여 벼슬이 지신(知申)에 이르렀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심력을 같이하여 왕실을 도왔습니다. 자기의 형인 조준이 새 왕조를 추대하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이 나라의 교목세가로서 나라가 보존되면 같이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같이 망할 것입니다. 또 달가(達可)046) 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고 하자, 조준은 그 뜻을 알고 다시 영남의 안렴사로 내보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고려의 운명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 속에 들어가 그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개견[犬] 자를 따른 것으로서 나라가 망해도 따라 죽지 못한 것이 개와 같다는 뜻이며, 또한 개는 옛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두류산에서 다시 청계산(淸溪山)으로 왔는데, 매번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습니다.
태조가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발탁하여 초빙하는 서신을 보내니, 답하기를 ‘송악산의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지언정 성인의 백성이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태조가 조준과 더불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청계산으로 가서 조준으로 하여금 나오도록 권고하게 하였는데, 조견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준이 이불을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내가 만나보지 못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형제간의 정의에 어찌 그리운 생각이 없었겠는가.’고 하니, 조견이 이불 속에서 대답하기를 ‘나라도 없어지고 집도 망하여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데 형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나와서 고하기를 ‘신의 아우의 성품이 편협해서 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나와 옛 친분이 있으니 빈주의 예로 서로 만나볼 수 없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조견은 비로소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 태조는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조견은 그 뜻이 금석 같아서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청계 한 구역의 땅을 봉해주었습니다.
조견은 양주(楊州) 땅에 옮겨 살면서 자기의 호를 자칭 송산(松山)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송악(松嶽)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조견은 이따금 송도(松都)에 가서 월대(月臺)의 폐허에서 통곡하니, 옛 도성의 유민(遺民)들이 저마다 따라서 슬퍼하였습니다. 조견은 일찍이 철(鐵)·석(石) 두 글자로 자기 두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며 죽을 때 임박하여 경계하기를 ‘나의 묘비에는 고려의 안렴사라고 쓰라.’ 하였으나 여러 아들들이 유언을 감히 따를 수 없어 조선조에서 내린 관직이름을 비석에 썼는데, 얼마 안 되어 비석이 갑자기 절반으로 꺾여져 ‘조공지묘(趙公之墓)’라는 네 글자만 남아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 충절과 도학은 실로 정몽주와 서로 대등합니다. 이 두 신하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신명을 감동시키고 금석을 뚫을 만합니다. 비록 따로 서원을 짓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응당 한 사당에서 제사지내주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장순(張巡)·허원(許遠)처럼 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야가 다같이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명하여 조견을 숭양 서원(崧陽書院)에서 제사지내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사람의 행적을 어찌 모르겠는가. 여기까지 미처 손을 쓰지 못한 형편이니 이 이외에도 반드시 이와 유사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