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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남터성지 설명
새남터’는 ‘새나무터’의 준말이다. 억새와 나무를 합한 것이 ‘새나무’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부터 이곳에 억새와 나무가 무성했다 한다. 억새와 나무가 무성한 곳, 그래서 새나무터, 새남터가 되었다. 새남터를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렀는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숲이 울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4대 박해 동안 순교한 성직자는 모두 열 네 분이다. 그런데 이곳 새남터에서 열 한 분의 성직자들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조선천주교회의 지도자급 평신도 세 분이 순교하신 곳이다. 먼저, 중국교회로부터 조선에 파견되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그리고 ‘기해일기’의 주인공인 현석문 가롤로 성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조선 초기 새남터는 군사 훈련장이고 국사범(國事犯) 등 대역죄인들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사육신(死六臣)₂」의 처형을 들 수 있는데, 세조 2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등 여섯 신하가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여섯 신하의 처형이 부당하다고 상소하기 위해 도성(都城)을 향하여 말을 달려오다가 지금 노량진 근처에 있는 어떤 고개에서 여섯 신하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하였다. 그 때 그 고개를 ‘아차고개’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후 1801년부터 1866년까지 한국천주교회 4대 박해 기간 중 천주교 신자들의 숭고한 피가 이곳 새남터에 뿌려졌고, 그리하여 찬란한 신앙의 꽃이 한반도에 피어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님 초상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목자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1795년 북경교구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주 신부는 최초로 이 땅에서 부활대축일 미사를 거행하였다. 한양에 들어온 지 6년 만에 6,000명으로 신자의 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신부는 쫓기는 몸이 되었고, 자신만 없으면 박해가 그치려니 생각하고 중국 쪽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고통을 겪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한다. 주문모 신부는 모진 형벌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이곳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되었다. 이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신유년의 박해가 끝나고 30년이 흘렀을 때(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빠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였고, 조선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들어왔다. 이 때 신자 수가 9,000 여명으로 증가하였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소년들을 선발해서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다.
1839년 기해년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에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였다. 이곳 새남터에서 세 분의 선교사들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김대건은 모방 신부님에 의해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두 번이나 중국을 넘나들며 조국에 들어갈 꿈을 꾸었다.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1845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고 그 유명한 라파엘 호에 몸을 싣고 조국을 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845년 10월 12일 익산 나바위 인근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이후 조국의 복음화에 힘쓰고 선교사 입국을 모색하는데, 1846년 6월 서해 뱃길을 통해서 선교사들을 입국시키려고 백령도 부근으로 나갔다가 관헌에 체포된다. 수십 차례 문초를 당하면서도 천주님을 향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마침내 신부는 군문효수형을 받고 이곳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사제로 서품된 지 불과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 신부의 나이 26세였다. 신부가 처형된 후 3일 후 현석문 도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철종 임금이 재위하는 동안 조선천주교회는 평화를 맛 볼 수 있었고, 교세도 크게 확장하였다. 천주교를 옹호하던 순원왕후 덕분이었다. 1855년에는 일만 사천여명에 이르고, 신학교도 세울 수 있었다. 철종이 승하(昇遐)하신 후 고종 임금이 즉위하자 상황은 백팔십도 바뀌었다. 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가 조정에 문호 개방을 요구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과 프랑스, 영국이 동맹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물리치자고 대원군에게 제의하 였는데, 시기도 놓치고, 오해도 일어나고 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 1866년에 박해가 시작되어 18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해 동안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순교하였고,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알렉시오 등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조선시대, 새남터의 저녁풍경은 용산 8경 중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도 저녁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어쩌면 이곳 새남터에서 돌아가신 순교자들의 피 때문에 이곳 저녁풍광이 그렇게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에 하늘도 슬픔을 감추지 않고 천둥소리로 대답했던 곳, 바로 이곳 새남터에서는 북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국천주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1956년 현 용산구 이촌 2동에 ‘가톨릭 순교성지’라고 새긴 현양비(顯揚碑)를 세울 수 있었다. 1981년에 한강본당으로부터 분가해서 본당이 설정되었고,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본당과 성지를 담당하고 있다.
국철을 타고 한강철교를 건너다보면 대교 북단 서쪽으로 한국식의 뾰족한 종탑이 있는 3층 기와건물을 볼 수 있다. 현재 명지대 건축학 교수로 계신 박태연씨가 설계한 이 건물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1987년에 완공해서 봉헌하였다. 현재 새남터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성 앵베르 주교님, 성 모방 신부님, 성 샤스탕 신부님, 성 베르뇌 주교님,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님, 성 볼리외 신부님, 성 도리 신부님,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 등 9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2. 새남터 여섯 분의 외국 선교사 순교 이야기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선교사 여섯 분이 새남터에서 순교 하셨다. 이때 서소문에서도 같은 시간에 남종삼과 홍봉주도 순교하였다. 이분들의 순교 장면을 생각하면서 나의 신앙생활은 어떠한지 묵상해 보자. 신자가 순교할 수 있는 힘은 우주 만물의 주재자인 하느님을 믿고 평상시 작은 일에 충실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을 때 그 능력이 길러지는 것이다. 내가 지금 땀의 순교를 하려면 항상 순교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갖고 살아야 세상 유혹을 이겨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바로 순교이다. (샤를르 달레 교회사 하권 400-404)
네 분의 선교사는 천국의 현관인 그 고약한 감옥 속에서 서로 만났을 때 그들의 기쁨이 어떠했는지를 누가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영광스러운 상처가 뒤덮인 몸을 서로 바라보면서, 그들이 서로 축하하는 말을 주고받으며 스스로의 마지막 제헌을 준비할 때, 드린 그들의 기도와 환희의 노래와 사랑의 열정을 누가 우리에게 말하여 줄 것인가. 드디어 승리의 날이 밝았습니다. 1866년 3월 7일 그들을 사형장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옥에서 끌어냈습니다. 외국인 신부들을 구경하려는 군중이 구류간 문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과 태도를 신기한 듯이 바라다보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웃고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웃고 놀리지 마시오. 당신들은 오히려 울어야 할 것이요. 우리는 당신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마련해 주려고 왔는데, 이제 누가 천국의 길을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겠소. 참말로 당신들은 불쌍하오.”
증거자들은 각기 긴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었고, 상투 머리를 뒤로 젖혀져 매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의자 뒤쪽 머리 뒷면에는 ‘여러 가지 형벌을 받은 후 사형 선고를 받는 반역자이고 불복종한 아무개라고 쓰여진 판자가 달려 있었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 운반인들은 여러 번 멈추어 쉬었습니다. 그럴 때 베르뇌 주교는 젊은 동료들과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를 따라오는 군중에게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쉬며,
아아 참말로 저 사람들이 불쌍하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
서울에는 형장으로 지정된 장소가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서둘러서 일을 끝낼 필요가 있거나, 처형될 자의 수효가 너무 많거나, 또는 처형을 비밀로 붙이고자 할 때에는 바로 궁궐 경내에서나 관청에서 몇 분 거리에 있는 두 개의 다리 위에서도 목을 벨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흔히는 1킬로미터 떨어진 서문 밖 네거리까지 사형 선고받은 자들이 끌려가고, 중죄인이거나 사형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대로 널리 알리고자 할 때에는 더 멀리 새남터라는 마을 근처 강변 모래사장으로 갑니다. 선교사들이 끌려간 곳은 바로 이 새남터입니다.
그들을 호송할 병정 4백 명과 매우 많은 호위병을 거느린 군관이 천막 앞에 반원형으로 늘어섰습니다. 이 원 한가운데 백기가 펄럭이고 있는 큰 장대 밑에 희생자들을 땅에 내려놓은 다음, 그들을 의자에서 풀고 팬츠 하나만 남기고 옷을 전부 벗깁니다. 베르뇌 주교가 제일 먼저 풀렸습니다. 그의 양팔은 등에 단단히 묶여 있었습니다. 망나니 하나가 위에서 아래로 양쪽 귀에 화살을 꿰뚫어 꽂아 놓았습니다. 다른 망나니는 얼굴과 머리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석회를 뿌렸습니다. 그런 다음 몽둥이 두 개를 겨드랑 밑으로 꿰어 그를 쳐들고 광장을 여덟 바퀴를 돌리면서 구경꾼들에게 보이는데, 그들이 걸어가며 만드는 동그라미를 매번 줄여 가며 여덟 번째를 돌았을 때는 사형 터 중앙에 와 있게 됩니다.
그때에 희생자는 무릎을 꿇고, 병정 하나가 붙잡고 있는 끈으로 머리칼을 묶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6명의 망나니는 긴칼을 치켜들고. 야만적인 춤을 추고 무서운 고함을 지르며 빙빙 돌아갑니다. 그들은 각기 제멋대로 치고 싶은 때에 칼질을 합니다. 세 번째 칼질에 공경 하올 주교의 머리는 땅에 떨어지고 모든 병사와 망나니들이끌 났다!하고 일제히 외쳤습니다.
곧 머리를 거두어 관례에 따라 작은 소반에 젓가락 두 짝과 함께 올려놓아 군관에게 가져가서 사형수의 머리가 틀림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젓가락은 사형 집행을 주관하는 군관이 더 자세히 검사하고자 하는 경우에, 머리를 집어 뒤척이기 위하여 거기 놓는 것이지만 보통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머리는 몸뚱이 곁으로 다시 가져다가 높이 네다섯 자 되는 기둥에 선고문을 쓴 판자 밑에 머리칼로 매달아 놓습니다.
다른 선교사도 같은 순서로 반복하였습니다. 브르트니애르 신부가 베르뇌 주교 뒤를 따랐고, 그 다음이 불리외 신부였고, 끝으로 도리 신부가 뒤따랐습니다. 그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세 번이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난 뒤 자신도 영광스러운 순교를 완성하였습니다.
시체들은 3일간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새남터에서 외교인들이 순교자들을 모두 한 구덩이에 함께 묻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있을 때에는 사형수의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시체를 거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가 죽을 때에 바라다 본 쪽에 있는 마을 주민들이 시체를 매장해야 합니다.
서울의 신자들이 직접 그들의 목자들을 매장하고 싶었으나 그때에는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들은 6개월이 지난 뒤에야 이 경건한 의무를 이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베르뇌 주교의 연세는 52세이고, 조선에서 일 한지가 10년이 되었습니다. 이 10년 간의 포교지의 놀라운 진보의 역사는 그가 교구장으로써 어떠하였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사생활과 개인 성격에 대하여 몇 마디 언급하면 우리는 그분을 한층 더 잘 알고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베르뇌 주교의 순교 소식을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알리면서 페롱(Feron) 신부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천사적인 신심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에다가 베르뇌 주교님은 깊은 신학 지식과 드문 행정력을 아울러 겸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아무런 휴식도 그분에게 남겨 주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선교사 3, 4명이 할 수 있는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었으며, 어떻게 영육간의 모든 일을 아주 자세한 것까지 보살필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가장 넓은 활동 지역을 가지고 계셨고, 선교사들과 신자들과 더불어 편지 왕래가 매우 찾았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의논 상대가 되었고 포교지에 경리 책임자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선교사가 그분을 뵈러 가면 그 선교사의 말을 듣고 그를 보살펴 주고, 재치와 친절이 넘쳐흐르는 화술로 즐겁게 해주는 외에 다른 일이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성인이 아니라면 그분의 농담은 풍자가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이 모든 것을 바로 잡았습니다. 무슨 일이나 그분에게 반대 의견을 내 놓을 수있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줄 아셨고 그분이 보낸 편지에는 언제나 정이 넘쳐흐르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분의 겸손은 지나친 경향이 있어 우리가 어떤 때 웃는 일도 있었는데, 그분이 먼저 웃으시면서도 조금도 그 겸손을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분이 혼자 계실 때는 밥 조금과 약간의 야채가 전부였습니다. 만년에 와서는 약주를 드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들 중의 누구를 대접하는 때가 아니면 고기도 생선도 심지어 계란까지도 그분의 식탁에 오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손님을 접대하실 때에는 손님을 잘 대접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하셨고, 조선 사람들이 빵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혼자 계실 때에는 결코 빵을 드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뵈러 오는 동료에게 주거나 어떤 기회에 지방으로 보내기 위하여, 손수 빵을 반죽해서 굽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사실이 그분의 고신 극기의 정도를 말씀 해 드릴 것입니다. 늘 고생하고 계시던 결석(結石)으로 인한 심한 고통도, 그분은 거의 임종 지경에 이르러 땅에 누워 계시게 되는 때가 아니면 그분의 일을 중단시키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분이 24시간을 계속해서 고해소(告解所)에 계시는 것을 본적이 있었는데, 내가 감히 나무람을 하자 주교님은어떻게 해요. 이렇게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는걸하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르뇌 주교가 처형되던 날 배론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도 서울에 도착하자 곧 우포청 포장 앞에 끌려나갔습니다. 이 포장은 며칠 전에 다른 선교사들을 신문하였고 또 이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름은, 국적은, 누가 그대들을 데려왔는가, 무엇 하러 왔는가, 베르뇌 주교를 아는가 등등.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들도 비슷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대들을 죽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소하고 포장이 덧붙이니 프티니콜라 신부는우리가 죽은 뒤에 조선은 크나큰 재난을 당할 것이요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푸르티에 신부는 병으로 기진맥진하여 포장 앞에서 몇 마디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 프티니콜라 신부가 대변하였습니다. 그가 더 자주 더 혹독하게 매를 맞고 뾰족한 몽둥이로 찔린 것이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새로 붙잡혀 온 선교사들에게 먼저 번증거자들에게 적용된 법적 절차가 대부분 생략되었습니다. 이들은 금부에 이송되지 않고 구류간에 남아 있었으며, 거의 즉시 내려진 그들의 사형 선고는 그들이 도착 한지 사흘째 되는 날에 집행되었습니다. 1866년 3월 11일, 4일 전에 다른 선교사들에게 행한 것과 같은 의식으로 군대를 크게 전개시킨 가운데 그들을 새남터로 데려갔고, 모든 것이 같은 모양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푸르티에 신부의 머리는 첫번 칼질에 떨어졌고 프티니콜라 신부의 머리는 세 번 째 칼질에야 떨어졌습니다.
3. 순교자 현양과 사적지 조성
이처럼 새남터에서는 모두 1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은 가운데서 주문모 신부 이외의 13명 순교자는 훗날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중 기해․병오박해의 순교자 5명은 1925년 7월 5일에, 병인박해의 순교자 중에서 프티니콜라와 푸르티에 신부를 제외한 6명은 1968년 10월 6일에 시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남터의 순교자 중에서 모두 11명이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됨으로써 이곳은 중요한 순교 성지가 되었다.
이에 앞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선 와서에 안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 7명의 시신을 1899년 10월 30일에 발굴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다가 다음해 9월 5일에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하였다. 다음으로 1901년 10월 2일에는 삼성산에 안장되어 있던 기해박해 순교자 3명의 발굴하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에 다시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미리내에 있던 김대건 신부의 무덤은 1886년에 1차로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901년 5월 21일에는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새남터 사적지를 중시해 왔으며, 1890년에는 그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46년 9월 16일에 발족을 본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중심이 되어 다시 이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50년에는 현재의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6․25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6년 7월 8일에는 그곳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순교자 현양비를 건립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이하게 된 1981년에는 ‘새남터 본당’이 설립되었고, 1987년 9월 12일에는 이 본당의 사목을 담당해 온 한국순교복자회에서 현재의 기념 성당을 완공하고 축성식을 가졌다.
4. 박해와 새남터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부터였다. 즉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4월 19일(양력 5월 31일)에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다섯날 동안 백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우선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과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가 8월 14일(양력 9월 21일)에 주문모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어 1849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7월 26일(양력 9월 16일)에, 현석문(玄錫文, 가롤로)이 7월 29일에 역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브르트니에르(de Bretenières, 白), 볼리외(Beaulieu, 徐沒禮), 도리(Dorie, 金),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é, 申妖案) 신부 등이 1월 21일(양력 3월 7일)에,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이 3월 11일에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들 중에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시신(앵베르, 모방, 샤스탕)은 신자들에 의해 노구산(老軀山, 마포구 노고산동의 漢尾山)으로 옮겨졌다가 1843년에 삼성산(三聖山, 관악구 신림동 57의 1번지)으로 이장되었다. 다음으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일시 와서(瓦署, 용산구 한강로 3가의 왜고개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안성 미리내로 이장된 반면에 현석문의 시신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중에서 가족들에 의해 시신이 거두어진 정의배 회장의 시신은 노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전되었고, 베르뇌 주교와 우세영 등을 비롯하여 7명의 시신은 새남터에 가매장되었다가 1866년 4월 14일 신자들에게 거두어져 와서에 안장되었다.
5. 새남터 성지 성당
[사목, 1999년 3월호, pp.90-93, 차기진]
소재지 :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새남터의 이름은「노들」혹은「사남기」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여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이 연무장과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사형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새남터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周文模) 신부를 처형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선혈을 뿌리기 시작했다.
주문모 신부는, 명도회(明道會) 회장인 정약종(丁若鐘)을 비롯한 선구자적인 지식인들이,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고 죽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황해도 황주(黄州)까지 갔다가, 발길을 되돌려 자진해서 의금부에 나섰고 이곳 새남터에서 장렬하게 순교했다. 주 신부를 잃은지 38년만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세 명의 외국인 사제 앵베르 범 주교, 샤스탕 정 신부, 모방 나 신부도 주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의 군문 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1846년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과, 기해 일기를 남긴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회장도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다시 1866년 전국적으로 8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병인박해 때 베르뇌 장 주교, 브르트니애르 백 신부, 볼리외 서 신부, 도리 김 신부, 푸르티에 신 신부, 쁘띠니 꼴라 박 신부 등 여섯 명의 프랑스 사제들이 순교하셨고,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 10여명이 순교하였다.
이렇게 새남터에서는 20여명의 순교자 중 11분은 1984년 5월에 시성 되이 곳에 1981년에 새남터 본당이 설립되었고, 1987년 한국 복자수도회에서 현재의 성전을 봉헌하였다.
다음은 새남터 성당의 내부에 대해 알아보면, 새남터 성당은 한국의 전통 양식으로 건축한 것이며, 대성당 안에 대형 십자가 뒤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문양이 있다. 또 사방 팔방으로 뻗쳐 있는 선은 세계 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상징한다. 십자가 아래 바치고 있는 백합꽃은 순결을 뜻한다. 돔 아래에 있는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하고, 어린양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지구 모양을 하고 있는 감실은 한 덩어리의 통 돌에 무궁화 꽃을 조각했고, 감실 문은 인간의 심장을 나타내는 하트(♡)모양을 하고 있다. 제대는 경전을 읽을 때 쓰는 경상 모양이며 역시 통 돌에다 조각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성수 대는 우리나라 고유의 도자기 모양이고, 왼쪽의 독서대는 장구 모양으로서 장구 소리처럼 복음이 널리 퍼져 나가라는 것을 상징한다.
정면에 있는 부조는 제대를 중심으로 103위성인 성녀 상인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왼쪽에는 임금 중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국의 임금님으로 표현했고 성인 성녀를 따로 조각한 것이다. 오른쪽의 아기 도령의 모습인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마리아 역시 우리나라 왕후의 옷을 입으셨다. 성모님을 중심으로 새남터와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고 성인품에 오르신 주교․사제․평신도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쪽에 출렁이는 파도는 세상의 세파를, 배는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이다. 또 성전 양쪽 벽면 십 사처에 예수님과 로마 병사들도 우리나라 사람으로 표현했다.
종탑은 목조 3층 모양으로 지었으며 그 안의 종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순교 성인들의 후손들이 보내 준 헌금으로 주조한 것이다.
다음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김대건(金大建)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에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서 김제준(金済俊) 이냐시오와 고 우르슬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때는,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비오 때부터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의 권유로 천주교를 받아 드렸다. 이존창의 조카딸이 김대건의 증조모이다.
김진후 비오는 위패를 모시지 않아 일어난 1791년 진산 사건 때 이미 신앙을 고백하였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해미에서 10여 년 간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은 증조부인 김진후 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선후와 그들의 손자를 포함해서 10명이 순교하신 순교자 가문이다.
김대건 신부님이 7살 되던 때에 박해를 피해, 용인 한덕골로 이사하셨다가 다시 골배마실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에서 15세 때에, 정하상 바오로 집에 계시던 모방 나 신부님이 김대건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천주님이 선택한 아이라 생각하여 최양업과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 두 차례나 필리핀 마닐라로 피난하는 고역을 치르고 있을 때에, 국내에서는 기해박해로 앵베르 범 주교, 모방 나 신부, 샤스탕 정 신부와 최양업의 부모님, 김대건 부친과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고, 그의 어머니는 걸식한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 1844년 당시 만주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고 주교에게 최양업과 같이 부제품을 받고 일단 조선에 입국하였다.
입국할 때 교회의 밀사와 만나기 위해 엄동설한에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맨발로 걷기까지 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도착하여 중병에 걸려 힘든 중에도, 신학생 두 명을 지도하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면서도 보고 싶은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주교님과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길이 25자(8.1m) 넓이 9자 높이 7자 되는 작은 배를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가까운 섬에만 다니게 되어 있는 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구사일생으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 만 24세가 되어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고, 15일 후 조선에서 타고 갔던 목선을 수리하여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그 배로 상해를 출발하여 천신만고 끝에 제주도까지 표류했다가 50여일 만에 강경 나바위에 도착하였고, 서울과 용인 은이 공소에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걸식하던 어머니를 만난다. 그러던 중 조선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맞아들이기 위해 뱃길을 알아보고, 지도와 편지를 백령도에 와 있던 중국 어선에 전하고 순위도에 들어왔다가 배를 빌리려는 일로, 관장과 문제가 생겨 신부님의 본색이 발각되어 체포된다.
그 후 100일 동안 40여 차례 문초를 받으며 그동안의 행적과 천주교회의 교리에 대해 묻자, 천지창조, 강생구속, 영혼 불멸, 상선 벌악 등을 합당하고 이치에 맞게 설명하였다. 이에 감탄한 관장이 국왕에게 그의 생명만은 보존해 달라고 상소까지 올렸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에게는 배교를 권유했지만 신부님은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은 인간에게 정해진 이치요. 천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묻고 내일 묻고, 때리고 죽여도 똑 같다고 대답했다.
그 당시 영의정인 권돈인(権敦仁)은 저 지독한 자를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니 죽여야 된다고 주장해서 사형 선고를 받게된다.
새남터에서 형리가 사형 선고문을 낭독하자, 김대건 신부님은 일어나 힘차게 말하였다. ‘여러분도 죽은 후 영복을 얻으려면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형리들이 달려들어 양 귀에 화살을 꽂고 얼굴과 온몸에는 물을 뿌리고 회칠을 하는 등, 잔인하게 형벌을 가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시퍼런 칼을 들고 춤을 추던 희광이의 칼에 여덟 번만에 목이 떨어졌다.
그 당시 국사범이나 중죄인은 처형 한지 3일 후에 가족들이 장사를 지낼 수 있었는데, 김대건 신부님의 몸은 모래사장에 묻고, 목은 장대에 높이 올리는 군문 효수형을 당하여 40일쯤 지난 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와 교우들이 신부님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밤에만 옮겨 미리내에 안장하였다.
신앙을 위해 죽음을 맞이하신 김대건 신부님과, 나라의 충신이었던 유명한 성삼문(成三問)의 죽음을 비교해 볼까 한다.
비록 두 분의 이상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충절을 다한 신념의 의인들이었다. 마지막 죽음에 임했을 때 성삼문은 사세시에서
북소리는 목숨을 앗기 위해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해는 저무누나
황천길에는 객사도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엔 뉘 집에서 머물까!!
피 비린내나는 곤장과 노린내나는 담근질에도 굴복치 않던 성삼문도 죽음 앞에서는 내세에 대한 불안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님은 ‘천주님을 위해 나는 죽는다. 바야흐로 나에게는 영원한 생이 시작된다.’ 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신앙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성인
○ 범세형 앵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43세. 주교)
○ 장경일 베르뇌 시뫼온 성인님.(프랑스. 새남터. 1866. 3. 7. 52세. 주교)
○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님. (솔뫼. 새남터. 1846. 9.16. 25세. 신부)
○ 모방 나 베드로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샤스탕 정 야고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백 브르트니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8세. 신부)
○ 서 볼리외 루도비코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8세. 신부)
○ 김 도리 헨리코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7세. 신부)
○ 현석문 가롤로 성인님. (서울. 새남터. 1846. 9.19. 49세. 회장)
○ 정의배 마르코 성인님. (서울. 새남터. 1866. 3.11. 71세. 회장)
○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님. (서흥. 새남터. 1866. 3.11. 21세. )
○ 주문모 야고버 순교자님. (중국. 새남터. 1801. 5.31. 49세. )
○ 신 푸르티에 안토니오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 박 프티니콜라 미카엘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 김면호 토마스 (안동. 새남터. 1866. 9.10. -- 세. )
○ 김문원 바오로 ( 새남터. 1866. 9.10 .--세. )
○ 이연식 이서방 (대원군하인.새남터.1866. 3.11. -- 세. )
○ 이유일 안토니오 (연풍. 새남터. 1866. 7.20. -- 세. )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6. 새남터 순교자 약전
성 모방 나베드로 신부님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님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님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님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님
성 정의배 마르코
성 현석문 가롤로
성 우세영 알렉시오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
프티니콜라 미카엘
알렉산데르 신부님
푸르티에 안토니오 신요안 신부님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님
성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1).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St. Kim Dae Geon Andreas)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며 초상화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미남형이다. 게다가 10 대에 라틴어를 유창하게 쓰고 구사했다는 데서 그 분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다.
성인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김제준의 아들로 1822년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서 태어났고 일곱 살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으로 이사해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성인의 가문이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는데 김진후는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5일)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공소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에 앞서 최양업, 최방제 두 소년이 이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에서 중국어와 라틴어를 공부하는 등 외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김대건은 그 해 7월11일에 이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1837 년 모방신부의 소개로 중국 마카오로 건너가 파리외방전교회의 칼레리신부로부터 신학과 다른 서양학문, 프랑스어, 중국어 및 라틴어를 배웠는데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들은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였다.
1842년 20세 때 공부를 마치고 고국으로 몰래 들어오기 위해 의주를 거쳐 서울로 잠입하려했으나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와 감시가 너무 심해 들어오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두 번째로 두만강을 건너 들어오려 했지만 실패하고 마카오에서 얼마 동안 공부를 더 하다가 1844년 12월 두만강을 통한 2차 입국시도도 실패하자 마카오로 돌아갔으며 그 해 12월 최양업과 함께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부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 24세에 못 미쳐 아쉽게도 사제품은 받지 못하였다.
드디어 1845년 성인은 무사히 변문을 통과하여 1월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다시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여 4월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4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하여 40여일 만인 10월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한양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전교를 통한 교세 확장에 전념하였다.
성인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공소 등을 방문하였는데, 그 곳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2개월 간이 조선에서의 사목방문 활동기간의 전부였다.
성인의 교회 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직책은 조선교구 부교구장이었다. 성인은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령도에 가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으나 그 곳에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해수감영으로 이송되었다가 6월 21일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성인은 포도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례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그 때 나이 26세였다. 성인의 시신은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 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대학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가 되었고, 1984년 새남터를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5월 6일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2).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님 (St. Beaulieu Ludovicus)
모방(Maubant, Pierre Philibert) 신부는 서양인 선교사로서는 한국에 최초로 들어오신 분이며, 한국명은 나 백다록(羅伯多祿)이라고 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1984년 5월 6일 성인위에 올랐다.
한국명이 나 백다록이라는 것은, 성은 나씨에 본명인 베드로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백다록으로 사용한 것이다. 1804년 8월 23일, 프랑스 배시(Vassy) 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열성적이 면과 부지런함이 뛰어났다. 그리고 항상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고 말하였으며, 이러한 전교의 의지는 결국 그의 일생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그는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후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3년 뒤에 중국 사천성 포교지에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 조선의 상황을 듣고는 곧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835년 11월 소 주교가 입국도 하지 못하고 선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장례를 맞게되었는데 그곳에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와 있던 조선신자 다섯 명을 만나 조선입국을 계획하였다. 다행히 그의 얼굴 모습이 조선인을 닮아 1836년 1월 12일 밤중에 의주의 남북 두성을 통하여 입국에 성공함으로써 서양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에 첫 발을 딛었던 것이다. 그가 입국을 하는데 얼마나 큰 고역을 치렀는지를 그의 편지에서 보면 ‘나는 여권을 조사하는 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로 벌벌 떨었다. 이로부터 밤과 낮을 굶으면서 달리어 백리길을 걸었다. 변문으로부터 조선의 검문소에까지 이르는 사이에는 사람이 없고 황무지로 되어 있어서 호랑이와 이리떼만이 돌아다니는 언덕과 골짜기가 가로 놓여 있었다. … 나는 머리에 상투를 틀어 얹고 얼굴에는 누렁 칠을 하고 병들어 앓는 사람 모양으로 모래 위에 넘어져서 끙끙대고 앓은 소리는 내었다. …’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나 교우들의 요청으로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16개 내지 17개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13명에게 영세를 주고 6백여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도록 하며, 모임에서는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성가와 성인전기 등을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목활동 중 특기해야 할 것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다. 그는 최양업 토마, 최방제 프란츠시꼬 사베리오, 김대건 안드레아 세 소년을 가리어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였다. 1839년 12월 2일에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니 이들이 조선 500년 역사를 통하여 해외로 파견된 최초의 유학생들이 되었고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선각자가 되었다.
1837년 1월 15일에 샤스땅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모방 신부는 양평으로 내려와 열심히 조선말을 배워 본격적인 전교를 했으나 1837년 7월 중순에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열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샤스땅 신부에 의해 병자성사를 받게 되었는데, 모방 신부는 샤스땅 신부가 성체를 모시고 방의 문지방을 넘어 설 때 병이 다 나으리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과연 병이 다 나아서 3개월 후에는 다시 일할 수 있었다.
이 두 신부가 1837년 한해에 1,237명에게 세례성사와 2,078명에게 고백성사를 주었으며 1,950명에게 성체를 모시는 즐거움을 주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신자들이 신자마을을 만들어 살게 하고 어린이 세례, 혼인, 장례, 주일과 축일의 모임, 말썽거리 해결 등에 관한 지침을 정하여 주었으니 혼자서 자라 온 조선교회가 일정한 조직과 법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앵베르 주교, 샤스땅 신부와 함께 무수한 고문을 당한 다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했다. 그가 자수하지 전에 남긴 편지 한 토막을 소개한다.
‘… 많은 장애를 뚫고 우리를 이 포교지까지 인도하여 주신 천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던 평화가 가혹한 박해로 혼란된 것을 하락하셨습니다. … 오늘 9월 6일 우리에게 순교하러 나오라는 주교님의 두번째 명령이 왔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나서 떠나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나에게는 영광으로 가는 길이 하나 뿐이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원하노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맛이 달고, 쉬기 좋은 그늘을 주며, 승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하느님의 인자에 천만 번 감사드려주시며, 우리 가엾은 신앙인들에게 구원을 보여 주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1839년 9월 6일).
3).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님 (St. Chastan Jacobus)
샤스탕(Chastan, Jacques Honore) 신부는 프랑스인 선교사로 한국명은 정 아각백(鄭牙各伯)이며 새남터에서 순교하시고 성인품에 오르셨다.
1803년 10월 7일에 프랑스의 마르쿠(Marcoux)에서 태어나 1826년 디뉴(Digne)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해 1월 13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4월 22일 우선 마카오로 보내졌다. 그는 페낭(Penang)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거기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 입국을 위해 떠나게 되자 샤스탕 신부는 자기도 평소에 원했던 조선으로 함께 동행하기를 주교에게 청하였으며 그의 청이 받아들여져 1833년 5월에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 후 3년간을 중국대륙과 몽고?만주를 거쳐 조선 국경까지 갔으나 그를 인도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2년간 산동(山東) 교우들을 돌보았다. 그동안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주 땅에서 잃었고, 동료 신부인 모방신부가 1836년 1월에 먼저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으므로, 그의 통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28일 모방 신부의 기별을 받고 변문으로 간 샤스탕 신부는, 유방제 신부와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의 신학생을 전송하던 조선 교우들을 만나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에는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양에 머무르면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성사를 집행하다가 부활축일을 양근(지금의 양평)에 가 있던 모방 신부에게로 가서 함께 보낸 다음, 손을 나누어 각 도의 교우들을 찾아보는 길에 올랐다. 상제복을 입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백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 그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떠나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1837년 7월 중순에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모방 신부가 병을 얻어 중태에 빠져 한양으로 이송되자, 샤스탕 신부는 곧 그에게로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다행히도 모방 신부는 그의 간병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샤스탕 신부는 남쪽지방으로 다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그 무렵 제 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 주교가 그 해 12월말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서울로 도착하자 샤스탕 신부는 1938년 5월 한양으로 올라와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교회 창설 52년만에, 그리고 교구 설정 7년만에 비로소 주교와 신부를 함께 모시게 되어 명실공히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주교와 샤스탕, 모방 두 신부는 함께 한양의 교우들을 돌보다가 샤스탕 신부는 다시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전교에 힘썼으며 회장 한 사람을 부산에 내려보내 일본 류우꾸(琉球)지방의 전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교를 비롯한 세 서양인 성직자가 조선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차차 퍼지게 되자 당쟁의 여파까지 가세하여 관헌에서는 천주교의 탄압을 강화함으로써 1839년 기해년(己亥年) 봄에 많은 교인들을 잡아 피를 흘리게 했고, 외국인 선교사를 잡으려는 관헌의 추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이에 수원(水原) 남쪽 서해안의 외딴 곳에 피신한 주교는 점점 심해지는 박해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전교중이던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를 불러 이에 대처할 방도를 논의하였다. 주교는 이 자리에서 혼자만이 남고 두 신부는 청국으로 피신할 것을 종용했으나, 두 신부는 끝까지 함께 남기를 결심하여 다시금 각각 맡은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주교는 배교자 김순성의 간계로 그의 거처가 알려져 1839년 8월 10일 스스로 나아가 잡히는 몸이 되었다. 주교가 잡히기 전에 쓴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받은 샤스탕 신부는 곧 모방 신부에게 달려가 함께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교우들과 외방전교회에 보내는 고별편지를 쓴 다음 9월 6일 홍주(洪州)로 나아가 관헌에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두 사람은 주교와 함께 포도청에 수용되어 고문을 받다가, 9월 21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라는 극형으로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7세로 조선 입국이래 2년 9개월만의 일이었다.
그의 시체는 다른 두 성직자의 시체와 함께 교우들의 손으로 신촌 노고산에 묻혔다가 1843년에 시흥(始興)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 묻었으나, 1901년 11월 2일에는 명동 대성당 지하실과 새남터 성당 소성당에 모시게 되었다. 그의 거룩한 순교정신은 1925년 7월 5일, 로마 교황청에서 장엄한 시복식이 거행됨으로써 기해박해의 순교자 및 병오년의 순교자 78명과 함께 우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복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4).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님 (St. Rev. Bretenieres Justus)
1866년 3월 7일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의 행렬에서 수고와 고통으로 인해서인지 나이보다 오히려 노인처럼 보이는 주교 뒤에는 키가 크고 곱슬곱슬한 엷은 밤색 머리에 얼굴이 부드럽고 명랑한 젊은 선교사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28세밖에 되지 않은 브르트니에르(Simon-Marie-Antoine Ranfer de Bretenieres, 유스토) 신부였다. 그의 한국성은 백(白)씨였다. 유스토 마리 드 브르트니에르는 1838년 2 월 28일 프랑스 귀족가문인 샬롱(Chalon sur Saone)의 노 판사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그 부인 안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두 사람 모두 신앙이 깊고 열심할 뿐 아니라 자선사업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신심 깊은 이 부부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참 신앙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하고 늘 염려하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어떤 특정한 가정교사에 의뢰하지 않고 항상 자기들이 손수 돌보아 주었다. 이런 사실은 아버지가 그의 협조자인 고트렐레 수도원장한테 쓴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것에 앞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내 자식들이 참된 신앙인이 되도록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실로 이것은 자녀들한테 바라는 오직 한 가지 나의 포부입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토록 열심한 부모는 어린 두 아들의 신심생활을 단련시키는데 못지 않게 체질적으로나 성격 면에서도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을 썼다. 따라서 이들의 생활규범도 유별나게 엄격했다. 방학 때엔 가끔 산에 가서 같이 지냈으며 자주 함께 여행하여 자녀들에게 언어공부와 지리공부를 시켰다.
그러다가 1864년 청년이 다 된 유스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하던 외국 선교사가 되어 자신을 천주님께 봉헌할 뜻을 외할아버지한테 여쭙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그의 한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날 성 니콜라 학교의 한 소년을 방문하였을 때였다. 유토스는 문득 자기가 왜 늘 선교사가 될 생각을 해왔는지 이제야 깨달았다고 하면서‘내가 성소를 내 마음 속에 느낀 것은 무척 어려서부터 였다. 내가 세 살 때의 일이었는데 다른 것은 내가 미처 못 알아들었지만 나는 키 작은 중국 사람들을 회개시키러 간다는 것만은 항상 기억해 왔다’고 말했다.”
브르트니에르 두 형제 (동생은 프란치스코 드 살)가 서로 만나 이야기할 때에도 유스토는 동생에게 “나는 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치고 싶다”고 늘 말하곤 하였다. “나는 순교자가 되고 싶어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원하니까요.” 이 놀라운 말은 소년 유스토가 휴롤 수도원장한테 드린 말이다. 한마디로 유스토는 어려서나 커서나 한결같이 선교사가 되는 희망으로 차 있었다. 1857년 유스토가 고등학교 공부를 할 때의 일이었다. 유스토는 정식으로 플라비니(Flavigny)에 있는 도미니코회에 들어가 수련생활을 하겠다고 승낙을 구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2 년을 더 기다리기로 하고 이동안 그는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동생의 공부를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2 년이 지나자 유스토는 마음 속에 자기 결심을 굳힌 다음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1859년 파리에 있는 이시(Issy) 신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유스토는 모든 이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아가며 지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1860년 삭발례를 받은 유스토는 다음해 그의 친구에게,“나는 외방 전교회 신학교로 갈 생각이다.”라고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외방전교회의 장상을 찾아가 상의한 후 부모에게 자기 결심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기어이 승낙까지 받아낸 유스토는 1861년 7월 25일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한 동료는 유스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스토의 마음은 참으로 비범하였다. 천주님께서 그에게 순교의 특은을 허락하시지 않더라도 그는 꼭 언젠가는 성인품에 오르게 될 것이다.” 신학공부를 마친 후, 그는 동료 볼리외, 도리와 같이 1864년 5월 21일 티베 교구장 토미느 데마쥐로(Tfomine-Desmazures) 주교에 의해 신품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첫 미사를 지낼 때부터 천주님께 특은을 주시기를 늘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순교자들의 수고와 고통을 같이 함으로써만이 그들의 영광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6월 13일 그는 자기가 어떤 전교지방에 배속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의 덕행을 알고 있던 교장은 거기에 대한 새 증언을 얻고 싶어서 그에게 말했다.
“오늘 목적지를 알려 주는 날입니다. 어떤 전교지방을 더 좋아합니까?”
유스토는 더 좋아하는 데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똑같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거룩한 노인인 앙부랑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티벳으로 가시오. 좋소?”
“아주 만족합니다.”
“아니오. 티벳으로 가지 않고 통킹으로 가게 되오.”
“그것도 역시 좋습니다.”
“그럼 포교지 지나로 가시오.”
“아주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단 말이요?”
“그렇습니다. 신부님.”
“자 이제는 진지하게 말하겠소.”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서 있는 교장신부 앞에 무릎을 꿇으니 교장신부는,
“당신은 조선으로 가시오”하고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스토는 조용히 대답했다.
“신부님께서 저더러 고르라고 하셨어도 다른 데는 고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발하는 다른 세 젊은이 볼리외, 위앵, 되리 신부들도 같은 목적지로 배정받았다. 도리 신부는유스토와 같이 따난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좋아서 이 점만을 기억해 두고 동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동료들이, 아니 대관절 어디로 가는데 그래?“하고 물으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몰라, 내가 아는 것은 유스토하고 같이 간다는 것 뿐이야. 내게 필요한 것은 이것 뿐이야.”
파리 출발은 7월 15일로 정해졌다. 서둘러 출발 준비를 하는데 유스토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을 뿌리칠 힘과 끝까지 잃지 않는 평온을 기도에서 얻어냈다. 마지막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신학교의 문을 넘어서려는 순간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그의 호주머니에 아직 동전 다섯 닢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들을 도리 신부에게 주면서 말했다.
“참 좋다! 내가 가난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20년이 더 되었는데 이제 정말 가난하게 됐어.”
홍콩에서 조선으로 향해 가기로 되어있는데, 네 사람의 출발자는 그들의 나머지 여정에 대해 상세한 지시를 받았다. 즉 해상에서 여섯 달 동안을 지내는 대신 만주의 배롤 주교에게로 가라는 것이었는데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는 유리한 시기가 올 때까지 거시서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조선에 잠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만주에서 새 선교사들을 싣고 오는 배와 또 하나는 그들을 반도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조선에서 보낸 배가 조선 서쪽에 있는 매린도(백령도)에서 만나는 것임을 베르뇌 주교는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1864년 10월 28일 만주해안의 요하 어귀에 도착해서 조선에 들어갈 유리한 조건을 여섯 달 동안을 기다려야 했다. 이 여섯 달 동안 그들은 중국말 공부와 중국 뱃사공들과 복잡한 교섭을 하는데 보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협약이 맺어졌다. 뱃사공들은 5월 2일 만주를 떠나 네 선교사를 매린도까지 데려가서 필요하다면 마지막 기한인 5월 20일까지 그곳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베르뇌 주교는 조선교우들이 배 한 척을 보내기로 되었는데 그 배는 5월 10일과 20일 사이에 백령도 앞 바다에 나타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첫 번 조선 배는 도중에 발각되어 압수되었고 두 번째 배는 정해진 기한이 마지막 날 밤 자정에야 겨우 나타났다.
풍랑과 조선 병졸들의 경계와 식량의 부족으로 인해 시련을 겪은 젊은 선교사들은 약속 장소에 제때에 닿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극도의 불안과 기약 없이 만주로 돌아가야 할 필요 때문에 한층 더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5월 20일 토요일 자정과 한시 사이에 배 한 척이 베르뇌 주교의 이름을 말하는 선원들을 태우고 그들의 배에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이제 살아났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빨리 서둘러서 배를 옮겨 타고, 짐을 옮겨 싣고 백령도를 빠져나기가 시작했다.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해도 연안으로 입국이 위험했기 때문에 거기서 300리나 떨어진 남쪽으로 갔다. 어둠을 타서 위험을 벗어났다. 그러나 조선배는 시설이 형편없는 돛이며, 밧줄이며, 갑판까지도 짚으로 짜서 만든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이 배에서 크게 곤궁을 맛보았다. 깊이 2미터, 너비 1미터의 비좁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 다리를 쭉 뻗고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1주일 내내 다리를 오그리고 옆으로 누워 거적을 덮고 지내야 했는데 이 거적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는 해주었으나 비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식량은 줄어들었고 오래지 앉아 뱃틈으로 스며드는 바닷물로 배가 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항해는 계속되었다. 중국인과 연락을 했다는 혐의를 받은 두 척이 당한 엄혹한 운명에 겁을 집어먹은 선원들은 그들의 밀수품을 싣고 서울 지방에 접근하기를 거절하고 그보다 300리나 더 남쪽에 있는 그들의 출신 지방인 내포지방에 가서 배를 댔다. 1865년 5월 27일 저녁 여섯시에 브르트니에를 신부와 동료들은 조선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교우들은 친절과 놀라움과 공포가 섞인 감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교우들은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오는 신부들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교사들이 그들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의 조선입국에 가담한 자들이 당하는 사형이 두려웠다. 선교사들을 데리고 온 배 주인조차도 감히 그들을 돌보려 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는 계약을 이행했고 따라서 책임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베르뇌 주교가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서울에 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천주님의 섭리가 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집이 불에 타버린 다블뤼 주교는 피난처를 찾아 내포지방에 와서 선교사들이 상륙했던 동네에서 20십리 되는 곳에 있었다. 다블뤼 주교는 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안전하지 못한 그 곳에서 빠져 나오게 했다. 5월 28일 다불뤼 주교는 한 교우를 시켜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서울로 인도하게 하고 자신은 그가 거쳐하던 거더리(합덕)교우촌으로 다른 선교사들을 데리고 갔다. 베르뇌 주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기쁘게 맞이하고 그를 그냥 서울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주교는 남대문 밖 자암에 있는 회장 정의배 마르코의 집에 그의 거처를 정해 주었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오랫동안 살았던 9평방 미터 되는 좁은 방에 들었다. 그 방이 그의 사무실 겸 경당 노릇을 했다. 거기서 1866년 2월까지 살면서 시간을 나누어 말도 배우고 기도도 드리고 했는데, 다만 세례와 견진을 주는 일과 밤에 주교를 찾아뵙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참된 피정의 생활을 거기서 했다.
<이런 종류의 생활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아무리 되풀이해 주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찾아가는 순교가 피의 순교인 때는 드물겠지만, 언제나 좋건 싫건 즉 공로가 있건 없건 자기의 모든 경향과 자기의 취미와 뜻을 버리는 순교일 것이며 대단히 심한 육체적 고행 외에 그보다 더 많은 정신과 마음의 고행이 따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은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거의 완전한 은둔상태에서 풍토순화와 적응과 말공부라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을 때 쓴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훌륭한 사도 베로뇌 주교의 지도를 받으며 실질적인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가 80명 가량의 고백을 듣고 어른 40명에게 세례를 주고 몇 번 견지성사를 주고 여러번 병자의 성사를 주었는데 1866년 2월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가 혼배성사를 집전하고 견진성사를 주고 있을 때 2월 23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서둘러 그 소식을 다블뤼 주교와 거주지를 아는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2월 24일 하루는 조용히 지나갔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미사성제를 드렸다. 그것이 마지막 미사가 되었다. 25일 그가 살던 집주인 정의배가 붙잡혔고, 그는 그 날 하루 낮 하루 밤을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26일 이번에는 그가 붙잡혔다. 그는 포졸들에게, “당신이 올줄 알았소”라고만 했다. 결박은 당하지 않고 그저 옷소매만 붙들린 채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신문을 당하자 그는 똑똑히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조선에 왔소. 나는 천주를 위해 기꺼이 죽겠소.” 그리고 조선말로 완전히 알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 포청에서 하루 낮 밤을 지낸 뒤 금부 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신문을 당하지 않고 고문만 당했는데 형벌을 한 마디 말도 없이 견디었다. 그는 주교와 운명을 같이해서 3월 6일 주교와 동시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이튼날 앞서 이미 서술한 절차에 따라 형장으로 끌려갔다. 브르트니에를 신부는 형장에 갔을 때, 목이 몹시 말랐다. 그래서 포졸들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했으나, 이들은 알아듣지 못했거나 혹은 못들은 체했다. 그것을 목격한 증인 박 베드로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물 한 바가지를 떠 와서 형벌 받는 사람에게 갖다 주게 하라고 관리에게 청했다. 집행관은 한 병졸에게 갖다 주라고 명했다. 그러나 병졸은 분개해서 물을 땅에 쏟아 버리며 말했다.
“금방 죽을 죄인들에게 먹을 물을 줘서 뭘 합니까?” 그러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밧줄을 움켜잡아 씹었다. 그러니까 침이 약간 생겨서 그것을 한숨을 쉬며 삼켰다. 구경꾼 하나가, “너희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않던 네가 남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죽으니 후회가 되지 않느냐?”하고 외치자,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신부는 대답했다. 그리고 “좋다”는 말을 세 번 되풀이했다. 팔방돌이를 하는 동안 신부의 허리띠가 끊어져 바지가 흘러내렸다. 집행관은 병졸에게 바지를 추겨 주라고 명했다.
베르뇌 주교와 몇 마디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베르뇌 주교의 참수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어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차례가 되어 네 번짼가 다섯 번째로 칼에 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이들 순교자들의 머리는 그 곳에 사흘 간 매달려 군중들에게 현시되었다가 후에 교우들이 정성껏 안장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5).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님 (St. Beaulieu Ludovicus)
볼리외[(Beaulieu, Bernard Louis, 한국명 : 서몰례(徐沒禮)] 신부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보르도 교구의 랑곤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Dsire)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결혼한 지 다섯 달 만인 1840년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한편 19세밖에 안되었던 그의 어머니는 성품이 온화한데다 열심하여 이 어린 아들을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리고 1843년에는 볼리외의 장래 교육을 위해서 죽은 남편이 하던 장사를 포기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 뒤푸르씨와 재혼했다.
볼리외는 여섯살 되던 해에 공만힉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서는 다행히도 교사들이 학생들의 종교교육을 잘 지도하고 있었다. 볼리외는 일곱살 때부터 복사를 하였는데 아마도 이 때부터 이 소년 안에 성소의 싹이 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 담임선생은 볼리외의 부모를 설득하여 1849년 10월 보르도에 있는 소신학교로 볼리외를 보냈다.
같은 해에 볼리외는 보르도에서 다시 숙천(중국시명)에서 전교생활을 한 신부에게 가 있게 되었는데 먼 나라 중국에서의 전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여러 번 듣게 되면서 어린 볼리외 마음 안에는 전교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1857년 볼리외는 보르도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직을 성실히 준비하였다. 한편 그의 성품도 성숙되어 갔다. 어느 날 그와 가장 친했던 벗 아멜리앵 비락이 죽게 되자 볼리외는 그의 아버지한테 ‘저는 아드님이 운명할 때 증표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천당에 들어가던 날에는 천주님께 선교사로서 죽는 특은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1858년 11월 7일 갑자기 볼리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남편이 죽을 때와 같은 심한 고통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이 땅 위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 볼리외와 마지막 혈육의 정을 끊었던 것이다. 한편 볼리외는 선교사의 길을 떠나려면 아직도 4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까닭인즉 지도 신부가 볼리외의 성소를 좀더 확실히 알아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교구일에 집착해 있던 보르도교구 대주교가 누구든 교구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아 볼리외가 청원할 때마다 매번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볼리외는 이에 결코 굽히지 않고 파리외방전교회 장상에게 전교지망의 편지를 자주 올려 가며 그 어느 때 보다도 전교신부생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볼리외는 연령 미달로 사제서품을 못 받고 때를 기다리는 동안 소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1863년 3월 볼리외는 폐렴에 걸려 죽을 뻔했었는데 얼마 후 또 재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전교신부생활의 희망은 전혀 실현될 수 없는 듯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 도네 대주교가 의외로 이 청년 볼리외에게 즉시 출국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려 주었다. 볼리외는 이 때의 기쁨을 ‘내 안에서 힘이 다시 생겨나고 즐거움도 몇 배로 더 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던 숙부로부터 심한 반대가 있었고 또 다른 어려움도 계속 뒤따랐다. 당시 볼리외는 숙부집에 살면서 친아들처럼 사랑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출발 준비물까지도 실상은 숙부에게 부담을 끼쳐야 할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볼리외는 이런 모든 것에 결코 굴하지 않고 자기 결심을 굳혀 8월 27일 숙부집을 떠나 그 달말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쉽게 주위환경에 적응하면서 필요한 애덕생활과 선행생활을 누구라도 감탄할 만큼 열심히 닦아 나갔다.
또한 볼리외는 무엇보다도 성실한 사제과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겸손되이 기도하며 이윽고 1864년 5월 21일 사제품에 오르게 되었다. 같은해 6월 15일 볼리외 신부는 한국의 전교신부로 지명되자 즉시 출발을 서둘렀다. 물론 볼리외 신부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땅에서의 전교가 대단히 어려운 형편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출발을 주저하지 않았다. 볼리외 신부는 1864년 7월 15일 프랑스를 출발하여 1865년 5월 27일 조선에 도착하였다. 물론 장주교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장주교는 그 때의 상황 때문에 전교 신부들을 분산시켜 산골 교우촌으로 피신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볼리외(서) 신부와 도리(김) 신부는 서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왕래하면서 고해성사도 보고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이들은 외교인들이나 관헌들의 눈을 피해야 했는데 상복을 입고 다님으로써 서양 사람의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서로 만나면, ‘이토록 잘 조직된 전교지방에 오게 되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곳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나라에 있는 주교들과 전교신부들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있는 사실입니다’라고 행복스럽게 서로 대화하면서 조선말을 익히곤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교신부로서의 처신을 잘 지켜 행여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무척 조심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술에 취하여 실수로 튀어나오는 말 한마디가 교우들을 대량 학살케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착하신 천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심판하실까? 이는 오직 그분만이 아시는 일이지만 우리 모두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지켜야 할 서약은 우리의 고귀한 신분에 맞추어 생명보다 천주님을 더 사랑하여야 할 중대의무를 증거할 줄 앎이로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성인들이 되도록 천주님을 열렬히 사랑해야 할지로다.>
1866년 2월에 접어들자 볼리외 신부는 성무수행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조선말에 능숙해졌다. 그래서 베르뇌 주교는 볼리외 신부에게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수십리 떨어진 광주지방을 맡아보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볼리외 신부가 짐을 꾸려 막 떠나려 할 무렵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2월 27일 볼리외 신부의집 주인이었던 장제철의 밀고로 새벽 둔토리 마을에 갑자기 포졸들이 습격하여 볼리외 신부를 붙잡아 서울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볼리외 신부는 옥고와 고문끝에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다. 3월 7일 볼리외 신부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 사형장으로 끌려 나갔고 정해진 의식이 거행된 후 브르트니에르 신부 다음으로 참수되었다.
볼리외 신부의 목은 세번째 칼날에 땅에 떨어졌고 그의 머리는 3일동안 그곳에 높이 매달려 현시되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군문효수란 극형을 선고받고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한 베르뇌,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네 분 성인의 시체는 처형된 후 그대로 버려져 있었는데 그 부근에 살던 외교인들이 4일 후에 그 곳에 구덩이를 파고 함께 묻었다. 조선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일가나 친구가 그 시체를 찾아다가 묻거나 그렇지 못하면 그 죽인 곳이 마주 보이는 동네에 묻는 법이었다. 서울의 교우들은 이 거룩한 시체들을 찾아 묻을 생각은 간절했으나 그 때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교우들은 6개월 후에야 이들을 다시 파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5리쯤 떨어진 외와고개(지금 용산 우체국 뒷고개)골짜기에 묻었다. 이 어려운 일을 맡아 본 교우는 한때 왕궁의 호위병을 지냈고 한강가의 서빙고에 숨어살고 있던 전교회장 박순집 베드로였다. 성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1876년부터 한국 천주교회에서 추진한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 추진 결과 볼리외 신부는 23명의 병인박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6).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님 (St. Dorie Henricus)
도리(Dorie, Pierre Henri, 한국명 : 김도리)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순교하여 성인이 되셨다.
성인은 1839년에 9월 23일 즉 성 앵베르, 모방, 샤스탕 등이 조선에서 순교한 다음날에 프랑스 방데(Vendee) 지방의 ‘성 힐레르 딸몽’이라는 대단히 작은 바닷가 어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오막살이 바로 옆에 있던 소금을 만드는 염전과 농사일을 하면서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갔던 매우 가난한 부부였다.
그러나 비록 지식은 도리 비뇨노 집안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지 않지만 신앙은 높이 평가되고 있었고 부모는 많은 자녀의 확고한 그리스도적 교육을 보장했다. 도리는 1852년 10월 소신학교에 입학해서 8년을 거기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모든 이의 사랑을받았고 졸업할 때에는 ‘성교회를 위하여 훌륭한 희망이 되는 소년’으로 소개받게 되었다.
중등부 1학년 때부터(그는 그때 15세였다)극동에서 전교하는 것을 생애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제일 좋아하는 독서가 잡지(유년)을 읽는 것이었다. 그는 복권으로 이 잡지 전질을 탔었다. 그러는 동안 1860년에 뤼송의 대신학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성실하게 수학하였다.
천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혼을 구하겠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지탱된 근면 덕택으로 착실한 공부를 했다. 그는 공부와는 반대로 감정의 순진한 너그러움과 고상한 생각과 열렬한 신앙심과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뤼송 교구의 요청에 의해 1861년 12월 21일에 삭발례를 받고 이듬해 6월 14일에 서품을 받은 뒤에 그는 그해 학년말로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출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족과 교구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은인을 떠나야 하는데 이들의 반대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뼈에 사무치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도리가 제일 먼저 그의 결심을 알린 사람 중의 하나는 드 베세 백작이었다. 백작은 심한 반발을 보였다. 그가 보호하는 학생의 병약한 체질이 그에게는 선교사 성소에 금기로 보였고 교구를 떠나는 것은 조심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은인은 신학생의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결심에 손을 들고 굴복하고야 말았다. ‘자네가 그렇게 원하니 떠나게. 그리고 천주님이 자네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네.’
도리 신학생은 다음에는 본당신부와 과감하게 맞섰다. 역시 본당신부도 똑같은 이의를 제기했다. 도리 신학생은 솔직하고 열렬하게 반박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건강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선교생활의 피로를 감당해 낼 수 있을 테니요. 그리고 또…’ 그는 이렇게 해서 마음 속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이 조그마한 몸뚱이로 천주님의 마음에 맞는 선교사가 되고 또 누가 압니까 순교자가 된다면 신부님은 기쁘고 자랑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
착한 본당신부는 자기 교우의 명분에 완전히 끌려들어가 자기가 직접 선교사 지망자를 교구 주교에게 추천하겠다고 햇다. 주교는 떠나는 사람을 친절히 맞이해서 격려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강복을 주었다. 이 강복은 최종적인 이별의 예측으로 몹시 괴로와하는 부모 형 제 자매에게 가까이 가는 데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몇주일 동안의 방학이 그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그가 파리로 출발하기로 정한 하루전까지도 부모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부는 되라, 그렇지만 교구에 남아 있지 외방전교회에는 갈 생각하지 마라’하고 어머니는 애원했다. ‘어머니, 외방전교회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계획을 세운 것이 8년이나 돼요. 천주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와 같이 있으면서도 천주님을 섬길 수 있지 않니? 제발 어미를 버리지 말아다오.’ ‘그럼 어머니가 꼭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 어머니곁에 남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전교지방도 그만이고 신부되는 것도 그만입니다. 어서 바지하고 작업복하고 곡괭이를 주세요. 동생 있는데로 가서 같이 밭일을 할테니까요.’
도리의 이 말로 어머니의 반대는 끝났다. 그러나 눈물이 마르지않았다. 아버지는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아들과 그의 짐을 생팅레르로 데려다 주고 옮기고 하는 것을 저녁내내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그러다가 아들의 고통을 당해내지 못하고 마침내 중얼거리었다. ‘자 뭣 좀 먹고 좀 쉬어라. 몇시간 후 생팅레르로 데려다 주마.’
새벽 두시에 아버지는 집의 수레에 말을 매고 아들을 생팅레르역으로 데리고 갔다. 때는 1861년 8월 11일이었다. 부모는 양보했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도리는 부모를 자기 성소의 수준에 올려 놓으려고 애정을 가지고 노력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고 신품받을 사람의 기쁨을 알렸다, 그러나 부모는 여전히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바라고 아들을 다시 보는 기쁨을 은총인양 청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세상없이도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 약함이 두려워서였고 무엇보다도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1864년 5월 21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그의 선교활동지역에 대한 장상들의 결정을 조용히 기다렸다. 6월 3일 어느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얼마 안있어 배를 타고 가라는데로 가게 되었네,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네, 티벳에서는 박해가 디시 시작되었고 조선사람들은 수많이 입교를 한다네. 거기건 다른 데건 상관없이 내가 떠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이나 마찬가지로 거기에 대한 생각은 이제 하지 않게 되었네. 이 평온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도록 기도해 주게.>
6월 13일 조선에 배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조선 만세! 내게 이렇게도 아름다운 전교지방을 주신 것을 천주님께 감사 드리세요.’ 이 전교 지방이 그에게는 두배로 아름다왔다. 그 곳이 주께서 그를 보내시는 땅, 그의 꿈과 기도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즉 복음을 위해 피흘리기를 희망하는 땅이었고 또한 그의 거룩한 친구 유스토 드 브르트니에르와 함께 있게 될 땅이었던 것이다. 그는 7월 19일 마르세이유에서 배를 타고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위앵 신부들과 같이 길고 위험한 항해를 했고 그들과 같이 1865년 5월 27일 조선에 몰래 들어왔다.
천주님께서는그의 착한 뜻만으로 만족하실 것이다. 도리 신부가 작은 교우촌 용인 손골리에 보내져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아직 조선말을 배우고 있던 중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는 아직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지는 않고 있었다. 그도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통지를 받았으나 교우들의 체포가 뒤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참으로 박해가 시작되는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교우들에게 해가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그를 돌보고 있던 교우 이군옥까지 피신시킨 뒤에 그만이 2월 27일에 이선이의 밀고로 붙잡혔다.
그가 손골리에서 지낸 8개월간 교우들이 자기를 김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기뻐했는데 그것은 조선에는 김이란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도리 신부는 자기의 소원대로 입국한지 10개월만에 볼리외 신부와 함께 투박한 들것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어 서울 옥에서 동료들과 합류했다. 그 후 동료들과 같이 고문을 당했다. 승정원 일기에 보면 -이것이 조선식 성이었다.-도리는 고문을 당했는데 곤장 치는 것이 아홉 차례에 가서 멈추어졌다고 한다. 그는 크나큰 용기를 보였다. 새남터의 형장에서 그는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것 같았다고 한 증인이 말했는데 이 증인은 ‘나는 그 분이 순교에 대한 마음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하고 덧붙 였다.
1866년 3월 7일 군문효수형으로 새남터에서 처형된 네 순교자 중에서 도리 신부는 맨마지막으로 참수되었는데 그의 머리는 두 번 째 칼에 떨어졌다. 그때에 그의 나이 27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1968 년 교황 바오로 6 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 년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7). 성 정의배 마르코(St. Jeong Ui Bae Marcus)
丁義培 성인은 1795년 서울 창동에서 태어났다. 유업(儒業)을 쌓으며 생활하던 중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의 순교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그 즉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후 열심히 신앙생활로 인해 1845년 페레올 주교가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20여년을 헌신적으로 일했고, 또 1854년 성영회(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사업 기관)가 조직되자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된 후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체포되어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새남터 강변에는 베르뇌 주교와 그 일행들의 시체가 군졸들의 감시 아래 아직도 사람들에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새로운 증거자들이 순교의 형장에 도착하고 있었다. 과거공부를 끝마친 정의배는 서울 글방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게 되자 몇 년 동안을 자식도 없이 홀아비생활을 하였다. 그 뒤 1839년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두 신부의 순교를 목격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는데 천주교를 위험한 도당이며 조상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단죄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선교사들과 갖가지 계급의 천주교인들이 아주 희한한 기쁨을 안고 죽음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렇 게 놀라운 결과를 내는 종교를 연구할 호기심을 가지고 성교도리의 신통한 효험을 알아보고자 책 몇 권을 장만하였다. 본디 마음이 착한 그는 성교도리 참됨을 깨닫고 아현리에 살던 황생원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즐거워 하며 말하기를, ‘내가 전에는 성교를 믿는 사람들이 착하지 못한 줄로 알았으나 이제 참됨을 알게 되니 사람은 반드시 성교를 믿어야만 착하게 된다’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바로 입교하여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였을 때 그가 너무도 열렬한 신앙과 갈고 닦은 덕행을 지니고 있음을 보고 그를 서울 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이 직책을 그는 죽을 때까지 모든 이에게 유익하게 수행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정의배 마르코에 대하여 일종의 외경심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차례 선교사들에게 이렇게말하였다. ‘저 노인을 보시오. 저분의 말들은 완전하고 저분의 길은 바릅니다.
나는 천국에서 저분의 자리만큼 훌륭한 자리를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열성은 참으로 놀라와 끊임없이 신자와 예비신자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그들에게 성사받을 준비를 시키는 일을 했다. 그의 행동에는 항상 변함이 없었고 입술에는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또한 주야를 막론하고 그를 부르는 사람들을 도와 줄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가 성내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면서도 1854년 성영회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버려진 고아를 데려다가 도와 주는 일을 했다. 그는 매우 가난했지만 신자들로부터 아무 것도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식탁은 아주 보잘것이 없었다. 두번째 맞은 부인 피 가타리나(1898년 3월 12일 순교했다는 것을 리델 이주교가 입증했음)는 삯바느질, 품팔이로 살림을 꾸려 갔을 뿐이고 다른 수입은 없었다. 이들은 슬하에 자녀가 없어 처조카 피영록 바오로를 양자로 삼았다. 이 때 그의 집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손님으로 잠시 와 있었는데 피바오로는 백신부에게 한국말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기도 했다. 정의배 회장은 변함없이 늘 침착하고 신덕이 깊었을 뿐 아니라 믿음도 대단히 굳세어 모든 신자들이 그를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성인처럼 공경하였다. 그는 자주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서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울 수밖에 없도다.’하고 말하곤 하였다. 미사첨례 때 그의 열심은 ‘누구든지 미사첨레는 정의배 마르코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확인할 정도로대단하였던 것이다. 박해가 시작되자 남대문 자암에 살던 그는 조카 바오로를 우선 피신시킨 다음 자기 직분에 충실하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가 남아 있는 그 자체가 교우들에게 절대 유익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866년 2월 25일 한때 장주교를 시중들던 이선이 바오로가 고발하여 체포되니 이 때 정의배 회장은 웃으면서 ‘그대들이 올 줄 알고 있었소. 자, 갑시다’하면서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포장에게로 갈 때에 그의 어깨엔 오라가 걸렸었으나 다만 형식적이었으니 그는 결박되지 않았고 군졸 두 명이 그의 옷소매를 잡고 있는 것을 포졸 우두머리가 ‘이 점잖은 노인을 혼자 걷게 내버려 두어라. 이 분이 도망칠 염려는 조금도 없으니 그저 호위만 하고 너무 빨리 걷지도 말라.’고 말하였다.
포청에 와서도 아무도 그를 마구 천대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도 72세나 된 노인이었는 데다가 그의 인품도 포도대장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고매하고 위풍당당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의배 마르코 회장은 처음에는 구류간에 갇혔다가 의금부로 옮겨져 선교사와 동료 교우들과 4일동안에 걸쳐 신문과 형벌을 받게 되엇다. 특히 그가 천주교인들의 우두머리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졌으므로 여러 차례 걸쳐 특별한 고문을 가하여 교우들을 밀고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가공인물 또는 외교인들의 이름을 말하였으므로 이것을 안 관원은 더욱 심한 곤장을 치게 하였다. 정의배 회장은 끝내 한 사람의 교우 이름도 대주지 않고 버티었다. 그리고 관장에게 ‘나으리 눈에는 천주교를 믿는 것이 죽어 마땅한 죄로 보이는데 정말 딱한 일이오. 배교할 수 없으니 죽여 주시오.’라고 반복하기만 하였다.
이윽고 3월 6일 군문효수라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다음날 즉시 임금의 윤허가 내려졌다. 1866년 3월 11일 새남터 형장으로 가는 길에 정의배 회장은 눈을 밑으로 내리감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의배 마르코는 네번째 칼에서야 비로소 목이 떨어져 순교하니그의 나이 72세였다. 본시 머리털이 없는 대머리였던 관계로 그의 수염을 대신 이용해 그의 목을 3일동안 매달았다. 그 뒤 그의 아내로 돈을 주고 그의 귀중한 시신을 모셔와 정중히 매장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8). 성 현석문 가롤로 (St. Hyeon Seok Mun Carolus)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병오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참수 치명한 후에도 아직 8명의 증거자들이 감옥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김 신부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한결같이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정부는 급기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중 현석문 가롤로만은 소위 사학의 괴수라 하여 김신부처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처형하였고 나머지 7명은 옥에서 목을 옭아매어 죽이게 하였다. 현석문 가롤로는 1796년에 대대로 벼슬을 지내던 서울 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현계흠 베드로가 1801년 신유년에 순교한 이래 어머니와 누이와 한가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전 생애를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도와주는데 바쳤으며 교황청 조서는 그에 대하여, “공적이 많고 덕이 높으며 성격이 상냥하고 온화하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문모 신부 순교 후, 이 나라에 주교나 신부가 아직 한 분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무렵에 현석문은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당시 쟁쟁한 인물들과 늘 교회를 상의하였고 무엇보다도 선교사를 모셔오는 일과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중대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현석문은 위험한 국경지대를 여러번 드나들면서 김대건, 최양업 등 신학생을 외국으로 떠나 보내는 한편 국경에서 대기 중이던 주교, 신부를 영접하게 되었다. 기해년 박해 때 현석문 가롤로 회장은 샤스탕(정)신부에게 복사하고 있었는데 석문은 주교 신부를 따라 포도청에 자수하여 신앙을 증거하고자 하였으나 선교사들이 그것을 말리고 차라리 남아서 목자 없는 교회와 교우들을 돌보기 위하여 깊이 숨고 세밀한 주의를 하여 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하였다. 앵베르(范)주교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선 교회를 현석문에게 맡겼다. 주교가 그를 얼마나 중히 여겼으며, 교들에게 얼마나 두터운 신앙을 받았는지 이 한 가지 만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다. 또 앵베르 주교는 전교회장 현석문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그대는 살아서 순교자의 행적을 만들도록 하라고 부탁하였다. 여기서 순교한 교우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기해일기다. 이것은 앵베르 주교 자신이 기해년 1월부터 5월까지 사이의 교회사정과 순교자의 간단한 전기를 만들게 되었으나, 주교 자신이 멀지않아 잡히게 될 것을 생각하고 그 뜻 깊은 일을 서울 교우의 회장이던 현석문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이후 3년 간 현석문은 포졸에게 쫓기며 변명과 변장을 해 가면서 깊은 산중의 극빈한 교우의 오막살이집에서 나날을 보내야 하는 등 이루 표현하기 어려운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막다른 처지에 있으면서도 현석문은 지방을 두루 다니며 애긍을 거두어 옥중 교우들의 사식(私食)을 돌보고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안전한 곳에 이장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신입 교우들을 격려하고 권면하여 포졸들이 수색을 당할 염려가 가장 적은 동네로 모이게 하는 등 동분서주하면서 맡은 바 직책을 성의껏 수행하였다.
또한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을 수집하라는 주교의 분부를 잊지 않고 스스로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고 그간 최 필립보, 정하상 등이 수집한 것을 다시 조사하여 책으로 정리하여 모든 교우들로 하여금 두루 읽게 하였다. 이것이 순교자소전(殉敎者小傳)인 <기해일기>라는 것이며 이 귀중한 순교자의 자료를 오늘날까지 전하게 하였다. 현석문이 지방으로 피신하여 다니는 동안 서울에서는 식구들이 다들 잡혀 순교하였다. 먼저 누이 현경련 베네딕타가 참수 치명한 데 이어 김 데레사와 은석 처자가 옥사하였다. 홀로 남은 현석문 가롤로는 박해 후 경향각지(京鄕各地)를 두루 다니며 교우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냉담자를 찾아 다시 수계할 것을 권면하여 마지않았다. 무엇보다도 석문에게는 목자 없는 교회에 선교사를 맞아 들여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국경과 북경에 사자를 파견하여 그간 두절되었던 중국 교회와의 통신을 부활시킴으로써 마침내 김대건 부제를 입국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 ‘들우물골’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나서 상해로 건너가 주교 신부를 영접하여 온 후 실제로 신부댁 주인노릇을 하며 교중일을 맡아보았다.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체포소식을 전해들은 현석문 회장은 즉시 김신부를 어느 비신자에게 맡기고 그 집에 있던 교회의 돈과 물건을 옮기고 동시에 여교우들을 가마에 태워서 이 아가타 집으로 피신시키는 한편 자기는 사포서동에 새 집을 마련하고 그 곳에 숨었다. 그러나 포졸들은 가마를 매고 간 사람들을 찾아내어 이 아가타의 집에 남아있던 우 수산나를 앞장세워 현석문 회장의 새 집을 습격함으로써 현회장을 비롯 5명을 모두 체포하여 우 포도청에 가두었다. 때는 7월 10일 이었다. 포도청에서 우 수산나가 집을 가르쳐주었다고 해서 여교우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현석문 회장이 이 광경을 보고, “천주를 위하여 순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라고 타일어 여교우들을 화해시켰고 마침내 모두가 훌륭하게 순교하게 되었다. 현석문은 포청에서 7월 23일과 26일 양일 사이에 여섯 번의 문초를 받았다. 첫 번 문초에서 석문은 “제 자호(字號)는 덕승(德昇) 나이 겨우 다섯 살에 아버지([계흠(啓欽)]가 신유년 사학(邪學)에 복법(伏法)이 되었고, 어머니가 자를 데리고 동래로 가서 살다가, 열네살에 서울로 올라와 약국을 업으로 살았더니, 기해년 사옥(邪獄)에 저의 성명이 모든 초사(招辭)에 나오는 고로 이재영이라고 성명을 고치고, 호서와 호남으로 도망하며 살다가 재작년에 서울로 올라와, 사포서동 김소사집에 숨었다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하고 그 간의 피신한 경위를 자백하였다.
그 다음 문초에서 석문은 김대건을 유학 보냈고 또한 귀국할 때에 그를 인도하였으며,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피신한 사실 등도 아울러 자백하였다. 1846년 9월 19일 정부는 석문을 모반 죄인으로서 군문효수형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선고문에 이르기를, “마땅히 모반한 법률로 시행할 것이나 저같이 더럽고 작은 자를 왕부(王府)까지 번거롭게 할 것이 없으니 대건의 예에 의하여 군문을 내어주어 머리를 잘라 매달아 민중을 깨우칠 것이다“ 하였다. 그 날 석문을 사장(沙場)에서 많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을 잘라 매달아 민중을 깨우쳤다고 보고해 왔다. 이 때 석문의 나이 50세였다. 후에 교우들이 현석문 회장의 시체를 찾아내어 왕십리에 이장했다고 한다.
9). 성 우세영 알렉시오 (St. U Se Young Alexius)
우세영 알렉시오는 ‘세필’이라는 속명도 갖고 있는데,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대대로 선비를 지내오던 양반 집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그도 당시의 사회 풍습대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벼슬을 위한 과거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며 재주가 아주 비범하여 집안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알렉시오도 이런 부모의 기대에 맞추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노력을 많이 했다. 마침내 그가 16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길은 항상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곳을 어루만져 주시는 것이라, 바로 그렇게 갈망하던 과거 급제를 위해 시험을 보러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요한을 만나게 되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돌아온 우세영이 벼슬길을 포기한 것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인 것이다.
그는 진정한 삶의 의미가 담긴 천주교 교리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믿고, 결국 벼슬을 포기하고 말았는데 만약 그가 그러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면, 훗날 평범한 벼슬아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내버린 채 집을 나와 몇몇 예비신자들과 장 베르뇌 주교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를 만나본 장 주교가 그의 학식과 신앙과 열성은 대견스러우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주위 환경이 너무 어려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세례를 주지 않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저에게 세레를 주신다면 천주의 도우심을 받아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기필코 이를 잘 참아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저버리지 마시고 제 소원대로 세례를 받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애원하였다. 결국 정 마르꼬 회장의 인도를 받아 1863년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막상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가족의 천대가 대단하였고,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저주와 악담까지 참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수난을 가만히 인내로써 이겨냈다. 마침내 남의 구설수에 오르기가 두렵고 대하기가 부끄럽다 하여 가족들은 그를 감금까지 하게 되었다.
이에 알렉시오는 어느 날 ‘집을 떠나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께 청하자, 그의 기도 덕분인지 아버지는 ‘차라리 네가 집에 없으면 죽어버린 것으로 여겨 위안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일로 미루지를 말로 오늘이라도 좋으니 당장 떠나거라’하고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우 알렉시오는 곧장 서울로 올라가 정 마르꼬 회장 집에 일년 동안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집안 식구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리서 번역과 십이단 편찬에 전력하였다. 서울에서 1년이 지낸 뒤에 아버지가 알렉시오를 찾는 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고향으로 가 아버지를 만났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아버지는 알렉시오를 불러 성교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알렉시오의 집안이 성교를 배우기 시작하여 식구는 물론 가까운 친척까지 20여 명이 한꺼번에 입교하였다. 이렇게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정부에 대한 고발 소동이 일어나자 하는 수 없이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후 1866년 정초에 알렉시오는 정 마르꼬 회장을 찾아가 세배를 하였는데 포졸들이 갑자가 들이닥쳐 그와 정 회장을 잡아갔다. 처음 심문과 고문은 잘 참아 내었으나, 두 번째는 위협에 못 이겨 배교 하였다.
하지만 시련은 그때부터였다. 특히 굳세게 신앙을 고백하던 유 베드로에 분격한 평양 감사가 배교자들로 하여금 유 베드로를 매질하도록 하여 죽게 하니, 그 시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우기 시체마저 배교자들이 메어 가 대동강에 던져버리라니, 알렉시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유 베드로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다. 그의 순교는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증거케 하였으니, 그가 곧 알렉시오였다. ‘우리는 우리의 입과 손으로 하느님을 끊어버렸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무슨 낯으로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땅을 밟을 수 있으며, 무슨 면목으로 하느님이 지어 주신 하늘을 쳐다 보고, 땅과 하늘 사이에 가려 있는 하느님의 물건을 감히 쓸수 있습니까?’ 하며 통곡하던 알렉시오는 옥중에 있는 장 베르뇌 장 주교를 만나 지난 일들을 사죄받고 베르뇌 장 주교와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때부터 심한 문초를 받으며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날까지 온갖 고문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지난번 배교했던 일만으로도 많을 고통을 체험했소, 이제는 나는 나의 스승이신 주교님과 함께 죽기만을 바랄 뿐이오’라며 오히려 군졸들을 나무랐다. 새남터에서 알렉시오의 목은 두 번, 세 번 내리치는 술 취한 희광이의 칼 끝아래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가 1866년 3월 11일이니, 1847년 그가 태어난 지 20년 남짓 된 때이다.
그후 그의 시체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3일 후에 와고개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절두산순교기념성당에 모셔져 있다.
1984 년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에 의해 시성이 되었다
10).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 (Ju Mun Mo Jacobus)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신부로 1752 년 중국 강소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일찍 천주교에 입교하여 북경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1794년 북경주교 구베아의 명을 받고 한국 잠입을 결행하여 12월 23일 조선인 신자 지황과 윤유일 등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 1795년 6월초 한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사제가 없었으므로 수 차례에 걸쳐 사제를 보내 달라고 중국교회에 요청하였고,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을 통해 조선 신자들과 약속한 대로 1791년 봄 마카오교구 소속의 레메디오스 신부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보냈지만 약속 날짜가 맞지 않아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바로 그 해에 신해박해가 일어나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였고 이듬해 권일신이 유배 도중에 사망하면서 조선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1790년 구베아 주교가 내린 제사 금지령은 몇몇 양반층 신자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조선 신자들이 다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한 것은 1793년이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층으로 활약하던 윤유일과 최창현, 최인길, 지황, 그리고 여교우 강완숙이 지황과 백(白)요한을 북경으로 파견한 것이다.
지황은 구베아 주교를 만난 뒤 1794년 초에 귀국하면서 다시 한번 성직자 파견 약속을 받았다. 이때 구베아 주교가 선발한 사람이 바로 북경 신학교의 첫 졸업생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였다. 그는 조선의 밀사들과 약속한 대로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요동의 봉황성 책문(柵門, 국경 관문)으로 가서 조선 신자들을 만났지만 압록강이 얼고 연행사가 다시 북경에 갈 때를 기다려 입국하기로 하였다.
그 무렵 최인길은 한양 정동에 장차 신부가 거처하게 될 집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1794년 12월 14일(양력 1795년 1월 4일), 주문모 신부는 마침내 지황, 윤유일 등의 안내를 받아 한양에 도착한 뒤 줄곧 이 집에서 머무르며 우리말을 배웠다. 그리고 1795년 윤 2월 16일(양력 4월 5일) 여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부활절 미사가 거행됨으로써 이 집이 조선 포교지의 유일한 본당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밀고자에 의해 주 신부의 거처가 포도청에 알려졌고, 5월 11일에는 체포령과 함께 포졸들이 정동으로 파견되었다. 을묘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주 신부는 남대문 안에 있던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였지만 집주인 최인길이 체포되고 이어 윤유일, 지황도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포도대장은 자신의 손으로 주 신부의 거처를 알아내어 일을 빨리 매듭지으려고 무서운 형벌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1795년 5월 12일 이들 세 명은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고 말았다.
훗날 밀사에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구베아 주교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선교사의 안내자들인 지황, 윤유일, 최인길 세 교우는 체포된 바로 그날 밤에 법정으로 인도되어, 재판관들의 악의와 술책과 잔인성을, 침묵과 인내와 항구함으로 이겨냄으로써 재판관들을 지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모독하라고 하자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참된 하느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 하고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재판관들은 세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와 조롱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외국인의 입국에 대해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 데 절망하고 격분한 나머지 죽을 때까지 그들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 증거자들은 거의 같은 시각에 고문 가운데 숨을 거두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이름을 불렀으며, 얼굴에는 예수와 교회를 위한 고통에서 맛보는 영적인 기쁨의 평온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후 그는 6년 동안 강완숙의 집에 은신하면서 정약종,황사영 등 특출한 교우를 만났고, 왕실의 은언군 부인 송씨와 그 며느리 신씨 등을 입교시켜 세례를 베풀었으며, 충청도를 거쳐 전주까지 지방 전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가의 수색망은 날로 좁혀지고 수많은 신자들이 잇달아 순교하자, 자신 때문에 무구한 생명을 더 이상 희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1801년 3월 자수, 그해 5월 한강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으며 이것이 조선교회 4대 박해의 첫 번째 박해인 신유박해 때의 일이었다. 이때 신부님의 최후를 지켜 본 신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형 집행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히고, 형장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소리, 억수 같이 퍼붓는 흙비, 캄캄한 하늘을 갈라 놓는 번개, 이 모든 것이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놀라고 서늘하게 하였다.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라 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 황사영 백서, 81행 – 다.
11).프티니콜라 미카엘 알렉산데르 신부님 (Rev. Padre Petitnicolas Michel Alexandre)
프티니콜라(Petitnicolas, Michel Alexander, 朴 신부) 신부는 1828년 프랑스 코앵슈에서 출생하였고, 1852년에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가 되어 1853년 인도로 파견되었으나 풍토에 적응을 못하고 홍콩으로 갔으며 이후 조선으로 부임 명령을 받았다. 1856년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해로로 조선에 입국하여, 한때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에 있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신학교에서 원장으로 일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체포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잘하였고 의술에도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교리를 전하고, 또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또한 3만 이상의 라틴어와 10만에 가까운 조선어를 담아 《나한사전(羅漢辭典)》을 지었는데, 그 중 한 부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나머지는 병인박해 때 소실되었다. 1866년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2). 푸르티에 안토니오 신요안 신부님 (Rev. Padre Pourthie Jean Antoine)
푸르티에(Pourthi, Jean Antoine, 한국명 : 신요안) 순교자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교구의 `발랑스 앙 알리브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하여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선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상해를 거쳐 해로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베론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3).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님 (St. Imbert Laurentius)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Lurent Marie Joseph, 한국명 : 범세형(范世亨)] 주교는 1796년 프랑스 까브리에(Cabries) 지방의 조그마한 촌락에서 태어났으며 비록 가난하였지만 총명할 뿐 아니라 기도와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갖고 신앙을 전파하러 갈 결심을 굳게 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액시(Axi)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 신품을 받고 곧 중국의 사천성 포교지에 임명되어 프랑스를 떠난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을 사천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그는 포교를 행하고 중국의 언어와 관습을 익혀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고 또한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또한 조선이라는 포교지에 파견될 것을 열렬히 희망하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1836년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 이어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그를 임명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곧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중국 내륙을 횡단한 후 1837년 12월 16일에 봉황성의 변문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북경으로 가던 사절단에 다섯명의 신자가 있었고, 그 중 조신철 가롤로와 정하상 바오로 등의 협력을 얻어 12월 17일 밤에 조선신자와 함께 변문을 떠나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의주 관문을 숨어 넘어서 13일 후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신자들은 교회 창설 53년 만에 처음으로 주교를 맞게 되었다( 초대주교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3개월 동안 조선 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신도들의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을 정도였다. 조선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라 주교를 맞이하여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신자의 수는 날로 늘어 갔고, 반면 앵베르 주교의 고생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몹시 지쳤고 크나큰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납니다. 세시에는 집안 사람들을 불러 기도 드리고 세시 반에는 예비자가 있는 경우 성사를 주고, 혹은 견진을 주는 것으로 성무의 집행을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미사를 드리고 감사의 기도가 따릅니다. 해 뜨기 전까지 성사를 받는 신자가 20여명이고 … 나는 시장기 때문에 고통을 많이 당합니다. 왜냐하면 두시 반에 일어난 다음 정오까지 기다려서야 영양가치도 별로 없는 맛 없고 양도 많지 않은 식사를 하는데, 춥고 건조한 기후인지라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을 끝맺어 줄 칼질을 그리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잘 갈 것입니다 …’
이때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 신부와 샤스땅 정 신부와 함께 그는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영세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고 그 결과 1839년 초에는 신자가 9,000명이 넘었으며 성직자 양성에 힘을 쏟아 세 소년을 유학 보냈고, 어른으로서 적임자를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교회발전에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었고 배교하는 신자들이 많았으며 따라서 앵베르 주교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가 전교하고 있음도 알려졌다. 엥베르 주교는 배교자 김여상의 간계로 체포되었고, 다른 두 신부는 범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였다. 이것은 신자들을 더 이상 죽음으로 몰아 넣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에서였다. 군문효수 언도를 받은 세 선교사들은 1839년 9월 21일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작은 가마를 타고 무장한 일백명 가량의 군사에게 호송되어 새남터 형장으로 나갔다.
병정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바지만 남기고 모두 벗긴 다음 그들의 손을 가슴 앞으로 결박짓고 겨드랑이 밑에 긴 몽둥이를 끼우고 양쪽 귀를 화살 두개로 내려 꿰뚫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회를 한 줌 뿌렸다. 그리고 병정 여섯명이 몽둥이를 메고 형장 둘레로 세 바퀴 끌고 다녀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받게 하였다. 그런 다음 한 병정이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한 병정이 사형 선고문과 선고 이유를 모두 읽고 나니 대장이 명하여 수형자들을 무릎 꿀린 후 곧 열명 가량의 병정이 그들 옆으로 달려들어 각기 지나는 길에 칼로 쳤다. 이때가 1839년 9월 21일 이었으며 성인의 나이 43세 때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목자를 불과 3년만에 다시 잃었고 1946년 김대건 신부가 들어오기까지 성직자 없는 교회가 이어졌다. 앵베르 주교는 당시의 신도들에 관한 전기를 모으다가 한양교우회장 현석문에게 맡겼는데, 이것이 1958년 파리에서 간행된 《기해일기》이다.
성인은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4). 성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님 (St. Berneux Simeon)
베르뇌(Berneux, Francois, 한국명 : 張敬一)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주교로 1866년 3월 7일 병인대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성인은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망스(Mans) 교구에서 평범한 부모한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장간 일을 했는데, 혁명이 일어나자 신앙생활을 멀리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그는 10세가 되었을 때,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고 부모의 승락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곳 본당의 보좌신부의 후원으로 라틴어를 공부한 다음, 그 도시에 있는 학교에 편입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몇몇 정성어린 도움으로 ‘망스’에서 면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는 소신학교에서 설교학을 연수했다. 1831년 그는 망스 대신학교에 입학했으며, 한때 건강 때문에 휴학했으나 다시 학업을 계속하여 1837년 5월 30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사도성직에 대한 강한 매력에 이끌려서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고, 1839년 7월 15일에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그 해 11월 28일에 선교지 출발 명령을 받고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 1월 15일 파리를 떠나 그 해 6월 25일에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 후 1841년 그들은 조그만 돛단배를 구해 타고 중국 통킹으로 가다가 도중에 베트남에 가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그곳이 박해 중이라서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잡힌 지 넉달 만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특별한 요청으로 결국 1843년 3월경에 석방되었다. 같은 달 17일 선교사들은 다시 상선을 구해 타고 이곳 저곳 헤매다가 1843년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성인은 그 해 10월경에 만주 주교로 임명되어 10여 년 간 열심히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지혜롭게 교구를 이끌어갔다. 1845년 8월 5일에 교황 비오 9세는 그를 조선 교구 페레올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한국 입국을 명령하였다. 수 많은 곤경이 가로 놓여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자기 소임에 만족하면서 ‘조선은 훌륭한 순교자의 나라이다. 조선은 그 이름만 들어도 우리 선교사를 마음속에 희열이 넘쳐 뛰는 곳인데 어쩌 입국을 마다 하리오’하며 푸르티에 신부와 숨어살면서 입국을 꾀하던 끝에 1856년 다행히 조선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만에 한양에 입성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하루 2시간만 자고 경기도에 산재해 있었던 60여개의 공소를 상복을 입고 방문하였으며 ‘매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기 위해 산길을 걸어서 4,5리를 가야 하고, 어떤 때에는 해면처럼 물을 빨아 들이는 버선과 짚신 차림으로 비와 눈을 무릅쓰고 길을 가야 합니다 ‘하는 글을 남겼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교회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 안 신부에게 부주교의 성성식을 거행했다. 이 성직자 회의 결과 그는 1857년 8월 <장 주교 제우윤시서>를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정비하였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 서적이나 출판을 대량 저술. 정리, 출판하였다.
1864년, 철종이 승하하고 12세의 고종이 등극하면서 고종의 부친인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무력적인 통상요구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1866년 초에 병인 대박해가 시작되면서 그 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학살되기 시작했다.
1866년 2월 23일 포졸들이 장 주교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장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심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놓고 형벌을 받을 때 요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군졸들이 곤장을 들고 매질을 가했는데 곤장을 맞을 때, 신음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80명의 군졸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때를 같이 하여 도리 김 신부와 볼리외 서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백 신부도 체포되어 같은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 3월 6일, 참수 사형선고를 받고 다른 신부와 함께 서로 머리를 맞대로 묶인 채 끌려나와 형장으로 향하였다.
장 주교는 ‘우리가 조선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 흘렸다. 사형장은 길게 구비진 한강의 넒은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명의 군졸들은 천막을 쳐 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귀에 화살이 꽂혀지고 얼굴에 물을 뿌린 다음, 회를 뿌리고 겨드랑이 밑에 뭉둥이를 끼어 치켜들고 사형장을 한 바뀌 돌았다.
마침내 선고문이 낭독되고, 칼을 든 병졸들이 날뛰고 소리를 외치며 돌다가 장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장 주교의 목이 두번째로 내려 진 칼날에 딸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당시 증인들에 의하면, 처형되는 순간 얼굴에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는데, 이 미소는 숨을 거둘 때가지 계속되었다고 하였다. 이 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한강로 3 가의 왜고개에서 정성껏 장례를 지냈다. 구 후 1899년 10 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었다가, 명동 대성당과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순교 직전 베르뇌 주교는 옥문 앞에 몰려들어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웃고 놀리지 마시오. 당신들은 오히려 울어야 할 것이요. 우리는 당신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마련해 주려고 왔었는데, 이제는 누가 천국의 길을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겠소. 정말로 당신들은 불쌍하오 “
1968 년 10 월 6 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 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 년 5 월 6 일 교황 요한 바오로2 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7. 기념관 소개
새남터는 조선새대 국사범을 처형하던 곳으로 1801년 5월 31일(신유박해)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여 이 곳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839년(기해박해)에는 제2대 조선 교구장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와 사스탕 신부가 순교하였고, 1846년(병오박해)에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현석문 가롤로, 1866년(병인박해)에는 제4대 조선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 그리고 정의배 마르코와 우세영 알렉스오 순교자가 모두 군문효수로 순교하신 곳입니다.
새남터 성당에서는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증거한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모든 신자들이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하며, 2006년 9월 3일 순교자 기념관을 개관하였습니다.
기념관 이용안내
관람 시간
AM 10:00 – PM 17:00
관람요금
본 기념관은 정해진 관람요금은 없으며 순례자들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운영됩니다.
단체관람 신청 및 문의
기념관 및 성지 안내를 원하시는 단체관람객은 반드시 사전예약을 부탁드립니다.
문의: 070-8672-0327 (성지 안내사무실)
관람 시 유의사항
본 기념관에는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관람 시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인 유해실 내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한 유해실을 제외한 곳에서의 사진 촬영 시 플래시 사용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쾌적한 기념관 관람을 위하여 음식물 반입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기념관 둘러보기
1) 한국천주교회 창설과 4대 박해사
2) 103위 순교 성인화
3) 천주교회의 시복과 시성의 역사
4) 교우촌, 장터, 순교지 모형
5) 형구와 형틀
6) 순교의 열매
7) 영상실
8) 성인 유해실
9) 기획전시 : 최양업 신부님 일생
10) 상복을 입은 선교사
11) 순교자 14인 동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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