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를 살아도 우리 집이고 내 집에 살아도 우리 집이다. 모양이 초가집이라도 우리집은 우리 집이고 고래등 같은 집이라도 집은 살면 우리 집이다. 그곳엔 유년의 추억이 청소년때 추억이 결혼해 자녀를 출산해 키우고 또 장가 보내고 친손자손녀가 외손자손녀가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달려오던 추억이 있어 희비애락이 떠올릴때마다 여울지며 넘실거린다.
결혼해 처음 전세 얻어 간 집은 아래층이다. 넓은 거실이 마음에 들어 이사를 갔다. 저 안쪽 식당에서 설겆이를 하고 있으면 노크도 없이 2층 주인집 아주머니가 들어 와 새댁이 어쩌구저쩌구 하고는 별 중요한 얘기도 아닌데 제 집 드나들듯이 하고 가버린다.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쪽은 나다. 참다못해 남의 집에 들어 올때는 노크를 하고 오세요 해도 그때뿐이다. 잠시 자신의 둘째 아이를 좀 봐 달라 급한듯 맡기고 가버렸다. 그당시 큰애를 가지고 점심때가 훌쩍 넘어도 오지를 않았다. 남의 집을 뒤질 수도 없고 과일이라도 내어 놓고 가지 난감했다. 전화 한통화 없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서점을 같이 못봐주니 그리 알라구. 나중에는 한 집에 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며 이사를 가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부추켰다.
상가가 있는 서점으로 이사를 왔다. 좋은점은 왔다갔다 안해서 좋았다. 문제는 상가라 살림하기엔 참 불편한 곳이고 방도 하나 화장실로 통하는 부엌 모든것이 비좁았다. 남편은 처음엔 책을 사입하러 가서 빨리 오더니 둘째를 낳고는 한번 나가면 볼일 볼것 다보고 오니 애를 데리고 서점을 운영해야 해 자유가 없었다- 바로 밖이 큰도로라 먼지도 날아 들어왔다. 언니가 방문 오더니 너는 방안에서도 뚫린 문지방으로 손님 오는가 늘 살펴야 하고 여기 있다간 노이로제 걸리겠다 하며 가버렸다. 남편은 밖에서 문을 열면 소리나는 벨을 설치해 두었다. 이래나저래나 매일반이다. 그래도 둘째 아들까지 낳고 초등학교까지 보내고 신혼초부터 시작 3년만에 2층집 상가를 마련했으니 빠른 편이라 생각했다.
만촌동에서 범어동으로 출퇴근하는 일은 불편했지만 완전히 내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뻤다. 처음 신혼집에서 입덧이 심해 창문을 열어 놓고 자자해 살풋 잠들려 하는데 창문을 열고 와당탕 누군가가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골아 떨어진 남편은 꿈쩍 않고 자고 무서움에 질린 나는 눈감고 이불 목위까지 끌어 당기고 질려 잠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 날 깨웠다. ''당신 내 바지 못봤어?'' ''몰라.'' ''당신 목걸이는? 반지는?'' ''여기 손가락에 여기 목에 그대로 있는데 왜?'' 남편은 도둑 들었다며 이리저리 집을 살피더니 부엌문에 바지는 걸려 있었는데 책 팔은 빵빵한 지갑은 사라졌단다. 머리맡에 바지를 두고 잤는데. 당신이 문 열고 자자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내 탓이냐구. 돈을 잘 간수하고 자지 그랬냐구 그러다가 얘기해봤자다 싶어 서로 입을 다물었다. 근데 만촌동 이사 온 이 집에도 서점을 파하고 돌아오니 현관문이 열려 있고 온 전신에 서랍이란 서랍 금고는 금고데로 뜯겨 있지 않은가 사실 값 나가는 물건도 없을뿐더러 집에 돈을 두고 다니지 않았으니 헛수고 한것이다. 열 네살 열 두살 터울로 자기 오빠랑 차이나게 태어난 늦동이 딸 아이는 그곳의 전 상가가 뜯기는 바람에 자동으로 서점을 접고 그 딸 아이에게만 정신을 쏟을 수 있었다. 그때 한동안 IMF로 직장을 잃은 남편은 힘들었지만 입에 풀칠만해도 난 좋았다. 그러니 부가 전부가 아닌것이다. 살아갈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얼마든지 희망을 가지고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누가 뭐라해도 지키려 노력했고, 생각을 반듯이 가졌고 아기가 태어나는 날 남편은 직장으로 출근하라는 소식을 접했다.
집을 팔고 효목동으로 이사를 왔다. 아주버님은 어찌 알고 형편이 어려우니 자신의 집을 사라해 늦게에서야 어머님을 모신다 해 그 집에서 그대로 살게 하고 우리는 효목동에 2층집에 전세를 얻어 살았다. 모두가 남편 혼자 내린 결정이라 꽤심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주인집이 문제이다. 세 얻어살면 집도 좀 지켜 줘야지 집에 안붙어 있다고 시비를 걸었다. 늦게 낳은 딸아이를 데리고 어른이 모이는 곳도 불사하고 가고 싶은데로 다 데리고 다녔다. 한번은 주인 아주머니가 성당에 나간다고 밥이 생깁니까 돈이 생깁니까 하고 빈정거렸다. 아이구 큰일이네 나만 가지구 이야기 하면 될것을 왜 교회를 들먹거리는가 큰일 나겠다 했는데 남편과 대판 싸우고 그뒤론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큰아들이 대학교에서 만난 여학생과 교제를 하고 군에 갔다 올때까지 기다려 주어 사돈네도 서두르는 바람에 아들이 살 아파트를 사는데 보태주고 우리집도 새로 장만하였다. 효목동에서 조금 더 떨어진 효목동 집을 사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와서 밤에 저쪽 아파트에서 이쪽 주택지역으로 연결되는 계단을 건넜다. 누가 가르쳐 준 그곳을 이사 와 한번도 답사 않고 밤에 건너다 계단이 아닌 두리뭉실하게 쌓아놓은 흙무더기 인줄 모르고 아파트에 주차하는 불빛이 내발을 비춘다는 것을 모르고 돌아보다 발을 잘 못 디뎌 나뒹굴어졌다. 아 왜이렇게 베개가 딱딱할까 하며 비몽사몽간 겨우 일어났는데 그곳 이었던것이다. 잠깐 기절을 했나보다. 남편은 그러다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참 난 그때 신고식을 제대로 하네 이 동네 와서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덥다고 밖으로 나와 앉아있던 할머니들이 절뚝거리는 내 꼴을 보고 ''와 그러는교?'' 했고 ''저 개 뭉디기 같은거는 왜 안 고치고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인지 날 밝으면 한의원 가서 침 맞으소.'' 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 질러 가려고 서두른 나의 불찰이다.
이 집 저 집 옮겨가며 더듬어 가다보니 나의 역사가 펼쳐졌다. 영화를 촬영하듯 싸악 훑고 지나가는데 지나고 나니 아기 웃음소리부터 동네 개 짖는소리 캐지나칭칭나네 새해마다 울려 퍼지던 북 꽹과리 소리까지 어느것 하나 정겹지 않은것이 없다. 지나고 나니 비로소 알게 된다. 슬픔도 기쁨도 그 무엇도 집과 함께 무르익어간다는 것. 이석의 ''비둘기집'' 노래가 은은히 들려온다. 그런 우리 집을 누구나 선망할 것이다. (20230103)
첫댓글 아주 잘 썼네요 역시 작가는 감각이 다르네요
잘 읽고 갑니다.
별말씀을요~
부끄렵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