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를 떠나거라!”가 있었습니다. 나로호 발사 성공 했습니다. 12년 동안 개발비 2조 원 들었습니다. 우리는 억 단위가 넘어가면 감이 없는데 조 단위면 천문학적인 단위입니다.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들까요? 중력 때문입니다. 지구를 떠나려면 중력을 벗어나야하는데 1초에 11.2km/s이상의 속도로 올라가야 합니다. 지구탈출 속도입니다. 총알이 0.9km/s입니다. 총알보다 나로호가 12배 빨라야 지구를 떠납니다. 우주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지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구를 벗나기 어렵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지구를 벗어나면 매우 위험합니다. 지구에서 안전한 곳은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장소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성도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살려준 예수님 사건 아시죠?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이 사건의 유머 버전입니다. 예수님이 군중들을 향해 외치셨죠?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양심의 가책을 받은 군중들은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합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예수님 발 앞으로 돌이 하나 뚝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한숨 한번 쉬시고 하늘을 보며 “아버지 하나님 제발 제일에 방해 좀 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내가 바로 죄가 없는 자니라~~”
하나님은 죄 없으신 절대 선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고 심판합니다. 여기서 아무도 빠져나올 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는 의를 전가 받아야 가능합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1장16, 17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곡언법으로 소개합니다. 곡언법은 이중부정을 말하는데 히브리어 강조법입니다.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도 곡언법입니다. 로마서1:16절은 “복음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곡언법으로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복음을 선포 한 후 지금까지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 26절부터는 하나님 편에서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가 설명합니다. 본문 26절 참고합니다. “26. 곧 이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감상적으로만 보기 쉽습니다. “얼마나 아프셨나~~~”하며 마음 아파하는 데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 편에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의롭다는 것은 한 점 흠이 없다. 항상 올바르다. 공의롭다.’라는 뜻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자기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저희 아들이 6살 때쯤 E마트를 사랑한다는 말을 가끔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좋아하는 거 다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장난감 코너를 갔는데 로봇으로 된 티라노사우루스 공용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여기에 딱 꽂혔습니다. 남자아이들이 보통 공룡을 좋아하다 로봇으로 옮겨갑니다. 그런데 공룡으로 된 로봇이니 얼마나 갖고 싶었겠습니까? 가격을 보니 사줄 마음이 1도 안 생길 정도로 비쌌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못 사주고 한참 후에 사준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아빠 엄마 말 잘 들면 한 달 후에 사주겠다 약속했는지 아니면 생일을 핑계로 사줬는지 기억은 정확히 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아무리 잘 들어도 며칠을 가겠습니까? 하루 이틀 하다가 맙니다.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약속을 어겨도 모르는 척하고 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자기모순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그냥 눈감고 넘기지 못합니다. 독생자를 죽이심으로 대신 죗값을 받아 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속성상 이런 방식으로 의로움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자기도 의로우시며”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구원은 의롭다고 함을 얻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구원은 나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오로지 믿음의 법으로만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랑하지 못합니다. 본문의 법은 원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래도 내가 뭔가 좀 잘나서 구원받지 않았나? ‘단 0.000몇 % 라도 남보다 나은 구석이 있지 않았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내가 선택한 공로가 있지 않나?’란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수단이요, 통로일 뿐입니다. 내 믿음은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100% 예수님의 공로의 효과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을 선물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그 선물에 리본 하나 단일 없습니다. 거져 받았을 뿐입니다. 선물 자체를 자랑해야지 선물 받은 나를 자랑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을 다 할애하여 믿음의 법으로 구원받은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유대인이 가장 존경하는 2명입니다. 한국인은 누구죠? 1위는 이순신 2위가 세종대왕입니다. CEO들이 존경하는 인물 하면 바뀝니다. 1위는 광개토 대왕 2위가 이순신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되었고, 다윗도 한 일 없이 죄가 사해졌음을 그의 시편을 인용하며 소개합니다. 롬4:4에서 8절을 읽어봅니다. 일하는 자는 월급을 당연히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덜 받았다며 불만을 품습니다. 요즈음은 자고 일어나면 기름 값이 뜁니다. 2천 원 선이 무너지고 벌써 2천100선도 넘었습니다. 이렇게 물가는 오르는데, 월급은 제자리라고 불만 많습니다. 본문은 구원을 일에 비유하여 일한 것이 없는데 월급 받은 거와 같다합니다. 결국 구원은 자랑할 수 없습니다. 다윗도 왕이었지만 치명적인 죄를 짓습니다. 밧세바와 그의 남편이자 충신인 우리야에게 간음죄, 탐욕 죄, 절도죄, 살인 교사죄, 직권남용죄를 짓습니다. 다윗은 이 죄에 대해 아무것도 일한 것이 없는데 불법이 사해졌고 죄가 가리어졌고 죄를 아예 인정치도 않으신 은혜에 관하여 시를 씁니다.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말씀에서 교훈을 생각해봅니다. 자랑은 남에게 드러내어 뽐낸다는 뜻입니다. 어원은 ‘수백 배로 말한다.’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자랑은 엄청나게 부풀려 말하는 것이 어원입니다. 자랑은 유치원생도 합니다. 제주도 유치원생이 3명 나란히 앉아서 자랑했답니다. 자랑거리는 잠수 시간입니다. 첫째 아이가 “우리 엄마는 요즈음 수영 배우는데 잠수를 30초 나 한다.” 두 번째 아이는 “우리 할머니는 해녀인데 3분이나 잠수한다.” 했답니다. 이걸 듣고 있던 3번째 아이는 “우리 삼촌은 작년에 바다에 들어갔는데 아직도 안나오셨어!”하고 자랑하더랍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다들 자랑하는 맛에 산다고들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랑의 대가들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바울은 자랑치 말라고 권면합니다. 성경은 구원뿐 아니라 모든 삶에서 자랑하지 말라는 교훈을 반복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도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계속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고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본문은 그러므로란 접속사로 시작하여 최종결론으로 믿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18세기 산데미니안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구원은 입으로만, 말로만 하면 된다.’ 주장합니다. ‘머리로만, 지적인 동의만 있으면 된다.’ 합니다. 오랫동안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기도하고 걱정하고 권면하여 분위기에 못 이겨서 구원을 시인합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원을 시인했답니다. 주변 사람들은 매우 반가워하며 칭찬 해 주었지만 본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믿음은 입으로만은 안 되고 전인격적인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완전히 설득당해서 믿어져야 합니다. 믿음에는 ‘나를 맡긴다. 의탁한다.’라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그러면 로마서 4장으로 다시 넘어가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알아봅니다. 아브라함 75세에 신앙 출발합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일할 나이를 지났습니다. 실제 아브라함은 많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BC2000년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바울처럼 선교역사의 주인공 역할도 못 합니다. 주변국에 전도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전도는커녕 먹을 것이 없자 잠시 이민을 갔다가 아내를 여동생으로 속여서 주변국에 욕만 먹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2번씩이나 속입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주일 예배, 수요예배, 교회학교 교사 봉사, 교회차 운전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일독도 안했습니다.
이렇게 한 일이 없는데 왜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습니까? 첫째 그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한번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지키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롬4:13절참고합니다. 본문에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한 언약’은 길게 보면 예수님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 아들 이삭 하나 바라보고 신앙 출발 했지만 나중에는 자기의 씨를 통해 탄생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요 8장 5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합니다. 역대 대통령의 공약 이행률은 13~40%로랍니다. 국회의원은 약간 높아서 46.8%랍니다. 인터넷에 혹시 결혼 전후 남성 공약 이행률 없나 찾아보았는데, 없었습니다. 우리 부모 세대 들은 서로 속았다고 합니다. 남성들은 결혼 전에는 하늘의 별도 따다 준다 해놓고 결혼하면 겨울에 딸기 한 팩도 사다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미래를 모릅니다. 미래의 상황과 조건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공약을 남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를 다 아십니다. 우리 인생 전체를 한눈에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약 이행률은 100%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은 알고도 믿었습니다 롬4:19절을 참고합니다. 그는 자기 몸이 죽은 것과 같음을 알고도 믿었습니다. 사라의 태도 이미 닫혔다는 것을 알고도 믿었습니다. 과학적으로 북가능함을 알고도 믿었습니다. 믿음은 내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알고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아는 나에게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습니다. “그래 나는 죄인 인 줄 알아! 앞으로 또 죄를 질 줄도 알아! 나는 약한 줄도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롬4:17절입니다. “기록된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창조주입니다. 생명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킨 권능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고향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뭇 별을 보여 주며 자손이 이와 같다는 황당한 말씀도 믿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 때문에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동도 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본질을 말할 때는 꼭 나이아가라 폭포 줄타기 명수의 예를 많이 듭니다. 요즈음은 리더십 특강에도 이 예를 많이 씁니다. 나이야가라가 아니고 나이아가라입니다. 나이트클럽 이름 ‘나이야가라’도 있습니다. 그 나이가 아닙니다. 1824년 프랑스의 곡예사 찰스 블론딘이란 외줄 타기의 명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지르는 로프를 설치합니다. 높이 48m 길이 548m랍니다. 전세계에서 구름처럼 인파가 몰렸습니다. 그는 능숙하게 몇 번 나이아가라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리고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번에는 한 사람을 업고 건너겠습니다. 이걸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물론입니다. 믿습니다.” 하며 환호합니다. 그는 이번엔 제안합니다. 그럼 업힐 사람 나오십시오. 군중들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습니다.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참 정적이 흐른 후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나왔습니다. 해리콜코드라는 그의 매니저입니다. 블론딘은 그를 업고 무사히 건넜습니다.
본 예화에서 정말 믿고 신뢰한 사람은 매니저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업히는 행위와 같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님과 같은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운명 공동체가 되면 서서히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믿은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 업혀 있습니다. 이를 믿고 의심치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복음에 설득당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업고 천국 문 안으로 들어갈 것을 믿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 당연히 온 세상 만민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유대민족만의 전통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도 예수님을 통한 길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피흘려 죽어 준 신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희석시키는 이단이 많은데 배격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내가 하나님이다.’ 하는 사람이 20명 있고 ‘내가 재림예수다.라’고 하는 사람이 50명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그래서 신의 나라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인데 죽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본문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말씀합니다. 서로 대척점에 있지 않고 서로 세워준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법이 많습니다. 헌법, 민법, 소송법 등등 다양합니다. 본문에 특별히 율법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제정한 법이므로 율법이라 합니다. 법이 왜 필요합니까? 사회 질서, 안녕을 유지하려면 필요합니다. 교통법을 예로 들면 교통법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통사고 온 종일 납니다. 온 종일 길거리에서 멱살 잡고 싸울 것입니다. 국가에도 법이 없으면 약육강식의 세계로 변합니다. 그야말로 범죄도시2와 같이 변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도 인간의 행복과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정한 법은 계속 뜯어고칩니다. 지난 국회 통계를 보니 발의 한 법은 6014건이고 통과한 법이 1366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완벽합니다. 법에는 법을 정한 사람, 또는 제정 집단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법에는 목적이 1조로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대표적 성품은 사랑입니다. 율법에는 사랑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율법의 액기스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완벽히 지키면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됩니다. 율법을 지키라함은 유대인처럼 지킴이 아닙니다. 유대인은 율법의 겉모습만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율법 지킴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했으면 겉으로 행동으로 살인 하지 않아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미운 마음 자체가 없어야 제대로 지키는 거라 합니다. 행동으로 간음 하지 않아야 율법을 지킴이 아니라 마음에 음욕까지도 품지 않아야 제대로 지킨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율법을 100% 지킬 자가 없음을 지적합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주신 목적, 율법의 정신을 살펴보니 율법은 당연히 폐기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세운다는 의미를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본문은 구원받으면 내가 갑자기 변해서 율법을 완벽히 지키게 되어서 세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운다는 뜻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나 대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율법의 정신까지도 완전히 구현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순종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한 말씀 중 “다 이루었다.”가 있습니다. 이 뜻은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세우셨다.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필자의 로마서 이외 원고는 블러그 "빛고운구슬" [성경탐구 및 강의원고]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