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 3장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변증하기 위한 말씀들로, 바로 앞(3:1-5)에서는 사도가 갈라디아 사람들의 믿음을 따른 경험을 통하여 이것을 변증을 하였다면,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이것을 변증하고 있다. 즉, 사도는 6절에서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을 따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Ἀβραὰμ ἐπίστευσεν τῷ Θεῷ, καὶ ἐλογίσθη αὐτῷ εἰς δικαιοσύνην)고 한다. 즉, 그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은 그가 율법을 지킴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은 결과이다. 혹,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한 것은 할례를 받아(창 17:24) 언약 백성의 징표를 얻었기 때문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은 훨씬 이전이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고, 이 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2:1-3). 그러나 그의 삶의 여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다시 여호와께서 나타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라고 하시며,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하시자, 성경은 “아브람(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셨다(창 15:1-6). 물론 아브라함은 이 약속이 더디 나타나자 그 약속을 믿지 못해 85세 때 사래의 종 하갈을 첩으로 삼기도 하였지만(창 16:3),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이것보다도 훨씬 나중인 그의 나이 99세 때이었다(창 17:24). 그리고 그가 100세 때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 즉, 그의 몸에서 날 자, 이삭이 태어난 것이다(창 21:5).
지금 우리는 창세기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간략하게나마 아브라함의 연대기를 살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사도가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구원은 율법의 행위(할례)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가능케 된 것이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것이 그에게 의가 되었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여기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우리가 방금 창세기를 살핀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믿음을 따라 의로 여기신 후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한다. 즉, 그것은 사래의 여종 하갈을 통하여 그의 상속자를 보겠다는 잘 못된 행동에 좀 집중을 해 보자. 사실 우리가 의롭게 됨은 우리의 행위가 의롭게 된 결과로 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의 피의 대가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된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우리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칭의(Justification)이다.
마지막으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다. 사도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고백을 했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빼면 우리의 구원은 그 어디에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가능하지 않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향후 행동을 하나님께서 몰랐을까? 이미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처럼 될 수 없는 한계적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따라 거룩해지고자 하는 율법의존적, 행위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은혜의존적인 존재이며, 하나님의 긍휼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의롭게 된 것과 관련하여 야고보 사도의 언급이 오해 될 소지가 있어, 이 문제도 여기서 좀 짚고 가자. 사도는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 내가 보니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0-23) 라고 한다. 혹자는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행함이 있어야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신칭의”는 잘못된 교리라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위의 성경 구절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요지가 과연 무엇일까? 사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때 의롭다고 함은, 마치 율법적인 행위를 실천함으로 받은 의로움이 아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정말 아브라함의 신뢰가 하나님을 향한 적적인 것일까? 그것은 모리아산으로 향하는 아브라함의 말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그가 아들 아식과 함께 올라가면서 종들에게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영어 성경은 “We will worship and return to you”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주어가 뭔가? 바로 우리(We)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야고보서를 통해서도 참된 믿음은 선한 행위를 수반하며,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즉,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그에게 의롭다고 인침을 받았다면 당연히 행함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의 전적인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지 말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아브라함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니…(Ἀβραὰμ ἐπίστευσεν τῷ Θεῷ)(이하 계속/ 구모영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