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짱>
삶이라는
선물에 감사하는 사람은
그 삶을
신에게 다시 선물로 바치기 위해
신의 창조물인 모든 생명체에게 사심 없이 봉사한다.
<나의 눈>
11/2 <완전 짱>
사람은
참회와 고해의 의무를
참나(큰나)에게만 진다.
사람은
죄와 죄책감의 의무를
참나(큰나)에게만 진다.
사람은
사는 방식과 변화의 의무를
참나(큰나)에게만 진다.
사람은
입장성포기의 의무를
참나(큰나)에게만 진다.
괴로움은
에고에게만 쓸모가 있다.
욕구나 감정이 없고
인간의 고통에 조금도 즐거워하지 않을 신에게
괴로움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호모 스피리투스>
11/3(짱)
사랑이 담기지 않은 에술은 없다.
예술은
언제나 혼을 불어넣는 과정,
육신의 손길이든
정신의 손길이든
인간의 손길로 하는 공예다.
이는 네안데르탈인 시대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다.
<의식혁명>
11/4 (완전 짱)
항복하는 법을 아는 것은
큰 가치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어떤 감정도
언제 어디서든
한 순간에 놓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수월하게 할 수 있기도 하다.
항복한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
항복한 상태란
특정 방면에서 부정적 감정이 없어진 덕분에
창의성과 즉흥성이 외부의 반대를 받거나
내면 갈등의 방해를 받지 않고
발현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내면의 갈등과 기대에서 벗어나면
주변 사람에게도 최대한 자유를 준다.
또한 항복의 상태를 통해
우주의 본성을 체험할 수 있게 되어
우주의 본성은
어떤 상황에서든
최대한 좋은 것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철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항복한 상태가 되면
몸소 경험할 수 있는 진실이다.
<놓아 버림>
11/5
피할 수 없는 일에
막딱뜨릴 때
영적 작업의 위력이 나타난다.
그 직면의 순간이
의식의 도약을 요구한다.
<치유와 회복>
11/6
비록 맥락이
의식의 선천적 특징이긴 하지만,
대개 맥락을
명시하거나
확인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진실자체를 다루는
과학의 전혀 없었고,
검증하거나 확인할 수단은
더군다나 없었다.
불가피하게도 인류는
허우적거리다가
끝없는 재앙에 반복해서 빠진다.
(이를테면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바란다)
<현대인의 의식지도>
11/7(짱)
에고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한 가지 기제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절연하고는
그것을
세상과 타인에게 투영하는 것이다.
<호모 스피리투스>
11/8
삶에 대한 반응은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세요
실제로
지독하거나
흥분되거나
슬프거나
좋거나
나쁜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참사가 ‘벌어지면’ 안된다,
무고한 사람들이 드런 일을 겪으면 안된다,
끔찍하지 않냐,
누군가의 잘못이 분명하다.
같은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관점의 폭이 넓은 사람은
삶의 내용에도 동요하지 않고
삶의 맥락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려면
비판을 하거나
기대를 걸거나
예민하게 굴기를
그만둘 필요가 있다.
<호모 스피리투스>
11/9
말하자면
진실과 실상은
등가물을 나타내며
이 등가물의 타당성을
이제는 진실의 수준의 눈금으로
매겨진 척도를 참조하여
검증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이고 개인과 무관하며
관찰자의 견해에 영향받지 않은 척도이다
진실을 주장하는 서술을 하려면
(내용이 아니라)
맥락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인의 의식지도>
11/10
진정한 사랑은
상실의 두려움이 없고
특징적으로 애착이 없다.
<놓아버림>
11/11 <완전 짱>
모든 삶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
아품과 괴로움을 겪고 죽는다.
기쁘거나 슿프고,
잘되거나 망하고,
늘거나 준다.
주식값이 오르고 내린다.
질병과 사고가
닥쳐오고 물러간다.
삶이라는 키르마 춤이
우주라는 카르마 극장에서 펼쳐진다.
<호모 스피리투스>
11/12 <완전 짱>
사람의 의식 수준은
그 사람이 충성하는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
의식의 진보를 지속하려면
원칙에 대한 충성이 흔들리면 안된다.
흔들리면
그 사람은
수준이 도로 떨어진다
<의식 혁명>
11/13<짱>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은
남에게 툭하면 감정을 다치거나 따질 일이 없다.
정직하게 통찰하면
실제의 감정상 고통은 물론
잠제적인 고통까지 줄이는 이로움을 즉각 얻는다.
사람이 감정상 고통에 취약한 정도는
자기를 알아차리는 정도나
자기를 받아들이는 정도와
그대로 직결된다.
<의식 수준을 넘어서>
11/14<짱>
영적 서원의 에너지를 얻는 것은
영적 의지가 신성의 속성에 정렬할 때이다.
신성은
진실하고
사랑하고
연민하고
현명하고
편애하지 않는다는 속성을 띤다..
헌신하면
삶의 우선순위가 정해지고
헌신에 도움이 되는 것이
끌어당겨진다.
신의 종이 된다는 것은
영적 목표가
여타 모든 입장성이나 끌리는 것이나
집중을 방해하는 것보다
우선하도록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내 안의 참나를 말하다>
11/15<짱>
생각은 어항속의 금붕어 같고
진정한 큰 나는 어항의 물과 같다.
진정한 큰 나는 생각들 사이의 공간,
더 정확하게는
모든 생각의 바로 밑에 있는 말없는 알아차림의 장이다.
<놓아버림>
11/16<완전 짱>
모든 용서는
모두에게 이롭다.
이 우주는
모든 행동을 감지하고 기록했다가
같은 것으로 갚는다.
우주의 선천적인 구조와
기능 자체 때문에
카르마는
사실 우주의 본성 자체이다.
우주에서는
시간을 엉겁 단위로 잰다.
엉겁을 넘어서면
시간은 아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친절을
그래서 영원하다.
<나의 눈>
11/17<짱>
영적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에 대한 애착이나
내용과의 동일시를 거두어들인 다음
자신의 실상이 맥락임을 점차 깨닫는 것이다.
가장 짧게 설명하자면
자아는 내용이고
큰나는 맥락이다.
<호모 스피리투스>
11/18
모든 영적 작업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실을 기꺼이 말할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그 진실은
‘나는 모른다’일 때가 많고
이 ‘나는 모른다’에서
신에 항복하고자 하는 자발성이 나온다.
진실은
항복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치유와 회복>
11/19<짱>
지나친 욕망이
결핍의 착각을 일으킨다.
돈 들어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돈을 쓰면
외견상 돈 문제가 생기는 것과 같다.
<호모 스피리투스>
11/20<짱>
문: 신에게 항복이란 말의 참뜻은 무엇인가?
답: 통제를 항복하고
에고의 입장성에서 얻는
은밀한 만족감을 항복한다는 뜻이다.
오직 사랑 그리고 신에게 의지해
생기와 환희를 얻어라.
이 선택권이
매 순간 주어지고 있다.
마침내 선택하면
보상이 막대하다.
청원을 하면
영적 알아차림이 길을 밝혀 준다.
열쇠는 자발성이다.
<호모스피리투스>
11/21 <짱>
신의 전체성과 사랑과
완전성에 반대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명 자체를 항복하고
신을 위해 죽고자 하는
의구심이 없는 자발성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깨달음 대신
영적 정화를 노력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11/22<짱>
에고는
포시(강제력)에 의존한다.
반면에 영은
파워(힘)로 영향을 미친다.
알아차림은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와
내가 되어 있는 존재 자체가
결국에는 중요하다는 것을
<호모 스피리투스>
11/23 <완전 짱>
자신의 가치를 못 느껴 내심 허무해 하는 대신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존경한다면,
더 이상 행복의 원천을
세상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11/24<완전 짱>
세상은 사실 오락물이다.
가볍게 즐길 거리처럼,
세상은
가볍게 걸치라고 입는 옷과 같다.
천국은
내면에 있다가
알아차림에 의해 드러난다.
세상의 멜로 드라마는
왜곡된 인식이 부리는 술수다.
이렇기에 사람은
‘세상은 크고 강하고 영원한데
큰나는 작고 약하고 단기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확히
그 반대가 진실이다.
<나의 눈>
11/25
겸손
고통 없는 성장의 열쇄는
오로지 겸손이다.
겸손은
바꿔 말하자면
그저 오만과 가식을 버리고
또한 오류를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
자신과 타인의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특징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실 대 거짓>
11/26
문 : 심판의 날이란?
답 : 인간은
에고의 특성을 신에게 적용 하고는
신을 두려워한다.
모든 날이 심판의 날이다.
그날은 이미 세상에 닥쳐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호모 스피리투스>
11/27<완전 짱>
성급히 비판하는 습성은
모든 에고의 엄청난 자만심을 나타낸다.
성경에서는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고 한다.
“주님께서는 심판은 나의 몫”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용서하라고 했다.
붓다는
인식을 통해서는 환상만 보이니
비판할 대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인식은
언제나 단편적이고
언제나 임의의 맥락에 재한되어 있다.
실제로는
어떠한 비판도 가능하지 않다.
<나의 눈>
11/28 <짱>
에고에게 가치는
감정적 정신화의 한 가지이나,
실상에는 정신화가 필요 없다.
겸손한 사람이라면
모든 것은
투영된 가치와는 무관하게
그저 ‘있는 그대로 있다’고
솔직하게 밝힐 수 있고
그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모든 것의 본질적 가치는
그것이 ‘있다’는 점이다.
즉 실재는
자체적으로 완전해서
‘특별한’ 을 투영받아 ‘특별한 것’으로
명사회 될 필요가 없다.
모든 창조물의 신성한 본질이 막힘없이 빛을 낼 때
에고/마음은 경외감(두려움)속에서
침묵에 들어간다.
<내 안의 참나를 만나다>
11/29 <짱>
세상을 이루고 있는
많은 요소와 강제력(포시)이
인간의 삶과 행복에
해로운 것은 명백하지만,
그런것을 혐오하거나
악마 취급을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적절이 용인하고 피하라.
<의식 수준을 넘어서>
11/30<짱>
기꺼이 사랑을 베풀게 되면,
자신이 내내
사랑에 에워싸여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는 법을 모랐을 뿐
임을 바로 알게 된다.
사랑은 사실 모든 곳에 존재하니
그 존재를 깨닫기만 하면 된다.
<나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