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하집 제11권 / 교서(敎書)
송조의 네 현인과 본조의 두 현인을 문묘에 종사한 뒤에 반포한 교서〔宋朝四賢本朝兩賢從祀文廟後頒敎書〕
왕은 말하노라. 왕의 교화의 근본은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것보다 큰일이 없고, 성묘(聖廟 문묘)의 안에는 유식(侑食)보다 중요한 예가 없다. 이미 문묘에 종사하거나 출향하는 것이 바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반포해서 알려야 한다. 예에 맞게 고종(瞽宗)에 차례대로 배향한 것을 생각해 보니 모두 유학을 장려하고 밝힌 것이었다.
스승을 잘 계승한 공문(孔門)의 제자들부터 사숙(私淑)한 후대의 여러 현인들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도통(道統)이 있는 분들에 대해서 모두 이미 문묘에 종향하였고, 작게는 서로 지켜 온 강사(講師)들에 대해서도 그 공을 폐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거취(去取 종사와 출향)가 잘못되어 전후로 비난을 면치 못하기도 하였다.
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 연간에 올린 사람 중에는 절반이 성교(聖敎)에 죄를 얻었고, 정강(靖康 북송 흠종(欽宗)의 연호) 연간 이후에는 참된 유자(儒者) 중에 누락된 사람이 많았다. 예컨대 양시(楊時)와 나종언(羅從彦)은 하락(河洛)의 전승을 접하였고, 이통(李侗)과 황간(黃榦)은 고정(考亭)이 전수받고 전수한 일을 밝혔다. 과분하게 배향한 아홉 사람은 마땅히 출향해야 하니 중국에서 이미 시행하였고, 네 사람의 종파(宗派)는 배향해야 하니 옛 법에 대조하여도 의심할 것이 없다. 세속에서 전하는 것이 사실과 어긋남을 알았으니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 하고, 옛날의 배열이 윤리에 어긋난 것을 고쳐야 하니 이 때문에 그 사람의 시대를 논하는 것이다.
우리 열성조가 누누이 태평하여 마침내 훌륭한 인물이 아울러 나왔다. 조예가 고명한 문성공(文成公 이이)은 태어나면서 광악(光嶽)의 정기를 받았고, 실천이 독실한 문간공(文簡公 성혼)은 학문이 가학에 뿌리를 두었으니, 함께 수사(洙泗)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성대하게 우리나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이기(理氣)와 성정(性情)을 분별함이 이미 지극히 정밀하였고, 규모와 사업의 융숭함은 더욱 광대하였다. 언론이 크고 높아 훌륭한 임금을 이루어 주는 정성이 한결같았고, 식견이 탁월하고 재주가 완전하여 도를 자임(自任)하는 용맹이 뛰어났다.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오히려 유풍과 덕업에서 징험할 수 있다. 관작과 시호는 비록 높였지만 어찌 성대한 덕을 보상하기에 충분하겠는가. 시비가 이미 정해지니 별세한 뒤에도 사모함을 더욱 볼 수 있다.
오현(五賢)을 이어 추가로 배향하는 것이 진실로 타당하고, 세 조정을 지났는데도 사류들의 호소가 더욱 절박하였다. 선철(先哲)을 더 높이니 이에 사전(祀典)에 빠진 것이 보완되고, 두 신하를 표장하니 사류들이 보고 감동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사도(斯道)의 책임을 주재함이 어찌 나에게 있지 않겠는가. 온 나라 사람들을 고무함 또한 이에 말미암을 것이다. 이제 문묘의 양무(兩廡 동무와 서무)에 배향하는 것을 크게 바로잡는 때를 당하였으니, 일제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이에 금년 5월 20일에, 문묘에 종향했던 수장후(壽長侯) 공백료(公伯寮), 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 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 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 사공(司空) 왕숙(王肅), 사도(司徒) 두예(杜預), 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 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 임천백(臨川伯) 오징(吳澄)은 출향하고, 문등후(文登侯) 신정(申棖), 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은 중복 배향한 것이므로 신당을 빼었으며, 건녕백(建寧伯) 호안국(胡安國), 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 포성백(蒲城伯) 진덕수(眞德秀), 숭안백(崇安伯) 채침(蔡沈)은 위차(位次)가 잘못되었으므로 위치를 바꾸어 정하였고, 송조의 장락백(將樂伯) 양시, 문질공(文質公) 나종언, 문정공(文靖公) 이통, 문숙공(文肅公) 황간, 우리나라의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새로 종향하였다.
아, 도는 고금이 다르지 않으니, 사람이 어찌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겠는가. 일이 전대에 빛나니 향해 가야 할 길을 보여 줄 수 있고, 유풍이 사방에 진동하니 진작하여 새로워지는 효험이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주-D001] 송조(宋朝)의 …… 교서 : 1682년(숙종8) 5월에 송조의 네 현인과 우리나라의 두 현인을 문묘에 배향하고 몇몇 사람들을 출향하는 예를 거행하고 내린 교서이다. 송조의 양시(楊時)ㆍ나종언(羅從彦)ㆍ이통(李侗)ㆍ황간(黃榦)과 조선조의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을 공자의 묘정(廟庭)에 종사하고, 선유(先儒)인 공백료(公伯寮)ㆍ순황(荀況)ㆍ마융(馬融)ㆍ왕필(王弼) 등의 종사를 폐지하였으며, 한 사람인데 이름이 다르게 중복 종사된 신당(申黨)을 빼었다. 《국역 숙종실록 8년 5월 20일, 21일》[주-D002] 유식(侑食) : 제사 때 삼헌(三獻)한 뒤에 첨작(添爵)하고 식사(食事)를 권하는 절차인데, 여기에서는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주-D003] 예에 …… 것 : 고종(瞽宗)은 은(殷)나라 때의 학교 이름이다. 《주례(周禮)》 〈춘관종백 하(春官宗伯下)〉 대사악(大司樂) 조에 “도덕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여기에서 가르치게 하고 죽으면 악조(樂祖)로 삼아 고종에서 제사한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성균관을 가리키고 성균관 안에 문묘가 있으니, 문묘에 차례대로 배향하였음을 말한 것이다.[주-D004] 스승을 …… 제자들 : 《양자법언(揚子法言)》 권1에 “빠르구나, 칠십 명의 제자가 중니(仲尼)를 닮음이여.[速哉, 七十子之肖仲尼也!]” 하였다. 문묘에 배향된 공문 제자로는 안회(顔回)ㆍ증삼(曾參)ㆍ민손(閔損)ㆍ염옹(冉雍) 등의 성현이 있다.[주-D005] 사숙(私淑)한 …… 현인들 : 사숙은 직접 배우지 못하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배우는 것을 말하니,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나는 공자의 문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선하게 하였다.[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는 맹자와 송대의 현인 등 공자에게 직접 배우지 못하였지만 도를 잘 계승한 현인들을 말한다.[주-D006] 정관(貞觀) …… 얻었고 : 정관 21년에 당 태종(唐太宗)이 조서를 내려 좌구명(左丘明)ㆍ복자하(卜子夏)ㆍ공양고(公羊髙)ㆍ곡량적(榖梁赤)ㆍ복승(伏勝)ㆍ고당생(髙堂生)ㆍ대성(戴聖)ㆍ모장(毛萇)ㆍ공안국(孔安國)ㆍ유향(劉向)ㆍ정중(鄭衆)ㆍ두자춘(杜子春)ㆍ마융(馬融)ㆍ노식(盧植)ㆍ정현(鄭玄)ㆍ복건(服虔)ㆍ하휴(何休)ㆍ왕숙(王肅)ㆍ왕필(王弼)ㆍ두예(杜預)ㆍ범녕(范寗) 등 21명을 태학에서 선사(先師)에게 제사 지낼 때 문묘에 함께 배향하도록 명하였다. 《舊唐書 卷3 太宗本紀下》 명 세종(明世宗) 대에 와서 정부경(張孚敬)의 건의에 따라 개정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문묘에서 출향되었다.[주-D007] 양시(楊時)와 …… 접하였고 : 하락(河洛)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살던 낙양 인근으로, 여기에서는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시(1053~1135)의 자는 중립(中立)이니, 정호와 정이의 문인으로 구산(龜山)에 거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구산 선생(龜山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정호 형제의 학문을 주희(朱熹)와 장식(張栻)에게 전수하였다. 나종언(羅從彦, 1072~1135)의 자는 중소(仲素)이니, 정이와 양시의 문인이다. 양시를 통해 정호 형제의 학문을 듣고, 나중에 정이에게 나아가서 수학하였다. 《宋史 卷428 道學列傳二 楊時, 羅從彦》[주-D008] 이통(李侗)과 …… 밝혔다 : 이통(1093~1163)의 자는 원중(愿中)이니, 연평(延平) 선생이라고 불렸다. 나종언을 통해 정호 형제의 학문을 전수받았으며, 주희의 스승이 된다. 황간(黃榦, 1152~1221)의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齊)이니, 주희의 사위이며 제자이다. 처음에 유청지(劉淸之)에게 수학하였다가, 유청지의 권유로 주희에게 수학하였다. 《宋史 卷428 道學列傳二 李侗, 卷430 道學列傳四 黃榦》[주-D009] 과분하게 …… 시행하였고 : 아홉 사람은 아래에서 언급한 공백료(公伯寮)ㆍ순황(荀況) 등을 말한다. 《국역 월사집》 제60권 〈남궁록 상(南宮錄上) 문묘의 사전(祀典)을 이정(釐正)하는 것에 대한 계본[文廟祀典釐正啓本]〉에,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실린 것을 조사하여, 안하(顔何)ㆍ순황(荀況)ㆍ공백료(公伯寮) 등 13명은 이미 중국에서는 출향했고, 거백옥(蘧伯玉)ㆍ오징(吳澄) 등은 문묘에 종향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는 모두 문묘에 두었음을 밝히고, 출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9명에 대해 “마융은 양기(梁冀)를 위해 주소(奏疏)를 지어서 충신 이고(李固)를 죽였고, 남군 태수(南郡太守)로 있다가 탐탁죄(貪濁罪)로 면직되어 삭방(朔方)으로 유배되었으며,……두예가 단상(短喪)한 것은 모두 명교(名敎)에 죄를 지었습니까.” 하였고, 또 “오징은 정민정(程敏政)의 의논에서 ‘비록 과실은 없는 듯하나 그 저술이 성학을 밝히기에 부족하다.’ 했습니다.” 하여 이들이 빠져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주-D010] 그 사람의 …… 것이다 : 그 사람에 대해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그 사람이 살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봄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천하의 훌륭한 선비를 벗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또 위로 올라가 옛사람을 논하니, 그의 시를 외우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사람의 당대를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위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하였다.[주-D011] 광악(光嶽) : 삼광오악(三光五嶽)의 준말이다. 삼광은 해[日]ㆍ달[月]ㆍ별[星]이고, 오악은 태산(泰山)ㆍ형산(衡山)ㆍ화산(華山)ㆍ항산(恒山)ㆍ숭산(嵩山)이니, 천지(天地)를 가리킨다.[주-D012] 학문이 …… 두었으니 : 아버지 청송(聽松) 선생 성수침(成守琛)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는데, 성혼이 10세에 아버지를 따라 우계(牛溪)의 파산(坡山)에 있는 별업에 와서 배웠다. 《국역 월사집 제54권 우계 선생 시장》[주-D013] 수사(洙泗)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합하여 말한 것으로, 공자가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공자 또는 유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주-D014] 관작과 …… 높였지만 : 이이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성혼은 좌의정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주-D015] 별세한 뒤에도 사모함 : 이이와 성혼의 덕을 사모하여 별세한 뒤에도 잊지 못함을 말한다. 《대학장구》 전 3장에 “《시경》에 ‘아, 선왕을 잊을 수 없네.’ 하였는데, 후대의 군자들은 선왕의 어짊을 어질게 여기고 선왕이 친하게 지낸 이를 친히 여기며, 후대의 소민들은 선왕이 즐겁게 해 주신 것을 즐거워하고 선왕이 이롭게 해 주신 것을 이롭게 여기니, 이 때문에 돌아가신 뒤에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詩云: 於戲, 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 하였다.[주-D016] 오현(五賢)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다섯 명의 유현(儒賢)을 가리킨다. 1573년(선조6)에 유생들이 오현에 대한 문묘 종사를 청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들이 청하였는데도 시행되지 않다가, 1610년(광해군2)에 와서 문묘에 종사되었다. 《국역 선조실록 6년 8월 28일》 《국역 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9월 5일》[주-D017] 세 조정을 …… 절박하였다 : 1635년(인조13)에 관학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 270명이 상소하여 다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한 뒤로 효종ㆍ현종 대를 거쳐 숙종 대까지 끊임없이 청한 것을 말한다.[주-D018] 문등후(文登侯) …… 빼었으며 : 《국역 월사집》 제60권 〈남궁록 상(南宮錄上) 문묘의 사전(祀典)을 이정(釐正)하는 것에 대한 계본[文廟祀典釐正啓本]〉에 “신정과 신당은 본래 한 사람인데, 《공자가어(孔子家語)》와 《사기(史記)》에 그 이름을 함께 기재했기 때문에 잘못 알고 두 사람으로 제사 지내다가 중국에서는 이미 신당을 없애고 신정만 모시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고치지 않았습니다.” 하여 중복 배향되었음을 밝혔다.[주-D019] 그러므로 이에 …… : 원문의 ‘운운(云云)’에 해당하는 내용은 《국역 숙종실록》 8년 5월 21일 기사에 보이니,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응당 잘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채현경 장성덕 (공역) | 2018
서하집(西河集) 이민서(李敏敍)생년1633년(인조 11)몰년1688년(숙종 14)자이중(彝仲)호서하(西河)본관전주(全州)시호문간(文簡)특기사항김수항(金壽恒), 신정(申晸), 이익상(李翊相) 등과 교유
西河先生集卷之十一 / 敎書 / 宋朝四賢本朝兩賢。從祀文廟後頒敎書。
王若曰王化之本。無大於右文。聖廟之中。莫重於侑食。旣陞黜之得正。宜敷告之用申。言念秩禮於瞽宗。罔非奬明於儒術。蓋自孔門速肖之群弟。以及後代私淑之諸賢。大焉道統之所存。皆已尙德。小而講師之相守。亦不廢功。然或去取之舛差。未免前後之指議。貞觀所進則半得罪於聖敎。靖康以降則多見遺於眞儒。如楊羅接河洛之傳承。與李黃明考亭之受授。九人之濫祀宜斥。在中朝而已行。四子之宗派可躋。應古法而不惑。稽俗傳之爽實。必也正名。改舊列之乖倫。是以論世。至我列祖之累洽。乃有偉人之並興。文成之造詣高明。生稟光嶽。文簡之踐履敦篤。學本家庭。同遡洙泗之淵源。蔚爲海東之山斗。理氣性情之辨。已極精微。規模事業之隆。益致廣大。宏言崇論。斷斷乎其致主之誠。卓識全才。仡仡乎其任道之勇。嗟負抱之未究。尙風烈之有徵。爵諡雖崇。何足爲盛德之報。是非旣定。益可見沒世之思。繼五賢而追享。固宜歷三朝而衆籲彌亟。加隆先哲。庸補祀典之闕遺。表章兩臣。尤切士類之觀感。主張斯道之責。寧不在予。鼓舞一邦之人。亦將由是。方當大正於文廡。允合齊擧於縟儀。玆於本年五月二十日。將文廟從享。壽長侯公伯寮,蘭陵伯荀況,岐陽伯賈逵,扶風伯馬融,司空王肅,司徒杜預,任城伯何休,偃師伯王弼,臨川伯吳澄黜享。文登侯申棖,淄川侯申黨。以疊享去黨。建寧伯胡安國,華陽伯張栻,蒲城伯眞德秀,崇安伯蔡沈。以失次改定位置。以宋朝將樂伯楊時,文質公羅從彥,文靖公李侗,文肅公黃幹,本國文成公李珥,文簡公成渾。新從享於東西廡。於戲。道不異於古今。人豈間於遠近。事光前代。克示趨向之途。風動四方。庶致作新之效。故茲云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