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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내포 교회와 정사박해
방상근*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Ⅰ. 머리말
Ⅱ. 내포 교회의 형성
Ⅲ. 정사박해의 발생과 전개
Ⅳ. 정사박해의 순교자
Ⅴ. 맺음말
<국문초록>
이 글에서는 1797년에서 1799년까지 진행된 정사박해의 원인과 순교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정사박해는 1795년 이후에 지속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추적, 급증하고 있던 충청도 지역의 교세, 1790년대의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기근의 원인을 신자에게 전가하는 분위기 등이 맞물려 일어났다.
둘째, 박해의 결과 100여 명이 희생되었지만, 현재 알려진 순교자는 여덟 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정산, 덕산, 홍주, 청주, 해미에서 순교했는데, 대부분 매를 맞고 사망하였다.
셋째, 순교자들은 ‘정송과 대시’ 규정에 따라 심문을 받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의 신자들이 신유박해 때처럼 십악(十惡)과 같은 중죄를 범한 죄인으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넷째, 정사박해 순교자들은 전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나눔을 실천했으며, 풍부한 교리 지식을 토대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순교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다섯째, 정사박해는 ‘교화주의 입장’에서 전개된 박해 사건이었다.
정조는 형벌보다는 교화를 통해 천주교를 막고자 했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책을 없애고 교육을 강화하면 크게 문제될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정사박해 순교자들이 대부분 장사(杖死)한것은 이러한 정조의 ‘교화주의 정책’ 때문에, 관장들이 배교를 강요하면서 고문을 강화한 결과라고 하겠다.
여섯째,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1801년 초에 신유박해가 발생했다. 신유박해는 지속적으로 표출되던 강경한 천주교 탄압론이 온건론을 이긴 결과였다. 즉 정조의 사망으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교화주의 정책’이 유지되지 못했고, 그 결과 정사박해와는 달리 ‘인기인 화기서(人其人 火其書)’의 방침이 ‘형기인 화기서(刑其人 火其書)’의 방침으로 변화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전국화· 강경화 되었던 것이다.
Ⅰ. 머리말
1784년에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명례방사건(1785), 진산사건(1791), 주문모 신부 체포 미수사건(을묘사건, 1795) 등을 겪으면서 여러 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다. 김범우, 윤지충과 권상연, 최인길·윤유일·지황 등이 위의 사건으로 사망한 순교자들이다.
이 사건들은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명례방사건은 양반 자제들의 천주교 신앙이 처음으로 발각된 사건이고, 진산사건은 천주교의 성격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로 규정짓게 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을묘사건은 외국인의 조선 잠입 문제와 결부되어,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가 실제로 외세(外勢)와 연결되어 있음을 주지시킨 첫 번째 사건이었다.
천주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사건들은 ‘신앙공동체의 형성 → 교회의 가르침 준수 → 성직자의 영입’ 등 교회가 체계화되어가는 과정이지만,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천주교를 탄압할 필요성이 점차 증가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의 세 사건은 대체로 해당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신자들만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지는 않았다.
을묘사건 이후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가 활동을 시작했다. 주 신부는 성사 집전, 교회의 조직 정비, 신자들의 신앙생활 지도 등을 통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갔다. 그러다가 1797년에 정사박해를 맞이했다.
정사박해는 몇 가지 점에서 특징이 있다. 지역적으로 충청도가 박해의 주 대상이었고, 1797년부터 1799년까지 비교적 오랫동안 박해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100여 명이 체포되어 순교할 정도로 희생자가 많았으며, 특정한 사건을 매개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 자체에 대한 탄압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박해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충청도에 국한된 측면은 있지만, 정사박해는 조선 교회가 겪은 최초의 대규모 박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사박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관련 글들이 있기는 하지만, 박해의 원인과 순교자들에 대한 서술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이만채의 《벽위편》 등에 수록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사박해의 원인에 대해서는 좀 더 고려할 부분이 있다.
그리고 박해의 희생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순교 과정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순교 시기와 형식, 순교지 문제 등도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자료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냄으로써, 정사박해의 성격을 규명하고 정사박해가 갖는 교회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Ⅱ. 내포 교회의 형성
충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1784년 말~1785년 초경이다.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출신의 이존창이 권일신의 전교로 입교한 후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내포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여사울의 신앙공동체는 1791년 당시 80여 호 중에 10여 호만이 비신자일 정도로 교세가 강했으며, 이존창에게 복음을 듣기 위해 멀리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충남 지역에는 여사울에만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당진 진목(당진시 고대면 장항리) 출신인 배관겸도 이벽이 천주교를 전하자마자 입교하였다. 배관겸은 1791년에 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진목은 1785년 이래 내포의 신앙 거점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솔뫼(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도 여사울과 같은 시기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현 형제가 김범우에게 천주교를 배웠다는 사실과 1791년 당시 강문리와 우평리 전체가 사학(邪學)에 물들었다는 점에서, 솔뫼와 그 인근에는 1785년 이래 많은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면천 여름이(당진시 면천면 대치리) 인근에도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해진 듯하다. 이것은 이 지역 출신으로 추정되는 박취득이 서울의 지황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그의 형인 박일득(朴一得)이 1791년에 많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청양 다락골(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도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된 지역이다. 홍주 영장(1801. 1~7)을 지낸 노상추의 일기(1801. 2. 18)를 보면, 15년 전에 최말재가 다락골의 김복성과 김복수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김복수는 홍낙민 집안의 산지기였는데, 이존창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홍낙민이 한글로 번역한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다락골에는 1786년 이전에 홍낙민과 이존창을 통해 천주교가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내포 지역에는 1784년 겨울 수표교에서 첫 번째 세례식이 있은 직후, 여사울, 진목, 솔뫼, 면천, 다락골 등에 1차적으로 천주교가 전해지고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내포의 신앙공동체는 신자들의 전교 활동과 이주를 통해 점차 확산되어 갔다. 이중 신자들의 전교 활동은 지도급 신자들의 활동과 그들로부터 천주교를 배운 신자들이 다시 복음을 전파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다락골의 김복수는 1786년 이전에 이존창에게 배웠고, 공주의 김홍철은 1791년에 가족과 함께 이존창에게 배웠다. 그리고 덕산 황무실의 유군명도 1791년경에 이존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와 함께 대흥(예산군 대흥면)의 김정득은 이존창에게 배운 김광옥의 친척으로, 김광옥을 통해 입교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이존창과 같은 지도급 신자들과 그들의 제자들을 통해 내포의 신앙공동체는 점차 지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신자들의 전교 활동 외에, 1791년에 발생한 신해박해도 내포의 신자 거주지를 확대시킨 요인이었다. 즉 당진 진목의 배관겸은 1791년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났다. 그는 서산 두룸바위와 면천 양제 등지로 이거했는데, 새로 정착한 곳에서도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존창도 1791년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여사울을 떠나 홍산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Ⅲ. 정사박해의 발생과 전개
1. 박해의 원인과 성격
지도급 신자들의 직·간접적인 전교 활동과 신해박해 이후 신자들의 이주로 신앙공동체가 확대되면서, 내포는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신자 수가 많은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성장해 가던 내포 교회도 1797년(정사년)에 정사박해가 발생하면서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를 보면, 정사박해는 1797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한용화(韓用和)가 도내의 모든 수령에게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시작되었고, 이 명령 이후에 이도기(李道起)가 처음으로 체포된 듯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도기는 1797년 윤6월 8일에 체포되었고, 한용화는 윤6월 19일에 감사로 임명되었다. 즉 이도기는 한용화가 감사로 임명되기 이전에 이미 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도기의 체포 시점을 고려할 때, 정사박해는 한용화가 부임하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도기는 청양 출신으로 체포 당시 정산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797년 윤6월 8일 무장한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아마도 인근에 살던 외교인의 고발이 있었던 듯하다. 이어 1797년 8월 19일에는 박취득이 홍주 관아에 자수하였다. 박취득은 1797년에 홍주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했다가, 손자가 대신 잡혀가는 것을 본 어머니의 권유로 관아에 자수했던 것이다.
1797년에 이도기와 박취득이 체포되었지만, 박해가 본격화된 것은 1798년과 1799년이었다. 그렇다면 정사박해가 일어난 배경은 무엇이며, 이 박해가 1798년에 격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벽위편》에 의하면 정조는 주문모 신부를 놓친 이후 자주 자신의 친위 조직의 무관(武官)들에게 신부의 행방을 찾게 하였다. 그러나 끝내 종적을 알수 없게 되자, 충청감사 김이양과 병사 정충달에게 명하여 사교에 물든 자들을 자세히 조사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즉 ‘1798~1799년에 사학을 다스린 것은 중국 사람을 잡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백서〉에도 ‘주 신부를 놓친 이후 잠시도 멈추지 않고 기찰을 하였으나, 종적을 알 수 없자 조화진을 시켜 신자를 가탁하고 충청도의 사정을 탐지토록 했다.’거나, ‘정조가 주문모 신부의 행적을 쫓는 가운데 기미년(1799) 겨울의 청주 박해가 발생했다.’고 하였다.
결국 《벽위편》과 〈백서〉에 의하면, 정조는 체포에 실패한 주문모 신부를 계속 추적하였고, 그 과정에서 충청도 신자들의 사정도 탐지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796년에 김 토마스(김풍헌)가 청양 관아에 체포되었고, 1797년에는 이도기와 박취득이 정산과 홍주 관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이에 정조는 기존에 탐지한 정보를 토대로 1798년부터 충청도 신자들에 대한 교화를 강화해 갔다. 그 결과 1798년과 1799년에 체포되는 신자가 많아
졌고, 그러면서 순교자도 생겨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1797년의 박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이 당시의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이다. 기록에 따르면 홍수와 가뭄으로 인한 기근은 1791년 이래 계속되고 있었다. 경상도 현풍과 영일의 상황이지만, 1791년과 1792년, 1794년, 1797년과 1798년에 연이어 기근이 들었는데, 다른 지방도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기근의 심각성은 정조가 1798년 8월 심환지(우의정)에게 보낸 돈유문(敦諭文)에서, “근년의 물난리와 가뭄으로 기근이 계속되나 백성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어 늘 한 밤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서 새벽까지 탑전(榻前)을 서성였다.”고 말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근은 충청도 지방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1796년 1월부터 4월까지 충청도의 기민(饑民)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진휼이 시행되었고, 1797년에도 영남·호남 지방과 함께 기근이 들었다. 그리고 1798년에는 호서 지방의 가뭄이 가장 심했다는 정조의 언급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근의 책임을 신자들에게 전가(轉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즉 이도기가 체포되었을 때 외교인들은 “저 놈 때문에 가뭄이 이렇게 심하고 우리가 굶어 죽게 되었으니, 저놈을 발로 차서 끝장을 내야겠다.”고 했고, 박취득을 심문할 때 관장은 “이 악한 도리를 좇는 저 흉악한 놈들 때문에, 나라 안에 기근과 가뭄이 심하여 온 백성이 죽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도 1797년 이후에 박해가 격화된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천주교와 자연재해를 연계시키는 인식은 조정에서도 나타났다.
1798년 5월 22일 지평 윤함(尹涵)은 ‘호서 지방의 사학이 번성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하늘이 노여움을 품고 음양이 화기(和氣)를 잃게되었다(上天之懷怒而陰陽之愆和).’고 했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은 공주 감영에 수감되어 있던 이존창을 죽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정조도 1799년 5월 22일의 차대(次對)에서, ‘오늘날 우주에는 요사스러운 기운(邪沴)이 가득차 있고, 이러한 기운이 가뭄을 불러왔다고 하면서, 요사스러운 기운을 깨끗이 쓸어낼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올바르지 못한 학문과 풍속을 변화시키고자 했는데, 그러한 시도 중의 하나가 바로 천주교 신자들을 교화시키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주문모 신부에 대한 추적, 충청도 지역의 교세에 대한 염려,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과 기근의 원인을 신자에게 전가하는 분위기 등이 맞물려 정사박해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사박해는 ‘교화주의 입장’에서 전개된 박해 사건이었다. 정조는 천주교를 이단사설(異端邪說)로 규정했지만, 직접적인 탄압보다는 온건한 교화주의 정책을 통해 천주교를 막고자 했다. 즉 “정학(正學, 성리학)이 크게 밝혀지면 사설(邪說, 천주교)은 스스로 꺾기고 말것”이라는 원칙 아래, 천주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책을 없애고 교육을 강화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정조의 입장은 1788년부터 1797년까지 견지되고 있었다. 심지어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정조는 법보다는 교화를 우선시하여 체포된 신자들을 새사람으로 만들 것을 지시했고, 또 신자들에 대해 본정(本情)이 크게 흉악하지 않아 감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30) 그리고 1798년 11월에도 같은 뜻을 피력하였다.
즉 정조는 서산 군수에서 물러난 김희순을 불러 서산과 충청도의 민폐(民弊)에 대해 물었는데, 그 자리에서 ‘서울과 지방에서 법을 쥐고 교화를 펴는 자들은 바른 길을 버려두고 나쁜 길로 빠져드는 무리들을 살피어, 마을의 어른이나 서당의 훈장들로 하여금 그들이 묵은때를 씻어내고 새 길로 나아가도록 훈계하도록 하며, 인의(仁義)를 연마하는 방도로써 신칙하여 명교(名敎) 가운데 바로 낙토(樂土)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 혹시라도 고치기를 바라기 어려운 자가 있을 경우에는 고을 수령에게 고하여 형벌로 다스려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형벌보다 교화를 우선시하는 정조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정조의 교화주의와 관련해서, 정사박해가 발생한 1797년에 《향례합편(鄕禮合編)》과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가 간행된 사실도 주목된다. 《향례합편》은 향약을 비롯해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 등 각종 향례(鄕禮)를 엮은 책으로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편찬하였다. 이 책은 1797년 6월 2일에 간행되어 서울의 각방(各坊), 8도의 감영, 4도의 유수영, 330곳의 주현, 전국의 향교와 서원, 화성(華城)의 52면에 배포되었다.
《오륜행실도》는 중국과 조선에서 오륜의 실천에 모범을 보인 150인을 선별하여 그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자식으로서의 효도, 신하로서의 충성, 아내로서의 정조’ 등 유교적 가족윤리와 사회윤리를 강조한 것으로, 1797년 7월 20일에 인쇄되어 서울의 5부, 8도의 감영, 4도의 유수부, 330군현의 관리와 향교에 배포되었다.
《향례합편》과 《오륜행실도》의 간행 목적은 풍속의 일신과 백성의 교화에 있었다. 정조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를 ‘안일과 방종으로 흐르고 어버이를 섬기고 연장자를 공경하는 기본 윤리가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흐트러진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할 목적에서 두 책을 간행한 것이다.
결국 1797년에 《향례합편》과 《오륜행실도》가 전국에 보급된 것은, 교화에 대한 정조의 관심과 함께 정사박해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즉 이 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한 것은 교화를 강조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나타난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1797년 윤6월 29일에 ‘천주교가 방치(方熾)한 지역에 향약을 시행하자’는 우의정 이병모의 제안도 나왔다고 생각한다.
2. 박해의 전개 과정
기록상 정사박해 때 가장 먼저 체포된 사람은 이도기였다. 그는 1797년 윤6월 8일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1일 후인 1797년 윤6월 19일에 한용화가 충청감사로 임명되었다. 한용화는 공주에 부임한 후 도내의 모든 수령에게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용화 보다 일주일 늦게 면천 군수로 임명된 박지원(朴趾源)도 부임 후 각 면에 천주교를 금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1797년 8월 19일에 면천 출신인 박취득
이 홍주 관아에 자수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박해는 이듬해인 1798년에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홍주 응정리(당진시 합덕읍 성동리) 출신의 원시보, 면천 출신의 방 프란치스코, 당진 출신의 배관겸 등 여러 명의 신자들이 1798년에 체포되었다.
원시보는 덕산 포졸들에게 체포된 후 홍주 진영으로 이송되었다가, 덕산으로 환송된 후 감사의 특명으로 병사가 있는 청주로 압송되었다.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방 프란치스코는 홍주에서 체포되었고, 배관겸은 1798년 10월 3일에 면천 양제에서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몇 달 후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런 가운데 이도기가 1798년 6월 12일 정산에서 순교하였고, 12월 16일에는 방 프란치스코가 홍주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신자들에 대한 처형이 이어졌는데, 1799년 2월 29일에는 박취득이 홍주에서 옥사장에게 새끼로 목이 졸려 죽었고, 원시보는 1799년 3월 13일에 청주에서 매를 맞고 사망하였다. 그리고 1799년 12월 13일에는 배관겸이 청주에서 매를 맞고 순교했으며, 이틀 뒤인 12월 15일에는 덕산 출신의 인언민(印彦敏)과 이보현(李步玄)이 해미에서 매를 맞고 사망했다. 이렇게 하여 정사박해는 일단락되는데, 1799년까지 1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정사박해에서 주목되는 것은 가짜 신자 조화진(趙和鎭)의 존재이다. 그는 정조의 비밀 명령을 받고 붓을 만드는 필공(筆工)이나 행상(行商) 차림으로 신자 행세를 하며 교우들을 염탐하여 관에 밀고하는 역할을 하였다. 실제 1798년 10월 3일에 체포된 배관겸은 조화진이 포졸들을 직접 동네로 데리고 와서 체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벽위편》에 의하면 정조가 조화진을 충청병사 정충달에게 소개한 것은 1798년 12월 1일 이후였다. 이것으로 보아 조화진은 그 이전부터 충청도에 파견되어 신자들을 염탐하고 밀고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조는 조화진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일찍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고, 주문모 신부의 행방이 드러나면 함께 처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행방이 묘연하자, 우선 천주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신자들을 체포하여 교화시키고자 했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정사박해였다.
Ⅳ. 정사박해의 순교자
1. 순교자의 특성
100명 이상이 순교했다는 정사박해의 순교자 중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2014년에 복자로 선포된 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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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신분적으로 대부분 양인이었는데, 일반 양인과는 다른 몇가지 특징들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인물들이 있었다. 홍주 응정리의 원시보는 상당한 재력의 소유자로 주일과 축일마다 매번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여, ‘이존창의 집에 가서는 지식을 얻고, 원동지의 집에 가서는 음식을 얻는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 그리고 덕산 황무실의 이보현도 유복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다음으로 동지와 비장과 같은 직책을 갖고 있는 신자들이 있었다.
원시보와 내포의 회장인 정산필은 동지였고, 그의 친구인 방 프란치스코는 감영의 비장(裨將)이었다. 동지는 ‘마을 일을 해 온 평민에게 주는 낮은 명예직(c'est une petite dignit
é du peuple)’인 듯하며, 비장은 원래 각 고을의 아전과 같은 역할로 감사를 돕는 직책이었다.
비장인 방 프란치스코의 신분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비장이라는 직책만 본다면 그의 신분은 중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원시보, 정산필, 박취득과 함께 ‘순교하기 위해 서로 밀고하기로 약속’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는 점에서, 방 프란치스코는 이들과 같은 신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만 ‘감영의 비장’이었다는 기록에서, 방 프란치스코가 당시 일반 양인과는 분명히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내포의 신자들은 자신보다 높은 신분층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박취득은 중인인 서울의 지황을 통해 입교하였고, 양인인 인언민은 양반인 황사영과 교류하며 천주교를 배웠다.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볼 때, 정사박해 때 순교한 내포의 신자들은 자신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신분층의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현재의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경제력과 지식을 갖춘 사람들로,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 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던 진취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다가 천주교를 접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던 에너지를 신앙을 위해 쏟아 부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2. 체포와 순교 시기
8명의 순교자 중 이도기와 박취득은 1797년, 원시보, 방 프란치스코, 배관겸은 1798년에 체포되었고, 정산필, 이보현, 인언민은 1798~1799년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8명 중 1798년에 순교한 사람은 이도기와 방 프란치스코이며, 나머지 6명은 모두 1799년에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6명 중 2명(박취득, 원시보)은 1799년 초에, 3명(배관겸, 이보현, 인언민)은 1799년 12월에 사망하였고, 정산필은 알 수없다.
이도기는 체포된 지 1년만에 순교했고, 박취득과 방 프란치스코
는 6개월째에 사망했으며, 배관겸은 15개월째, 원시보는 7개월 혹은 13개월째에 매를 맞고 사망하였다. 그리고 정산필, 이보현, 인언민은 체포된 시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정산필 등 3명의 심문 기간은 알 수 없지만, 그 기간을 알 수 있는 5명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정사박해 때 체포된 신자들의 심문 기간은 상당히 길었다. 가장 빠른 경우가 6개월이고, 나머지는 1년 넘게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정약종이 체포된 지 14일, 이승훈은 16일, 이존창은 21일만에 처형된 1801년의 상황과 비교할 때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심문 기간과 함께 주목되는 것이 이들의 순교 시점이다.
이도기를 제외하면 2~3월인 연초와 12월인 연말에 사망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조선시대의 재판과 처형에 적용되었던 ‘정송(停訟)’과 ‘대시(待時)’ 규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십악(十惡), 간도(奸盜), 살인 등 중죄에 해당하지 않으면 생물이 자라는 춘분~추분 기간에는 재판과 처형을 중지하는 규정이다.
만약 정사박해 때 체포된 신자들의 심문 기간과 순교 시기가 이규정에 따른 것이라면, 이 시기의 신자들은 신유박해 때처럼 ‘부대시(不待時) 율(律)’에 해당하는 죄인으로 취급된 것이 아니라, 정조의 교화주의 정책의 영향으로 ‘정송과 대시’ 규정을 적용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즉 배교할 때까지 집요하게 설득하는 정조의 방침에 따라 심문 기간이 길어졌고, 처형보다는 교화의 대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정송’ 규정을 적용하여 재판을 진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정조의 교화주의 정책’은 지방에서 고문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정조의 방침에 따라 배교시키려는 지방 관들의 의지가 형벌을 더욱 혹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8명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매를 맞아 사망했는데, 이들의 순교 형식을 ‘부대시 율’의 적용을 받은 신유박해 순교자들과 비교해 보면, 당시에 존재하던 천주교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3. 순교지와 순교 형식
8명의 순교자가 순교한 곳은 정산(1명), 덕산(1명), 홍주(2명), 청주(2명), 해미(2명)였다. 이중 홍주, 청주, 해미에는 진영(鎭營)이 있고, 진영장이 토포사(討捕使)를 겸했기 때문에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다른 고을에서 이송된 신자들을 심문할 수 있었다. 즉 진영이 없는 고을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해당 고을에서 1차로 심문한 후 관할 진영으로 이송해서 처리하였다.
그런데 이도기는 정산에서 장사되었고, 정산필은 덕산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이도기는 체포된 고을에서 심문 중에 매를 맞아 숨졌기 때문에 정산에서 사망할 수 있다. 그러나 정산필이 체포지인 덕산에서 참수형을 받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덕산에서 체포된 이보현이 해미 진영으로 이송된 것을 볼 때, 정산필도 당연히 해미로 이송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정산필이 덕산에서 순교한 것은 이도기와 마찬가지로 심문 중에 물고(物故)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덕산에서 해미로 이송되기 전에, 체포지 단계에서 심문을 받다가 순교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산필의 순교 형식을 ‘참수’라고 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8명 중 원시보와 배관겸이 청주로 끌려가서 순교한 것도 주목된다. 원시보는 덕산에서 체포되어 홍주로 이송되었다가 1799년 2월에 청주로 보내졌다. 그리고 배관겸도 홍주에서 청주로 이송되었다. 앞에 언급했듯이 홍주에도 진영이 있어 심문과 처형이 가능했는데, 두 사람을 청주로 이송한 이유는 무엇일까? 청주에는 진영과 함께 병마절도사가 있는 병영이 있다. 정조로부터 신자들을 엄히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충청병사 정충달이 바로 청주에 있었다. 따라서 내포에서 체포된 신자가 청주까지 보내진 것은, 정충달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이 시기 충청도의 박해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진영에서 상위 관청인 감영과 병영으로 죄인들을 이송할 수있다. 그러나 8명 중 왜 2명만 청주로 이송했느냐 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원시보와 배관겸이 비중있는 신자였기 때문에, 당시 박해를 주도한 병사가 직접 심문하고자 청주로 부른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뿐이다. 정조가 1791년에 권일신, 이존창, 최필공을 회유했듯이, 지도급 신자를 배교시키면 나머지 신자들도 쉽게 배교할 수 있다는 신해년의 경험을 공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정조는 사학 괴수인 권일신과 최필공이 정학(正學)으로 돌아온다면, 다른 무리들은 바람을 만난 홍모(鴻毛)에 불과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시기 개별 신자들의 교회 내 역할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원시보와 배관겸이 청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에서, 두 사람의 교회 내 역할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도기가 정산에서 순교한 것과 정산필이 덕산에서 사망한 것도, 두 사람이 지도자급 인물이었기 때문에, 상위 관청으로 이송되기 전에 혹독한 형벌을 받아 물고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순교지와 함께 장사(杖死)라는 순교 형식도 주목된다. 정산필의 경우 참수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참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고, 방 프란치스코는 교사(絞死) 아니면 장사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박취득의 경우 죽도록 때렸으나 살아나자 새끼로 목을 졸라 죽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매를 맞아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정사박해 때 순교한 8명은 대체로 심문 중에 매를 맞고 사망했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정식 판결이 나기 전인 심문 과정에서 장사되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이도기는 정산현감 채윤전(蔡潤銓)이 배교를 강요하자, “정산 고을을 다 준다해도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다.”고 했고, 박취득은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면서, 영혼의 주인인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시보는 “내가 하느님을 위해 순교자로 죽기를 갈망한 지 9년이 되었다.”고 했으며, 정산필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천국으로 갈 것’을 믿으며 가혹한 형벌을 견뎠다. 배관겸은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형벌을 받았지만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만 생각했고, 방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순교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인언민은 혹독한 형벌에도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했고, 이보현은 박해를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8명의 순교자는 모두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자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심문관들의 목적은 신자들의 자백을 받아 처형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교화시켜 배교를 이끌어내는데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랜 기간 온갖 고문과 매질을 가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은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거하고자 했다. 이에 고문의 강도가 세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이들의 순교는 장사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4. 행적과 신심
정사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보면, 이들은 복음 전파와 나눔 실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먼저 이도기는 5~6번 이사를 하는가운데, 정산 지역을 전교했을 뿐만 아니라, 홍주의 이세채, 보령의 김성옥, 청양의 이원경, 은진의 이상원, 공주의 김선룡 등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정산필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후 내포 지방의 회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회장으로서 그는 기도와 경건한 독서에 열심이었고, 끊임없이 천주교인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데 전념하였다. 뿐만아니라 전교 활동에도 힘을 써, 홍주의 김일찬, 덕산의 정복선 부자, 유한징, 박춘산, 박중돌 등 여러 사람에게 천주교를 전하였다. 원시보는 천주교를 전하고자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전교를 했고, 주일과 축일마다 공개적인 큰 잔치를 베풀어, 모든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외 나머지 사람들도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들처럼 전교 활동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8명의 순교자 중에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도 있었다. 박취득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지만, 헐벗고 곤궁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썼고, 이도기도 입교 후 외교인들을 입교시키는데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였다. 원시보는 신자가 되었을 때 빈곤한 자들을 위한 자선에 힘쓰겠다는 맹세를 하였고, 이에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데 전념하였다.
자선과 관련해서, 박지원은 ‘천주교 신자들은 재물을 소홀히 하고, 교도를 귀히 여기는 것을 법으로 삼는다.’72)고 하였다. 그의 지적대로 자선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특징 중의 하나였다.73)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1790년대에는 여러 해 동안 기근이 계속되어 굶주린 백성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충청도 신자들은 백성들을 구호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눔을 실천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교세의 증가로 이어졌고, 그 결과 ‘호서 지방에 사학이 번성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순교자 8명의 특징으로 이들이 보여준 ‘확고한 믿음’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혹독한 형벌에도 이들이 순교에 이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이러한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취득은 천주교를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를 숭배하라고 가르치는 참 종교’로 인식했고, 천주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첫째 아버지시고 만물의 최고 주재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주만이 영혼의 주인’이라여겼다. 그러면서 4계, 6계, 9계 등 10계명의 내용을 들어 제사 금지, 통화통색(通貨通色)과 같은 관장의 비난을 반박했고, 예수의 강생과 구속, 수난, 부활과 승천, 공심판과 천당·지옥에 대해 설명했다.
박취득은 천주가 어떤 존재라는 것과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 지식을 토대로 천주교가 참 종교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결과 천주는 부인하거나 배반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했고, 그 분을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보현은 ‘천주를 만물의 군주’라고 생각했고, ‘대부(大父)이자 대왕(大王)이기 때문에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정산필은 함께 갇힌 교우에게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천국에 갈것’이라고 권면함으로써,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원시보는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천주교를 믿는다고 했고,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순교를 갈망하였다. 이도기도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진정한 임금이자 스승이며, 만물을 보존하는 분으로 효성과 충성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은 영혼의 영광’이라고 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이보현, 정산필, 원시보, 이도기는 박취득과 같이 풍부한 교리 지식을 토대로 천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배운 교리 지식을 체화(體化)하는 가운데 믿음이 확고해졌고, 이렇게 형성된 확고한 믿음이 순교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1797년에서 1799년까지 진행된 정사박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정사박해는 1795년 이후에 지속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추적, 급증하고 있던 충청도 지역의 교세, 1790년대의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기근의 원인을 신자에게 전가하는 분위기 등이 맞물려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박해의 결과 100여 명이 체포되어 희생되었지만, 현재 알려진 순교자는 여덟 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정산, 덕산, 홍주, 청주, 해미에서 순교했는데, 대부분 매를 맞고 사망하였다. 즉 심문 과정에서 물고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신유박해 순교자들과 달리 ‘정송과 대시’ 규정에 따라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의 신자들이 십악(十惡)과 같은 중죄를 범한 죄인으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정사박해 순교자들은 전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나눔을 실천했으며, 풍부한 교리 지식을 토대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의 풍부한 교리 지식은 1788년 이전부터 충청도 지역에 많은 교회 서적이 보급되어, 부녀자나 아이들까지도 책자를 보고 교리를 익힌 결과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확고한 믿음은 박해 때 순교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정사박해는 ‘교화주의 입장’에서 전개된 박해 사건이었다. 정조는형벌보다는 교화를 통해 천주교를 막고자 했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책을 없애고 교육을 강화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없다는 입장이었다. 정사박해 때 순교한 8명이 대부분 장사(杖死)한것은 이러한 정조의 ‘교화주의 정책’ 때문에, 관장들이 배교를 강요하면서 고문을 강화한 결과라고 하겠다.
정사박해는 1799년 12월에 배관겸, 이보현, 인언민이 사망하면서 끝이 났다. 그 결과 정조는 충청도에서 천주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 꺾인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후에도 계속 천주교도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다. 즉 지평 신귀조(申龜朝)는 1800년 윤4월에 “요즘 사학(邪學)이 삼남(三南)에서 기승을 부리다가 기호(畿湖) 지방으로 차츰 파급되고 있다”고 하면서, 삼남의 감사에게 엄중 지시하여 각별히 단속하게 하고 사학을 금하지 않은 양근 군수의 처벌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령 권한위(權漢緯)도 같은 해 5월에 ‘서울에서 시골까지 불길이 번지듯 번져가고 있는 사학을 막기 위해 천주교 서적을 전부 거두어 불태울 것’을 건의하였다.
그런 가운데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1801년 초에 신유박해가 발생했다. 신유박해는 지속적으로 표출되던 강경한 천주교 탄압론이 온건론을 이긴 결과였다. 즉 정조의 사망으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교화주의 정책’이 유지되지 못했고, 그 결과 정사박해와는 달리 ‘인기인 화기서(人其人 火其書)’의 방침이 ‘형기인 화기서(刑其人 火其書)’의 방침으로 변화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전국화·강경화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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