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4월 말. 새벽 공기는 달콤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면서 어머니의 도시락이 싸지기만 기다렸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니 이제 다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륙색을 등에 메기도 전에 대문을 나서며 “잘 다녀오겠습니다” 소리쳤다.
새벽 5시. 대구역광장에는 벌써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썩하니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커다란 기타 케이스를 걸쳐 멘 동아리 친구 K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청록 동아리 멤버와 노래도 부르고 함께 등반도 하자고 진즉부터 약속 되어있어서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수학여행. 설악산 3박 4일. 여행은 출발 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지 않던가. 초등학교, 중학교 두 번의 수학여행을 경험했었다. 그때는 그때 나름 즐거웠지만 그다지 기억이 없다. 어린 추억이라 그런가. 그러나 지금은 어른이라는 듯 까칠한 수염, 더벅머리에다 총각의 객기가 숨어있는 반항기 가득한 얼굴들을 하고 어깨 건들거리며, 나팔바지에 한쪽 다리를 끄떡이며 힘자랑하기 바쁘다. 기다리는 지루함이란 없고, 집 대문을 벗어나서부터 여행은 시작되고 있었다. 강릉행 기차가 출발하지 않았을 뿐이다.
출발.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기차 칸은 노랫소리와 왁자지껄한 얘기로 시끄럽다. 카드놀이, 게임, 떠들고 얘기하고 놀고먹고 마시기엔 기차 칸은 충분하게 넓었고, 이곳저곳 크고 작은 소음은 기차의 덜커덩거리는 반동과 기적 소리 등과 어울려 가벼운 흥분을 자아내기 충분하였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몰래 한 개피 궐련의 작은 일탈의 유혹은 용인되는 분위기도 있었다. 소위 주먹파들은 저희끼리 힘 자랑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대구에서 영천으로 군위를 지나 의성 안동으로 차창의 농촌 4월의 풍경은 모내기, 밭갈이 등 농사일에 바쁜 농부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이고, 온갖 꽃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다툰다. 그들이 내뿜는 달콤함으로 사방이 꽃향기 잔치로 가득하다.
우리도 꽃들과 함께 청춘 찬가를 부르고 있다. 기차 칸 곳곳에서는 준비해 온 악보 책들과 기타 연주에 맞추어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컨트리 뮤직에 대중가요는 물론 동요에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노래 등 거의 모든 노래는 다 불러보았으리라.
기차는 숨 가쁘게 고개를 오른다. 영주에서 봉화를 지나 태백으로 향한다. 태백에서 도계로 넘어간다. 갑자기 기차가 가던 길을 멈추더니 서서히 뒤로 물러선다. 잘못 길을 들었나 싶을 만큼 한참을 간다. 무엇인가 의아한 데 방송으로 여기가 스위치백 구간이라 한다. (뒤로 간다고 후퇴라 생각지 마라. 뒤로는 가지만 기실은 산을 오르고 있다) 뒤로 가던 기차는 멈추고, 이번에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간다,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더니 심포리--> 나한정 --> 흥전역 구간은 우리나라 유일 스위치백 구간이며, 스위치백은 경사가 가파른 산간 지역을 ‘갈지(之)’자 형으로 철로를 연결해 운행하는 방식이란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도계역 못미처 갑자기 기차 안이 어수선해졌다. 사고가 났다며 승무원이 뛰어다니고 주위가 시끌시끌 소란스럽다. 선생님 눈 피해 한 잔 두 잔 하던 아이 중에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친구 하나가 있었다. 취중에 장난이 과하여 뛰어다니다 갑자기 기차 칸 출입문이 세차게 닫히면서 유리창이 깨어지고 팔목에 자상을 입었다. 승무원이 뛰어가고 응급차 싸이렌이 울리고 기차가 멈춰서고, 연이어 다급한 ‘삐우삐우’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갑자기 기차 칸은 적막이 흘렀고 선생님들께서 “이제 조용히 쉬면서 가자” 시며 우리 사이에 앉으셨다. 다행히 응급조치가 가까운 도계에서 이루어지고 강릉에서 봉합수술을 하였으며 큰일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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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첫날밤이 지났다. 6반씩 울산바위 팀과 비선대 팀으로 나뉘어, 오전 오후 두 팀 맞교대하기로 되었다. 오전에 울산바위, 오후에 비선대로 오른다. 무거운 다리임에도 불구, 점심 후의 나른함을 이겨내면서 젊은이답게 씩씩하게 비선대로 향했다.
물소리가 시원하다. 세찬 물줄기가 계곡을 쓸어내린다. 철제 다리 아래는 맑은 물이 흐르고, 다리 위에서 우러러보는 계곡물은 작은 폭포처럼 떨어져 내린다. 비선대는 금방이었다. 여기서 금강굴과 대청봉으로 갈라져 오르는데 수학여행단은 여기까지란다. 선생님들께서 혹시나 노파심에 입구를 막고 계신다. 어제의 일탈 행동이 이렇게 제약으로 뒤따랐다.
몇몇이 내기가 붙었다. 누가 비선대 계곡물 속에서 오래 견디나 시합을 벌인단다. ‘내다’하는 영웅심도 발동되어 뛰어든 아이는 종잡아 15명은 넘었다. 4월이지만 계곡물은 얼음이다. 살얼음보다 차가운 계곡물 추위를 견딘다. 금방 밖으로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5분 10분 20분이 지난다. 결국 선생님의 중재로 3명이 일등을 하였다.
아쉬움을 두고 내려가려는 데 한문과 황 선생님께서 슬금슬금 계곡을 오르신다. “선생님 그리 가시면 안 돼요.” 그 소리를 듣고는 슬쩍 뒤돌아보시며 손짓한다. 따라오라고…
평소 존경하는 선생님이라 기꺼이 따라나섰다. 한 10여 명 되었다. 성큼성큼 계곡 옆으로 난 길을 올랐다. 금방 우리는 다른 아이들의 시야에서 벗어났고, 천불동계곡의 비경이 지금까지의 비선대 풍경과는 확연히 다르게 다가왔다.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나오고, 낭떠러지 길을 바위에 의지하며 올랐다 내려왔다 반복했다.
귀면암. 바위로 이루어진 몸체에 얼굴은 면과 면으로 조각하여 붙인 듯하다. 생김새가 무시무시한 귀신의 얼굴을 닮은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귀신의 모양새라 하나 바위 생김새의 웅장함과 그 아름다움은 잊을 수가 없다.
계곡을 따라 계속 올랐다. 빠끔 하늘이 보이는 철 사다리 길을 따라 한참 올랐더니 갑자기 하늘이 열린다. 하얀 눈밭이 햇볕을 받아 뽀얗게 반사되고, 눈이 부신다.
이 4월 말에 눈이라니. 예기치 않은 설원에 흥분되어 가슴이 방망이 친다. 길 바로 옆으로는 천 길 낭떠러지이고, 눈밭 사이로 사람들이 다닌 외길이 있다. 아래를 내려보니 저절로 다리가 후들거린다. 몇 차례 설악산을 다니셨다는 선생님께서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킨다. 그 끝에는 신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걸작품이 있었다.
폭포였다. 오련폭포. 다섯 五, 이을 連, 폭포 다섯이 연이어 내려온다. 폭포 하나 담(潭: 깊을 담. 소, 못)하나, 담 밑에 폭포 둘, 폭포 셋에 소(沼), 폭포 넷에 못이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폭포는 아래로 시원하게 뻗어내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자연이 있다니. 평생 잊지 못할 장관이다. 절로 탄성이 나오고 넋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설악산. 나의 청춘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평생 산을 찾아다녔으며, 청춘의 시기 대학 때 친구들과 4번, 교사 시절 학생들을 데리고 야영 2번, 수학여행 인솔 3번, 단독산행 2번. 백두대간 종주로 2번을 가로질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찾았다. 설악산은 내 삶의 휴식처요,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 기를 여기서 받아왔다.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설악산은 나에게 두근거림과 도전에 대한 열망을 일깨워 준다.
일탈의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 가르침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어떻게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치기 어린 잘못된 일탈로 다치고 상처받을 수도 있고, 금지된 산행이었지만 평생 따라나설 길로 나타나기도 했다. 스위치백 트레인이 뒤로 가는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듯 했지만, 기차는 분명 산 위로 오르고 높은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인생은 비록 그 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할 지라도, 변화 속에 무언가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지금은 모든 걸 내려놓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으며 하루들을 지내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청춘이며, 늘 새로움을 꿈꾸고 있다. 비록 되돌이킬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도, 뒤로 가는 듯이 보여도, 그 속에는 다시금 가슴을 뛰게 하는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하지 않나.
그래서 오늘도 금호강 산책길을 맨발로 걸으며 일탈을 꿈꾼다. 가슴 두근거릴 일탈이 어디 없을까. 푸른 하늘이 손짓한다.
첫댓글 수학 여행 잘 풀었습니다. 더욱 매진하여 훌륭한 작가가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포항역에서 출발했던 고2 때의 수학여행이 생각납니다. 그때도 청춘이고 지금도 청춘인것 같습니다^^
수학여행 일정을 실감나게 풀어 주셨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수학여행을 떠나것 같이
설렘과 즐거움의 연속 이었으면 합니다.
좋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먼 젊음의 뒤안 길을 돼새겨 보며 강변을 걷고 있는 노익장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설악산을 누볐던 영광이 맨 발걷기 노인의 발바닥에서 훈장처럼 빛나고 있습니다.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