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못 성지 순례기 ,1925년. 정(규량) 신부
1. 치명 장소와 치명자 묘지 발견
경향잡지 제19권 574~577호(1925. 9. 30~11. 15)
정(규량) 신부
○ 공경하올 안(다블뤼) 주교와 오(오메트르) 신부와 민(위앵) 신부의 산 자리 석죽골[서짓골 혹은 서리골]과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이 치명하신 갈마연 진터를 참배함.
나는 벌써부터 이 복지를 심방할 마음을 두고 있던 차에 금년(1925년) 7월 5일은 조선에서 치명하신 공경하올 주교․신부와 남녀 교우 79위가 로마 성베드로대성전에서 처음으로 복자위에 오르시는 경사를 맞이했건만, 이런 경사에 참여치 못함을 원통히 생각하고, 이왕이면 공경하올 주교․신부․교우들이 치명하신 복된 땅이나 가보겠다는 결심으로 7월 5일(주일) 오후 1시에 보령군 미산면 평장리[현 평라리의 평장리] 석죽골을 찾아가는데, 소양리 성당[현 부여 금사리 성당의 전신] 아래 사는 이 바오로를 먼저 보냈다. 그 사람은 나이 71세로, 병인년 전에 석죽골서 살다가 13세에 떠났으며, 또 이 사람의 조부 이 바오로와 중백부 지슈[즉 긔수,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부친 힐라리오와 또 교우 최모는 본래 병인년 전부터 석죽골에서 살아오던 중이었다.
이상 4명이 공경하올 안 주교와 오 신부와 민 신부의 치명하신 시체를 70리 되는 수영 갈마연 진터에서 석죽골로 모셔오는데, 때는 5월이었다. 자기가 사는 집 뒤의 골짜기요 또 자기가 부치는 밭 가운데 장사를 지낼 요량으로 광중을 크게 파고, 칠성판을 하나씩 받쳐 장사를 지내고, 그 위로는 묘의 봉분도 만들지 않고 밭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경신년[경진년을 말한 것인 듯. 그러나 경진년도 아니고 정확히는 임오년․1882년이 맞는다]에 백(블랑) 주교의 분부로 전에 수영에서 이장해 오던 이 바오로 삼부자가 공경하올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3위 시체를 파서 강경리로 와 계시던 백 주교에게 모셔다 바쳤다고 한다.
보령군 미산면 석죽골의 위치로 말하면, 7월 5일에 금사리에서 나와 이 바오로와 도화담[현 보령시 미산면 도화담리] 공소 회장 김 빈첸시오와 그 공소 교우 김 요셉 등 도합 4명이 석죽골 동네로 들어갔는데, 호수가 78호나 되었다. 병인년 전부터 교우들이 동네에서 살아왔으며, 병인년 이전의 집은 모두 없어지고, 혹 약간 있더라도 모두 새로 고쳐서 지은 집들이었다. 동네 아래는 평평하여 다소의 전답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교우들의 전답들도 있었지만 군난 때에 모두 적몰되었다. 또 큰 내가 있어 남포 한내[大川]로 흘러간다. 이 지방으로 말하면 충청남도에서는 큰 산중이라 할 수 있다.
석죽골 동네에서 공경하올 주교 산소 자리로 올라가려면 한 5분 정도 걸리니, 그 산상봉을 근동 사람들이 부르기를 멍덕봉이라고도 하고 멍덕산이라고도 한다. 이 멍덕봉에서 북편으로 세 번째 봉을 타고 내려오면 매상리 바위를 만나는데, 매상리 바위에서 등을 타고 끝까지 내려오다가 동편 비탈로 내려서면 공경하올 주교 산소 자리를 만난다. 반은 산비탈을 차지하고 반은 평지를 차지하였으며, 앞에는 오치상의 담불[약 100평 크기] 밭이 있고, 산소 자리와 밭 사이는 담 형상의 바위가 둘러있으며, 누가 보든지 묘지 하나는 쓸 만하게 보인다. 그 자리에 28년 전에 그 동네 임성좌와 임원중의 부친 무덤을 썼는데, 공경하올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산소 자리는 그 무덤에서 바로 남쪽 고개를 향해 두 걸음 가량 되는 곳이다.
이후에도 이런 모양으로 찾아가면 알기 쉬울 것이다. 그 자리에서 시작하여 20보 가량 내려가면, 병인년 이전에 죽은 교우들의 무덤 세 개가 있다. 전해 내려오기를 몬도리 요왕의 부친 정씨 무덤과 장씨 무덤과 20세 된 동정녀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봉분은 조그마하다. 지금까지 임성좌와 임원중 형제가 자기 부친의 무덤을 벌초할 때 교우들의 무덤 세 개까지 벌초를 한다고 한다. 또 주교 산소 위로 있는 10정보 가량 되는 산은 그 동네 새초장[억새풀밭을 말하는 듯함]인데, 보통 소도 먹이고 풀을 베어서 말렸다가 겨울에 소 먹이기 위해 그 동네와 면에서 상관한다 하며, 산에는 별로 나무가 없고 무성한 풀뿐이었다.…… 그날 나는 도화담 공소로 돌아와 하루를 지내고, 7월 6일에는 수영 갈마연을 찾아갔다.
○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황 루카, 장 요셉이 치명한 수영 갈마연 진터를 참배함
7월 6일에 수영을 갈 요량으로 보령군 청소면 파리재[현 보령시 청소면 진죽리] 공소로 가서 이 회장 마티아와 같이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비가 와서 하루를 묵고 8일에 나와 회장 마티아와 이 바오로와 백 마티아와 김 마르티노 등 도합 5명이 수영으로 갔다. 나는 자전거로 먼저 가면서 산천과 해변을 유심히 살펴보며 가다가…… 수영 성 밑에 당도하여 쉴 겸 뒤에 오는 교우들을 기다릴 겸 주저주저하던 차에 뜻밖에 웬 노인이 고구마 한 소쿠리를 지고 이종(移種)을 하러 왔다.…… 수작하기를…… 나는 수영을 처음으로 오는 길인데, 여기서 갈마연은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 여기서 오리 되고, 여기서 거기까지 농사를 많이 짓지요. 내 들으니 그 전에 갈마연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합디다. 그렇지요. 수사 영감 시대에 간간이 사람을 죽였지요. 그러나 여간 큰 죄인이 아니고는 거기서 죽이지 않이하였지요. 갑오년에 동학군 10여 명 죽이고, 그 전에 서양놈들 셋 죽이고, 천주학 하는 놈들도 여럿 죽였다고 합디다. 감사 영문에서는 큰 죄인을 죽여도 먼저 부(府)에 보고한 다음에 죽이고 또 보고하였지만, 수사의 권한으로는 큰 죄인을 죽이고 보고하기만 하였답디다.
그러념 갈마연에서 그 전에 사람을 죽이던 자리며, 장기대 섰던 자리를 아실 수가 있겠소. 예, 알지요. 그러나 그 사정은 위에 묻소.…… 그러면 이 바쁜 때에 노인에게 여쭙기는 염치가 없지만, 같이 가셔서 자리를 일러주시면 일 못하시는 손해에 상당한 품값을 생각할 터이니 가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바빠서 가지 못하겠습니다. ‘갈마연 가시면 들에서 사람들을 만날 것이니 물어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요’ 하고 못 가겠다고 하였다. 그때 마침 교우들도 와서 권하고 나도 간청하니 마지못해 가기로 하고 허락하였다.……
목적지에 가서 장기대 섰던 자리를 대라고 하니, 밭두둑을 가리키면서 ‘여기다’라고 하기에 ‘무슨 표적은 없느냐’ 하니 ‘오래 되어서 없어졌다’고 하였다. 조금 의심이 나서 말하기를 ‘분명히 알려면 여러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겠으니, 보이는 동네에 가서 알만하고 엄숙한 노인을 찾아보라’ 하고 교우를 보냈다.…… 알아본 즉, 알 만한 사람은 편응택․이조용․김순경이라 하므로, 뒤골 논에서 모 심고 있는 편응택․이조용 두 사람을 불러왔다. 이 사람들은 누대에 걸쳐 살아온 사람들이며, 나이는 사오십 세 가량씩 되어 보였다. 수인사 후에 온 것을 감사하고……
장기대는 저기 서있었는데, 30년 전까지 있다가 썩어서 없어졌으며, 우리도 젊어서 항상 보았소. 또 죽인 자리는 여기일 듯하나 정확히는 알 수 없소. 또 파묻은 자리를 세 군데나 알려주는데 보니 구덩이를 크게 파고 여러 사람을 묻었던 흔적이 희미하게 드러나며, 주위는 조금 깊고, 봉분은 조금 불룩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 전에 서양인 한 명과 조선 사람 하나가 와서 묻고 간 일이 있다’ 하였다.……
장기대 섰던 자리는 이웃 장상길의 밭으로, 구장에게 가서 알아보니 밭 번호는 353번지요 평수는 20평인데, 조금씨 조금씩 생 자리를 일구어 보리 한 두락 가량을 심었으며, 밭 형태는 세모진 형상으로 안면도로 향해 있었다. 밭 귀퉁이에서 밭 중심을 향해 다섯 보 가량 들어가면 조금 깊어 보이는 데가 그곳이었다. 또 그 사람들의 말과 같이 치명한 자리는 장기대 섰던 자리에서 산밑을 향해 20보 가량 될 듯하였다. 편응택․이조용 두 사람의 말은 믿고 데리고 갔던 정응춘이 일러주던 자리와 서로 다섯 걸음 떨어져 있는 밭두덩인데, 그 말은 신용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밭두덩에는 간혹 찔레나무가 있고, 노린재나무도 간혹 섞여 있으며, 장상길의 밭에서 서쪽으로 길 둑 너머에는 밭이 있는데, 윤예칠의 밭은 아래 있고, 김수동의 밭은 위에 있었다.
장상길의 밭에서 동남쪽으로는 풀밭이 있고 평평하며, 전에는 모두 밭으로 부치다가 묵힌 것인데, 밭고랑의 흔적이 분명하였다. 뒤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도랑은 산밑을 끼고 수영 쪽으로 휘둘러 바다로 들어가며, 편응택과 이조용이 일러주던 무덤은 각각 있는데, 그 구덩이 중에 하나는 분명히 주고․신부․교우가 몇 달 묻혀 있던 자리이지만 알 수는 없었다.
첫 구덩이로 말하자면 제일 먼저 이조용이 가르쳐준 것인데, 주의할 만한 것이었다. 수영 쪽으로는 밭 좁은 목정이며, 산을 안고 둔덕 위에 있는데, 인위로 땅을 변개하여 끌어 메운 흔적이 현저하고, 가운데는 조약돌이 쌓여 봉긋하였다. 장기대 섰던 자리 장상길의 밭까지는 거리가 백 보 내외였다. 또 그 구덩이에서 시작하여 산밑으로 언덕을 살펴 몇 십 보를 올라가면 그와 같은 구덩이 둘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는 희미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끌어 묻은 구덩이었다. 장상길의 밭에서 오십 보 내외 정도며, 또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위에서 말한 구덩이들은 편응택․이조용이 일러준 구덩이었다.
또 그 진터의 토질을 말하자면, 흙은 검고, 잔돌은 이상하게 납작하며 잘록잘록하고 거뭇거뭇한 돌들인데 밭에 죽 깔려 흙이 별로 많지 못하였다.…… 장상길의 밭에서 5~6보만 나서면 곧 깊은 바다로, 사리 조금 때면 언덕과 평면이 되도록 물이 철렁하게 섰다가 나아가며, 안면도는 수로로 40리가 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