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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2년 봉황대 다시 일어서다.
1778년부터 호서와 영남 관동지방에 닥친 대기근에서 김산군도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1786년의 대화재로 인명과 건물피해가 상당하였고, 연이은 2차례의 화재와 기근으로, 군민은 거의 소생 불능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은 김산에 태실을 둔 정종의 후손인 64세 이성순(李性淳,1724~)을 김산군수로 임명한다.
조정에서 고령의 이성순이 김산 복구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한 것은 그의 가계와 자녀들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이성순은 정종 이방과(李芳果,1357~1419)의 11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이다. 생부는 봉화현감 이광직(李匡直)이며, 양부는 도승지 이광보(李匡輔)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관직에 출사하였다.
그의 아들 4형제 중 셋째 이면긍(李勉兢,1753~1812)은 1783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영천군수로 관직에 있었고, 4남 이면승(李勉昇,1766~1835)은 2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대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들 형제를 주목한 것 같다. 조정의 기대처럼, 이후 두형제는 경상도 관찰사와 전라도 암행어사를 거쳐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한다. 고령의 부친이 김산군수로 부임하자 넷째 아들 (李勉昇)이 아버지를 따라 김산에 내려와 보좌하면서 지역민들과의 가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1788년 12월 64세의 이성순(李性淳,1724~)은 김산군수로 부임하여 그동안 미뤄두었던 공역을 대대적으로 시행한다.
먼저 무너진 양사당을 다시 세워 문풍을 일으키고, 관아와 금릉객관을 대대적으로 수선한다. 금릉객관을 수리하고 남은 자재로 때마침 무너져 있던 봉황루를 중건하고, 마침내 1792년 가을 관찰사와 인근 수령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한다.
이러한 이성순 치적을 현재 김산향교에 남아 있는 공덕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산향교내 군수이후성순흥학비(郡守李侯性淳興學碑)
군수이후성순흥학비(郡守李侯性淳興學碑)
五載獎育(오재장육) 5년 동안 권면하여 기르니
牑我羣蒙(편아군몽) 아둔한 우리를 모두 다 계몽했네.
一心勤篤(일심근독) 일심으로 부지런하고 도타웠으니
去思冞極(거사미극) 선정 생각에 지극하네.
이 뿐이랴. 그의 재임 기간 중 발생한 기근에 대한 조치를 일성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일성록 > 정조 > 정조 17년 계축(1793년) > 6월 1일
금산군(金山郡) 구급을 13차 시행하였는데, 기민이 도합 1만 2267구이고, 분급한 각 곡물이 976섬 6말 남짓이다. 미가 8섬 3말 남짓인데, 진상의 봉진을 정지시키고 그 가미(價米)를 떼어 준 것이다. 조가 968섬 3말 남짓인데, 23섬은 전초로 마련한 것이고, 528섬은 공명첩가곡이며, 214섬 10말 남짓은 별회곡이고, 202섬 8말은 전 군수 이성순(李性淳)이 자비한 것이다.
연화지의 서사에 있어 1792년 가을은 큰 의미를 갖는다. 김산객관을 중수하고, 중수한 봉황대(鳳凰臺)에서 낙성식외에 새롭게 변화한 김산을 소개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새로 지어진 봉황대에 판상시를 걸어 김산 봉황대가 명실 상부한 영남의 명소임을 재확인하는 연회였다.
잠시 누정의 판상시에 대한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자. 보통 누정시를 설명할 때 “누정을 통해 자연을 조망하고, 그 자연과 공존하는 사람의 삶을 성찰하는 과정 즉 지성과 자연이 만나는 문화의 장”이라고 설명한다.
누정에 판상시를 걸 때는 사유와 명분히 분명하다. 창건했을 때 중건했을 때, 중요 인물이 방문하여 행사가 있었을 때, 그 행사의 주요 귀빈이 차운시를 증정하여 그 건물의 품격을 더해준다. 그렇기에 유명인사의 판상시가 있다는 것은 그 건물의 품격을 더욱 높혀 주는 오늘날의 품질보증서와 같다.
이날 낙성식을 가진 객관과 별개로 봉황대에서 가진 연회에서 상량문과 아울러 참여 귀빈들이 판상시로 봉황대 명성을 더해 준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당시의 봉황대가 어떤 모양과 형식을 갖추었는지 알수 없지만, 이날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판상시를 통해 봉황대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식순에 따라 남아 있는 글을 통해 영상을 이어가 보자. 먼저 건물을 짓는 의미를 고하는 상량문으로 경과 보고를 하고, 다음 편액을 거는 행사를 할 것이다. 주인이 먼저 봉황대를 운으로 하여 시를 짓는다. 이어 두 아들이 아버지의 운을 따라 공손히 차운한 시를 올릴 것이며, 주요방문객들이 또 차운한 시를 지어 증정 할 것이다.
이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이 판상 글들을 보면서 이 건물의 내력과 공로자와 보증인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 봉황대에는 기문을 대신하여 아주 특별한 한 장의 판상이 걸린다. 앞서 소개한 “별봉황대신부‘이다.
이 장면이 너무 파격이다. 이 장면을 두고 연화지에 서사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후에 이면승이 이조판서까지 오르게 되는 인품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봉황대를 중건한 공을 봉황대를 사랑했던 김산 사람 정약광(鄭約光,1761~1793경)의 글로 대신한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억 저편의 사람. 그가 남긴 ‘별봉황대신부’를 봉황대에 걸어, 향토인과 이방인 하나 되어 10년간의 재난을 이겨내고, 이제 옛 명성을 되찾겠다는 애틋한 마음을 새겨두었다는 점이다.
지금부터는 220년전 김산 고을 연화지 옆 봉황대 낙성식을 마치고 거행된 축하 공연을 관람하자. 요즘으로 말하면 방탄소년단쯤 되는 영남의 명사들이 펼치는 시를 읊는 공연이다. 물론 봉황대와 연화지 주변에는 구름 같은 사람들이 몰려 있을 것이다. 먹을 갈고 종이에 써 내려간 글을 받아 글 판에 붙혀 봉황대 벽면에 걸어, 이곳이 영남 제일의 명소 김산 봉화대(鳳凰臺)임을 알리는 시간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지금은 당시의 판상글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김산읍지> 1832년발간본과 1895년 발간본에 남아 있는 글들을 시간순으로 재구성하였다. 번역은 <김천시사>를 참고하여 재정리 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전번역원 주석을 병기하였다.
먼저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김산군수 이성순을 배종했던 넷째 아들 이면승(李勉昇,1766~1835)이 지은 상량문을 읽어 내려간다.
먼저 봉황대를 다시 짓는 내력을 밝히고, 지세에 대해 설명한다. 이어서 봉황대 편액의 유래를 설명하고 공역을 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한다. 공역의 내용 중에 백성의 땅을 바꾸어 터를 만들었다는 설명으로 봉황대의 위치가 원래 있던 곳에서 옮겨진 것을 알리고, 이어서 봉황대의 구조와 연화지 풍경 묘사를 통해 지금의 봉황대가 되기까지 어떠한 변화를 거치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축원문을 기록하면서 보통의 상량문에는 없는 문구가 들어간다.
‘사계절의 재해가 영원히 없게 하소서.’
신증봉황대 상량문을 전문을 감상해 보자.
신증봉황대상량문(新增鳳凰臺上樑文)
새로 지은 봉황대 상량문
이면승(李勉昇,1766~1835)
術夫, 名都占逰觀之區 因地之勝, 華構歴頹剝之運 待人而興. 豈但爲賁餙 風流亦所以修舉曠闕. 盖玆邑跨湖嶺之要 臺擅山水之竒, 門隣湧金 通遥矚扵十里蹄轂. 潭凝沉璧 櫬新彩扵一色菱荷.
서술해보면, 유명한 고을이 유람할 곳을 가지고 있는 것은 땅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며, 아름다운 건물이 무너지는 운을 겪으면 사람이 일으키기를 기다리는데, 어찌 다만 꾸미기만 하겠습니까. 풍류 역시 방치되었던 것을 수리하여 받드는 것입니다.
대저 이 고을은 영호남의 요충지에 걸쳐있어 (봉황)대는 산수의 기이함을 차지하여, 가까이에 용금문이 있어 십리 밖의 말발굽과 수레가 아득히 보이고, 연못에 (봉황대)벽이 잠겨 어리고, 마루는 마름과 연꽃보다 새 빛이 납니다.
*용금문(湧金門) : 남송(南宋)의 행도(行都)인 임안(臨安), 즉 지금의 항주시(杭州市) 서쪽 성문으로 서호(西湖)를 굽어보고 있다. 김산군 읍치에 용금문이 있다. *능하(菱荷) : 마름꽃과 연꽃을 아울러 이르는 말.
鳳凰篇名 依然詩仙之題詠, 龍蛇閱怯 久久地靈之護呵 那知物換而星移. 以致風凘而雨泐 赤壁破蘇子之夢 皜衣何人. 黃樓訴崔生之拳, 白雲此地 草塢苔逕 仍爲樵牧之場, 花榭藥欄 遂失觴詠之所.
봉황이란 편액은 시선(이태백)의 제영과 다름이 없고, 임진왜란 병화에도 오래도록 지령이 보호하였는데, 어찌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알겠습니까. 비바람에 깎이고 씻기기에 이르니, 적벽에서 소부자의 꿈을 깨트리던 백의 문사는 누가 되겠습니까.
황학루처럼 최생의 손을 호소하지만, 이 땅에 흰구름이 흘러 잡초 무성한 담장과 이끼 낀 오솔길은 나무꾼과 목동의 놀이터가 되어서, 꽃피던 사대와 약초 울타리의 각영(觴詠) 장소를 잃어버렸습니다.
*赤壁破蘇子之夢(적벽파소자지몽) : 옛날 소순(蘇洵)이 그의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데리고 악양교(岳陽橋)를 지나면서 「천하의 문장 두 아들을 데리고 이 다리를 지나간다.」라고 하였는데, 이귀(李貴)가 그 두 아들을 데리고 장단(長湍)의 적벽(赤壁)을 지나면서 ‘옛날 소순(蘇洵)이 그의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데리고 악양교(岳陽橋)를 지나면서 「천하의 문장 두 아들을 데리고 이 다리를 지나간다.」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지금 천하의 절의(節義)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을 지나가니 어찌 소가(蘇家) 부자의 문장보다 낫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을 비유. 김산군수로 부임하더 이성순은 문장이 뛰어났던 이면긍과 이면승 두 아들을 두었다. *黃樓訴崔生之拳(황루최생지권) : 〈황학루(黃鶴樓)〉 시를 지은 당(唐)나라 최호(崔顥)처럼 뛰어난 문재(文才)의 소유자에게 호소한다는 의미.
逮夫 大人之莅郡 事無不舉 治有餘閑, 修養士之堂 制度復舊, 葺迎客之舘 棟宇咸新. 玆又相地之冝 爱始建臺之役. 贖民田而開基址 前巽後乹, 捐官廩而備瓦材 上損下益. 一面洲嶼 別是環山而繞流, 八角軒楹 非止累石而築土
아버님께서 군에 부임하기에 이르러,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없지만 다스림에 여가가 있었기에, 양사당을 수리하여 제도를 복구하고, 객관의 지붕을 다시 이어 동우가 모두 새로워졌습니다.
이에 또 마땅한 땅을 살펴 대를 짓는 공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백성의 땅과 바꾸어서 터를 개척하니 손향건좌(前巽後乹)이며, 관의 창고를 들어 기와와 재목을 준비하니 위를 덜고 아래를 더하는 모양이었습니다. 한 면의 모래섬은 둘러싼 산과 구별하여 감싸 흐르게 하고, 팔각 마루기둥은 돌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고 흙을 채웠습니다.
*헌영(軒楹) : 마루의 기둥
工告上樑 序屬中秋. 鳳兮鳳兮來儀 二字舊額 翬如鳥如飛革 百尺新顔. 於是 彩架懸而衆舞爭呈 文榻列而嘉賓華至. 兩堤六橋之風物 何必讓美於西湖. 三山二水之形便 從此擅榺於南嶠. 雲飛雨捲 覩景熊之無雙 地秘天慳 悟興廢之有数. 玆成短引 助擧修樑
장인이 상량을 고하니 계절은 중추인지라. “봉황이여. 봉황이여” 하면서 의식을 시작하니, 편액의 두 글자가 꿩이 날아가고 새가 놀라는 것과 같이 높은 루가 새로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단청한 보를 걸어 올리니 여러 사람들이 춤추며 다투어 올리고, 문탑(의자)을 줄지어 놓으니 아름다운 손님 모두 도착하였습니다.
양쪽 제방에 있는 여섯개 다리의 경치가 어찌 서호에 아름다움을 양보하겠습니까. 삼산이수의 모습은 지금부터 영남에서 명소가 될 것입니다.
비구름 걷히니 보이는 경치는 견줄 곳이 없고, 땅이 감추고 하늘이 아끼는 곳이지만 흥하고 무너지는 운수를 깨달았습니다. 이에 짧은 글을 지어 수선한 들보를 올리는 것을 돕겠습니다.
*비혁(飛革) : 춘추 시대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하여 무너진 궁실을 다시 짓고 낙성을 알리니, 사람들이 송축하여 읊기를 “새가 놀라 낯빛을 변함과 같으며, 꿩이 날아가는 것과 같으니, 군자가 올라가서 정사를 다스릴 곳이로다.〔如鳥斯革, 如翬斯飛, 君子攸躋.〕”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詩經 斯干》
兒郎僞抛樑東 日出扶桑瑞靄中. 誰信湖山兼冨麗 杏花深處酒旗紅
어영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들어보니 해가 부상(동쪽)의 상서로운 구름속에 떠오르네. 누가 호산이 부유함과 화려함을 겸했다고 믿으리. 살구꽃 깊은 곳에 주막 깃발 붉다네.
*행화(杏花) : 행화촌(杏花村). 술집을 가리킨다. 두목(杜牧)의 〈청명(淸明)〉 시에 “한번 물어보세 술집이 어디 있는지, 목동이 멀리 가리킨 곳 살구꽃 핀 마을.〔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杏花村〕”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兒郎僞抛樑南 高山天外落來三. 曽濆月出雲歸後 一片澄潭萬象涵.
어영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들어보니, 고성산 하늘 밖에 세 개로 떨어져있네. 일찍이 달이 뜨고 구름 나왔다가 돌아간 후에, 한 조각 맑은 연못에 만상이 잠겨있네.
兒郎僞抛樑西 千丈黃山直欲齊. 詠罷美人歌一曲 半輪秋月入簾低.
어영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들어보니, 천 길 황악산 가지런하네. 미인가 한 곡조 읊기를 마치니, 가을 반달이 주렴 아래 들어오네.
兒郎僞抛樑北 天際雙垂九鳳翼. 斗下終南如何望 聖君齊壽祈宸極
어영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들어보니, 하늘가에 두 줄기로 구봉산일이 펼쳐있네. 북두성 아래 남산을 어찌하여 바라보나. 성군께서 가지런히 장수하기를 북극성에 기원하네.
*종남(終南) : 종남산(終南山).‘남산’의 옛 이름. *신극(宸極) : 북극성. 작은곰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 천구의 북극 가까이에 있고 위치가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에 방위나 위도의 지침이 된다.
兒郎僞抛樑上 營室方中光欲放. 把酒登臨欲問天 太平行樂知誰貺.
어영차, 대들보를 위쪽으로 들어보니, 중앙에 집을 지어 광채를 뿌리네. 술잔 들고 올라서 하늘에 묻노니, 태평한 행락은 누가 주는 것인가.
兒郎僞抛樑下 門臨大道連平野. 使君之樂倘知不 日永花陰無訟者.
어영차, 대들보를 아래로 들어보니, 큰길에서 평야로 이어지는 곳에 문이 있네. 사또의 즐거움이 부족함을 아는지, 하루 종일 꽃 그늘에 송사하는 이 없네.
伏願上樑之後 一區之繁華稳占 四時之菑害永除. 軒構崔嵬 長留行客之指點. 笙歌縹緲 共和農勝之謳謠. 壬子 初秋 完山 李勉承 撰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후에는, 고을이 번화하고 사계절의 재해가 영원히 없게 하소서. 헌이 우뚝하니 여행객들의 지점이 되어 오래 머물게 하고, 생황 소리 아스라하니 풍년의 노래와 어울리게 하소서.
임자년(1792년) 초가을 완산인 이면승이 짓다.
상량문 판상을 올리고 본격적으로 시회가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에서 주도한 시회가 이처럼 큰 규모로 개최된 것은 1482년 김산군수 이인형(李仁亨,1436~1504)이 김종직, 김맹성, 조신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함께한 이후 실로 오랜 만이었다. 그때 시회 주관자 이인형이 문과 장원 급제자라는 사실과 김종직의 명성으로 이 시회는 두고두고 전국에 회자되었다.
300년을 격해서 다시 당대 문과 장원급제자 이면긍(李勉兢)이 참석한 시회가 김산고을에서 개최되어, 그들의 판상시가 관아가 아닌 누구나 방문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봉황대에 걸려 있다는 소문은, 김산고을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문만큼 영남 고을에 빠르게 전해 졌을 것이다.
어쩌면 이성순(李性淳,1724~)은 이 효과를 염두에 두었을는지 모르겠다. 5년을 함께 김산고을 복구를 위해 일했던 아들이 봉황대상량문 말미에서 밝혔던 그 간절한 소망
여행객들의 지점이 되어 오래 머물게 하고
생황 소리 아스라하니 풍년의 노래와 어울리게 하소서.
이 간절한 소망, 김산 재건을 이루고자 이면승은 김산의 랜드마트로 봉황대를 소개하고자 했을 것이다. 장엄하지 않은가. 250년 전 이면승이 이루고자 했던 소망이 지금 연화지에서 이어지고 있는데 서사가 없다고 하겠는가.
이날 행사의 주인격인 이성순(李性淳,1724~)은 곧 떠날 임지에서 김산 백성에 대한 애잔함을 여기에 또 더한다. 부전자전의 애민정신이다.
임기를 다하고 떠나는 김산군수 이성순이 남긴 시를 따라가 보자.
新增鳳凰臺板上韻
새로 지은 봉황대 판상운
김산군수 이성순(李性淳,1724~)
特立危甍擁衆山(특립위맹옹중산) 우뚝 솟은 용마루 여러 산을 감싸고
雙流巧合自成環(쌍류교합자성환) 두 갈래 물길 만나 저절로 둘러싸네.
一輪秋月碧潭外(일륜추월벽담외) 가을의 둥근 달 푸른 연못 가에 비치고
十里歸僧紅樹間(십리귀승홍수간) 십리 길 가는 스님 붉은 단풍 사이에 있네.
可耐民憂方溢目(가내민우방일목) 견뎌내는 백성 근심 눈앞에 넘쳐나지만
且將樽酒暫開顔(차장준주잠개안) 술동이 끌어안고 잠시 얼굴 펴 보는데,
竹樓肯爲明年計(죽루긍위명년계) 죽루에선 마땅히 내년 계획 바라기에
剩借來人吏牒間(잉차래인이첩간) 오는 사람 도움 되게 공문서에 끼워두네.
郡有鳳凰臺 頹毁己久. 壬子夏 修改客館 以餘力 新建于蓮花堤北 中秋下澣
군에 봉황대가 있었는데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
임자년 여름 객관을 개수하고 여력이 있어 연화제 북쪽에 새로이 지었다.
중추월 하한.
떠나는 군수의 전별시가 이어지자 장내는 잠시 숙연해졌을 법하다.
‘덕있는 우리 사또가 이제 떠나는구나.’
'앞으로 어떻게 되지' 하는 변화와 새로운 군수에 대한 막연함 불안감으로 좌중은 숙연했을 것이다.
이에 셋재 아들이 부친께 시를 올린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면긍(李勉兢,1753~1812)은 1783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때에는 영천군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한 단어로 좌중을 압도하며 안도시키다.
‘추정(趍庭)’
“아버지의 가르침을 배워서 계승할 것이니 두려워말라. ”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이면긍은 후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한다.
백성에 대한 근심을 잠시 접고, 이제 노년을 즐기기를 바라는 자식의 바램. 아버지의 애민정신을 추정(趍庭)하겠다는 목민관의 자세
백성에 대한 삼부자의 희망과 간절함과 다짐이 담긴 판상운이 이제 봉황대에을 걸렸다.
이면긍이 봉황대에 남긴 시를 음미해보자.
敬次新增鳳凰臺板上韻
새로 지은 봉황대 판상운에 경건히 차운하다
영천군수 이면긍(李勉兢,1753~1812)
廉外天浮面面山(렴외천부면면산) 주렴 너머 하늘에 떠 있는 사면의 산들은
名亭興廢理循環(명정흥폐이순환) 유명한 정자 흥하여 폐한 이치를 순환하네.
夢翻羽客歸何處(몽번우객귀하처) 꿈속에 날아서 신선 돌아간 곳 어디인가.
吟罷詩仙在此間(음파시선재차간) 읊기 마친 시선(詩仙)은 이 사이에 있다네.
八角軒簷分異態(팔각헌첨분이태) 팔각 정자 지붕 나눠어서 형태가 다르지만
一潭漁鳥媚新顔(일담어조미신안) 연못의 새와 고기, 새 얼굴로 아양 떠네.
民憂暫豁趍庭暇(민우잠활추정가) 백성 근심 잠시 접고 추정(趍庭)하는 여가에
先占良宵水月閒(선점양소수월한) 좋은 밤을 수월(水月)이 한가하게 차지했네.
壬子 季秋 上澣 子 榮川郡守 勉兢 敬次
임자년(1792년) 9월 상순 아들 영천군수 면긍이 경건히 차운하다.
*추정(趍庭) :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가 종종걸음으로 뜨락을 지날 때에[趨庭] 공자가 시를 배워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論語 季氏》
5년간 김산군민과 동고동락했던 넷째 아들 이면승(李勉昇,1766~1835)이 다시 붓을 잡았다. 한해전에 문과에 급제하고, 연로한 아버지를 보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출사도 미루고 김산에 머물렀던 26살의 그는 누구를 대상으로 시를 지을 것인가.
그는 김산 군민을 대상으로 시를 짓는다.
이제 김산의 미래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간단 명료하다. 앞서 상량문에 드러냈던 간절한 소망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냥 쿨함. 그 자체다.
왜일까. 앞서 형님이 할 이야기를 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연로한 아버지에 대한 걱정에 최대한 감정을 자제한 듯하다.
이후 이면승은 홍문관 수찬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전라도 암행어사, 우부승지, 황해도관찰사, 대사간, 형조판서, 우참찬,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하고 있다.
순조 시대에 세역제도(稅役制度)의 문란과 각종 재해로 민중들이 곤궁을 겪고 있던 지방 실정을 비교적 밝게 이해해, 당시의 국가 행정과 민중 생활을 기본적으로 규정짓던 세역 문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노력한 관료였고, 문장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敬次新增鳳凰臺板上韻
새로 지은 봉황대 판상운에 경건히 차운하다
이면승(李勉昇,1766~1835)
淸秋遠勢見群山(청추원세견군산) 가을날 아득히 여러 산이 드러나
山與簷齊天一環(산여첨제천일환) 산과 처마 가지런히 하늘을 감싸네.
得月通明軒上下(득월통명헌상하) 달 뜨자 환한 빛이 헌의 상하 비추어
凭欄宛在水中間(빙난완재수중간) 난간 기대 굽어보니 물속에 잠겨있네.
鳳移巢穴開新畵(봉이소혈개신화) 봉황이 둥지 떠나 새로 그림 그리니
魚戱樓光鮮昔顔(어희루광선석안) 물고기 노는 루대 풍경 지난 얼굴 선명하네.
歸後定應勞夢想(귀후정응노몽상) 돌아가 꿈속에 상상했던 노력에 부응하여
且將嘯皷日偸閑(차장소고일투한) 장차 웃고 노닐며 한가한 날 보내리.
壬子 季秋 上澣 子 勉昇 敬次
임자년(1792년) 9월 상순 아들 면승이 경건히 차운하다.
이제부터 초대된 내빈들이 시간이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1749~1805)이 운에 따라 그 격을 보태준다. 그는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며 환곡의 폐해를 시정하고자 노력했던 인물로, 후에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한다.
<김천시사>에는 편집 과정의 오류인지 정대용의 시를 결락하였다. 원문을 찾아 다시 정리해본다.
뜻이 정확히 이어진다. 봉황대가 들판에 있다는 점. 불길에 휩싸였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이를 극복해 낸 태수의 공을 치하한다
次鳳凰臺板上韻
봉황대판상운을 차운하다
순찰사 정대용(鄭大容,1749~1805)
從古金陵只鹿山(종고금릉지녹산) 예로부터 금릉은 단지 녹산 이였는데
名樓修廢若循環(명루수폐약순환) 유명한 루 폐하여 고치니 순환과 같네.
經營參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農功没(경영참■농공몰) 땅을 일궈 농사일에 골몰하면서
突兀擡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野水間(돌올대최야수간) 오똑하게 ■대가 들판 사이에 솟아났네.
岡阜偶占千刃勢(강부우점천인세) 고을 언덕 우연히 불길에 휩싸여
琅玗不改百年顏(랑간부개백년안) 대나무로 오랜 모습 고치지 못하다가
歸來鳳鳥知今夕(귀래봉조지금석) 봉황이 돌아온 걸 오늘 저녁 알고서
太守酣歌化日閒(태수감가화일한) 태수는 감가로 하루 여가 보내네.
巡察使 鄭大容 題 순찰사 정대용이 제하다
*낭간(琅玗) : 대나무 *감가(酣歌) : 술을 마시고 흥겨워 노래 부름. *화일(化日) : 봄날.
*정대용(鄭大容,1749~1805) [생1783][문1785]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도이(道以). 호는 기호(耆湖). 정석조(鄭錫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신검(鄭愼儉)이고, 아버지는 정동윤(鄭東尹)이며, 어머니는 조인명(趙麟命)의 딸이다. 1791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환곡의 폐해를 시정하는 데 노력하였다.
다음 차례는 내빈으로 초대된 지례현감 이었던 이채(李采,1745~1820)였다. 조부 이재(李縡, 1680~1746)와 쌍둥이처럼 닮은 초상화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형집행을 잘못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10여년간 조야에 묻혀있다가 지례현감에 제수되어 관직생활을 다시 하는 인물이다. 그에 대해 소개한 자료를 찾아보자.
본관은 우봉(牛峯, 지금의 황해도 금천),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이다.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손자다. 아버지는 대사간 이제원(李濟遠)이며, 어머니는 풍산 홍씨 홍중복(洪重福)의 딸이다.
지례 현감으로 재직할 때의 치적도 만만치 않다. 실록에서 그의 치적을 살펴보자.
<정조실록> 정조 17년 계축(1793) 6월 14일(을해)
영남 암행 어사 이상황(李相璜)이 복명하고 서계를 올리니, <중략> 지례 현감 이채(李采)는 환곡 정사를 정밀히 하고 진휼을 널리 폄으로써 실적이 크게 드러났다 하여 특별히 통정 대부의 품계에 발탁시켜 선산 부사로 삼았으며 <하략>
만만치 않은 집안 출신인데 내외의 평판도 훌륭하다. 그런 인물이 봉황대를 한폭의 산수화처럼 묘사한다.
次鳳凰臺板上韻
지례현감 이채(李采,1745~1820)
好是金陵九峯山(호시금릉구봉산) 아름답구나. 금릉의 구봉산이여.
層欄圜似八稜環(층난환사팔릉환) 층층이 두른 난간 팔각을 두른 듯
丹靑倒瀾秋潭裡(단청도란추담리) 가을 연못 물결 속엔 단청이 일렁이고
蒼翠平臨晚嶂間(창취평림만장간) 들판의 물총새는 저녁 산으로 날아가네.
萬古名臺還在目(만고명대환재목) 만고에 이름난 봉황대 눈으로 둘러보니
一時新館併生顏(일시신관병생안) 새로 지은 객관과 아울러 돋보이네.
居隣慣踏蓮花境(거린관답연화경) 이웃에 살며 연꽃 핀 곳 익숙하게 다녔는데
民物同歡太守閒(민물동환태수한) 백성과 만물 기뻐하니 태수는 한가롭네.
壬子 暮秋 三州 李采 題 임자년 저무는 가을에 삼주 이채가 제하다.
*팔릉(八稜) : 여덟개의 모서리. *민물(民物) : 백성과 물건.
화재로 소실되었던 김산의 시설물들을 모두 재건하고, 9월에는 무사히 낙성식을 마쳤다. 이제 주변 정리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그 한달의 정리 기간동안 이면승은 별봉황대신부를 봉황대에 건다. 화재로 고향이 불타는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며, 먼저 간 친구가 남긴 글을 접하고, 그 글의 내력을 적어 봉황대에 걸어 친구의 영혼을 위로한다. 다행히 이면승이 봉황대에 걸었던 ‘별봉황대신부’의 글이 김산읍지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 끝에 기록했던 그의 소망처럼 연화지와 봉황대는 서사를 이어간다.
臺之毁而有子之夢 臺之成而有子之文, 隨臺之成毁而子之名 將永與之傳矣. 玆用刊揭于壁 因記其事. 是壬子仲冬一日也. 友人 完山 李勉承 識.
대가 무너질 때 자네의 꿈이 있었고, 대가 지어지니 자네의 글이 있으니, 대의 성쇠에 따라 자네의 이름은 영원히 함께 전해질 것이네.
이에 글을 새겨 벽에 걸어 그 일을 기록하네.
임자년(1792년) 중동(11월) 1일 완산인 이면승이 기록하다.
이성순이 김산객관을 중수하고 남은 자재로 봉황대를 다시 세운 것에 대해 부정적 시각도 있었던 것 같다. 객관과 봉황대를 다시 세우고 김산군민의 민심을 위무했던 이 연회에 대해 당시 영남 어사가 치계한 일성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일성록> 정조 16년 임자(1792) 11월 28일(계해)
서유린이 아뢰기를,
“영남 어사의 서계에, <중략>
‘금산 군수(金山郡守) 이성순(李性淳)은 대(臺)를 쌓는 공역이 원망을 불렀고 창곡(倉穀)이 비방을 초래했습니다. 낮부터 술에 취하여 정사를 해치는 일이 많은 데다가 문얼(門孼 서자)이 따라와서 정사에 간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안무(按撫)하는 데에 만약 성심으로 내 뜻을 받들어 펴는 효과가 있었다면 무슨 까닭으로 어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얼음과 눈을 헤치고 보내고 또 보내며, 또 몰래 다녀오게 하여 뒤에 올린 서계와 앞에 올린 서계를 비교하여 반드시 두 말이 어긋나지 않게 된 뒤에야 회계하게 했겠는가. 지금에 와서 그들이 비록 해명하고자 하여도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다한 잘못된 정사에 대해서 지적하여 거론하게만 한 것은 또한 너그럽게 여지를 보여 주어 그들 스스로 일신하는 노력을 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암행 어사의 서계는 도에서 바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경우 대부분 곧바로 감죄하지 않은 전례가 있으니 이번에도 다르게 할 수는 없다. 또 혹여 그들이 능히 깊이 깨달아서 눈에 띄게 정사를 바로잡는다면 어찌 수령을 교체하여 한갓 보내고 맞이하는 폐단만 있는 것보다 낫지 않겠으며, 또 새로 차임하는 수령이 전의 수령보다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다시 더 두고 보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하고,
봉황대를 단순히 유흥을 즐기는 곳으로 바라보는 암행어사의 시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봉황대를 단순히 양반들이 유흥을 즐기는 곳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할까.
‘봉황대에 신이 깃들어 살고 있다’고 인식은 정약광이 지은 ‘별봉황대신부’에 잘 드러난다. 봉황신이 거주하던 곳이 불이 타고, 연이어 계속해서 같이 재난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주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우는 방법은 신이 거처하던 곳을 다시 만들어 그 신이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간절한 백성의 마음을 담아 봉황대를 세우고 백성을 모아놓고 상량문을 읽으며 김산 군민 들에게 공포한다.
봉황대에는 연이은 재해에 대한 백성의 불안감을 덜어내고자하는 목민관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 정신을 뒤이어 오는 목민관들이 계승하도록, 상량문으로 걸어 두고 경계로 삼지 않았을까.
봉황대 상량문 마지막 구절로, 김산군수 이성순을 위한 변명으로 삼는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후에는,
고을이 번화하고 사계절의 재해가 영원히 없게 하소서.
헌이 우뚝하니
여행객들의 지점이 되어 오래 머물게 하고,
생황 소리 아스라하니
풍년의 노래와 어울리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