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은 성경에도 80여회를 등장하는 단어이다. 빵은 성경의 배경이 된 유대인에게는 식생활의 기본이었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어 양식을 거두기에도 넉넉하지 않을 땅에 꽃을 심는 사람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빵’ 혹은 ‘밥’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까? 이때 ‘빵’이나 ‘밥’은 없으면 한시도 살아 갈 수 없는 의식주의 모든 것을 지칭 한다. “ 너 밥은 먹고 다니니?”
우리에게는 ‘빵’이나 ‘밥’에 담긴 애환이 너무나 많다. 굶주림 때문에 극한의 고비를 넘긴 사람들은 무슨 설움 무슨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크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삼면이 바다로서 신으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은 금수강산을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는 반도국가의 특징으로 잦은 외세의 침입이 있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반도국가들은 역사적으로 전쟁이 많이 일어났다. 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는 제국을 확장하다보면 마지막 지역이 되고, 결국은 제국 확장에 힘을 쏟아 부은 세력과 마지막 전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해양에서도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교두보로 삼게 되었으니 전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전쟁은 전쟁을 수행하는 남자들이 많이 죽었음을 의미한다. 농경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센 남자들이 없다는 것은 노동력의 상실을 가져와 소득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열대지방처럼 자생하는 과일이 흔한 것도 아니어서 배가 고플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지정학적으로 가난이 대물림 되는 나라였다.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 이었고 그렇잖아도 먹거리가 부족한 이 땅을 폐허와 누더기의 땅으로 만들었다. 우리들 세대는 그즈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땅에 태어났다. 하얀 이밥을 구경하는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생일과 제사와 추석과 설날이 전부였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6.25 전쟁이 끝난 당시의 사진을 보면 서울 시내 전경 가운데 온전한 건물이라고는 눈을 닦고 찾아 봐도 없다. 가정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사회경제적 난관이 극복되기 까지 배부르게 먹은 기억이 없다. 아침밥으로 꽁보리밥을 먹었다. 물론 타작마당이 끝날 무렵에는 흰 쌀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쌀과 보리쌀을 바꿔 철저하게 춘궁기를 대비했다. 겨울철 점심은 고구마나 배추 뿌리로 주린 배를 채우면 다행이었다, 저녁은 보리쌀을 갈아서 만든 묽은 보리죽을 먹었다. 오죽하면 우리 형제들은 죽 그릇에 얼굴이 비친다고 했다.
그러한 시기에 국민학교를 다니던 나에게는 특별한 추억의 음식이 있다. 그 음식 덕분에 우리의 친구들이 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인구의 절반가량은 굶어 죽거나 병사하지 않았을까? 어설프게 혼자 추측하여 본다. 미국의 주요 원조 식품은 밀가루와 우유 가루와 옥수수 가루였다. 밀가루나 옥수수 가루 포대 겉면에는 커다란 손을 맞잡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에게 특별한 음식이라는 것은 옥수수 가루와 우유 가루를 반죽하여 만든 빵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강냉이 빵’이라고 불렀다. 강냉이 빵으로 급식을 받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처음에는 옥수수 가루만으로 죽을 끓여서 주다가 죽 그릇을 가져오지 않는 친구들이 많고 뜨거운 죽 그릇을 엎지르는 경우가 종종 생겨났다. 우유 가루 또한 끓여서 주었는데 우유 가루를 끓인 것을 난생 처음으로 한 그릇씩 먹은 우리들은 먹기가 바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이 급했던 친구들 가운데는 바지에다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남학생들은 교실 뒤편에 있던 친구네 밭으로 달려가서 볼일을 봤다. 그런 일이 잦자 여학생들은 아예 먹지 않거나 주저 않아 엉엉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리하여 우유 가루는 용기를 가져와서 받아가도록 하였다. 우리들이 받아 온 우유 가루를 어머니는 추발 같은 그릇에 담아 밥하던 솥에 넣어 익혀서 간식으로 주었다. 우유 기루는 굳어져 딱딱하기가 돌덩이 같았다. 그것을 깨어 먹느라 이빨을 다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유여곡절 끝에 탄생한 것이 ‘강냉이 빵’ 이었다. 옥수수 가루와 우유 가루를 일정 비율로 섞어 채반 등에 올려서 증기로 쩌 내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니 뜨거운 죽 그릇에 델 염려도 설사할 걱정도 없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가져온 용기에 두부모처럼 생긴 강냉이 빵을 하나씩 나눠 주기만 하면 되었다. 급식 실에는 졸업한 큰 누나 친구가 근무를 하였다. 누나는 우윳빛 살결에 치렁치렁 하게 머리를 길러 예쁘기도 하였지만 마음씨는 더욱 예뻤다. 천사 같은 누나였다. 늘 배가 고파보였던 나에게 조금이라도 큰 놈으로 골라서 주면서 말줄임표 미소를 지어 보여 주었다. 우유 맛이 감도는 강냉이 빵은 내가 먹은 빵 가운데 가장 맛있는 빵이었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