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제19장 괴이한 추격(追擊) [1] "누님, 어딜 그리 바쁘게 가시오?" 등조민은 벌떡 일어나 고혜원을 불러 세웠다. 그는 넓은 바위에 혼자 앉아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길가로부터 이십여 장 떨어진 그 바위가 바로 주막의 영업장소였다 . 등(燈)이 걸려 있는 소나무 주위마다 행락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 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고혜원은 머뭇거렸다. '장구안, 약은 놈 같으니... 사람들 틈에 끼여 도망갔구나.’ 이 지역은 장강이 심한 굴곡을 이루어 배를 타고 도주하지 않는 한 육로로 가는 길은 오직 이 길뿐이었다. 그러나 장구안은 남부지방 지리에 익숙하여 그녀가 밤중에 추적하 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녀는 등조민과 술을 마실 기분도 아 니었다. 문득 그녀는 그가 나타난 것이 궁금했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을까? 누구를 뒤쫓는 냄 새가 나는데.......’ 등조민은 껄껄 웃고는 다시 소리쳤다. "아니, 자네가? 역시 세상이 좁기는 좁아." 고혜원은 그가 누구를 부르는지 알아차렸다 "청풍까지......." 이제 일부러 피하듯 지나칠 경우 어색하게 보일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바위로 훌쩍 뛰어올라 도로를 등진 채 자리를 잡았다. 유청풍은 깜짝 놀랐다. "아니 웬일들이야?" 그는 등조민을 바라보다 비로소 고혜원을 발견한 것이었다. 등조민이 손을 흔들며 반기는 반면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유청풍은 등조민과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 부담 없이 다가갔다. 푹신한 멍석이 깔린 바위 위에 동그란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 나 상에는 산채 안주와 소주(燒酒) 한 병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유청풍과 등조민은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어서 오게나." "신선이 따로 없군." 등조민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 이리로......." 세 사람은 삼각형을 이룬 채 술상에 둘러앉았다. 눈치 빠른 주모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잽싸게 새로 술상을 보아왔 다. "나들이하는 철이라 술이 금세 떨어져요. 특히 쌀로 만든 소주는 귀한 손님께만 드리는 거예요." 소주(燒酒)는 원나라 때 개발된 증류주였다. 주모의 말처럼 쌀이 귀해 대부분 옥수수나 조로 술을 빚어 쌀로 만 든 소주는 금값이었다. 주모는 술 세 병을 생색내듯 내려놓은 후 처 음에 차린 술상을 치워주었다. 고혜원은 가끔씩 유청풍을 바라보며 혼자서 술을 마셨다. "캬아......." 흑림에서 헤어진 이후 그를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심은 제 삼자 앞에서 마음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다. 등조민은 두 사람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모처럼 넉살을 떨었다. "나도 객지 생활을 좀 하려는 걸세." "멋있게 변하는군." 아무래도 우연한 만남 같지 않아 유청풍은 태연히 대꾸했다. 등조민은 술잔을 부딪친 후 자세를 가다듬었다. "고맙네." 유청풍은 의혹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등조민은 고혜원의 잔에 술을 따르며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자네가 없었다면 내가 어찌 누님과 술상을 마주할 수 있겠는가?" 고혜원은 아미를 심하게 찌푸렸다. 한 번만 더 그녀 자신을 입에 올리면 술상을 박살 낼 눈치였다. 유청풍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은 곳에 자리 잡았군." "도법을 수련하다 목이 컬컬해서 한잔 하던 중일세." 그는 아버지가 정해단의 수뇌라는 사실을 안 이후 심란한 마음을 잊기 위해 장강에서 도법을 연마해왔었다. 거센 물살을 잘라내는 과 정에서 그는 나름대로 무인의 길을 가리라고 결심했다. 어쨌든 자기가 수련한 방법을 밝히는 것은 무인들이 꺼리는 금기였 다. 이를 공공연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진솔함과 아울러 열심히 수련하려는 의욕이 엿보였다. 거의 자작 술을 마시던 고혜원도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그녀 역시 그가 지닌 소탈한 인간성과 훌륭한 면면을 인정하고 있었다. 유청풍은 빙그레 웃었다. "사부를 닮아가나?" 그는 등조민과 위강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그는 위강이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는 점을 잊지 않았다. 등조민은 두터운 도를 들어 보이며 겸연쩍어했다. "허어, 이거 부끄럽네. 자네가 단검으로 정해단과 살루문을 응징할 동안 나는 무기를 벗삼아 술만 마셨으니......." 지금 그가 휴대한 것은 도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가문의 상징인 창을 등에 비껴 매고 있었다. 얼추 석 자 꼬챙 이처럼 보이는 그것이 아홉 자로 변하는 이른바 색혼비창(索魂飛槍) 이라는 무서운 병기였다. 천축산 묵철과 청은(靑銀)을 합금하여 만든 그 창은 강철 방패 열 개를 뚫어버리는 성능을 지녔다. 그 창으로 펼친 비룡해 삼초식을 제 대로 당해낸 사람이 별로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등조민은 주관이 뚜렷한 협객 기질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과연 도법을 연구하면서 술만 마셨을까? 유청풍은 의문을 담아둔 채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던 정신이 중요하지." 등조민은 정색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목표는 수리마제의 전인과 겨루어 승리한 다음 혜원 누님과 결 혼하는 걸세." 그의 눈빛은 신념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 같으면 빽 소리를 질러야 할 고혜원은 이상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기득권을 얻은 사람처럼 느긋해 보였다. 등조민의 심성을 잘 아는 유청풍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해. 자네야말로 진정한 무인이야." "천만에. 나는 자네의 초연함이 부러워." 두 사람의 말은 결코 공치사가 아니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등조민은 위강이라는 우직한 사부에게 무공 을 배워 늘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반면 일찍이 사곡환자들을 돌보았던 유청풍은 과묵한 선친과 수리 마제 단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그는 천락무예단에서 오십대 고참들과 지내는 동안 관조하는 습성이 들었다. 타인들이 그를 잔잔한 망망대해처럼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되자 등조민은 정색을 하며 질문을 던졌다. "수리마제를 자처하면서 왜 혈광마검을 사용하지 않는가? 설마 마 검각을 고수들이 지켜서 그럴 리야 없겠지?" 기실 유청풍의 신분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다같이 느 끼고 있었다. 의문이 깊어질수록 점차 공포로 변하기 때문에 무림은 긴장하는 것이었다. 혈광마검을 도외시한 채 고수들을 간단히 처치하 는 깔끔한 솜씨, 그것은 정녕 신비였다. 등조민은 그런 유청풍이 대가를 받는 살수가 아님을 익히 알고 있 었다. 그러하기에 의구심이 증폭되었으며 그래서 만나고 싶었던 것이 다. 유청풍은 등조민이 흘린 말을 깨달았다. '진심을 말하면서도 조심하라는 암시를 준 것인데......?’ 하지만 그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사연이 깊은 검은 함부로 손댈 수가 없네." 왜 단궐이 혈광마검을 방치한 채 거옹이라는 신분으로 활동했겠는 가? 더구나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하고많은 말 가운데 그는 무엇 때 문에 냉정을 당부한 것일까? 거기에는 꼭 풀어야 할 중대한 비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유청풍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고심하는 중이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등조 민 역시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멀뚱거렸다. 그러나 고혜원의 심정은 전혀 달랐다. 흑림에서 소중한 곳을 치료받은 이후 그녀는 혈광마검보다 그가 자 신을 얼마만큼 생각하는지 그 점이 더 알고 싶어졌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은 사랑의 씨앗이 아닐까? 그녀는 다정하게 유청풍이 마셔 버린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처음 따르니까 떨려." 무슨 말이든지 들어보고 싶었건만 유청풍은 묵묵히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나서 그도 그녀가 비운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러한 대작은 흔히 말하는 주법일 뿐 왠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 았다. 세 사람은 잠시 침묵을 유지한 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연거푸 술을 마셨다. 그들 모두 주량이 만만치 않아 벌써 술병이 바닥난 상 태였다. 이윽고 등조민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누님도 저처럼 일방적으로 접근하는 것 아니오? 그런 의미에서 저 도 얼마든지 자격이 있군요." 정말 그의 태도는 시원시원했다. 고혜원은 싸늘한 표정으로 잔을 비웠다. "크으, 너는 이미 자격을 상실했어." 등조민은 때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녀를 응시했다. "더 갖추라는 말이군요." 고혜원이 침묵을 지키자 그는 유청풍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사금환을 만날 참이었나? 어디로 가는 모양이던데......?" 언뜻 그 답지 않게 불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예상 외로 그녀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시선 은 등조민이 지니고 있는 병기에 고정되었다. '이상한 말을 하거나 과시하듯 무기를 휴대할 녀석이 아니잖아? 혹 행적을 은폐하려는 짓이 아닐까?’ 그때 유청풍의 덤덤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맞았어." 순간 고혜원은 벌떡 일어나 주막을 향해 걸어갔다. "먼저 갈게. 술값은 내가 계산하겠어." 그녀는 연적인 엄희채에 관해 얘기를 멋쩍게 듣는 것보다 차라리 장구안을 추적할 작정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무심한 사내에 대하여 반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등조민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같이 가시지요. 제가 이미 값을 치렀습니다." 고혜원은 힐끗 돌아보는 것 같더니 그새 보이지 않았다. 등조민은 유청풍에게 재빨리 전음을 날렸다. "혈광마검이 가짜로 바뀔 것이네." 유청풍은 비로소 등조민의 의도를 확실히 알아 차렸다. 하지만 그는 혈광마검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전광신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단순히 검만을 보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희채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살수인 그녀가 행적을 노출시킨 점이 못내 의아스러웠다. [2] 몰혼산(歿魂山)은 동서남북 각 방향마다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동쪽 봉우리는 험한 적벽(赤壁)에서 멈췄으며 서편 봉우리는 악주 나루터 코앞에까지 뻗어나갔다. 몇십 년 전만 해도 그 산은 사금(砂金)을 캐던 광산이었다. 그러나 원인 모를 매몰사고가 잇따라 발생하여 수많은 생명이 죽자 나라에서 폐광시킨 다음 민가에 불하(拂下)했다. 하지만 이곳을 사서 별장을 짓고 살던 어느 부호도 이상하게 하는 일 마다 실패를 거듭하여 결국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다. 이러한 소문은 쉬쉬하는 가운데 알게 모르게 퍼져나갔다. 그 후 사람들은 이곳에 귀기가 서렸다며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았 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몰혼산 중턱에 수십 채의 건물이 자리잡았 다. 웅장한 삼층 전각 한 채와 그 좌우에 수용소인 듯 기다란 단층 막 사가 보였다. 그 세 개의 건물 십여 리 주위에는 원두막처럼 생긴 초 소형 전각들이 빙 둘러 지어져 있었다. 이곳이 이름하여 은하자비소(銀河慈悲所)로 역질 환자와 운신이 어 려운 불구자를 수용하는 곳이었다. 와호장주 고헌부는 어머니 장대부인의 뜻을 존중해 개봉의 막연산 사곡에 있던 환자들을 이리로 격리시켜 놓았다. 그는 행여 정해단의 손길이 미칠까 염려하여 고수를 은하자비소 소장(所長)으로 임명했다 . 소장은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유명한 쌍두사목(雙頭蛇目) 교동악(喬瞳岳)이었다. 그는 은하자비소 삼층 건물에서 기거했다. 여명이 다가 올 무렵 그곳에 허겁지겁 날아드는 인영이 있었다. 인영은 곧바로 삼층으로 내달렸다. "헉헉... 청풍... 그 놈이 그리 무서울 줄이야." 그는 회랑 중간 방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문을 세 번 두드렸 다. 이내 실내에서 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족삼이냐?" "예!" "들어와라." 장구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기... 여기가 저 교동악의 천국이로군. 전염 안된 계집아이들과 재미나 보고.......’ 그는 실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교동악은 반지르르한 독두(禿頭)에 새파란 안광을 번뜩이는 오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그는 우수로 골패를 맞춰 보는가하면 좌수로는 열 심히 사발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알몸의 소녀가 걸터앉아 연신 가쁜 숨을 내쉬며 엉덩이를 상하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는 침상에도 두 명의 소녀가 알몸으로 누워있었다. 세 소녀는 모두 이제 겨우 십 오륙 세밖에 안돼 보이는 데다 얼굴 과 몸매 또한 제법 아름다웠다. 한데 소녀들은 음약에 중독 되었는지 눈빛이 몽롱할뿐더러 도무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달깍! 교동악은 엎었던 사발을 들췄다. 그 속에는 주사위 세 개가 들어있었다. 주사위의 숫자는 한결같이 낮았다. "학!" 마침 그의 무릎 위에서 요분질을 치던 소녀는 절정을 맞은 듯 신음 과 함께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교동악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 를 냅다 침상으로 집어 던졌다. 아마도 그가 원하는 숫자가 잘 안나온 모양이었다. "악!" 소녀는 비명을 질렀으나 이내 야릇한 신음을 발하며 다른 소녀들과 뒤엉켰다. 세 명의 소녀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도 없이 서로의 몸 을 애무하며 연신 신음을 질러댔다. 장구안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쌍두사목님, 큰일 났습니다!" 쌍두사목 교동악은 몸서리칠 듯한 안광을 번뜩였다. "목청 좀 가다듬어." 순간 실내는 까마귀가 우는 듯한 여운으로 말미암아 소름끼치는 음 산함이 감돌았다. 찔끔 놀란 장구안은 차근차근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예, 저, 청풍이 곧 들이닥칠 겁니다." 교동악은 눈을 부라렸다. "그 녀석이 여기를 어떻게 알아?" "정해단의 오합척이 다른 뜻을 품고 회유하다가 죽었는데......." "시끄러워! 네가 오합척을 끌어 들였지?" 오싹한 눈빛과 마주친 장구안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그게 실은......." 교동악은 시선을 옮겨 장구안의 이마에 맺힌 땀을 힐끗 응시하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장구안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무슨... 뜻인지......?" 교동악은 냉정한 음성으로 딱 잘랐다. "오합척에게 주려던 것." 짧은 순간 장구안의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염병할 인간! 내 돈을 아예 노름밑천으로 삼으려 드네.’ 하지만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교동악은 그 떨림을 보지 못했다. 장구안은 품 속과 허리춤에서 진주 열 개를 꺼내 그의 손에 올려놓 았다. "저... 여기." 그런데 교동악은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자식, 껍질을 확 벗길까?" 그는 당장 살초를 전개할 눈치였다. 기겁을 한 장구안은 재빨리 둘 러댔다. "아, 워, 워낙 정신이 없어서... 깜빡 했습니다." 그는 우측 바짓가랑이에서 다시 진주 세 개를 더 꺼내 교동악의 손 에 얹어놓았다. 비로소 교동악은 씨익 웃었다. "나머지는 활동비로 써." 장구안은 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이크.......’ 그의 좌측 바짓가랑이에는 지금 진주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쉰 후 얼른 허리를 굽혔다. "예, 뭐... 그거야......." 끼익! 묘한 소리가 들렸다. 장구안이 고개를 들자 침상이 뒤집어지며 비 밀통로가 열리고 있었다. 이미 소녀들은 침상 아래로 떨어졌는지 오 간 데가 없었다. 교동악은 고갯짓을 했다. "가 봐." 장구안은 얼른 밑으로 사라졌다. "예, 그럼. 저는 이만......." 그가 몇 개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동안 침상은 원래대로 돌아왔 다. 교동악은 진주를 보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거참, 저 녀석을 툭 건드리면 보석이 와르르 쏟아지니......?" 잠시 희희낙락하던 그는 흠칫 놀랐다. 어느새 문 앞에 고혜원이 안색을 싸늘하게 굳힌 채 서있는 것이 아 닌가? 교동악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가씨?" 그녀는 차디찬 음성을 흘렸다. "장구안은 어디 갔지?" 교동악은 딱 잡아뗐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혜원은 시선을 벽 밑에 고 정시켰다. 벽과 바닥이 교차하는 부분에 신발에서 떨어진 듯한 흙이 약간 묻어 있었다. 교동악은 지체 없이 벽을 두드렸다. 퉁, 퉁, 퉁....... 세 번의 소리가 울리자 벽이 서서히 갈라졌다. 놀랍게도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은 혁련달이었다. 그는 놀랍다는 듯 반가운 음성을 발했다. "아니, 이게 누군가? 절세미인이 웬일로 여기를 오셨나?" 그는 이곳을 설계했으며 기금을 관리하는 책임자를 겸하고 있었다. 고혜원은 마지못해 목례를 하면서도 여전히 쌀쌀한 태도를 취했다. 그녀는 동생의 사부인 혁련달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교동악은 혀를 차며 말했다. "혁선배, 제발 신발 좀 닦고 다니시오." 혁련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고혜원은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지분 냄새? 도대체 할머니는 왜 이런 자들을 고용했을까?’ 그녀는 은하자비소를 지을 당시 얼추 계획만 들었을 뿐 운영에 일 체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증거도 없이 소란을 피우기도 딱한 노릇이었다. 또 이 자들은 호락호락하게 마각을 드러낼 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밖으로 나갔다. '계속 탐지하면 언젠가 드러나겠지.’ 혁련달과 교동악은 동시에 소리쳤다. "아가씨, 안녕히 가십시오." "또 오게나."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음험한 눈짓을 나누었다. [3] 장구안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캄캄한 막다른 지하 통로까지 내려 갔다. 그곳에서 갈곤태를 비롯하여 쌍곰보 형제 팽고와 팽소가 심각 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구안은 그들을 무시한 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갈곤태는 그의 뒤에다 대고 비웃음을 던졌다. '자식, 분위기 파악도 못해......?’ 팽고와 팽소도 도리질을 하며 눈짓을 나누었다. '아부나 할 줄 알지. 틀렸어.’ 장구안은 문 하나를 더 열고 들어가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저, 도련님......." 청죽(靑竹) 발이 쳐져 있는 저편에 옷을 벗은 듯한 인영이 어른거 리고 있었다. 인영의 밑에는 긴 머리칼을 늘어트린 섬세한 체격의 그림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지를 뻗고 있었다 막 방사(房事)를 끝낸 인영은 다름 아닌 고일두였다. 그는 전혀 억 양이 없는 음성을 발했다. "결과는?" 의외로 담담한 태도에 장구안은 겁을 집어먹고 얼른 둘러댔다. "오합척이 당했습니다. 철저히 대비하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는데 얕보다가 그만......." 고일두는 언제부터인가 변한 황금색의 안광(眼光)을 번뜩이며 마치 자신이 직접 본 것처럼 물었다. "누님이 그곳에 있었나?" 장구안은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계속 거짓말로 보고했다. "아, 아닙니다. 이리 오는 도중에 뒤쫓아 오셔서......." 고일두는 폐부를 도려낼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미행 당한 것은 아닐 테지?" 장구안은 등골이 시릴 정도로 한기를 느꼈다. "저... 사곡환자들 환경을 살필 겸 둘러보시다가 미심쩍어 그러셨 을 겁니다." "나가서 누님을 적당히 따돌려." "예." 돌아서는 순간 장구안은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으으... 비정한 놈들, 한 번만 실수하면 완전히 제껴 놓는구나.’ 지금 고일두의 태도는 예전과 달리 노련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야단치지도 않았으며 마치 실패를 예상한 사람처럼 조용히 넘 긴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그 만큼 무서운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증거 였다. 장구안이 떠난 후 그는 장검을 메고 나와 갈곤태에게 지시했다. "가자." "예." 갈곤태를 비롯하여 쌍곰보 형제 팽고와 팽소는 고일두를 따라 어디 론가 사라졌다. 암로를 빠져나간 장구안은 일부러 고혜원의 눈에 띈 다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산과 하천을 넘어갔다. 강남 지리에 훤한 그가 그녀 를 따돌리는 것쯤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다. "그냥 갈 수 없잖아?" 지금 그는 환락가로 유명한 화정(花情) 거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장강을 따라 고급 주루가 연이어 늘어선 높은 장원이 보이고 대로 를 지나 눈에 띄는 낮은 건물들은 일반 주점이다. 비록 화정거리가 항주나 악주에 비하여 격이 떨어지지만 호광성(湖 廣省)의 성도인 무창부(武昌府)가 코앞에 있어서 그 규모가 작지 않 았다. 강 건너 멀리 가물거리는 넓은 불빛이 바로 무창이었다. 이맘 때가 되면 무창의 한량과 고관부호들은 배를 타고 와서 화정 거리로 몰려들었다. 화정 거리 우측 끝 부분 판자촌이 빽빽하게 들어선 동쪽 도로가 소 위 홍등가로 불리는 창녀촌 축정리(蓄精里)였다. 이곳은 주머니가 헐거운 사내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낡은 판잣집들이 거미줄처럼 다닥다닥 엉킨 골목마다 역겨운 냄새 가 번져 나왔다. 흐릿한 홍등 아래 물간 창녀들은 속살이 비치는 옷 을 입은 채 한철 맞은 메뚜기 떼 마냥 바글거렸다. 일단 여기로 들어서면 아무 계집이나 붙들고 기를 한번 빼야 무사 히 통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면 죽도록 얻어맞던가 옷이 찢어질 정도로 봉변을 당한 후 얼간이처럼 엉금엉금 기어가야만 한다. 또한 여기서 사람을 찾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 웠다. 따라서 아무리 배짱 좋은 고혜원일지라도 처녀 몸으로 이곳까 지 추적할 리 만무했다. 아마 그녀는 나루터 부근에서 잠복하다가 지치면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장구안은 일부러 여기를 찾아온 것이었다. 사내를 봉으로 아는 창녀들이건만 장구안을 슬슬 피하는 눈치였다. 그는 중간쯤 가다가 늙은 창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쌍곰보 형제 여기 안 왔는가? 덩치 좀 큰 애들 말이야." 아편 곰방대를 빨아대던 창녀는 그의 위아래를 힐끔거렸다. '쳇! 옴 붙었어. 하필 오랏줄이야?’ 오랏줄이란 관아에서 나온 자들을 일컫는 이들만의 은어였다. 그녀도 다른 창녀들처럼 그의 행동거지를 보고 관리로 단정지었다. 관아에서 나온 자들이 가끔 단속 명목으로 돈을 뜯거나 공짜로 몸 을 풀고 가므로 창녀들은 재수 없다고 여겨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 다. 그러나 장구안의 가락이 제법 고위직인 것 같아 창녀는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하나 와호장의 쌍곰보 형제 팽고와 팽소를 창녀인 그녀 가 알 리 만무했다. "그런 쌍판들은 본 적이 없는데......?" 이곳 축정리 창녀들은 닳고닳은 인생이라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무 조건 반말로 트는 것이 상례였다. 장구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노련하게 물었다. "이 근방에 가게가 어디 있나?" 그의 말투는 영락없이 탐문조사를 나온 관리 냄새를 풍겼다. 창녀는 아편 곰방대 끝으로 우측 막다른 골목을 가리켰다. "저기......." 장구안은 약간 음성을 높여 협조를 구하는 척했다. "녀석들을 보면 저 가게에다 알려." 그는 마치 점검 나온 것처럼 눈을 부라린 채 골방 안을 기웃거리며 골목을 유유히 지나갔다. 그때 창녀가 뒤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생각나면 놀러와. 잘해 줄게." 다정한 그 말은 관아에서 불시 점검을 나왔으니 주의하라고 다른 창녀들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따라서 아무도 장구안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판자로 지은 가게를 자세히 살피며 천천히 지나갔다. 가게 안에는 오십대 후반의 여인이 새벽잠을 못 이겨 끄덕끄덕 졸 고 있었다. 이곳 가게들은 도난을 막고자 뒷문이 거의 없으며 기껏 방 한칸이 딸려 있을 뿐이었다. 가게를 돌아간 순간 예상대로 그 방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장구안은 주위를 쓱 둘러 본 다음 창문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퍽! 하는 음향이 터지면서 창문 구석에 조그만 구멍이 뚫렸다. 장구안은 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여지가 없군.’ 그는 손을 쑤셔 넣어 창문을 가만히 열어 제낀 후 바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창 밖에서 이미 보았듯 십 오륙 세쯤 된 소녀가 자고 있 었다. 보나마나 그녀는 이 가겟집 딸일 것이다. 이곳 남자들은 십여 세만 되면 성내로 돈벌이 나가므로 사지를 못 쓰는 불구자가 아닌 이상 거의 집에 있지 않았다. 장구안은 창문을 닫은 다음 소녀의 아혈을 짚어놓았다. 연후 살며 시 방문을 열고 한 가닥 지풍을 쏘아보냈다. 졸던 여인은 순간 숨이 끊어진 채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장구안은 재빨리 가게문을 닫아걸었다. 방으로 들어 온 그는 이불을 걷어내며 음험하게 웃었다. "흐흣! 간만에 몸 좀 풀어야겠어." 그는 익숙한 솜씨로 소녀의 옷을 벗겨냈다. 소녀의 흰 나신이 드러나자마자 그도 허리띠를 풀어 바지를 내렸다 . 이미 그의 흉물은 희생자를 원하고 있었다. "......!" 육중한 무게가 짓누르는 순간 놀란 소녀가 눈을 치켜 떴다. 하지만 소리지를 틈도 없이 장구안의 입술이 그녀의 작은 입술을 덮어버렸다. 그는 버둥대는 소녀를 찍어누른 채 감각이 예민한 부분 만을 더듬었다. 주위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 성정이 그러한지 반항하던 소녀의 나신은 금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소녀의 다리가 힘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구안은 하체에 힘을 주며 들이밀었다. 그의 입에서는 분성이 터 져나왔다. "두고봐라! 언젠가 네 년을 이렇게......!" 그는 마치 고혜원에게 분풀이하듯 무지막지하게 진입했다. 여린 속 살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아픔에 소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우욱......!’ 하나 비명은 입 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소녀의 속살 깊이 파고든 장구안은 무지막지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의 가쁜 숨소리와 함께 방바닥이 요란하게 울렸다. 소녀는 그의 숨막히는 공격을 견디지 못해 그의 등을 힘껏 끌어안 은 채 바들바들 떨어댔다. 방 안에는 무참하게 짓밟힌 소녀의 첫 경 험의 혈향(血香)이 가득했다. 잠시 후 소녀는 자세가 바뀌었다. 이마를 방바닥에 박은 채 엉덩이 가 한껏 쳐들린 자세였다. 장구안은 뒤에서 소녀의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소녀는 고통과 쾌감이 교차하는지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한 순간 격렬하게 움직이던 장구안은 허리를 반듯이 폈다. "헉!" 정점에 오른 그는 강철 의수를 슬며시 뻗었다. "일찍 가르쳐 준 내게 감사해라. 흐흐흐......." 의수에 목이 졸린 소녀는 사지를 버둥대었으나 이내 힘없이 늘어지 고 말았다. [4] 교동악은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방술 몇 가지를 가르쳐 주더니 감히 날 속이려고?" 혁련달은 그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똑똑한 친구야." "무슨 말이오?" 혁련달은 엄지를 척 꼽았다. "장구안을 얘기하는 것 아닌가? 재물이야 관직에 있을 때 잔뜩 모 아 두었겠다 윗전의 신임만 얻으면 훨훨 날걸?" 교동악은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한 발만 나보다 앞섰다가는 칵 씹어버릴 거요. 거용관 시절부터 꽉 잡고 있었으니까." 서북의 관문인 거용관은 장구안이 순무어사를 지내던 관아였다. 당 시 그가 지역 부녀자들을 범하고 막북으로 팔아 넘길 때 교동악이 운 송과 안전 그리고 자금을 관리해 준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교동악은 누구보다 장구안의 심리를 훤히 꿰고 있었다 . 혁련달은 교동악이 들고 있는 진주를 힐끗 훔쳐보았다. "자네는 가능해. 가만히 앉아서 우려내는 솜씨를 보면 말이야." 교동악은 당연하다는 듯 진주를 흔들어 보였다. "형님, 이거야 목숨을 살려준 대가 아니오?" 그와 환갑인 혁련달은 다섯 살 차이라 의형제를 맺지 않았지만 호 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교동악은 기분 좋게 진주를 품 속에 집어넣었 다. 혁련달은 천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에라, 몇 달간 관외(關外)나 다녀올까?" 이때 대각선으로 뻗어나간 그의 시선은 교동악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마를 잔뜩 구긴 교동악은 아까운 표정을 지었다. '염병할, 번번이.......’ 조금 전 혁련달이 던진 말은 진주를 나눠 갖자는 뜻이었다. 그가 가끔씩 자리를 대신 지켜줘야 교동악은 여자만큼 좋아하는 노 름에 마음껏 전념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한데 몇 달 동안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교동악은 자비소 안에서 죄 수처럼 지내야 하며 먼젓번 날린 돈 때문에 식욕마저 잃을 것이다. 그는 마지못해 진주 여섯 개를 건네주었다. "옛수." 진주를 잡아채듯 움켜쥔 혁련달의 음성이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올 때가 됐지? 잘 해." 교동악은 침상 밑에서 긴 쇠꼬챙이 두 개를 꺼내들었다. '오랜만에 사형두필(蛇形頭筆)을 써먹는군.’ 뱀처럼 생긴 그 시퍼런 병기가 바로 그의 명성을 높여준 사형두필 이었다. 찌를 때는 창보다 예리하지만 긁을 때는 뱀의 비늘 같은 것 이 돋아나 맹독을 퍼트리는 특이한 무기였다. 교동악은 사형두필을 악귀같이 사용하여 오늘 날 쌍두사목이라는 외호로 불리는 것이다. 그는 기름걸레로 애병(愛兵)을 정성껏 닦아냈다. 두 자루를 모두 기름칠한 그는 느닷없이 창문을 향해 강기를 발출 했다. "나와라!" 동시에 두 갈래로 갈라진 밧줄이 사형두필을 휘감아 당겼다. 그러나 기름칠한 사형두필은 그대로 쑥 빠져버렸다. 이때 나머지 한 갈래 밧줄이 교동악의 머리를 내리쳤다. 교동악은 벌써 예상한 듯 재빨리 상체를 낮추었다. "어딜!" 쐐애액! 일순 둥그런 환들이 금색 광채를 번쩍이며 다가왔다. 교동악은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사형두필로 금환들을 쳐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번의 파향음이 터져 나왔다. 그 사이에 시 커먼 인영이 수평으로 날아들었다. "키익! 원수, 오늘이 네 제삿날인 줄 알아라!" 괴이한 웃음소리를 낸 그는 야혼승 노방이었다. 노방은 두 갈래 야혼승으로 교동악의 상하를 쓸어버렸다. 몸이 세 조각날 찰나 교동악은 신형을 빙그르르 돌려 가볍게 피했다. 어느새 나타난 엄희채가 그의 머리와 가슴을 향해 비사금환을 날렸 다. "살루문의 개야! 받아라." 교동악은 마치 춤을 추듯 사형두필을 휘두르며 야유를 보냈다. "엄희채, 아주 잘 익었구나. 크흐흐흐......." 사형두필과 충돌한 비사금환들은 팽이처럼 회전하며 다시 교동악을 목표로 맹렬히 쏘아갔다. 교동악은 사형두필로 원을 그린 다음 이리저리 신형을 굴렸다. 한순간 요란한 굉음을 내며 비사금환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아아악! 사방에서 십여 명이 도검을 번뜩이며 노방과 엄희채를 후려댔다. 그때 야혼승의 다른 한쪽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묘하게 밧줄은 도검을 휘감은 후 흑영들을 후려쳤다. "끄아아악......!" 자신의 검에 찔린 검수들은 모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노방이 놀 라 소리쳤다. "엇, 이 자가 어디로 사라졌지?" 기름칠한 철벽 방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을 뿐 교동악은 어느새 보 이지 않았다. 노방과 엄희채가 기름이 칠해진 석 자 두께의 강판을 밀고 있을 때 그들 사이로 또 다른 강철 벽이 내려오고 있었다. 동시에 상하좌우 에서 여덟 개의 창이 화살처럼 튀어 나왔다. 창과 창 사이로 피하는 와중에 강철 벽이 가로막혀 노방과 엄희채 는 순식간에 격리되고 말았다. 그들은 서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노방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교동악, 이 약삭빠른 놈아! 비겁하게 기관을 작동하다니......." 그가 흥분해서 소리치는 동안 실내 공기는 점점 희박해졌다. 슉슉슉! 또한 여덟 자루 창은 위치를 바꾸며 쉴새없이 들락거렸다. 바쁘게 피하던 노방은 마침내 어깨와 허벅지를 찔린 후 쓰러지고 말았다. "윽......." 그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엄희채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기이이잉! 그녀가 갇힌 방은 굉음과 함께 둥근 공처럼 변하더니 빠르게 회전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방이 무서운 굉음을 동반하며 수시로 방향을 바꿔 머리 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원심력에 의해 급속히 진기를 빼앗긴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 철컥! 철컥! 그녀가 아찔함을 느끼는 순간 내 개의 족쇄가 손과 발을 채워 버렸 다. 돌연 뿌연 연기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몽혼산을 뿌려... 흑......." 그녀는 족쇄에 수족이 묶인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노방과 그녀가 무공이 정심해도 장시간 동안 휘날리는 독한 수면제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혁련달과 교동악은 철로 만든 방 밖에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까 내가 한 말 벌써 잊었나?" 혁련달이 능글맞게 물었다. 교동악은 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말이오?" 그는 엄희채가 갇힌 방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혁련달의 입에서 짤막한 단어가 튀어 나왔다. "관외." 그는 비키라며 냉정히 고갯짓을 했다. 교동악은 코가 쭉 빠진 채 돌아서야만 했다. '제기랄, 내가 목숨 걸고 유인했는데.......’ 혁련달은 엄희채가 쓰러져 있는 철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놈 목을 자르고 기다려." "알았수." 교동악은 못내 아쉬운 음성을 토해냈다. 혁련달은 엄희채를 번쩍 안아 든 채 음욕이 가득한 안구를 팽그르 르 굴렸다. '히히히......! 고것 아주 탱탱하네.’ 교동악은 사라지는 그의 뒤에서 약지(藥指)를 치켜세웠다. "제길, 볼품없는 물건으로 꼭 먼저 손본단 말이야."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