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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十九 章 誘惑 쏴아아아아! 폭우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는 강기슭의 넓은 갈대밭이다. 폭우와 어둠으로 뒤덮인 갈대밭 저쪽에서 도망쳐오는 작은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헉!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인영은 바로 남궁진성이었다. 그의 자그마한 체구는 비로 흠뻑 젖어 있었고 희고 뽀얀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 오를 정도로 극도로 지친 남궁진성은 불안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뒤를 쫓는 무리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남궁진성은 내심 안도하며 쇠뭉치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을 힘겹게 떼어놓았다. "어억!"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다. 발을 잘못 디딘 남궁진성이 무릎까지 수렁에 푹 빠지며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허억… 허억!" 남궁진성은 흙탕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치켜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안되겠어, 엄마! 도저히 더 이상은……." 이때 문득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남궁진성은 몹시 긴장하며 귀를 바짝 세웠다. 끼익! 끼익! 그것은 누군가 노를 젓는 소리가 분명했다. 남궁진성은 기다시피 하며 갈대를 헤쳐나갔다. 얼마 정도 앞으로 나가자 멀찌감치 앞쪽에서 갈대 숲을 헤치며 막 강 쪽으로 나가려는 나룻배가 보였다. 나룻배에는 기다란 장대로 배를 젓고 잇는 죽립을 쓴 도롱이 차림의 사공과 같은 복장인 세 명의 사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남궁진성은 얼굴에 화색이 돌며 몹시 반색을 했다. '…… 배다……!' 어디에서 갑자기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남궁진성은 막 떠나려는 배를 향해 냅다 달음박질치며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남궁진성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사공이 장대질을 멈추자 배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철퍽! 철퍽! 남궁진성은 배를 향해 필사적으로 뛰어갔다. "저를 좀 태워 주세요! 나쁜 자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남궁진성과 배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강만 건너게 해주신다면 은혜는 절대로……." 문득 기쁨에 들떠 있던 남궁진성은 흠칫하며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든 채 자신을 향해 음산하게 웃고 있는 사공과 세 명의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은 사공도, 또한 어부도 아니었다. 바로 음혼사귀라 불리는 남극벌의 추살대였던 것이다. "다, 당신들은……?" 남궁진성은 창백하게 질리며 말을 더듬거렸다. 음혼사귀는 징그럽게 웃으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어서 오너라, 아이야!" "흐흐흐……. 어린놈이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잘도 빠져 나가기에 낚싯밥을 한번 던져봤더니 제대로 걸려들었군그래!" 그들의 음산한 모습에서 남궁진성은 일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절감했다. 그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속았어! 치잇!' 남궁진성은 뒤로 홱 돌아서 냅다 뛰었다. 그러나 그런 남궁진성을 그냥 두고 볼 리 없는 음혼사귀였다. 일귀가 노로 사용하던 장대를 달아나는 남궁진성을 향해 무섭게 후려쳤다. 쉬이익!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이젠 끝장이다, 어린놈!" 쾅! 달아나던 남궁진성은 등줄기에 강력한 충격을 받으며 두 눈을 까뒤집었다. 그는 중심을 잃고 가랑잎처럼 앞쪽으로 날아갔다. "드디어 잡았구나, 꼬마 놈!" 일귀는 장대를 내던져버렸다. 나머지 음혼삼귀도 배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때 문득 날아가는 남궁진성을 주시하던 일귀의 쭉 째진 두 눈이 터질 듯이 확 불거졌다. 제멋대로 날아가는 남궁진성의 맞은편, 빗줄기를 가르며 흑영 하나가 믿을 수 없이 비쾌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잡은 건데……!" 쉬이잇! 유성처럼 쏘아져온 흑의인영은 날아오는 기세 그대로 남궁진성을 두 손으로 받아 안았다. 휘휘휙! 이어 흑영은 연속적으로 공중회전을 하면서 나룻배 쪽으로 날아왔다. 음혼사귀는 일제히 흠칫했다. 흑영이 보여준 초절정 신법으로 미루어보아 절대고수가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상대는 단신이고 자신들은 넷이었다. 촤촤촤촹! 검을 빼든 음혼사귀가 일제히 노갈을 터트렸다. "감히 당대 무림에서 남극벌의 일에 끼여드는 간 큰놈이 있다니!" "열 군데 살길을 마다하고 한군데 지옥 길을 택했으니 어찌 살려둘까 보냐!"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흑영을 향해 음혼사귀는 맹렬한 기세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쳐랏!" "타앗!" 콰차차창! 번갯불이 휘몰아치듯 흑영과 음혼사귀는 무섭게 격돌했다. 그들은 서로 엇갈린 채 흑영은 뒤돌아선 자세로 나룻배에 내려섰다. 검은색의 장포에 치렁치렁한 은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그는 종잇장처럼 얇은 연검을 손가락 사이에서 휘리릿 휘돌리더니 허리띠 속으로 집어넣었다. 철컥! 연검이 허리에 채워지며 금속성을 울렸다. 첨벙! 첨벙! 그제야 음혼사귀는 갈대밭의 여기저기로 내려서고 있었다. 쩌쩍! 쩍! 그들이 쓰고 있던 죽립이 두 동강 나면서 정수리에서 턱 끝까지 길다란 칼자국이 생겨났다. 음혼사귀는 두 눈을 한껏 부릅떴다. 일귀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빠른 검이라는 건……." 첨벙! 그는 물 속으로 처박히면서 의문스럽게 말했다. "서, 설마… 당신은?" 첨벙! 철퍽! 그것이 시작이었다. 일귀를 시작으로 나머지 삼귀도 목을 꺾으며 차례로 흙탕물 속에 처박혀 버렸다. 여전히 등을 보인 채 폭우를 맞으며 나룻배에 서 있는 흑의인의 두 팔에는 남궁진성이 혼절한 채 안겨 있었다. 남궁진성을 내려다보는 흑영의 얼굴은 무수한 칼자국으로 뒤덮인 파면괴인의 모습이었다. 쏴아아아아! 남궁진성을 안아든 파면괴인은 비오는 하늘을 우울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업(業)이다……!' * * * 거적때기 위에는 시체 네 구가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 그들의 온몸에는 무수한 칼자국들이 나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내리비추는 후원의 뜨락에서 남극벌의 거물 대여섯 명이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주위에는 십여 명의 수하들이 늘어서 있었다. 거물들의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다. 특히 그들 중 중앙에 선 인물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체를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다부진 체격에 반백의 머리는 단정히 묶어 뒤로 넘겼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두 눈에선 연신 예리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구지마옹(九指魔擁). 바로 남극벌의 팔대장로 중 한 사람이자 지모와 무공을 겸비한 절대고수였다. 그는 또한 개벽신수 철륭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그러니 남극벌 내에서의 그의 위상은 드높을 수밖에 없었다. 구지마옹 옆에 서 있던 거물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떤 놈들의 짓일까요? 음혼사귀를 이 지경으로 만들 정도면 예사 놈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구지마옹의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놈들이 아니야." 그의 곁에 서 있던 거물들이 흠칫하며 구지마옹의 얼굴을 주시했다.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지만 이건 한 사람의 솜씨다." 그는 예리한 시선으로 상처투성이의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언뜻 보기엔 치열한 격전 끝에 만신창이가 된 것 같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따로 있다." 그는 미세한 선이 그어진 시체 한 구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미세한 흔적……!" 구지마옹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음혼사귀는 바로 이 흔적에 의해서 살해된 것이다." 구지마옹의 말에 거물들은 모두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음혼사귀를 죽인 인물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다다랐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거기다 상흔의 폭과 깊이가 똑같이 일정하다는 건 단 일초의 쾌검에 모두 당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안색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가 알기로 당금 무림에 이토록 정교한 쾌검을 구사하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다." 거물들은 구지마옹의 충격적인 말에 경악성을 발했다. "그럼… 설마?" 구지마옹은 고개를 돌려 수하들을 향해 일갈했다. "마도수는 지금 어디 있나?" 쾅! 문짝이 부서질 듯이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방안 탁자에는 위지강이 홀로 앉아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구지마옹은 거물들을 거느린 채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위지강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가지만 물어보겠네." 위지강은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운 뒤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술병을 탁자에 놓으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구지마옹(九指魔翁) 육당천(堉當天)이 남극벌 팔대장로(八大長老)의 하나로 노천주의 측근 중 한 명이란 말은 들었지만 나한테까지 이렇게 무례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구지마옹이 굳은 얼굴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남궁린의 손자 놈을 잡으러 갔던 음혼사귀가 누군가에게 피살되었네. 이 점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구지마옹의 시선은 위지강의 한 동작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예리하게 빛났다. 위지강은 술잔을 입에 갖다대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칼 한 자루로 밥을 먹고사는 인생은 누구나 항상 한쪽 발을 관 속에 넣고 살아가는 법이오." 구지마옹의 반백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나머지 거물들의 안색도 확 대변했다. 구지마옹은 재차 차갑게 물었다. "또 한가지, 남궁린의 며느리를 지금까지 죽이지 않고 별전에 모셔두는 이유는 뭔가?" 위지강은 술잔을 탁자에 놓으며 냉오하게 말했다. "주제넘는 질문을 하고 있구려." 그는 비로소 구지마옹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하는 일이오, 알겠소?"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구지마옹이 아니었다. 그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노부가 반드시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들어야겠다면 어찌하겠나?" 위지강은 피식 실소를 날렸다. "당신은 그나마 아홉 개의 손가락도 많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려." 순간 구지마옹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 주위에 서 있던 거물들도 기겁을 하며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구지마옹의 최대약점이자 들춰서는 안될 부분을 위지강이 서슴없이 건드린 것이다. 입술을 깨물며 안면근육을 부르르 떠는 구지마옹을 거물들은 우려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필이면 육장로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약점을 들춰내다니……!' 그들은 모두 내심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구지마옹은 살벌한 안광을 폭사시키며 위지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기껏해야 자객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됐어요, 그쯤 해두세요.!" 이때 문득 들려온 고혹적인 목소리에 구지마옹과 거물들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네 명의 수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긋나긋한 걸음걸이로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염서시의 모습이 보였다. 네 명의 수하들은 모두 이십대의 준수하게 생긴 미남청년들이었다. 염서시는 몸에 꽉 끼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잘 발달된 육감적인 몸매의 굴곡이 더욱 두드러지며 아낌없이 드러나 보였다. 엉거주춤 길을 터주는 거물들 사이를 나긋나긋한 걸음걸이로 지나오는 염서시를 쳐다보며 구지마옹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여길 어떻게……?" 염서시는 구지마옹과 마주선 채 차갑게 말했다. "천하의 북파무림맹과 남궁세가를 초토화시킨 공로면 사소한 잘못 따윈 얼마든지 용납될 수 있어요." 그녀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구지마옹을 지나쳤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어서 가서 귀환 준비나 하도록 해요." 축객령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 한 사람도 염서시의 명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남극벌에서 지닌 그녀의 위상은 독보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구지마옹과 거물들은 소태 씹은 얼굴이 되어 방안을 나섰다. "빌어먹을……!" 그들이 방안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염서시는 술을 따르고 있는 위지강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희들도 나가 있어." 그녀는 자신을 수행해 온 네 명의 호위들에게 짧게 명했다. 호위들은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인 뒤 재빨리 밖으로 사라졌다. 염서시는 술병을 내려놓는 위지강을 야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술친구 해드려도 괜찮겠죠?" 위지강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용건만 얘기하시오." 염서시는 얼굴 가득 요염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빨리 귀환하라는 노천주님의 말씀이 계셨어요. 모르긴 해도 당신의 업적에 대한 큰 포상과 함께 다음 과업에 관해 의논하시고 싶은 모양이에요." 위지강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주인은 욕심이 많군." 염서시는 위지강의 말이 뜻밖이라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노천주님을 내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위지강은 입술 가에 묘한 미소를 피워 물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호호호호……!" 염서시는 간드러진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뇌살적으로 다리를 꼬았다. "실수하신 거예요. 노천주님은 다만 나를 키워주신 의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구요." 그녀는 아교처럼 끈끈한 눈빛을 발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아직까지 내가 주인으로 받들어 모실 만한 자격을 갖춘 사내는 한번도 보지 못했어요." 그녀의 위지강을 바라보는 눈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입에서도 점차 단내가 풍겼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말뚝 같은 사내를 제외하고는……. 아시겠어요?" * * * 울창한 수림이 웅장한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거목들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푸근하게 감싸주는 것 같았다.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이름 모를 산새들은 마치 자신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경쟁이라도 하듯 연신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뾰로로롱! 뾰롱! 이곳 산기슭의 깊숙한 곳에 산세와는 잘 어울리는 아담한 모옥이 한 채 있었다. 울타리는 싸리를 엮어 만들었고 지붕은 초가인, 전형적인 농가 풍의 모옥이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모옥 안 창가. 창가에 놓여진 침상 위에는 남궁진성이 잠들어 있었다. 매우 지친 얼굴이나 잠든 모습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따가운 햇살이 쓰다듬듯 얼굴을 비추자 남궁진성은 살며시 실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눈을 완전히 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통나무로 이리저리 엮어진 천장의 흐릿한 모습이었다. 그 다음엔 머릿속이 제멋대로 마구 헝클어져 무엇 하나 제대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 혼돈의 와중에서 누군가의 칼을 맞고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엄마의 모습이 확 떠올랐다. 남궁진성은 퉁기듯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엄마!" 순간 쩡! 하는 충격이 가슴을 강타했다. 남궁진성은 뼈마디가 부서지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억!"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상체가 흰 붕대로 칭칭 동여매져 있었다. 남궁진성은 자신이 부상당한 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시체처럼 누워 있던 놈치곤 박력 있게 일어나는군그래!" 방 한쪽에서 문득 들려온 음성에 남궁진성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미처 방안에 다른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지를 못했던 그였다. 한쪽 구석에서 숯 돌에 칼을 갈고 있는 제중인과 탁자에 턱을 괸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어린 소녀가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남궁진성에겐 낯선 사람들이다. 남궁진성은 얼떨떨한 얼굴로 제중인에게 물었다. "여긴 어디죠?" 스슥! 스슥! 제중인은 남궁진성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칼을 가는 데만 열중했다. "사람 사는 곳이지 어디긴 어디야, 임마!" 제중인은 짐짓 퉁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다 간 칼을 쳐들고 날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씨익 웃었다. "감옥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니까 걱정 말고 푹 쉬어, 알겠나?" 남궁진성은 비몽사몽 중에 빗속을 꿰뚫고 날아와서 자신을 안아주었던 흑의인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누군가 저를 구해주신 분이 계신 것 같았는데……." 제중인은 예리하게 잘 갈린 칼날을 이리저리 살피며 남궁진성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 몸이 하늘처럼 존경하는 스승이자 큰형님이시다. 나중에 만나볼 기회가 있으면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드리는 걸 잊지 않도록 해." 제중인의 옆에 있는 소녀가 남궁진성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남궁진성은 소녀와 눈길이 마주치자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정색을 하며 제중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큰 신세를 졌군요. 혹시 그분의 존함이라도 알 수 없겠습니까?" 남궁진성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제중인은 칼날을 손가락으로 팅 퉁겨 보며 매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갈아졌군!" 그는 소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뭐가 먹고 싶으냐, 이화야!" 소녀, 이화는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멧돼지 통구이!" 제중인은 칼을 손가락 사이에 걸어 빙글빙글 돌리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가장 듬직한 놈으로 한 마리 엮어올 테니 술이나 준비해 두어라." 이윽고 제중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오빠!" 이화는 밖으로 나가는 제중인을 전송했다. "참!" 제중인은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짐짓 험악한 인상을 쓰며 남궁진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임마, 혹시 아무도 없다고 내 동생한테 엉뚱한 짓 했다간 뼈도 못 추릴 줄 알아!" 남궁진성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예?" 제중인은 그런 남궁진성의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짜식, 그냥 한번 해본 소리 가지고 놀라긴……. 핫하하하!" 이화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남궁진성의 옆으로 다가왔다. "신경 쓰지 마. 우리오빤 말투가 원래 저래."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 양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오는 대로 불쑥 내뱉고선 내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는 거 있지?" 눈이 커지는 남궁진성에게 이화는 한 손을 척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제중인의 성품을 이어 받아서 그런지 나이 어린 소녀의 행동치고는 매우 대범했다. 이화는 부석 같은 치아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 "우리 아직 인사 안 했지? 내 이름은 이화야." 남궁진성은 악수를 하며 야릇한 감정에 휩싸였다.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예쁘게 생겼지?' * * * 휘우우우웅!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빙산설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광풍폭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광풍폭설 속 저 멀리 보이는 고봉 끝에 태산처럼 우뚝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머리와 어깨에 눈을 잔뜩 이고 뒷짐을 진 채 석상처럼 굳어 있는 인영은 바로 남궁사였다. 폭설은 남궁사의 발목까지 차 오를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그의 앞, 조금 떨어진 곳에는 눈을 잔뜩 이고 부복한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절명수사 뇌광이었다. 남궁사는 무섭게 가라앉은 눈빛을 허공에 고정시켰다. "내 아내는 어찌 되었다던가?" 뇌광은 부복한 자세 그대로 통분을 토했다. "내당마님과 도련님의 생사만 아직 확인돼지 않은 것으로……." 남궁사는 뒷짐진 손을 힘주어 꾸욱 말아 쥐었다. 우우우우웅! 남궁사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뻗어 나왔다. "그랬단 말이지……." 쿠오오오오! 더욱 강해지는 기운 속에서 남궁사의 머리카락이 모두 쇠침처럼 곤두서고 맑고 투명하던 눈의 초점이 사라졌다. "남극벌 따위의 오합지졸들에게 남궁세가와 북파무림맹 양쪽 가문이 떼몰살을 당했단 말이지……!" 콰드드드드! 그가 딛고 서 있는 고봉이 통째로 진동을 일으켰다. 그 엄청난 현상에 뇌광은 흠칫 몸을 떨었다. '맙소사, 이건……!' 그것은 인간의 힘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거력이었다. 소름 끼치는 안광을 폭사하면서 남궁사는 악마처럼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었다. "죽인다……!" 쩌쩌쩡! 남궁사가 딛고 서 있는 발 밑의 지면에 마구 균열이 생기며 쩍쩍 갈라져 나갔다. 쿠콰콰콰콰! 눈부시게 폭산되는 햇살 같은 강기 속에서 남궁사는 악마처럼 절규했다. "죽… 인… 다……!" 콰콰콰콰쾅! "우욱!" 지면이 무섭게 폭발하면서 뇌광이 거세게 퉁겨 나갔다. 하늘 높이 통째로 터져 나가는 고봉. 콰르르릉! 쿠쿠쿠쿠쿠! 우박처럼 쏟아지는 집채만한 바윗덩이들과 이미 육중한 기세로 지면 위를 뒤덮고 있는 바위들. 자욱한 낙진 속에서 뇌광은 멀리 떨어진 곳 바위에 낭패한 몰골로 기대앉아 있었다. 뇌광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사방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바윗덩이들을 쳐다보았다. '일찍이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무량공력(無量功力)……!' 그는 허공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남궁사를 격정과 경이가 교차되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대공(大功)을 성취하셨는가!' 후우우우웅! 돌 부스러기의 자욱한 낙진과 눈보라가 휘날리는 허공에 남궁사는 천신(天神)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세상을 당장이라도 한발로 짓밟아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가공한 신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남궁사의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이 허공 멀리까지 퍼졌다. "걸리적거리는 건 모조리 밟아버린다." 그는 전율하도록 무서운 안광을 폭사시키며 강렬한 투지를 활활 불살랐다.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 * *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천공의 중앙에 떠 있었다. 어둠에 잠겨 있는 산 속 야영지에는 수십 동의 군막들이 세워져 있었다. 군막의 입구에 꽂혀 있는 남극벌이란 글귀가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군데군데 군막 사이에는 화롯불을 밝힌 채 남극벌의 무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핫하하하하!" 수십 개의 군막 중 중앙에 자리잡은 가장 크고 화려한 막사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연방 터져 나왔다. 넓은 막사 안 탁자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혈랑팔겁 중 잠송을 위시한 일곱 명이 빙 둘러앉아 거나하게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제중인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좌우간 사람팔자 시간문제라고!" "썩어질 놈의 유황굴에 처박혀 꼼짝없이 인생 종치게 될 줄 알았던 우리가 이렇게 잘 나갈 줄 누가 꿈이나 꾸었겠어!" 혈마륵 호랑평이 씨익 웃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요즘 강호에선 혈마륵이란 이름 석자만 나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구먼." 그의 옆에 있던 축악이 호랑평을 흘낏 흘겨보며 말했다. "별호가 너무 살벌해서 싫다며?" 호랑평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으휴, 우리끼리 얘기지만 좀 살벌한 건 사실이지 뭘 그래." "하하하하……!" "낄낄낄낄……!" 일동은 모두 배를 잡고 파안대소했다. 이때 주청산이 무게를 잔뜩 잡더니 큰소리로 한마디했다. "사막을 휩쓰는 죽음의 모래바람, 용권풍이 한마디하겠소." 단엽이 같잖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왜 또 무겔 잡고 난리야?" 잠송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용권풍!" "모름지기 개 같은 주인을 만나면 개가 되고 정승 같은 주인을 만나면 정승이 된다고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그나마 목에 힘주고 살아가는 건 순전히 큰 형님을 잘 만난 덕분이오." 호랑평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서 뭘 해? 두말하면 잔소리지." 호랑평은 잠송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헌데, 지금 저 얘기 공자 말씀이 맞긴 맞는 거요?" 잠송은 인상이 우그러지는 주청산을 재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맹자의 산상칠훈(山上七訓)에 나오는 말이지." 호랑평이 화난 얼굴이 되어 주청산을 흘겨보며 이죽거렸다. "쥐뿔도 모르는 놈이 아는 척은……." 호랑평의 빈정거림에 주청산은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노기를 터트렸다. "공자나 맹자나 다 같지 뭘 그래!" 호랑평은 그와 말싸움하기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좋아 좋아, 그렇다 치고 하던 말이나 계속해 봐." 주청산은 탁자 아래에 있던 술항아리를 번쩍 안아들면서 말했다. "이것은 그 동안 내가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으며 피땀 흘려 모은 돈으로 산 절강의 명주 백로홍(白露紅)이오!" 이때 포부동이 석옥성의 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소곤거렸다. "믿지 마라 막내야, 저 말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의 음성은 아주 작았으나 나머지 사람들도 포부동의 말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주청산은 뜨끔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축악 등은 키득거렸다. "지난번 남궁세가를 박살냈을 때 주방에서 저 술 훔쳐오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 그러나 주청산은 포부동의 말을 못들은 척 붉어진 얼굴로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좌우지간 나는 그 동안 음으로 양으로 베풀어주신 하늘같은 은혜에 보답코자 이 술을 큰 형님 영전에……." 쾅! 순간 주청산은 말끝을 다 맺지도 못한 채 면상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뒤쪽으로 볼썽사납게 나자빠지고 말았다. 호랑평이 주먹을 흔들며 자빠져 부르르 떨고 있는 주청산을 째려보았다. "영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아예 고사를 지내라, 임마!" 주청산은 얼굴이 부어오른 채 술항아리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있었다. 넘어지면서도 술항아리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이 술을 큰형님께……."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던 주청산은 막사 안쪽의 텅 빈 침상을 보고 커다란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 그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이 양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사라지신 거야?" 그제야 제중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커다란 나뭇가지에 보름달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언덕의 거목에 기대앉아 위지강은 보름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매우 고독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세상의 온갖 고뇌와 슬픔을 모두 간직한 듯한 그런 분위기였다. 휘영청 뜬 보름달 속에 연해월의 모습이 떠올랐다. ― 매달 보름 때마다 소주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다릴게요… 꼭… 와야 해요… 꼭… 알았죠? 위지강의 우수에 젖은 눈빛은 보름달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그의 얼굴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 보름인가……!' "여기 계신 줄 모르고 한참 찾았습니다." 이때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위지강은 상념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잠송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위지강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모두 밤새도록 퍼마실 기세이던데 벌써 끝난 건가?" 잠송은 질렸다는 듯 손을 바삐 내저었다. "말도 마십쇼. 그놈의 백로홍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위지강은 훈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번쯤 엉망으로 망가지는 것도 나쁘진 않지. 내버려두게!" 잠송은 자신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망가지는 건 우리가 망가질 테니까 형님은 어서 내려가 보십쇼. 아까부터 염서시가 눈이 빠지게 형님을 찾고 있습니다." 위지강은 의아해했다. "그 여자가 나를……?" 쪼르륵! 옥처럼 희고 가늘며 매우 아름다운 손이다. 섬섬옥수에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술병이 쥐어져 있었고 지금 탁자에 놓인 옥배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누굴까? 누가 이런 아름다운 손을 가진 여인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는 것일까? 오색등불이 밝혀져 있어 분위기를 고즈넉하게 만들어주는 막사 안이다. 한쪽에는 침상까지 갖춰져 있는 적당한 넓이의 실내였다. 중앙의 탁자에는 방금 술잔을 채운 염서시가 앉아서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위지강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염서시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요즘도 술보다 물을 더 자주 마시나요?" 위지강의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 반대지." 그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리곤 술잔을 염서시에게 쓱 내밀었다. "한잔 더……!" 염서시는 술병을 들어 술잔을 다시 채웠다. "물과 술이 뒤바뀔 만한 특별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위지강은 입가에 고소를 떠올렸다. "원래 인생이란 변화무쌍한 거 아닌가!" 또다시 단숨에 술을 들이키는 위지강이다. 그런 위지강을 염서시는 야릇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무언가 할말이 많은 듯한……! 술잔을 내려놓던 위지강이 문득 흠칫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위지강은 손으로 입가를 스윽 문지르며 낮은 음색으로 물었다. "뭘 탄 건가?" 염서시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고혹적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미인루(美人淚)… 만가지 번뇌와 시름을 씻어주는 특효약이죠." "쓸데없는 짓을 했군!" 염서시는 위지강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당신이란 남자는 참 이상해요." 그녀는 손가락 끝에 걸린 위지강의 머리카락을 코에다 대고 냄새를 음미했다. 사내의 강한 체취가 물씬 풍겨 나왔다. "시건방 떠는 꼴이 보기 싫어서 관심 밖으로 내던지려다 문득 뒤돌아보면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불가사의한 흡인력에 이끌려 오히려 내 쪽이 사정없이 끌려 들어가 버리곤 하거든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위지강의 주위를 거닐었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는 이방인처럼 늘 허공을 더듬는 텅 빈 시선……." 염서시는 죽음과도 같은 고독이 내려앉아 있는 위지강의 두 어깨를 바라보았다. "괜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드는 죽음 같은 절대의 고독……. 그래요, 어떻게 보면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장점으로 소화시켜 보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사내는 하늘 아래 당신 한 사람밖에 없을 거예요." 염서시는 위지강의 뒤에서 그의 목을 껴안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알겠어요? 불같은 얼음 덩어리… 그게 바로 당신이란 말이에요." 위지강은 염서시의 노골적인 행동에도 관심 밖인 듯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 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되지 않나?" 염서시는 야릇한 열기에 휩싸인 채 위지강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제가 아름답지 않나요?" 그녀의 입에서 뜨거운 단내가 물씬 풍겨 나왔다. 위지강은 염서시의 질문에 빙긋 웃었다. "그 점에 관해선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염서시의 동공이 위지강이 한 말에 취한 듯 몽롱해졌다. "그 정도의 아름다움이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마침내 용기를 낸 염서시는 길다란 속눈썹을 내리깔며 자신의 앵두 같은 입술을 위지강의 두툼한 입술로 가져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을 때였다. 염서시가 흠칫하며 눈이 커졌다. 놀란 그녀의 뒷덜미에 젓가락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염서시는 젓가락을 들이대고 있는 위지강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뭐예요, 남다른 특별한 방법을 즐기는 쪽인가요?" "아니!" 염서시는 자신의 뒷덜미에 닿아 있는 젓가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이따위 물건이 왜 필요한 거죠?" "생각이 없다는 뜻이지." 염서시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드세요?" 위지강은 그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젓가락을 놓으며 일어섰다. "되도록 푹 쉬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입구 쪽으로 걸어나갔다.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노숙하는 일이 많아질 테니까." 위지강은 출입구의 천막을 젖히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염서시의 날카로운 음성이 그의 뒷덜미에 와 닿았다. "이유가 뭐예요?" 순간 위지강은 멈칫하며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염서시는 차가운 음성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여자의 자존심을 짓밟는 게 취미가 아니라면 한사코 나를 거절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죠?" 위지강이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바로 그 자존심 때문이야." 위지강의 뜬금없는 말에 염서시는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 떴다. "당신을 안고 다른 여자를 생각한다는 건 당신의 자존심을 두 번 짓밟는 일이 될 테니까." 말을 마친 위지강은 뒤돌아서 막사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위지강을 염서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여자라고……?' 염서시는 매우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
첫댓글 재미납니다.
잘 보고 갑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