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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번째 금강경 14-5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色~法=6境
如人이 入暗에 卽無所見이요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卽爲如來以佛智慧로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나니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 낱자 공부
若: 만일 약, 같을 약 心:마음 심, 有:있을 유, 住:살 주, 卽:곧 즉, 爲:할 위, 非:아닐 비
是:이 시, 옳을 시, 故:옛 고, 佛:부처 불, 說:말씀 설, 菩:보리 보, 薩:보살 살, 不:아니 불
應:응할 응, 色:빛 색, 布베 포,(보), 施 :베풀 시, 如:같을 여, 來:올 래, 須:모름지기 수,
提끌 제(리), 利:이로울 이, 益:더할 익, 切:일체 체, 끊을 절, 衆:무리 중, 生:날 생,
諸:모두 제, 相:서로 상, 모습 상, 又 :또 우, 眞:참 진, 語:말씀 어, 者:놈 자, 實:열매 실,
誑속일 광, 狂미칠 광, 異:다를 이, 所:바 소, 得듣:얻을 득, 法 :법 법, 此:이 차,
無:없을 무, 虛:빌 허, 而:말 이을 이, 行:행할 행, 人:사람 인, 入:들 입, 暗::어두울 암, 見:볼 견, 目:눈 목, 日:날 일, 光:빛 광, 明:밝을 명, 照비출 조, 種:씨 종, 當:당할 당,
之:갈지, 世:세상 세, 善:착할 선, 男:사내 남, 女:여자 여, 能:능할 능, 於:어조사 어,
經:날 경, 경서 경, 受:받을 수, 持:가질지, 讀:읽을 독, 誦:욀 송, 智:슬기 지, 慧:지혜 혜,
悉:다 실, 知:알 지, 皆:다 개, 成:이룰 성, 就:이룰 취, 量:헤아릴 량, 邊:가 변, 功:공 공,
德:덕 덕,
* 해설
우리가 사는 곳은 집입니다.
집은 편안한 곳입니다.
집은 울타리가 있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일이 끝나거나 일이 없을 때는 집에서 쉽니다.
그런데 집에 있어도 편안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밖에서 하던 일이 덜 끝나거나 잘못된 경우입니다.
육신은 집에 있는데 생각은 집에 있지 못합니다.
이것은 온전히 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하지도 않고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보시를 할 때나 보시를 하고 나서 상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을 마무리 하고 집으로 들어와야 온전한 집입니다.
마음이 상을 떠나지 못하면 경계가 없는 집은 찾을 수 없습니다.
만일 집에 들었다해도 생각이 일어나서 안주할 수 없습니다.
빈 마음으로 보시하고 보시한 후에도 빈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받으려는 마음이나 속셈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가 아닙니다.
주고 나서 주었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어도 안 됩니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일심을 하고
일을 마친 후에는 빈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원기 109년 2월 19일
경계: 손주 돌봄
방학이라 손주를 챙겨야 하기에 개인적인 볼일이 자꾸 뒤로 밀린다. 손주 때문에 그동안 해오던 가야금 레슨을 기존 시간에 할 수가 없다, 가야금 선생께 법회 마치고 레슨을 하자고 문자를 넣었다. 솔직히 교당에서도 공간이 한 곳밖에 없어 부산스러워 집중은 안 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월요일도 된다고 문자가 와서 가겠다는 응답 문자를 넣고 보니 점심때 또 약속이 있었다.
손주를 방과 후 수업에 보내 주고 버스를 40분이나 타고 가면서 이렇게까지 가야 하나 하는 마음이 또 올라온다. 마음의 요란함이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어찌 되었건 어영부영이지만 일 년 가까이 배운 시간들이 아까워 10분을 하더라도 오래오래 하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여행 간다고 생각하자며 다시 또 마음을 다독인다.
서둘러 다시 돌아와 맛있게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러 올라가는데 딸이 손주를 픽업했냐며 전화가 왔다.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 하고 되물었더니 지금 마치는 시간이란다. 순간 시계를 보니 딸 말이 맞았다. 차를 시켜놓고 지인끼리 먼저 먹고 있으라 해놓고 손주를 데리고 허겁지겁 돌아왔다. 손주를 옆의 자리에 앉혀놓고 우선 유트브를 보라고 하고 지인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공부시키고 바로 영어학원에 보낼 수도 있다고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딸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애 봐주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말은 상대에게 하면서 눈은 손주에게 가 있는 나를 보며, 짜증이 슬슬 올라온다. 방학이 되면 방학이라고 챙겨야 하고, 방학이 아니면 아닌 대로 챙겨야 하고 내가 노는 사람도 아니고 아이에게 매여 차도 편하게 못 마시는 이 순간이 짜증이 난다.
지인들과 생각보다 빨리 수다를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와 영어공부를 시켰다. 매주 월 목만 되면 내가 수험생이 된듯한 기분이다. 솔직히 적당히 하라 해놓고 모른 척하고 싶지만 괜한 착심이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늘 시계를 보며 수다 떨다가 데리러 가는 내 마음을 손주도 알 리가 없고, 딸은 또 얼마나 알까 생각하니 원망심이 올라온다.
손주가 돌아와 100점을 맞았다고 하면 내 책임을 다한 것처럼 기분이 좋다. 마음을 돌려 생각하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그나마 시간이 자유로워 손주를 챙길 수 있고 하는 일과 맥락이 연결되어 역사 이야기도 해줄 수 있고 공부를 봐줄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돌린다.
항상 마음의 난리는 나에게 있었음을 알아차리며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7편 법훈 30 난리의 근본에 보면 [난리의 근본은 원망심에서 시작되고 평화의 근본은 감사 생활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씀을 봉독하며 경계가 올라올 때마다 한순간 멈추고 또 멈추며 나를 챙기고 또 챙기는 공부의 체를 잡아야겠다.
교무의 의견
방학이 되어 손주를 돌보고 계시네요
그동안 해오던 일이 있는데 손주를 보는 일이 추가되었네요
가야금 레슨도 받아야 하고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할 일이 많은 데 딸의 부탁을 안 들어 줄 수도 없지요. 안 해도 되는 일인데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요. 자기 아들은 자기가 키워야지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지요.
손주를 돌보다가 딸의 원망을 듣게 되면 일해주고 원망을 듣는 꼴이 되지요.
이렇게 생각이 들면 짜증도 나고 원망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이를 키울 때는 당연한 일로 생각을 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원망을 하지 않으며 설령 짜증을 냈다 하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또 하는 것이 엄마인 것 같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사생의 자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태난습화 모든 중생의 자비로운 부모가 되라는 뜻이지요
하물며 딸이나 손주는 그 중생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지중한 인연이지요
지중한 인연을 위하여 하는 일은 남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이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딸의 눈치 때문에 돌보는 것도 아니고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나에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감사할 뿐이지요
우리의 마음을 어느 방향으로 돌리느냐에 따라 원망과 감사가 나뉘는 것 같습니다.
2024년 2월 11일
경계 : 명절 제사와 기제사
결혼한 지 46년 2개월이다.
몇 년 전부터 남편에게 우리도 제사를 교당에서 하자고 권유(부탁)를 해왔다.
남편은 안 된다고 집에서 지내자고 한다. 결혼 초기에는 1년에 제사가 8번이었고 명절을 포함하면 10번이었는데 시골 하동까지 안 빠지고 다녔다. (차종손 맏며느리)
30여 년 전부터는 제사를 부산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면서 시어머니가 윗대 5위는 시사로 올리고 우리 집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시아버지 3분만 모시기로 정리를 하였다.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에는 할아버님&할머님을 합동으로 하고 시부모님 내외분을 합동으로 해서 두 번과 명절 차례를 합해서 1년에 4번으로 줄여서 지내다가, 올해부터는 시아버님 기일 날 다 같이 합동으로 하기로 결정하면서 원불교 의식으로 하자고 다시 부탁하니까 남편이 그럼 올해까지면 설명절 추석 명절 제사 지내고 내년부터는 명절 제사는 안 모시고 시아버님 기일 날 합동으로 1년에 한 번만 집에서 모시는 거로 합의를 봤다.
설날 아침에 차례상 앞에서 이번이 마지막으로 모시는 거라고 조상님들께 심고를 올리고 마무리했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 46년간 지내던 명절 차례를 그만 모신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섭섭한 마음도 있고 내년 설명절 에는 뭘 하지 하는 마음도 있고 묘한 마음이 든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남편이 그동안 수고했노라고 말은 했어도 정초부터 사사건건 태클을 건다.
마음이 참 무겁게 느껴진다. 주변에서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고들 하며 명절 제사장 보러 간다니까 요즘은 다들 명절 제사는 안 지내는 가정이 많은데 하면서 동생네는 식구들 5명 해외여행 간다고 하며, 언니는 요즘같이 좋은 세상 왜 그렇게 사냐고도 한다. 교무님께서 설법하실 때 죽으면 헌 집 버리고 새집으로 이사하는 거라고 하셨는데 이미 새집에서 잘살고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생업에 충실하기로 법신불 사은님께 기도를 올린다.
교무의 의견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데 주부의 입장에서 보면 큰 일 중에 하나입니다. 제사상을 차리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제사 지내러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 뜻이 맞으면 몰라도 서로 관계가 소원한 상태라면 어려움은 가중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종손은 알지도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가 있고 1년에 몇 번씩 준비하려면 힘든 일 중의 하나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다행히 시어머니께서 정리를 많이 해 주셔서 수월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 할아버지 내외와 아버지 내외의 재사와 차례를 합하면 4번인데 이번에 명절 차례는 없애고 한 번의 제사로 통합하셨네요.
제사와 차례는 선진들을 추모하고 그 뜻을 이어받아 발전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의미를 살려 유교와 불교에서는 음식을 차려놓고 예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유교의 의식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돌아가셔서 육신이 사라지면 실제 음식을 드시지 못하는 것이고 방편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도록 해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원불교에서는 음식을 차리지 않고 꽃을 공양하고 독경과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독교의 영향인지 힘든 일을 싫어하기 때문인지 제사를 지내지 않고 명절에 휴가를 가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기의 편함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려는 것은 권장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선진을 추모하는 마음은 더욱 살아나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행사로 자리를 잡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원기 109년 2월 20일
경계 : 운전 중 생기는 경계 ♧
손주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좁은 길은 가로수길이라는 이쁜 이름이 있고 내가 참 좋아하는 길이다. 길이 좁은 만큼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여 양쪽으로 손을 맞잡고 멋진 꽃 터널 아치를 만들어 바람이 불라치면 꽃비도 맘껏 뿌려주는 길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차량 두 대가 스쳐 지나가기가 힘들어 이쪽저쪽 길 끝에서 먼저 진입한 차를 기다려줘야 한다. 등하교 時에는 특히 몇 대나 기다리며 무언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데 가끔 욕 나오게 하는 얌체들이 많다. 중간중간 빌라들 주차장으로 피신 할 수도 있지만 기다려주는 것보다 시간은 좀 더 걸리는 듯하여서 많은 분들이 그냥 조용히 기다리며 차례를 지킨다^^ 그런데 큰길 쪽에서 올라오는 차들이 새치기로 먼저 진입하는 경우를 볼 때는 아니 누구는 못가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눈은 뒀다가 뭐 보노? 하며 그 차 뒤통수에 레이저를 발사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할 때 나의 맘을 들여다보면 편한 맘일 때는 에고 많이 바쁜 모양이다 이왕 기다린 거 좀 더 기다리자 그래 봐야 1~2분인데~라며 대수롭잖게 지나가는데 애가 짜증 내며 빨리 준비 안 하고 늦장 부려서 시간에 쫓기면 맘이 요란하고 급해져서 여유가 없어지니 상대차의 4가지없는 행동을 보면 좋지 않은 소리가 바로 나오는 것 같다 양보하며 여유를 갖자는 다짐을 하고 또 하지만 내려놓는 공부는 실천하기가 힘든가 보다, 포기하지 말고 끝없이 노력하여 멋지고 우아한 할머니가 되어야 하는데 그때는 언제쯤일까?
교무의 의견
승용차 2대가 교행하기 어려운 골목길이 많지요. 그중에 손주를 데려다주는 학교길이 그 골목길인 것 같습니다. 골목길에서 차를 만나면 먼저 어디서 비껴갈 까를 생각하게 되지요. 중간에 비낄 곳이 없으면 진입하는 곳에서 건너편을 바라보고 싸인을 받아야 되겠지요. 동네 사람들끼리는 하나의 관례가 되어 서로 배려를 하고 다니지요. 그런데 외부의 차량이나 바쁜 차들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바로 진입을 하곤 하지요. 그럴 때 짜증이 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끼어든 차들이 왜 들어왔는지 알면 이해가 되나 이유를 모를 때는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비난을 하게 되지요. 기다리는 상황에서 끼어든 차를 보며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여야 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 상황에서 내려 물어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묻지 않고 알기는 어려운데 모르면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이때 마음운전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마음이 편안하려면 저 사람이 몰라서 그랬구나 아니면 바빠서 그랬구나 하면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마음을 돌려 이해가 되면 찌꺼기가 남지 않으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쌓이게 됩니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면 폭발하거나 병이 나기 쉽습니다.
물론 모두가 룰을 알고 지켜주는 것이 최상책이지만 나의 마음을 돌려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공부입니다.
원기 109년 2월 18일
제목: 기도 때 불리는 내 이름
기도시간에 교무님께서 축원문을 읽으시는데 축원인 이름이 한분 한분 또박또박 들려온다. 참 천천히 한 분 한 분의 이름들을 정확히 불러 드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옆에 계시던 노 교도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 이름 불렀재
나 역시 몇 해 전까지는 기도 후엔 내 이름자가 나오는가? 귀 기울여 신경 쓰며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많은 이름들 속에서도 내 이름이 항상 들렸었다. 요즘은 기도명단 부르는데, 내 이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당연히 불러주실 것이고 설령 부르지 않으셔도 괜찮다. 나의 생활이 원만 구족하고 사가 없으며 모나지 않게 살아간다면 모든 것이 잘되고 모든 관계가 좋아져 인생이 술술 풀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교무님이 실수로 나의 명단을 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법신불님께서는 다 아시리라 생각한다. 그동안 마음공부를 했더니 큰마음이 생겼나 보다.
그동안 교당에 다니면서 작은 것에 집착하고 잘잘못을 따지며 요란한 마음을 내던 나를 빨리 알아차리고 큰마음으로 수용하고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올 상황을 예의주시하여 미리 연마하기에 주의하는 생활을 일상으로 만들어가야 하겠다. 교무님께서 빌어주시는 축원과 나의 염원이 부처님의 위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을 해 본다.
교무의 의견
우리는 교당에서 기도할 때 기도명단을 부르곤 합니다. 교무님이 부르시는 명단에 우리 가족이 있으면 부처님이 돌아보시고 명단에 없으면 부처님의 위력을 받을 수 없는 그것처럼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실지 실견(實知實見)한다고 합니다. 즉 다 보시고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했던 모든 것을 아시고 거기에 맞는 결과를 주시지, 일은 했는데 명단을 부르지 않았다고 대가를 안 주실 분은 아니십니다. 법신불 부처님은 우리가 심신작용을 한 만큼 결과로 답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보응의 이치라고 합니다.
교무님이 명단을 부르거나 안 부르거나 상관할 것은 없습니다. 명단 부르는 것은 교무의 일이고 잘못 불렀다면 그 과보는 교무가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간절한 마음을 법신불님께 전달하는 일입니다. 간절한 서원을 세웠는가 일심을 모았는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2024년 2월 20일
경계 : 약속 시간
일하는 곳에 이모님이 점심을 드시러 매일 오신다. 아무리 약속 시간을 정해도 항상 약속을 어기신다. 어제는 11시까지 오시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를 하였는데 식사시간이 다 되고 12시가 넘었는데 그때까지 오시지 않아서 어르신하고 둘이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12시 15분 되니 그때야 들어오신다. 기분이 상했다. 짜증도 나고 나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앞으로 이모님 시간 안 지키시면 밥 안 챙겨 드릴 거예요. 이모님이 알아서 챙겨 드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마음이 불편하다. 어르신이 내 눈치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이모님도 어찌 할 줄 모르는 것 같고 내 눈치만 보는듯하여 마음이 무지 불편했다. 밥을 챙겨드리면서 이모님 좀 일찍 오셔야 같이 밥도 먹고 조금 놀다 가지요. 매일 늦으니까 나도 바쁘고 어르신과 이모님하고 대화할 시간이 안 되잖아요. 밥 빨리 먹고 좀 놀다 가게 다음부턴 일찍 오셔요 하니 히히 웃으신다. 생각 해보니 항상 늦으시는데 오늘은 왜 마음이 불편했을까 퇴근 시간 때문이겠지. 그리고 내가 당부를 했는데 안 지킨다는 마음이 짜증으로 올라온 것일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커피 한 잔 타드리면서 미안해요. 이모님 그래도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라고 이쁘게 말하였다. 다음부터는 늦게 오셔도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야겠다.
교무의 의견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곳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지금 돌보고 있는 할머니의 동생이 혼자 사는데 점심을 함께 드시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은 차리는 것도 힘들지만 혼자서 식사하는 것은 즐겁지 않은 일입니다. 그걸 눈치채시고 함께 와서 같이 식사하시라고 하신 것은 배려입니다.
오후 1시까지가 근무시간이니 그 안에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퇴근을 하려면 빠듯하지요. 그래서 할머니 동생분께 11까지 오시라고 당부를 하셨는데 12시가 넘어서 오시니 짜증이 날만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마음을 읽어보면 언니 식사를 하는데 함께 먹는 것이고 12시가 식사시간이면 10분 늦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요양보호사를 가정부처럼 부리기도 하는데 이분은 하 하고 웃으시는 것을 보면 못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의 요란함은 이모님과 소통이 덜 된 데서 오는 것인 것 같습니다. 이모님께 잘 설명하여 이모 부처님의 감응을 얻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이모 부처님이 말을 잘못 알아들으시거나 시간 개념이 없으시면 그분의 처지를 고려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도 짜증이 나지 않고 오히려 불쌍한 이모를 어떻게 도울까 그런 생각이 일어날는지도 모릅니다. 한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보고 왜 그 손을 안 쓰느냐고 탓을 한다면 안 될 일이지요. 장애인의 심정을 이해하고 무엇을 도와야 할까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번의 요란함은 이모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나의 마음이 원인이기도 합니다. 나를 중심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나의 편리를 위해서 약속을 하니 안 지켜지는 것이고, 또 내 입장에서 보니 식사시간을 꼭 지켜야 하는 것이지 할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평소에 시간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약속 시간도 꼭 지킬 필요가 없는 분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기의 가치관을 두고 남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기준을 세워놓고 거기에 안 맞춘다고 요란함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는지요.
원기 109년 2월 20일
경계 : 영진이의 원망하는 전화
설 연휴 전 7일 날 지인들과 저녁 10시쯤 술을 한잔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향 후배인 영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후도 없이 사촌 동생인 회관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하면서 내가 원인제공을 했다고 원망을 한다. 전화상으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났다. 그래서 전화를 먼저 끊고 있다가 내가 다시 전화하니 통화가 잘 안 된다. 조금 있으니 다시 전화가 걸려와 통화하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봐도 막무가내로 나를 계속 원망한다. 후배가 술이 많이 취해서 그러거니 생각하고 동생과 해결하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사촌 동생과 통화를 하니 통화가 안 되어 그냥 지나쳤다. 며칠 후 동생과 통화를 하게 되어 사실을 알아보니 동생도 일한다고 바빠서 통화를 못 했다고 하면서 영진이와는 전화를 차단한 상태라고 하였다. 이야기인즉 영진이가 동생보다 나이가 많은데 선배 대우를 하지 않는다고 술만 먹으면 갈군다고 한다. 나도 그 후로 아직 통화하지 못하고 있다.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무엇 때문에 원망하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전화를 받으니 황당하기도 하고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 생각에서 떠나지 못하고 가지고 있으니 주착심인가 보다. 언젠가 영진이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조용히 물어보리라. 모두가 섭섭한 관계 속에 사는 것보다 은혜를 느끼며 감사 생활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
교무의 의견
갑자기 후배가 전화해서 원망을 하나 무슨 일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돌아보아 지기도 하고 답답함과 불편함이 함께 일어나지요. 이유를 분명히 하고 원망을 하면 고치면 될 것인데 그 연유는 말하지 않고 원망만 하니 기분이 상하지요. 직접 만나서 하는 것도 아니고 전화로 그러니 상대방의 마음을 읽기도 어렵지요.
특히 술을 먹고 횡설수설하면 다음에 하라고 전화를 끊어버리기도 하지요. 동생과 연관된 일이니 동생에게 무슨 이유인지 물어보는 것은 순서인 것 같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나에게 역경을 주는 것은 공부할 기회를 주심이라 하였습니다. 영진이가 마음공부를 하라고 역경을 주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영진이도 속상한 것이 있으니 술을 먹고 전화를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후배가 선배에게 예의가 없다느니 잘못한다는 선입견으로 대하지 말고, 영진이가 원래 부처님인데 어떤 주착심이 감싸고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 주착심을 벗겨주어서 영진이 후배도 편안하게 하고 나도 편안하면 어떨까요. 어떤 주착심인지 잘 들어보시고 영진이의 마음을 읽어주시면 영진이도 위안을 얻고 오해도 해소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경계를 잘 헤쳐나가면 영진이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려는지 모릅니다.
일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