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합성연료와 합성안료를 둘러싸고
모브의 발견. 1856년 갓 18세가 된 윌리엄 퍼틴은 왕립대학(Royal College)의 부활절 휴 가 동안에 자기집 실험실에서 야심에 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키니네(quinine)를 인공적 으로 합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유명한 독일인 화학자 A.W. 호프만 교수의 조수를 하고 있었다. 영국의 왕자 앨버트는 호프만을 왕립대학의 초대장으로 독일의 본에서 초청했다. 호 프만은 강의 중에 말라리아에 유일하게 효과적인 이 키니네가 동인도에서 자라는 킨키나나 무 껍질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키니네를 인공적으로 합성시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이라고 말했다(천연 키니네가 어떻게 해서 우연히 발견되었는가는 제 3장을 참조할 것). 퍼 킨은 제철공업의 값싼 부산물인 콜타르(coal tar)에서 나오는 톨루이딘(toluidine)을 원료로 해서 당시 유행했던 '가감법'에 의하여 키니네를 합성하려고 생각했다. '가감법'이란 출 발원료와 목적원료의 단순한 분자식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알려져 있던 톨로이딘과 키니 네의 분자식의 차이에서 퍼킨은 톨루이딘에 몇 개의 탄소원자와 수소원자를 가하고 그 후에 산소원자를 몇 개 가해서 원소의 형과 수를 키니네와 같게 하면 키니네를 합성시킬 수 있 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원자가 모여서 분자의 3차원 구조가 형성된다는 오거스트 케클레의 이론이 발표되기 수년 전의 일이었다(케클레와 분자구조에 관해서는 제 14장을 참조할 것). 퍼킨의 계획이 얼마나 소박했는가는 키니네의 구조식 결정이 1908년에 있었으며 그 합성에 이르러서는 매우 우수한 화학자들의 도전을 1944년까지 받아 온 것만으로도 알만하다. 퍼킨은 계획한 대로 실험을 실시하여 처음에는 3개의 탄소와 4개의 수소를 아릴(allyl)기로 해서 톨로이딘에 가한 다음에 강력한 산화제인 2크롬산칼륨으로 처리했다. 그 결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적갈색의 진흙이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출발물을 좀더 간단한 아닐린(aniline)으로 바꾸어 보았다(실은 퍼킨이 사용한 아닐린은 소량의 톨루이딘을 함유하고 있으며 이것이 보라빛 염료의 합성에 필수였다). 이번에는 이전의 생성물보다도 더욱 가망성이 없을 것같은 새까만 고체였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기 전에 살펴보니 이것을 씻어내기 위해서 사용한 물이나 알콜이 보라빛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예상외의 결과에 흥미를 느낀 퍼킨이 이 보라색 용액을 조사해 보니 이것이 천을 물들인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퍼킨은 바로 흑색 혼합물에서 보라색 염료를 추출하는 실용적인 방법 을 발견하여 이 합성 염료의 샘플을 영국의 유명한 염료공장으로 보내고 명주와 무명에 시 험을 의뢰했다. 그 평가 결과, 명주에는 매우 유망하지만 무명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 다. 그러나 무명에도 전 처리를 하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이와 같이 키니네를 합성하려던 소박한 시도가 우연히 인류 최초의 인공염료를 생산하는 결 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젊은이다운 열의로 퍼킨은 자기가 만들어낸 염료의 특허를 취득하여 공장을 세우고 염료공업으로 나섰다. 염료업을 시작하는 것이 바보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던 그의 스승 호프만은 그가 학문의 세계에서 연구를 계속하길 희망했던 만큼 퍼킨을 전혀 응 원하지 않았다. 대학교수인 본인(저자)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호프만이 잘못 생각한 것이 다. 다행히도 퍼킨의 부친은 자산가였고 명석한 아들에게 크게 기대했다. 부친과 형제의 지 원을 받으면서 퍼킨은 합성법을 공업적인 규모로까지 확대생산하는 동안에 산더미같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 확대생산의 처음 무렵에는 폭발 사건도 더러 있었으며, 주철로 된 반응용기의 내용물이 너무 심하게 비등을 시작하면 용기에 냉수를 끼얹으며 그 반응을 '제 어'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때문에 공장직원이 수도호스를 손에 들고 지켜야하는 그런 형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료제조는 대성공이었다. 아닐린퍼플, 티리언퍼플, 모브(또는 모빙) 등으로 불리운 그의 염료는 퍽 널리 보급되었다. '모브'(mauve)란 프랑스에서 이 새 로운 염료에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이름이 되었다. 퍼킨의 발명 이전에는 내구성이 있는 보라색, 연보라색의 염료는 매우 고가의 것이었다. 기 원전 1600년부터 사용되어 온 천연염료는 원래 티리언퍼플이라고 했으며 지중해에서 채취되 는 조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조개는 모으기가 어려워서 1그램의 염료를 만드는 데 9,000개의 조개가 필요했다. 오직 왕가만이 이 염료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것으로 말미 암아 보라색과 왕족과의 연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퍼킨이 콜타르에서 내구성있는 아 름다운 보라색 염료를 합성한 덕분에 누구라도 이 색을 사용할 수 있는 가격이 되었다. 게 다가 이전의 보라색은 바래기가 매우 쉬워 여성이 아침에 모자에 연 보라색 리본을 달고 외 출하면 저녁 때는 붉은 색깔로 변해버리는 형편이었다. 모브의 성공은 합성염료공업 탄생의 계기가 되었으나 실제로 그 가능성을 간파하고 대규모 로 발전시킨 사람은 영국인이 아니고 독일인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퍼킨의 지도로 영국 에서도 새로운 염료공업 발전이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최초의 공장이 건설되고 나서 겨우 6 년만에 영국 화학회가 콜타르에서 만들어지는 염료에 관한 강의를 그에게 의뢰할 정도였다. 퍼킨의 그 후의 인생은 영예가 충만한 것이었다. 영국학사회 회원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이 어서 데이비상, 호프만상, 라보이제상을 받았다. 그리고 1906년 콜타르염료공업 설립 50주년 에는 전세계에서 다수의 저명한 과학자가 출석하는 기념식이 있었으며 또한 영국 화학공업 회의 미국 지회에는 미국인 화학자의 최고의 영예로써 퍼킨상이 마련되었다. 퍼킨에 의한 모브의 발명은 세렌디피티의 좋은 예이다. 그는 어떤 목적을 향해서 출발하여 우연한 행운 덕분에 휠씬 중요한 다른 결과에 도달했던 것이다. 1856년에 키니네를 합성한 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설령 가능성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당시에 합성염료공업의 설립만큼 중요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드워드와 윌리엄 폰 E. 도 에링 등에 의한 키니네의 합성은 천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실용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말라리아가 만연되어 있는 태평양지역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키니 네 입수의 길은 단절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드워드와 도에링의 합성이 실용적으로 키 니네를 생산하지는 못했다. (해설) 퍼킨이 개발해 공업적으로 생산한 또하나의 중요한 콜타르염료는 몇 세기 동안 꼭두 서니과의 식물 뿌리에서 채취한 적색염료인 알리자린이었다. 1868년에 독일의 칼 그레베와 칼 리베르만은 콜타르의 한 성분인 안트라센에서 알라자린 합성을 발표했다. 그레베와 리베 르만의 이 합성법은 공업생산에는 비실용적이었으나 이 발표는 호프만 밑에서 연구하고 있 을 때 안트라센을 취급한 적 있는 퍼킨의 흥미를 끌었다. 1년도 안 되어 퍼킨은 콜타르 안 트라센에서 알리자린을 생산하여 1871년에는 연 생산 220톤에 이르렀다. 1874년에 퍼킨은 그의 공장을 매각했다. 36세에 그는 나머지 인생을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해도 될 정도의 재 산가가 되어 있었다. 새로 집을 샀으나 모브를 발명했던 옛집은 연구실로 계속 사용했다. 여 기서 그는 콜타르에서 최초의 향료인 쿠마린(coumarin)의 합성을 완성시켰다. 계피산 합성 때에 그가 사용한 방법은 아주 유용하며 퍼킨반응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1882년 아돌프 폰 바이엘은 염료 역사상 또하나의 기념비적인 그의 유명한 인디고합성의 출발물질을 제조 하는 데 변화된 퍼킨반응을 사용했다. 콜타르 염료의 가치는 섬유의 염색에 그치지 않고 미 생물 연구의 매개물 염색에서도 중요하다. 결핵이나 콜레라의 병원균이 발견된 것도 염색기 술로 이들 염료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퍼킨에 의한 모브의 발명은 19세기 후반, 특히 독일 에서 유기화학의 눈부신 발전의 출발점으로 인정되어 왔다. 호프만이 독일로 귀국한 것이 으 급격한 발전에 분명히 관계가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케크레와 그의 화학구조론에 자극된 독일의 '방향족화학'의 발전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새로운 합성염료는 벤젠에 관련되 는 방향족화합물이었다. 알리자린. 적색염료의 알리자린은 고대부터 알려져 왔으며 이집트인은 미이라를 싸는 천을 염색하는데 이를 사용했다. 알리자린은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꼭두서니과의 식물 뿌리에서 얻을 수 있다. 1886년에는 아직 알리자린의 화학구조도 알려져 있지 않고 베 를린에 있는 바이엘의 연구실의 연구과제가 되었다. 수년 전 바이엘은 다른 천연염료인 인 디고(다음 항을 참조)의 연구에 나섰다. 그 연구 중에는 바이엘는 복잡한 유기화합물에서 산 소를 제거하여 이미 알려져있는 간단한 화합물로 변환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였다. 그 는 화합물을 아연분말과 함께 가열하는 이 방법이 알리자린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바이엘의 젊은 조수이던 칼 그레베와 칼 리베르만이 실험해 본 결과 생산된 것은 콜타르의 성분으로 잘 알려진 탄화수소 안트라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가 있기 몇 년 전에 이미 케클레가 벤젠분자의 환상구조를 설명했었으므로 그들은 안트라센에 대해서 벤젠 3개를 붙인 구조식을 만들 수 있었다. 케클레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의 회화적인 분자구조설은 많은 유기화합물, 특히 알리자린과 같은 방향족화합물의 구조 결정에 넓은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 후 그레베와 리베르만은 이 과정이 역반응으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즉 안트라센에 산소를 부가해서 알리자린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계획은 현재는 잘못 생각한 것으로 인정된 어떤 가능한 화학반응을 계획한 것이었는데, 여 기서 유사 세렌디피티가 일어났다. 그들이 이론에 맞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천연의 알리자린과 일치되는 합성품을 만들 수가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천연염료를 실험실에서 최초로 합성한 것이었다(퍼킨의 모브는 천연의 조개에서 취한 티리언퍼플과 색 은 비슷하지만 화학식이 다른 새로운 물지이다). 이 실험실에서의 합성은 학문적 성과로서 는 훌륭한 것이었으나 알리자린의 공업적 생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바딧셰 아닐린 과 소다공업회사(BASF)'의 기술자 하인리히 카로의 도움을 받아 그레베와 리베르만은 실 용적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시도했다. 몇 번인가 실패한 후, 카로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실험에 의해 표준 알리자린을 양질의 수량으로 바꿀 수 있는 구조불명의 중간체를 발견했다. 그 유사 세렌디피티적 합성법은 영국에서 퍼킨이 거의 같은 무렵에 독 립적으로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합성 알리자린은 독일과 영국 두 나라에서 1871년에 시판이 시작되어 순식간에 천연염료를 대체하게 되었다. 망가진 온도계와 인디고. 청색염료인 인디고(Indigo)는 알리자린과 마찬가지로 고대문명시대 부터 알려져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말경까지 이 염료는 '쪽'이라는 식물에서 채취했다. 1897년 인도에서 쪽의 재배면적은 200만 에이커(약 8,000평방킬로)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 침 그 무렵 독일의 화학회사가 이 염료를 합성하는 과정을 개발하여 합성품을 천연품보다 염가로 팔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천연인디고를 생산하고 있던 인도나 기타 나라들에서는 경제적 대변동이 일어났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경제적 및 문화적 대변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실험 중에 온도계가 파손되는 우연한 사건에 도달하게 된다. 아돌프 폰 바이엘이 베 를린대학에서 인디고의 화학구조 연구를 시작한 것은 1865년이었다. 1883년까지 그는 옳다 고 여겨지는 구조를 추론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보통 유기화학자가 하는 대로 어떤 구 조의 화합물을 합성해서 이것이 천연염료와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가를 일일이 확인했다. 실 제로 그는 몇 가지의 합성법을 연구하여 그중의 하나로 퍼킨방응도 써 보았지만 어느 것 하 나 천연인디고와 가격 면에서 경쟁이 될 만한 합성염료의 공업적 생산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BASF의 칼 호이만이 처음으로 성공적인 공업용 합성을 개발시킨 것은 1893년의 일이었다. 이 합성이 성공한 것은 콜타르의 한 성분으로서 당시 제철공업의 페기물이나 다름없던 나프 탈렌을 출발원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철광석으로 철을 빼내는 데 코크스가 사용 되고 있다. 코크스를 만들기 위해 석탄을 가열하면 점성이 높고 심한 냄새가 나는 흑색 액 체인 콜타르가 흘러나오는데 이것을 어딘가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 었다. 합성염료와 합성안료가 발명되고 나서야 이것이 유기체 출발물질의 풍부한 원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디고를 성공적인 공업용 합성으로 이끈 우연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BASF의 사퍼라는 화 학자가 나프탈렌을 발연황산과 함께 가열할 때 실수로 온도계를 망가뜨리면서 그 속의 수은 이 반응용기 속에 흘러 들어갔다. 사퍼는 반응이 언제나처럼 진척되지 않고 나프탈렌이 무 수프탈산으로 변화한 것을 알아차렸다. 잘 조사해 보니 황산이 수은을 황산수은으로 변화시 키고 이 황산수은이 나프탈렌을 무수프탈산으로 산화하는 촉매였다는 것을 알았다. 무수프 탈산을 인디고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주 쉬웠다. BASF는 1897년에 합성인디고를 천연품보 다 싼값으로 팔기 시작했다. 합성인디고를 제조하는 과정은 그 이후 점차 개량되어 천연인 디고가 염료시장에서 이전과 같은 지위를 되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나스트랄 블루. 염료와 역사 속에서는 세렌디피티의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모브나 알리자린, 또는 인디고 따위의 발견보다 훨씬 후인 1928년에 A.G. 댄드리지가 아름 다운 청색안료를 발견했을 때에 일어났다. 안료라는 것은 다른 물질을 착색하는 데에 사용 되는 불투명하고 불용성인 분말로서 염료하고는 구별된다. 안료는 주로 표면보호와 장식용 도료, 인쇄잉크, 프라스틱, 고무 등에 사용된다. 댄드리지는 스코틀랜드 염료회사의 화학자로 제철용기 속에서 용해된 무수프탈산에 암모니 아를 첨가하여 프탈리미드(phthalimide)를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프탈리미드와 무수프탈산이라는 말은 모두 나프탈렌에서 유래되었다). 댄드리지는 용기벽이나 뚜껑에 청 색 결정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껴 조사해 보기로 했다. 댄드리지 등이 연구한 결과 청색 결정은 용기인 철과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의 화학반응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과 철 대신에 니켈이나 동 등 다른 금속이 반응하면 다른 안료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1929년 스코틀랜드 염료회사의 모회사인 임페리얼화학 공업사는 런던의 임페리얼대학 린스 테드 교수에게 이 안료의 샘플을 보냈으며 교수는 학문적으로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하여 연 구를 시작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린스테드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이들 염료의 화학구조 를 결정해서 프탈로시안이라는 이름을 붙여 1934년에 일련의 연구 논문으로 보고했다. 이 연구와 1935년 로버트슨에 의한 X선 결정 해석 결과, 동을 함유한 안료의 구조식이 정해졌 다. 크론쇼우는 '프탈로시안 발견에 관한 총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프탈로시안류의 존재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아마도 예상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프탈로시안류가 발견되어 분자구조도 확인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화합물의 필연성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이 물질의 생성은 얼마나 경탄스러운가! 적당한 반응온도에서 동과 같은 금속과 함께 꼭 필요한 4개의 성분이 제자리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 이다. 프탈로시안의 구조는 혈액 중의 색소성분인 헤민[중심금속은 동(Cu)대신에 철(Fe)로 되어있 다]이나 녹색 식물의 색소 성분인 클로필[중심금속은 마그네슘(Mg)]와 비슷하다. 이 안료는 학문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실용성도 높다. 린스테드와 공동연구자들은 1933 년부터 1942년까지 26개의 특허를 얻었으며 그 후에도 많은 특허를 취득했다. 화합물 중 철 원자를 동으로 바꾸어 놓으면 더욱 좋은 청색안료를 얻게 되며 이 '모나스트랄 블 루(monastral blue)'는 컬러 인쇄에 3원색 프로세스용 청색 안료로서는 현재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또한 프탈로시안 동속의 수소원자 몇 개를 염소원자로 바꾸면 훌륭한 녹색 안료가 된다. 프탈로시안 안료는 인쇄잉크, 그림물감, 페인트, 락카 등 색소 재료로서 고가인 것이 많다. 레이온이나 아세테이트의 염색에도 사용된다. 이와 같이 고가인 안료도 우연과 통찰력에 의 한 발견 즉, 세렌디피티의 좋은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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