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 10년(927). 후당(後唐) 천성(天成) 2년, 거란(契丹) 천현(天顯) 2년. 봄 정월. 직접 백제(百濟)의 용주(龍州)를 정벌하여 항복시켰다. 당시에 견훤(甄萱)이 맹약을 어기고 누차 변방을 침공하였는데도 왕이 오랫동안 참았더니 견훤(甄萱)이 자못 병탄하려는 뜻을 가져, 왕이 이를 정벌한 것이다. 신라(新羅)의 왕도 병사를 보내어 조력하였다.
○견훤(甄萱)이 왕신(王信)의 시신을 보내왔다.
○3월. 왕이 운주성(運州城) 성주(城主) 긍준(兢俊)을 성 밑에서 패배시키고, 나아가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여름 4월. 해군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과 능식(能式) 등을 보내어 수군을 이끌고 가서 강주(康州)를 공격하고, 돌산(突山) 등 4개 고을을 함락시키게 하였다.
○왕이 웅주(熊州)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김락(金樂) 등을 보내어 대량성(大良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 명을 사로잡고, 그 성을 부순 후 돌아왔다.
○8월. 왕이 강주(康州)를 순행하기 위해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나가는데, 성주(城主) 흥달(興達)이 먼저 나서서 그 아들을 보내어 귀부하였다[歸款]. 이에 백제(百濟)가 배치한 성을 지키는 관리들도 또한 모두 항복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흥달(興達)에게 청주(靑州)를 녹읍(祿邑)으로, 그의 맏아들 준달(俊達)에게는 진주(珍州)를 녹읍으로, 둘째 아들 웅달(雄達)에게는 한수(寒水)를 녹읍으로, 셋째 아들 옥달(玉達)에게는 장천(長淺)을 녹읍으로 내려주고, 또 토지와 집도 주었다.
○배산성(拜山城)을 보수한 후, 정조(正朝) 제선(悌宣)에게 병사 2개 부대를 거느리고 지키도록 명하였다.
○명주(溟州)의 장군 순식(順式)이 아들 장명(長命)을 보내어 병사 600명을 이끌고 들어와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9월. 견훤(甄萱)이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불태운 후 나아가 신라(新羅)의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고 왕도(王都) 근처까지 핍박하였다. 신라(新羅)의 왕이 연식(連式)을 보내어 급박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시중(侍中) 공훤(公萱)과 대상(大相) 손행(孫幸), 정조(正朝) 연주(聯珠) 등에게 말하기를, “신라(新羅)는 우리와 우호관계를 맺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으니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공훤(公萱) 등에게 병사 10,000명을 이끌고 가게 하였다. 〈고려(高麗)의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는 갑자기 신라(新羅) 왕도로 들이닥쳤다. 이때 신라왕(新羅王)은 왕비, 빈첩[嬪御], 종친[宗戚]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 나가서 술자리를 벌이고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백제(百濟)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자 몹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왕비는 함께 성의 남쪽 이궁(離宮)으로 달려 도망하였지만,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관(樂官) [영관, 伶官]들은 모두 잡혔다. 견훤(甄萱)이 병사들을 풀어서 마음껏 노략질 하게 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앉았다. 좌우의 사람들로 하여금 신라왕(新羅王)을 찾아오게 한 후, 그를 군영 안[軍中]에 두고 핍박하여 자진하게 하였으며, 왕비를 강제로 욕보이고, 부하들을 풀어서 빈첩들을 겁탈하게 하였다. 마침내 신라왕(新羅王)의 사촌 동생인 김부(金傅)를 옹립하여 왕으로 세우고 왕의 동생 박효렴(朴孝廉)과 재상[宰臣] 영경(英景)을 포로로 잡았으며, 어린 아이들[子女]과 온갖 장인, 병장기(兵仗器)와 진보(珍寶)들을 모두 가지고 돌아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지냈으며, 직접 정예 기병(騎兵) 5천 명을 이끌고 가서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을 요격하였는데, 크게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견훤(甄萱)의 병사들이 왕을 에워싸 매우 위급한 상황이 되자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뭇 군사들도 패배하여 달아나고 왕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견훤(甄萱)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탈취하여 논밭과 들에 쌓인 곡식들을 모두 불태웠다. 왕이 두 사람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김락(金樂)의 동생 김철(金鐵)과 신숭겸(申崇謙)의 동생 신능길(申能吉), 아들 신보(申甫)를 아울러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신숭겸(申崇謙)은 광해주(光海州) 사람으로 용맹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항상 〈태조(太祖)를〉 따라 정벌에 나가 공을 세웠다. 후에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태조(太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겨울 10월. 견훤(甄萱)이 장수를 보내어 벽진군(碧珍郡)을 침공하고, 대목군(大木郡)과 소목군(小木郡) 두 곳의 벼를 베어버렸다.
○11월. 〈견훤(甄萱)이〉 벽진군(碧珍郡)의 벼이삭을 불태워버렸다. 정조(正朝) 색상(索湘)이 그 곳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12월. 견훤(甄萱)이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전에 신라(新羅)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족하(足下)를 왕경(王京)으로 불러들이고자 할 때, 마치 큰 자라의 울음소리에 작은 자라가 반응하듯 군신(君臣)이 서로 감응하는 것[黿鳴鼈應] 같았다. 이는 메추라기[안, 鷃]가 매[준, 隼]의 날개를 찢고자 하는 것이니, 반드시 백성[生靈]들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사직(社稷)을 폐허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조적(祖逖)의 채찍[祖鞭]을 잡아 홀로 한금호(韓擒虎)의 부월(鈇鉞) [한월, 韓鉞]을 휘두른 것이니, 〈신라(新羅)의〉 백관들에게 밝은 태양과 같이 맹세를 하고 의로운 기풍으로써 6부(部)를 타일렀던 것인데, 뜻하지 않게 간신들이 도망을 치고 나라의 임금이 훙서하는 변고가 있었다. 마침내 경명왕(景明王)의 사촌 동생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외손(外孫)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으니,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어진 임금을 다시 있게 한 것이 여기에 있다. 족하는 〈내가〉 충심으로 하는 말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단지 뜬소문만을 듣고는 온갖 방법으로 기회를 엿보아 〈우리를〉 침노하여 어지럽혔음에도 오히려 나의 말 머리는 보지도 못했으며, 나의 소의 터럭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전투에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하였고, 이달에는 좌상(左相)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죽임을 당한 자들이 허다하고 쫓기다 사로잡힌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강함과 약함이 이와 같으니, 승부를 알 만하다. 내가 기필하는 바는 평양(平壤)의 문루에 내 활을 걸고 패강(浿江)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오월국(吳越國)〉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조서에서 말하기를〉 ‘경(卿)이 고려(高麗)와 더불어 오랫동안 화호(和好)관계를 맺고 이웃나라로서의 맹약을 맺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근래에 양국의 볼모가 모두 죽은 일로 인하여 마침내 화친(和親)하던 예전의 우호관계가 깨지고, 서로의 강역을 침공하여 창과 방패를 거두지 않고 있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경(卿)의 나라에 이르게 하고 또 고려에도 문서를 보내니, 마땅히 서로 화친(和親)하여 영원토록 편히 쉬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나는 왕실을 높이는 의리가 돈독하고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은데, 이제 〈오월국(吳越國)〉의 조서를 받았으니, 곧 그 말을 받들고자 한다. 다만 족하(足下)가 싸움을 그만두자 하여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싸우고자 할까 염려되어 이제 그 조서를 베껴서 보내니, 유의하여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또 토끼[준, 㕙]와 사냥개[로, 獹]가 모두 고단하여지면, 끝내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며, 방합(蚌蛤, 조개)과 도요새[휼, 鷸]가 서로 버티면 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길도 잃어버리고 돌아갈 수도 없다’는 말을 경계로 삼아 후회를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라고 하였다.
○이 해에 임언(林彥)을 당(唐)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