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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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남도 서북 해안에 자리한 태안군(泰安郡)은 서산군과 접한 동쪽을 제외하고는 북으로는 가로림만, 남으로는 천수만, 서로는 서해와 접한 땅으로 흔히 태안반도(泰安半島)라 불린다. 태안반도 중심부를 동서로 지나는 금북정맥은 태안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산줄기다. 내륙은 저산성 구릉지로서 많은 산지가 개간지로 개발되어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리아시스식 해안은 만곡이 심하여 간척지로 개발되어 있다. 강이라 부를 수 있는 큰 물줄기는 없고, 대부분 금북정맥 부근서 발원해 바다로 흘러드는 10km 미만의 짧은 개천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530.8km며 12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분포되어 있다. 이중 유인도는 안면도(安眠島)를 비롯해 11개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반도이기 때문에 대체로 바다의 영향을 받지만,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직접 받아 같은 위도의 동해안 지방보다 오히려 춥다. 연평균기온 11.8℃, 1월 평균기온 -2.7℃, 8월 평균기온 25.6℃. 연평균강수량은 1,115mm로 50% 가량이 7월~9월에 집중된다. 면적 503.57㎢, 인구 66,0626명(2002년 12월31일 통계). 태안은 백제의 성대혜현(省大兮縣)으로서, 신라 경덕왕 때는 소태현(蘇泰縣)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운주(運州)에 속하였다. 이후 고려 충렬왕 때까지 소태현으로 계속 이어지다가 1298년 태안으로 바뀌었다. 1895년에 군으로 승격해 태안군으로 불리다가 1914년 해미군(海美郡)과 함께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면으로 격하되었다. 1973년 태안면이 태안읍으로 승격했고, 이북면 청산리·마산리가 원북면에, 안면면 간월도리가 부석면에 각각 편입되었다. 1980년 안면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안면읍 고남출장소가 고남면으로 승격되었으며, 1987년 이북면의 명칭이 이원면으로 변경되었다. 1989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산군 관할 중 태안읍·안면읍·고남면·남면(南面)·근흥면(近興面)·소원면(所遠面)·이원면 일원을 분할하여 태안군을 설치하는 동시에, 안면읍 죽도리(竹島里)를 홍성군 서부면(西部面)에 편입시켰다. 2003년 현재 태안읍·안면읍과 고남면·남면·근흥면·소원면·이원면·원북면의 2읍 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 접하고 있는 서산시는 내륙으로 연결되는 육상교통의 유일한 관문이며, 서쪽은 서해로 315km 나가면 중국의 산동반도에 이르게 되는데, 일찍 대륙문화가 이 서해를 통해 태안반도에 들어왔다. 특히 백제불교 문화의 선진 지역이 바로 태안이며, 또한 안흥항(安興港)은 일찍이 여송무역선(麗宋貿易船)의 기항지(寄港地)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고, 북쪽의 원북 청산리는 일찍 해상 교통이 발달하여 인천항(仁川港)을 내왕하는 정기 여객선이 1960년대까지 성업을 이루었으나 육상 교통의 발달로 인해 이미 해상교통이 두절되고 말았다. 동서로 연결되는 32번 국도가 서산시 인지면에서 태안읍 근흥면을 지나서 소원면의 만리포 해수욕장에 이르고, 남북을 잇는 77번 국도는 태안읍에서 안면도 영목항까지 이어진다. 이 외에 태안반도 서편을 남북으로 잇는 603번 지방도가 근흥면 신진도서부터 태안읍~원북면을 거쳐 이원면 만대 마을까지 이어지고, 634번 지방도는 원북면 소재지에서 학암포 해수욕장까지 원북면 북서쪽으로 이어진다. 해안선과는 달리 간단한 육상 교통망을 지니고 있다. 또 2001년 12월 서해안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됨에 따라 수도권에서 2~3시간이면 진입이 가능하게 되면서 당일 관광의 요지로 떠올랐다. 530.8km에 달하는 해안 중 대부분이 태안 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리아시스식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만리포·연포·몽산포·방포·영목·꽃지·삼봉 등 30여 개의 해수욕장과 안면도·안흥항·안흥성·신진도·백화산 등이 주요한 관광자원을 형성한다.
 | 금북정맥 금북정맥(錦北正脈)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황봉(1,058m)에서 뻗어내려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의 끝인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492m)에서 태안반도의 안흥진(安興鎭)까지 이어진 산줄기를 말한다. 금강의 서북쪽 울타리 역할을 하며, 남한의 중부권을 남북으로 나누는 금북정맥의 길이는 약 240km. 칠장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청룡산(400m)~성거산(579m)~차령~광덕산(699m)~차유령~국사봉 등 충남 땅을 가로질러 청양의 일월산(395m)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뻗으며 오서산(791m)~보개산(274m)~월산(395m)~수덕산(495m)~가야산(678m)을 빚고, 다시 서쪽으로 뻗으면서 팔봉산(326m)~백화산(284m)~지령산(218m)~안흥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애매한 부분이 많은 금북정맥에서는 독도를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지형도에 마루가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는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는 것보다 <산경표>의 원칙인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물길을 찾아보는 게 좋은 방법이다. 종주에 필요한 1:50,000 지형도는 근흥·만리포·서산·당진·홍성·대천·청양·예산·전의·평택·진천·안성·장호원·음성·미원·관기·속리. 1:25,000 지형도는 근흥·소원·태안·서산·운산·해미·덕산·홍성·나원·청양·대흥·유구·대술·광덕·의당·전의·천안·병천·서운·만승·죽산·생극·쌍정·음성·청안·미원·내수·은행·속리천·관기·상판·화북.
 | 고남 패총박물관 안면도 남쪽 고남면 고남리에 있는 고남 패총박물관은 2002년 4월에 설립된 역사유적 전문 박물관. 부지 7755㎡, 연면적 759㎡로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상설전시실, 역사실, 영상·기획전시실, 체험학습실 등의 시설이 있다. 주요 소장품은 빗살무늬토기 모형, 원삼국과 고려 토기 22점 등 유물 470여 점. 이 가운데 108㎡ 규모로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 석기 등 고남리 패총에서 출토한 1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 상설전시실에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디오라마와 터치스크린도 갖추고 있다. 또 33㎡ 규모의 역사실은 원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신시대의 토기·자기 등 22점을 갖추고 있다. 115㎡ 규모의 영상기획전시실은 태안에 분포한 문화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과 영상 자료가 있다. 고남리패총과 관련된 영상물을 시청할 수 있고, 무문토기편과 기와·산수문전 등을 탁본하는 체험학습실도 갖추고 있다. 관람시간은 09:00~18:00(동절기 17:00)이며, 관람료는 중학생 이상 700원, 어린이 500원. 매주 월요일과 1월1일·설날·추석 연휴에는 휴관한다. 전화 041-670-2337
안면자연휴양림 2002년 국제 꽃박람회가 열린 꽃지 해변 근처에 자리한 안면도 자연휴양림에는 토종 붉은 소나무 안면송이 군락을 이뤄 자생하고 있다. 곧게 뻗은 이 소나무들은 궁중의 궁재와 배를 건조할 때 많이 사용하였고, 경복궁을 지을 때도 사용했다. 터널로 연결되어 있는 산림수목원 숲에는 서어나무, 먹넌출, 말오줌때, 층층나무 등 안면도와 중부 해안 지역의 자생수종 203종 16,000본이 보존·관리되고 있다. 휴양림에는 통나무 숙박시설인 숲속의 집을 비롯해 산림전시관, 숲속교실 등의 자연학습장과 잔디광장, 어린이놀이터, 캠프파이어장, 물놀이장, 체력단련시설 등이 있다. 산림전시관에는 소나무를 이용해 배 만드는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구역면적 175만㎡으로 1992년에 개장했으며 하루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전화 041-674-5018~9
황도 붕기풍어제 안면도 동북쪽 끝에 자리한 황도는 면적 2.5㎢, 해안선 길이는 16km인 아담한 섬이다. 섬 전체가 해발 50m 미만의 구릉지. 1982년 황도교가 완공됨으로써 안면읍과 연결되었다. 황도 붕기풍어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이틀과 초사흘에 걸쳐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는 마을 축제. 아주 오랜 옛날 황도 어민들이 자욱한 안개 때문에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섬 어디선가 비치는 빛의 인도를 받아 무사히 귀향하게 되자, 빛이 시작된 곳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풍어제가 유래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뱀신을 모시다가 17세기 말엽부터 임경업 장군을 모시게 되었고, 이후 어업의 형태가 커지면서 더 많은 신을 추가로 봉안하였다. 8·15광복 후 각지에서 일어난 미신타파 운동의 일환으로 주민들에 의해 뱀신의 화상이 소각되고, 현재는 군왕을 중심으로 성주·사해(四海) 용왕장군·삼불·사해 오방장 등을 봉안하였다. 현재도 당집 등이 잘 보존되어 있고, 매월 정월 초이틀과 초사흘에 이곳에서 열린다. 붕기풍어제는 1977년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충남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전통 고기잡이 시설 ‘독살’ 밀물과 썰물의 간만의 차이가 크고, 오목하게 들어간 포구에 대나무, 싸리나무, 돌멩이 따위로 보를 쌓아서 고기를 잡던 원시적인 어로방식을 ‘어살’이라 한다. 여기에는 돌로 막은 ‘독살’, 대나무로 막은 ‘죽살’ 등이 있는데, 이 함정에 밀물로 인해 밀려온 고기들이 걸려들고, 썰물이 되면 물이 빠져나가면서 고기가 갇힌다. 독살은 서해안과 남해안에 많이 남아있는 형식으로, 독은 돌(石)의 충청도 사투리고 살은 그물을 뜻한다. 몽산포에서 2km쯤 북쪽으로 떨어진 인하대 수산연구소 뒤편의 굴혈포에 있는 굴혈 독살은 1812년 무렵에 만들어졌는데, 태안을 비롯한 서해안이나 남해안에 산재한 전국의 200여 개 독살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고 현재도 활용되고 있어 2002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태안반도에는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일리포 등에 10여 개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만리포와 천리포의 독살은 이미 사라졌고, 백리포와 십리포, 일리포 등의 의항리 독살은 아직도 그 윤곽이 뚜렷하다. 모래사장의 오른쪽과 왼쪽 끝을 보면 둥그렇게 쌓은 돌담 흔적을 볼 수 있다. 그중 의항 독살은 규모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주요 소득원이 되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굴을 채취하거나 배 타고 나가 고기를 낚기 때문에 효용성이 없어졌다고 한다.
 | 안흥성 금북정맥의 끝인 안흥진 뒷산에 위치한 안흥성(安興城)은 조선조 제17대 효종 6년(1655년)에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았으며 안흥진성(安興鎭城)이라고도 한다. 둘레 1,568m, 높이 3.5m에 이르는 석성으로 1979년 충청남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성안에는 대여섯 가구의 민가가 있고, 태국사라는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군사적 요새지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어 군사상 중요한 임무를 맡아보게 하였고, 뱃길로 조선을 찾은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기도 하다. 안흥성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안의 건물은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성곽과 동·서·남·북의 성문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동문은 수성루, 서문은 수홍루, 남문은 복파루, 북문은 삼성루라 불린다.
소근진성 소원면 소근리에 있는 소근진성(所斤鎭城)은 조선시대의 읍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1514년(중종 9년)에 성 둘레 2,165척으로 축성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에는 영조 당시의 수군 실태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서해 방비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면적 6,347㎡, 성의 둘레 630m, 높이 3m.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성이 폐쇄되어 성벽의 일부와 동문지 부근 110m 정도가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성벽은 바닥 너비 8m, 외벽 높이 4.4m, 내벽 높이 2m, 윗면 너비 1.7m. 성벽 안쪽은 군사들이 통로로 이용하기 위해 흙을 성벽 안쪽에 쌓았으므로 바깥쪽에 비해 얕으며, 동쪽 밖으로는 성벽에서 4.5m 떨어진 곳에 해자가 가설되었는데, 깊이 2.1m, 폭 6m다. 서벽은 성 내부가 바다에 접하면서 비교적 평평하며 서문지가 확인되는데, 문의 폭은 3.3m며, 이를 지나면 너비 7.6m의 도로가 보인다. 동쪽·남쪽·북쪽 벽은 해발 40~50m의 능선 위에 축조하였는데, 성외벽으로 가파른 비탈에 접해 있어 지정학적으로 천혜의 요새다. 동문·서문·북문의 흔적이 보이나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며, 동문지는 폭이 4.2m며, 북쪽 벽은 석축 5단이 남아 있다. 성에서 백자조각과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조각이 출토되었으며, 성안에는 우물 1곳이 있다. 1993년 충남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었다.
 | 옥파 이종일 생가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1858-1925)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으로 태안이 배출한 독립 운동가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5세에 상경, 김윤식, 이상재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2년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개화문명을 접하고 귀국하였다. 1894년 보성고교 교장에 취임했고, 1898년 대한제국민력회 회장, 제국신문 사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고종황제 탄신일 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오식(誤植),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그를 중상하는 측의 고의적인 행위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 <천도교회월보>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인쇄소 보성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3·1운동 때는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이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다 출옥, 3년간 ‘한국독립비사’를 집필했다. 또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도 이바지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86년 원래의 생가터인 원북면 반계리에 집을 복원하였고 사당은 1990년 완공하였다. 1994년부터 본격적인 생가지 복원 사업을 실시하여 주변을 정비하고 편의시설을 갖추어 놓았고, 옥파의 생전 업적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 등도 갖추었다. 충남기념물 제85호. 관람시간은 09:00~18:00(동절기 17:00). 관람료는 무료. 전화 041-670-2245
파도리 해옥전시장 파도리 해안을 유명하게 만든 해옥 장신구는 태안의 특산품.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의 멋이 물씬 풍기는 데다 특히 돌 속까지 색을 배게 하는 착색기법으로 사랑받고 있다. 전국 토산품 경진대회와 산업박람회 등에서 여러 차례 상을 타는 등 그 아름다움도 인정받았다. 가까운 일본과 대만, 그리고 서독, 미국, 캐나다 등지에도 수출한다. 해옥 전시장엔 반지, 목걸이, 팔지, 귀걸이, 열쇠고리, 염주 등 앙증맞은 액세서리서부터 꽃나무, 등잔, 거실탁자 등 덩치가 큰 것까지 수십 종에 이른다. 지난 84년에는 자연석 가공에 의한 특허를 얻어내기도 했고, 99년에는 월드컵 관련 생산 유망기업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0~3,000원 정도면 앙증맞은 해옥을 구입할 수 있다. 전화 041-672-9898
천리포수목원 천리포 해안에 위치한 천리포수목원은 1979년에 귀화한 민병갈(閔丙渴· Carl Ferris Miller·1921-2002)씨가 1962년 구입한 사질 토양의 6,000평의 임야를 기반으로 이룩한 국내 최대 규모의 민간 수목원이다. 현재 국내의 자생 수종을 비롯해 미국 등 60여 개국으로부터 수집된 식물들은 목련을 비롯하여 약 6,686종에 이른다. 그동안 국내 모든 관련 분야와 학과의 전문인들에게 연구와 실험자료로서 활용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식물자원의 가치와 그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약 60ha(18만평)으로 이루어진 천리포수목원은 크게 7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의 토질·기후, 기존 식물상 등 다양한 자연환경에 따라 종류별로 적절히 배치관리하고 있다. 주요 수종은 목련속 약 400종, 감탕나무속 370종을 비롯해 침엽수 종류와 매자나무속, 진달래속, 참나무속, 단풍나무속, 분꽃나무속, 녹나무과 등이다. 천리포수목원은 식물 관련학과나 관련 기관의 교육과 연구목적을 위한 경우와 후원회 회원에 가입한 사람에게만 개방한다. 전화 041-672-9310, 672-9983 홈페이지 www.chollipo.org
 | 신두사구 태안반도 서쪽 원북면 의항리 신두리 해안의 모래 언덕으로, 길이 약 3.4km, 너비 500m~1.3km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다. 사구의 원형이 잘 보존된 북쪽 지역 일부가 2001년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되었다. 신두리 해안의 만입부에 있는 사빈(砂濱)의 배후를 따라 분포하는데, 겨울철에는 강한 북서풍의 영향을 받는다. 인접 해역이 대체로 모래로 구성되어 있어 간조 때가 되면 넓은 모래 갯벌과 해빈이 노출된다. 모래가 바람에 의해 갯벌과 해빈에서 육지로 이동되어 사구가 형성되기에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다.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데다 멸종 위기종인 금개구리를 비롯해 표범장지뱀, 무자치, 갯방풍, 갯메꽃 등 다양한 식생 분포로 자연환경적 보존가치가 높다. 2002년 해양수산부는 신두사구 주변 해역 0.64㎢를 해양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태안마애삼존불 태안의 진산인 백화산에 자리한 태을암 동쪽 50m 지점에 있는 자연 암벽에 조각된 불상. 남북으로 보살입상을 새겼으며, 중앙에 낮은 보살입상을 끼워 조각하였는데, 보살은 양손으로 보주를 받들고 머리에 삼산보관을 썼다. 양쪽 불상의 바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약합을 들었고, 어깨는 넓고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장방형의 얼굴에 귀가 길어 어깨에 닿았고,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표현되었다. 2여래 1보살 형식으로 높이는 왼쪽 불상이 2.07m, 오른쪽 불상이 2.09m, 중앙 보살이 1.3m이다. 1966년 보물 제432호로 지정되었다. 마애불의 기원은 서기전 3~2세기 경의 인도 아잔타나 엘로라 등의 석굴사원에서 볼 수 있고, 중국의 윈깡룽먼 등의 석굴사원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태안의 백화산 중턱에 있는 태안마애삼존불이 초기의 것이라 한다. 백제는 태안마애삼존불을 통해 마애석상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인접한 서산마애삼존불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굴포조거 고려시대 지방에서 걷은 조세를 선박을 이용하여 운송하는 조운(漕運)제도가 정비되면서 태안반도는 위정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삼남(三南)의 세곡은 모두 서해를 통하여 보령 앞바다~태안 안흥량~당진 난지도를 경유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태안반도 앞바다인 안흥량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유속이 빠른 데다 암초도 많아 사고가 빈번하였다. 이는 재정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운하(運河)였다. 태안과 서산 사이의 금북정맥 산줄기를 파내고 운하를 만들면 안흥량을 전혀 거치지 않고도 바로 당진의 난지도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 운하공사는 고려 때인 1134년(인종 12년) 처음 시도했다. 하지만 이때는 10여 리를 파냈지만, 7리 정도만 남겨놓고 중단하였다가 1391년(공양왕 3년)에 다시 굴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지하에 암반이 깔려 있고 뻘흙을 개착하는 과정에서 조수에 밀려 계속 막히자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고려시대에 두 차례 실패하였던 운하 공사는 조선 태조 4년에 있었던 경상도 조운선 16척의 난파를 계기로 다시 논의되었지만, 지하에 암반층이 있어 굴착이 어렵다는 이유로 중지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안흥량에서의 사고가 이어지게 되자 태종 12년 이전과는 달리 갑문식(閘門式)과 유사한 형태의 운하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2월에 공사를 완공하였다. 이 방법은 5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물길을 연결시키는 방법이었는데 저수지의 규모가 작아 소규모의 배 1척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 조수간만의 차로 실제 배가 운항할 수 있는 일수가 며칠 되지 않았다. 또한 조운선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조곡을 몇 차례 옮겨 실어야하기 때문에 효용성이 많이 떨어졌다. 때문에 태종은 태안에 두 차례나 순행하는 등 운하의 개축문제에 고심하였으나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 후 이 문제는 적극적으로 논의되지 않다가 중종 때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 고형산의 건의에 의해 1522년(중종 17년)에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는 차선책으로 소원면 의항리 일대에서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공사도 착공 4개월만에 중단되었고, 1537년(중종 32년)에 다시 시작해 6개월만에 준공했으나 조수가 제대로 넘나들지 못하여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 대안으로 1638년(인조 16년)에 현재 안면도 북쪽의 개미목(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을 뚫는 데 성공했다.
마검포 실치회 실치회(뱅어회)는 봄철 모내기를 전후해 맛을 볼 수 있다. 보통 3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 달포 동안 맛볼 수 있고, 5월에 잡히는 것들은 뼈가 생겨 회로 먹기에는 좋지 않기 때문에 뱅어포로 만들어 반찬으로 활용된다. 주로 2톤짜리 소형 어선으로 잡는 실치는 말 그대로 2~5cm 사이의 실처럼 가늘고 조그만 생선으로 살아있을 때는 뱃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성질도 급하고 연약해 그물에 잡힌 지 채 1분도 안돼 바로 죽는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나면 투명하던 살색도 하얗게 변하고 한나절이 지나면 맛이 가기 시작한다. 실치회를 마검포 현지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실치가 가장 많이 잡히고 맛있는 시기는 4월이다. 이때가 되면 마검포 앞바다는 실치잡이배들로 새벽부터 불야성을 이룬다.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3시쯤, 적막을 깨고 활기차게 출어한 선박들은 서너 시간 동안 그물질을 한 후 오전 7~8시경 실치를 가득 싣고 마검포항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마검포항은 각지에서 가장 싱싱한 실치회를 맛보려 몰려드는 사람들로 다시 활기가 넘친다. 설치회는 각종 양념과 야채에다 초고추장을 듬뿍 뿌리고 배를 잘게 썰어 넣어 새콤달콤한 맛을 낸다. 입에 넣으면 술술 넘어가는데, 다른 생선회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맛이 난다. 3~4인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1kg에 20,000원선이다. 마검포 항구에 선창횟집(041-674-6270)과 바다횟집(041-674-6563) 두 집이 있다.
 | 박속낙지탕 원북과 이원의 별미인 박속낙지탕은 원래 ‘밀국낙지탕’으로 불렀다. 옛날 밀과 보리가 나오는 계절에 맷돌로 밀을 갈아 칼국수와 수제비를 떠 국물을 내고 갯벌에 넘쳐나던 낙지를 넣어 먹던 것이 밀국낙지탕이다. 그러다 20년쯤 전부터 원북과 이원 지역에서 흔한 박의 속을 넣어 먹으면서 박속낙지탕으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했다. 보통 5~7월에 잡히는 7~10cm 정도의 어린 세발낙지를 박속과 양념을 넣고 끓인 물에 살짝 익힌 후 낙지는 건져서 먹고, 낙지의 맛이 우러난 국물에 칼국수나 수제비 등을 넣어 익히면 담백한 박속과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낸다. 낙지 낚시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제일 많이 하는 것은 능젱이(칠게)를 미끼로 만들어 배를 타고 나가는 ‘주낚’이다. 낚싯줄에 능젱이를 묶어 바닷물에 던지면 갯벌에 숨어있던 낙지가 미끼를 문다. 이 때 줄을 거두면서 낙지를 잡는 것이다. 또 간조 때 삽이나 호미로 갯벌을 파서 잡는 ‘삽낚’, 밤에 횃불을 켜고 잡는 ‘횃불낚’이 있다. 박속낙지탕은 원북면 소재지의 원이식당(041-672-5052), 삼거리한우식당(041-672-4540) 등이 잘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