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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구와 아이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영조 79권, 29년(1753 계유년 / 청 건륭제 18년) 6월 3일(정해) 3번째 기사) 지평 이상윤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동성을 개축할 때 동문에서 수구문까지의 거리가 1리입니다. 근래 여역과 두진으로 죽은 남녀가 몇 천 명인지 모를 정도인데 이들을 모두 그 사이에다 묻었습니다. 이제 감독하는 사람이 잘 살피지 못한 탓으로 성을 개축할 즈음 수천 개의 남녀 무덤에서 발굴된 뼈를 수십 개의 구덩이를 파고서 묻었는데, 해골과 몸뼈가 부러지고 부서져 머리와 발이 위치가 바뀌어져 그 낭자하게 전도된 꼴은 차마 볼 수가 없는 정도였다고 하니, 이것이 재이를 부르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하니, 비답하기를,“듣고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감예관을 해부로 하여금 나처하게 하라.”하였다.
[1]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2] 당시엔 황충(蝗蟲)이라 불렀다. 아니, 메뚜기보다 더 질긴 것이 황충이다. 이른바 누리 떼.
[3] 극심한 굶주림 이후에 함부로 음식을 먹을 경우 소화를 못하고 사망한다. 기록에도 흉년에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할 때 쇠약해진 몸이 소화할 수 있는 묽은 죽과 같은 음식부터 주라고 되어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9부 강제수용소 해방 장면을 보면 유사한 상황이 나온다.
[4] 호적에 등록된 인구보다 양반의 외거노비로 들어간 인구나 유랑민이 상당했다.
[5] 경상도, 평안도는 각각 사신 문제로 논외였고 함경도는 아예 거두질 않았다.
[6] 모피와 그것으로 만든 방한용 모자는 조선 후기 조선이 청에서부터 수입한 대표적인 물품이었다. 개간이 활발해지면서 모피를 얻을 만한 야생동물이 줄었을 뿐더러 소빙하기로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 한편으로 17세기 후반 쯤에는 주변국의 수요 상승, 조선 내의 자연삼 고갈 등으로 조선 내에서 인삼을 찾기 힘들어졌고, 만주로 향하는 발걸음이 18세기 재배삼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 엔하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