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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01.21 지정)
제211호 : 도산서원상덕사부정문및사주토병(陶山書院尙德祠附正門및四周土병)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이황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상덕사를 드나드는 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은 상덕사를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으로 앞면 기둥은 계단 높낮이때문에 다른 기둥보다 길이가 길다. 정문 양옆으로 사당 주위를 둘렀던 토담은 1969년 보수공사 때 돌담장으로 모두 바꾸었다. 간결하고 매우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시대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제212호 : 관룡사대웅전(觀龍寺大雄殿) 창녕
관룡사는 통일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경치가 좋기로도 유명하다.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다 갑자기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 이 관룡사 대웅전엔 비로자나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1965년 8월 보수공사 때, 천장 부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은 조선 태종 1년(1401)에 짓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고쳐 세워, 이듬해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가운데부분을 한층 높게 한 점이 특이하다.
제213호 : 삼척죽서루(三陟竹西樓)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도 천장의 구조로 보아 원래 다른 형태의 지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지만 재료 형태는 다른 양식을 응용한 부분이 있다. 또한 기둥을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춰 직접 세운 점도 특이하다.
이 누각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년(1711)에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주변 두타산의 푸른 숲,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있어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제214호 : 강릉문묘대성전(江陵文廟大成殿)
강릉향교는 옛 성현께 제사를 드리고 학문을 갈고 닦는 곳으로, 성균관을 제외한 지방 향교로는 규모가 가장크다. 고려 충선왕 5년(1313) 강릉 존무사(存撫使)였던 김승인이 세웠다. 조선 태종 11년(1411)에 불에 타, 2년 뒤 강릉도호부판관 이맹상의 건의로 다시 세웠고 몇 차례에 걸쳐 수리를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태종 13년(1413)에 지은 것으로 공자를 비롯해 중국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간결하게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은 바닥에 판석을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이 지방의 많은 선비와 학자를 배출한 강릉향교의 제사 공간을 대표하는 전통깊은 건축 문화재이다.
제215호 : 북한산구기리마애석가여래좌상(北漢山舊基里磨崖釋迦如來坐像)
거대한 바위면에 홈을 약간 판 다음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으며, 머리 위에는 8각의 머리돌을 끼워 넣어 얼굴을 보호하고 있다.
다소 딱딱해 보이지만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에는 단정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몸은 건장하고 당당하지만 각이지고 평판적인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어서 경직된 모습이 나타난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으며, 왼팔에 새겨진 옷주름에서는 기하학적인 추상성이 엿보인다. 손은 왼손을 배부분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고 있는 모습이고,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에는 화사한 연꽃 무늬가 겹쳐서 새져져 있다.
강한 느낌의 얼굴, 평면적인 신체 등의 전통적인 양식에 다소 추상성을 가미하면서 웅대하게 변모시킨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마애불좌상으로 높이 평가된다.
제216호 : 법주사마애여래의상(法住寺磨崖如來倚像)
높이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양각된 이 여래좌상(如來坐像)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椅像)으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함께 법주사(法住寺)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彌勒佛像)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 길고 큼직한 코,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 꽉 다문 두꺼운 입술 등은 길다란 귀, 삼도(三道)의 표현 등과 함께 고려(高麗) 초기(初期) 마애불(磨崖佛)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넓은 어깨에 비해서 유난히 잘쑥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水平的)으로 처리한 조각수법(彫刻手法)에서도 나타난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가슴에서 양다리 사이로 유려한 곡선을 이루며 부드럽게 처리하였으나 도식화(圖式化)된 경향이 엿보인다.
이 불상(佛像)의 오른쪽에 음각(陰刻)된 마애조각은 선사시대(先史時代) 암각(岩刻)이라는 일설(一說)도 있지만 의신조사(義信祖師)가 불경(佛經)을 실어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佛法)을 구하였다는 내용의 법주사의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하여튼 이 불상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 주는 주존(主尊) 미륵불(彌勒佛)로 중생(衆生)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고 있다.
제217호 :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大鳥寺石造彌勒菩薩立像) 부여 대조사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대한 석조미륵보살의 하나로 논산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가 10m나 되는 거구이다.
머리 위에는 이중의 보개(寶蓋)를 얹은 네모난 관(冠)을 쓰고 있으며 보개의 네 모서리에는 작은 풍경이 달려있다. 관 밑으로는 머리카락이 짧게 내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머리모양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도 마찬가지이다. 얼굴은 4각형으로 넓적하며, 양쪽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이 작아서 다소 기이한 느낌을 주지만 관촉사 보살보다는 덜하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데 매우 투박한 모습이다. 팔의 윤곽은 몸통에 붙여 옷자락으로 겨우 표현되었고, 손도 간신히 나타냈는데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어 연꽃가지를 잡고 있다. 보살상 앞에는 제사 음식을 차려 놓기 위하여 판판한 돌을 마련해 놓았다.
전반적으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과 함께 동일한 지방양식을 보여주는 보살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제218호 :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일명:은진미륵, 논산
제219호 : 개태사지석불입상(開泰寺址石佛立像) 논산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태조 19년(936) 격전지에다 세운 사찰이다. 이 삼존석불은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의 본존불은 민머리에 얼굴이 둥글지만 평면적이고 귀는 길게 늘어졌다. 어깨와 가슴은 투박하게 만들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만들었는데 지나치게 둔중하다.
왼쪽의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왼쪽의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얼굴이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터운 삼도(三道)가 있다.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만든 작품이며, 고려 초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우수한 작품에 속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제220호 : 영주북지리석조여래좌상(榮州北枝里石造如來坐像) 부석사
제221호 : 영주가흥동마애여래삼존상및여래좌상(榮州可興洞磨崖如來三尊像 및 如來坐像)
이 불상은 강가 바위면의 중앙에 앉아 있는 불상 좌우로 서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긴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이다.
중앙의 중심되는 불상은 상당히 큼직한 체구로 장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큼직한 코, 꽉 다문 입, 팽창된 뺨 등 활기찬 얼굴 표현과 당당한 어깨, 듬직한 가슴, 손 모습은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법의는 양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린 통견의(通肩衣)로 장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두 보살상도 마찬가지다. 생기있는 얼굴이나 초기적 삼곡자세(三曲姿勢) 등에서 새롭고 사실적(寫實的)인 경향을 엿보게 한다.
자연 바위를 이용한 연꽃과 불꽃 무늬 등을 새긴 광배와 높게 돋을 새김한 연꽃대좌 등은 장중한 불상 특징과 잘 조화되어 더욱 듬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의 조각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실주의적인 불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제222호 : 합천치인리마애불입상(陜川緇仁里磨崖佛立像)
거대한 바위를 다듬어 불상을 고부조< 高浮彫 >하고 발 아래 대좌< 臺座 >를 마련한 이 불상은 머리 뒤에 원형두광< 圓形頭光 >을 얕게 새기고, 나머지 부분을 신광< 身光 >으로 처리한 석주형< 石柱形 >의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얼굴과 두 손을 정교하게 조각한 반면 불신< 佛身 >은 마치 석주< 石柱 >에 새긴 듯 옷주름 등을 간략하게 처리했다 육계< 肉계 >가 높직한 소발< 素髮 >의 머리, 꼬리가 올라간 눈, 융기된 인중이 뚜렷한 비만한 얼굴, 건장하나 평편적인 가슴에 보이는 승각기< 內衣 >, 당당한 왼쪽 어깨에 나타난 고리장식 등은 9세기 초로 추정되는 백률사< 栢栗寺 > 금동약사불입상< 金銅藥師佛立像 >(국보 제28호)과 비교되는 당대의 걸작품이라 하겠다.
제223호 : 도피안사삼층석탑(到彼岸寺三層石塔) 철원
제224호 : 비인오층석탑(庇仁五層石塔) 서천
지방적인 특색이 강했던 고려시대의 탑으로, 옛 백제 영토에 지어진 다른 탑들처럼 부여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하였는데, 특히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은 목조건축의 기둥과 벽과 같이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를 판판한 돌을 세워 막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을 기단에서처럼 기둥과 벽을 따로 마련하여 세워 놓았는데, 각 면의 모습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몸돌 위로는 지붕돌을 얹기 전에 지붕받침을 2단 올려놓았는데 그 모습이 정림사지5층석탑을 떠올리게 한다. 1층 몸돌의 각 기둥들이 아래로는 기단을 누르고, 위로는 지붕받침을 이고 있어, 마치 신을 신고 관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백제계 석탑양식의 지방분포에 따라 그 전파 경로를 알아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제225호 : 신륵사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 여주
이 탑은 흰 대리석(大理石)으로 만든 방형(方形)의 일반형 석탑으로서 기단부(基壇部)는 2층을 이루고, 상하의 갑석(甲石)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또한 기단 면석(面石)에 장식되어 있는 용무늬(龍紋)와 구름무늬(雲紋)는 뛰어난 조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대리석에서 오는 질감은 이 탑을 더욱 우아하게 돋보이게 한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되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이 석탑은 조선(朝鮮) 성종(成宗) 3년(1472)에 건립된 것으로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우수한 탑의 하나이다.
제226호 :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제227호 : 창녕탑금당치성문기비(昌寧塔金堂治成文記碑)
이 비석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인 9세기 초의 불찰(佛刹) 조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특수한 비석이다.
인양사(仁陽寺)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이 있는 여러 사찰의 범종(梵鐘), 탑(塔), 불상(佛像), 금당(金堂), 요사(寮舍) 등의 조성연대와 소요된 양식(糧食)을 낱낱이 기재하고 있다. 그것은 신라(新羅) 혜공왕(惠恭王) 7년(771) 인양사 종을 주조한 일로부터 이 비석을 세운 원화(元和) 5년, 즉 신라 헌덕왕(憲德王) 2년(810)까지 40년간에 베풀어진 일의 내용이다. 특히 비 뒷면에는 승상(僧像)이 양각되어 있는데 이는 사찰조성에 관련된 당시의 고승을 기리기 위해 새긴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승상은 동안(童顔)의 자비로운 모습이며 인체를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수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비석에는 이례적으로 옥개형(屋蓋形)의 머릿돌을 얹어 놓았는데 그 크기가 지나치게 커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는 의문이다. 비석은 화강석이며, 높이 159cm, 폭 45cm이다.
제228호 : 신륵사보제존자석종(神勒寺普濟尊者石鐘)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제229호 :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제230호 :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제231호 :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神勒寺普濟尊者石鐘앞石燈)
제232호 : 관촉사석등(灌燭寺石燈)
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전체적으로 뒤에 서 있는 석불 못지않게 힘차 보이나, 화사석의 네 기둥이 가늘어 균형이 깨지고, 받침의 가운데기둥이 너무 굵고 각이 없어 그 효과가 줄어든 감이 있다. 뒤의 석불 즉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화엄사각황전 앞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 (높이 5.45m)
제233호 : 무량사석등(無量寺石燈) 부여
무량사 법당 앞뜰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받침돌은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받침은 기둥으로 길게 세워져있으며 그 위로 연꽃이 새겨진 윗받침돌이 놓여 있다. 화사석은 8면 중 4면은 넓고, 4면은 좁은 형태로, 넓은 4면에 창이 뚫려 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의 치켜올림과 처마의 경사가 잘 어울려 경쾌한 모습을 보여 주며, 꼭대기에는 자그만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전체적으로 지붕돌이 약간 큰 감이 있으나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움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래·위받침돌의 연꽃조각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화려한 연꽃무늬와는 차이가 있고, 각 부분이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제234호 : 옥구발산리석등(沃溝鉢山里石燈) 군산
제235호 : 장의사지당간지주(莊義寺址幢竿支柱) 서울 승가사,
제236호 :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 익산
제237호 : 청자순화4년명호(靑磁淳化四年銘壺) 이화여대박물관
고려 태조의 태묘 제1실의 향을 피우던 높이 35.2㎝의 항아리로 최길회가 만들었다.
『고려사』에 보면 태묘는 고려 성종 8년(989) 4월 15일에 착공해서 성종 11년(992) 12월 1일에 만들었으며, 이 항아리는 태묘가 준공된 이듬해인 ‘순화 4년〈성종 12년(993)〉’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에 태묘 터가 있지만, 이 항아리의 출토는 알 수 없다. 항아리의 굽 밑에 ‘순화 4년…’으로 시작되는 18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유색은 청자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은 담록빛을 띠는 회색 계열이며, 바탕 흙은 회백색의 자기에 가깝다.
형태와 유약 등의 특질을 보면 중국 당나라 후기 5대의 중국 월주 청자의 여운을 짙게 풍기고 있으며, 고려 청자가 만들어지는 초기의 상황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유물이다.
제238호 : 백자박산향로(白磁博山香爐) 간송미술관
송대(宋代) 중국 경덕진요산(景德鎭窯産)의 청백자(靑白磁)이다. 윤택있고 맑은 청백유(靑白釉)가 전신에 두껍게 씌워져 있으며, 빙렬(氷裂)도 거의 없어서 경덕진요(景德鎭窯) 중에서도 뛰어난 유조(釉調)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형태는 중국 한대(漢代)의 박산향로(博山香爐)를 단순화시킨 것으로서, 화사(火舍)에는 밖으로 휜 토끼 꼬리 모양의 3족(足)이 붙어 있고, 뚜껑은 둥근 반구형(半球形)의 중첩된 산악형(山岳形)을 이루고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부정형(不整形)의 다각광망형(多角光芒形)을 이룬 큰 기공(氣孔)이 있고 이를 중심한 둘레의 일곱 군데에 쌍엽형(雙葉形) 풍혈(風穴)이 있어서 순조롭게 향연(香煙)을 발산하도록 되어 있다. 고려(高麗)시대 고분(古墳)에서 고려청자들과 같이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에서는 아직도 고려산(高麗産) 백자(白磁)로 추정하고자 하는 의견이 있으나 이를 확증할 자료가 희박하다.
제239호 : 상감초화문병(象嵌草花文甁) 영남대학교
조선 초기에 제작된 분청사기 병으로 높이 28㎝, 아가리 지름 5.8㎝, 밑지름 17㎝이다.
이 병은 면상감법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면상감법이란 청자상감이 분청사기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나온 새로운 장식기법의 하나이다. 몸통에는 힘차면서도 거침없는 솜씨로 덩굴 꽃무늬를 흰색으로 상감하고, 꽃잎과 덩굴 사이에는 선명한 검은 색을 상감하여 흰 면상감의 특이한 효과를 더하고 있다. 담녹색의 투명한 광택이 흐르고 있고, 어두운 회색빛 바탕 흙의 질감 위에 상감 문양이 맑게 어우러져 투시되고 있다. 전체 형태는 몸통이 둥글고 허리가 가늘며, 굽다리가 넓다. 조선 초기 특유의 곡선을 이루는 것이 고려 시대의 반듯하고 아담한 매병 양식에서 조선 초기 양식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240호 : 백자투조모란문호(白磁透彫牡丹文壺)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