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북유럽 원주민 켈트족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가시나무새가 있다. 이 가시나무새는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로 그 울음소리는 이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아름답다고 한다.
그 새는 알에서 깨어나 둥지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단 한 번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가시나무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가시나무를 발견하면 가장 길고 날카로운 가시에 몸을 날려 가슴을 찔려 붉은 피를 흘리며 생명이 다 하는 순간까지 고통을 참아가며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새소리보다 아름답고, 그 무엇도 따를 수 없는 절묘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다.
사람은 즐거울 때는 미소를 짓거나 소리 내서 웃고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 내어 울을 수 있다. 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감정의 소리고 표정이다. 웃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울고 있는 모습은 보기 좋은 건 아니지만 눈물과 울음은 사람에게 웃음만큼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예로부터 남자는 평생 두 번 울어야 한다고 했다. 그 첫 번째는 태어났을 때고 두 번째는 부모님이 돌아갔을 때라고 한다. 여기에 운이 나빠서 나라가 망했을 때라면 세 번을 울어야 한다고 했다.
태어날 때야 영문도 모르고 울었을 것이고 부모님이 돌아가셔 장례를 치르면서 어느 누구에 눈치 볼 것도 없이 슬픔을 마음껏 쏟아 놓으며 울 수 있는 때며 장소다.
옛 장례문화는 상가에서 망자의 죽음을 슬퍼할 울음소리가 나야 당연했고 또한 형식에 맞추어 곡(哭)을 하며 울었다. 아울러 곡소리가 크고 적음이 바로 그 집의 위세를 가늠해 주기도 한다.
곡(哭)이 결국은 산 자를 위한 것일 뿐, 죽은 자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그런 곡소리마저 듣기 힘들다. 망자(亡子)에 대한 슬픔이 적어져서 그런 것일까? 곡소리가 나야 할 장례도 드물어졌다,
애이고(哀而苦. 슬프고 괴롭다는 뜻)하는 곡을 상주들이 음률에 맞추어 하다나면 눈물이 절로 나고 부모님이 생전에 베푼 일들이 주마등처럼 생각나서 더욱 경건해지고 슬퍼지는데 남자는 평생을 참아왔던 울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게 된다. 이렇게 크게 곡을 하며 울고 나면 삶에 찌들어 막혔던 숨통이 뻐근하게 터져 나오고 온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마져도 내 집이 아닌 장례식장이라는 공공장소에서는 크게 곡을 하며 울 수도 없다. 또한 삼년상(초상 소상. 대상)을 치르지 않고 대개 49제로 탈상을 하니 곡을 한다 해도 얼마 할 수 없다.
초상집에 상주들이 섧게 울면 정도 많고 눈물이 유독 많은 민족이라 동네 아낙들도 따라서 울던 모습도 많이 보아 왔는데 이제는 웃을 일은 많고 울 일은 별반 없어서인지 모두들 눈이 안구건조증에 걸린 것만 같고 인정도 점점 메말라 가지 않나싶다.
실컷 소리 내서 울고 나면 몸속에 서러움의 찌꺼기도 배출되고 근심 걱정도 희석될 것 같은데, 남자가 울 수 있는 기회마저 없어져가서 울지도 못하는 가시나무새가 되어간다.
※ 편집자 주 : 칼럼의 내용은 홍천인터넷신문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
첫댓글 가시나무 너무 애절하고
인타까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