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가 되면서 감기 등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한산이문 모든분들의 문중에 건강하고 안녕이 있기를 바랄분이다
강동파 초고편 이후 휘 현정 선조님의 인연편등 휘 현정선조님을 더 다루고 더많은 내용을 2탄으로 이어가고자 하였지만 다음편을 위해 남겨 두고자한다
오늘의 2탄은 약와 휘 현정의 자식중 일부만 게시하려고 합니다
1탄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유견문의 저자 류길준을 언급한적이 있다 바로 외조부가 한산이씨 휘 경직이기 때문이다
항일의병으로 가기위해 잠시 언급 드리면 휘 경직은 명성황후 시해 후 같이 졸한 충절의 위인이시다
1895년 10월 을미의병 乙未義兵 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며 청일전쟁 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시행에 분격한 유생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 아래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일으켰다고 한다 바로 한산이문 휘 경직과 명성황후 외가가 한산이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기타 >
한산이씨 목은 휘 색의 손주중 판중추공파 휘 맹진의 후손들은 현달하여 정조시대 강동파 시조 약와 휘 현정까지 500년 가까이 정 3품 이상의 세대를 이은 관직을 대대로 이어온 대유방가이며 누구도 이보다 현달한 가문은 조선 역사상 다섯 손가락도 안될정도로 찾아보기가 힘들다
위 내용은 자랑도 아닌 가공한것 없는 사실이다
한산이씨 해산공파 시조 휘 문영 선조님이 안동 하회 마을 풍산 류씨 서애 휘 성룡의 따님(여식)과 통혼후
차자이신 수은공파 안동입향조 휘 홍조의 이야기도 이제는 익숙하다
그러면 혹시 지금은 잘 사용하지않고 누구나 만들어 사용하는 호 號의 의미를 우리는 잘 알고 있을까 ?
사실 글을 작하는 본인도 완벽하게 잘 알지못한다
중국은 아직도 일상 및 특히 비즈니스할때 이름을 사용하면 안되고 꼭 성씨를 사용해야 된다고 한다
그만큼 선조님이 부르고 지어준 성명은 누구라도 한부로 부를 수 없다
잠깐 사전적 백과 사전 정의를 살펴보면
본이름이나 자(字) 외에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 내용 호는 2종 이상의 이름을 가지는 풍속[複名俗], 또는 본이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實名敬避俗)에 그 근원을 두고 있고
중국의 경우, 호의 사용은 당대(唐代)부터 시작하여 송대(宋代)에는 보편화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되었고 추사김정희(金正喜)는 오제봉(吳濟峯)이 조사, 수집한 ≪추사선생아호집 秋史先生雅號集≫에 의하면 무려 503개나 된다고 한다
그러데 왜 갑자기 주제와 관련 없는 신암 휘 병하와 설죽 휘 병은 이야기를 안하고 호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 하실 것이다
이제 그 실마리로 가고자 한다
해산공파 파보책 1988년 안동 수은공파 일명 소호문중 두번째 족보책을 보면 특이할만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혹시 자세히 보면 앞쪽 행장 뒤 요약하여 세대별 이름만 나온것이 몇 장되고 그뒤쪽 몇장지나고 부터 인물 한분씩 세부적인 내용이나온다
요약 이름중 옆에 호가 나온다 그런데 어떤 요약자은 호가 없는 세파도 보인다
물론 세부 인물에는 호는 나온다
이곳에 엄청난 비밀이 있는 것이다
바로 문중의 발전및 헌신 현달등 다방면에서 뛰어나신 분 앞에는 호를 붙여 요약본에 반드시 후손들이 참조하고 본받아야 할 분들인 것이다
간혹 우리가 아는 업적에 비해 호가 요약본에 없는 사례도 있지만 정확하게 문중에서는 파악하여 요약본에 넣었다고 나름 유추해 본다
수은 공파 중 가장 호가 많고 화려한 파는 휘 효제의 첫째자 석관의 자 휘 태화의 자중 첫째 자 휘 후정( 수은종택 ) 셋째 자 휘 상정(대산종택)이며 그 중 휘 병원의 위 아래가 가장 거대하다 높은 관직은 휘 돈우 휘 돈욱 파도 있다 물론 휘 후정 휘 상정 대산 계보이다
넷째 아들 소산 휘 광정계보는 아들 휘 우 이후 호가 요약본에는 없다
그다음 계보는 휘 효제의 넷째자 휘 석보의 자 중 첫째 자 휘 재화( 후사 휘 현정이 이음) 둘째자 휘 명화(현정의 생부)의 첫째 자 휘 현정의 후사계보이다
이외의 계보중에서도 위대하신분이 엄청 많고 다루지 못한 분도 많이 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가공은 없다는 점을 참조 바라며 안동의 인물 요약본을 보면 대략 가공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강동파의 시조 휘 현정의 생부는 휘 명화이며 명화의 형이신 휘 재화가 통혼 후 일찍 졸하여 재화의 후사를 이었다
생부인 휘 명화는 자로 현정 사정 술정 택정등의 아들을 보셨는데 네 아들분이 모두 현달하고 그 네분의 손주들 역시 현달하여 생원 및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보를 이어간다
지면상 중략하였고 저자의 가계보만 논하여 자화자찬이 될까 염려가 앞선다
약와 휘 현정 ( 강동파시조 일명 강동할배)는 4남 1녀중 따님은 이장유에게 시집갔다
네아들이 바로 휘 곤 암 경 상목이다 상목은 후사가 없어 응년(과거 합격 생원 ) 이 후사를 잇는다
이 곤(李堒):1743(영조 19, 계해)~1814(순조 14, 갑술). 본관 韓山. 자는 穎仲. 弘祚의 후손. 顯靖의 子. 1780년 생원시 합격. ▣참고:嶠南誌 집필:이원걸
이 경(李 土敬 ):1755(영조 31, 을해)~1813(순조 13, 계유). 본관 韓山. 자는 君澤. 堒의 弟. 1803년 사마시 합격. ▣참고:嶠南誌 집필:이원걸
위에서 세째 아들 휘 경의 아들이 바로 휘 병하 병은 응년 병상이다
바로 오늘 글의 주인공은 바로 이 두분이다
이병하(李秉夏):1780(정조 4, 경자)~1852(철종 3, 임자). 본관 韓山. 자는 忠立. 호는 信菴. 顯靖의 손자. 秉殷의 형. 학행으로 칭송을 받음. 문집이 있음. ▣참고:嶠南誌 집필:이원걸
이병은(李秉殷):1782(정조 6, 임인)~1860(철종 11, 경신). 본관 韓山. 자는 質汝. 호는 雪竹. 土敬의 子. 외조는 慶州 崔興好( 호는 잘못기록 수정해야함). 貧寒해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독서궁리하여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이룸. 「雪竹歌」 수십 편을 창작. ▣참고:「墓碣銘」(崔孝述 撰) 집필:이원걸
지면상 중략하였으며 위 두분의 이야기를 통해서 3탄이 이어질 예정이다
저자의 가계보는 설죽 휘 병은의 파이다
몇년전 경상북도 영주 지나 강원도 영월을 지나가면서 안동김씨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온적이 있다
설죽가를 체험해보고 조선후기 방랑시인의 삶을 조명하는 문화제도 열린다
그는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이며 1807 ~ 1863 출졸이며 《김립시집》이있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다라고 한다
안동 수은공파 일명 소호문중에도 동시대에 이름을 날리고 퇴계의 설죽가도 있지만 설죽으로 너무 유명하여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이 다 아시는 분이 계셨다 바로 설죽 이병은 이다
한국학진흥원에 타문중 및 소호문중일가가 기증한 자료가 있고 계속 번역중이다
바로 저자의 가계보가 현대 꼭 종가라는 문구로 위상을 높이고 선양을 한다면 바로 설죽종가인것이다
종가라 칭한다면
차종가문중인 작하는 저자는 선대조 때 기막힌 일로 이제는 직계 종가가 된 것이다
지면이 너무 길어져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을 다음에 게시하기에 앞서
서애 류성룡의 출생지 안동 소호리 옆 의성군 점곡의 사촌마을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곳을 알아야 3편을 연장이 될 수 있어 도입하고자한다
사촌마을의 역사는 신라 중엽 나천업(고운 최치원의 장인)정승의 고총이 뒷산(자하산)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약 천년 정도로 추정되나 1392년 감목공 김자첨 공이 안동 회곡에서 이곳으로 이주 정착하면서 정확한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620년 전이다. 입향조 김자첨 공은 고려 때 충신 충렬공 김방경을 중 시조로 한 안동 김씨(도평의공파)이다.
그 후 혼인 관계로 안동 권식(1450년), 풍산 류태춘(1758년)이 이주하면서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 등이 어울려 사는 집성촌이 되었다.
사촌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 따서 사촌이라고 지었다 한다.
행정 권식, 송은 김광수, 만취당 김사원, 천사 김종덕,
만동 김양범, 우강 김호직, 민산 류도수, 자계 류도희등 많은 유현들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특히 서애 류성룡도 이곳 외가(안동김씨 종택)에서 태어났고, 탄생에 따른 재미 있는 설화도 있다.
조선시대 문현(文賢) 달사(達士)와 과한(科翰)이 이어진 유교 전통의 선비 마을로 대과13명, 소과35명, 그 외 향시에 합격한 분과, 문집과 저서를 낸 유학자들이 9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사촌 마을 안동 김씨들은 선조(송은 김광수)의 유훈에 따라 과거 보다는 학문 수양에 정진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만취당 김사원 삼형제와 응봉 김치중 여러 형제는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과를 올렸고 순국한 분이 많다.
사촌마을에서 태어난 서애 류성룡과 외종질 만취당 김사원 삼형제, 이종질 응봉 김치중 등의 임란 때의 활약은 음미해 볼만 하다.
구 한말 일제의 침략시에도 운산 김상종은 1896년 창의하여 의성 의병대장으로 많은 전과를 올리고 수십명이 순국하였다.
그때 그 본거지인 사촌마을은 일본의 보복 방화로 만취당을 제외한 수백채의 와가(瓦家)와 유자정, 병촌정, 성곡정이 불타고 많은 역사적인 사료가 사라졌다.
마을 내에 자생하고 있는 수백년 된 고목(회나무, 향나무 등)이 말없이 역사의 증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사촌마을을 유학 연원이 깊은 마을, 선비 정신이 이어 온 마을, 항일의병에 앞장 선 마을이라고 합니다.
사가(私家)의 목조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만취당은 임진왜란 이전에 건축 되었다.
영귀정, 만취당, 사촌가로숲(서림), 만년송 등이 문화재 및 천연기념물로 지정 되어 있고
후산정사,
후송재, 양진당, 유자정, 민산정, 자계정등 수십채의 전통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자료출처 : 의성군 신문화공간 조성사업 >
위의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은 한산이씨 신암 휘 병하와 설죽 휘 병은의 사돈 마을이다
바로 항일운동이 있었던 곳이며 한산이씨 휘 병원과도 연관이 있다
더 자세한것은 다음에 삼가 게시하고자 한다
한산이씨 휘 병하 신암공 및 휘 병은 설죽공을 기리며
2015년 10월 7일 6대조 선조님 후손 이대원 삼가 글을 게시하다
첫댓글 글 잘 읽었소. "대산파"에 관한 나의 평소 생각은 사환을 따진다면 면재 휘 병운에서 매와 휘 수응, 긍암 휘 돈우로 내려가는 대산파종손 줄기가 가장 화려했다고 봄. 면재선생은 사마/현감에 문학이 높아 문집 발간. 매와 선생은 사마시 입격. 긍암 선생도 문학이 높았고 문집 발간에 또한 대과에 입격했으며 종2품 이조참판직에 제수. 5대연속 과거입격. 비교적으로 소암 휘 병원 선생은 사마/현감에 문학이 높아 문집발간. 아마도 큰 형님인 면재선생보다 소암선생이 학문적 성취도는 더 높았을수도 있음. 그러나 소암선생 이후로 그 계보에서 현달한 후손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하여서 면재 병운 선생의 계보가 더 괄목할 만함
형님 댓글을 많이 남기셨네요 연도별 오해가 있었군요100~ 130년 정도를 더내려 가셨습니다
휘 현정와 휘 상정 대산의 자 휘 완까지 파 줄기 대략600년~700년 위 선대계보 정조까지인데 형님은 100~130년을 더 내려간 계보를 먼저 기술하였습니다
형님이 더내려간 계보의 위 내용은 사실이고 동감가는 내용이 맞습니다 휘 돈우는 다음 이야기에서 다룰 내용인데 휘 돈우 고종까지 보면 타성씨에서 볼 수 없는 700년 연이은 세보중 판중추 광목공 문열공계보는 으뜸중의 으뜸이지요 조선왕실도 이런세보를 만들 수 없었으니깐요
조상의 뿌리에 자긍심을 갖고 중요한 사료를 추적하시어 좋은 정보를 모든 한산이문의 후손들과 네티즌과 함께 공유케 하시니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드림. 개인적으로도 많이 배우고 있음. 참고로 나는 면재 선생과 소암 선생의 중간에 있었던 휘 병진 선조의 계보를 이었는데, 휘 병진 할아버진 과거도 일찍 포기하고 문집내는데도 통관심이 없으셨고 하여 세분 형제분들중 세간에 이름이 제일 덜 알려진 분. 할아버지의 호가 뭔지도 난 모름. 공은 두 형제가 벼슬살이하는 동안에 집에서 오로지 부모님공양하는데 주력했다 하니 충보단 효에 점수를 더 따지 않으셨나 함. 이 또한 본받아 마땅한 일. ^^
대산파 휘 병운 병원 병진은 강동파 휘 곤 경 과 비슷한 시대순으로 보셔야 이야기 전개가 맞습니다 면암 소암 긍암 선조님 내용을 넣으려고 하니 몇년을 쓰고 끝날것 같지않아서 이야기진행상 배제하려고 한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셨습니다 저보다 더 연구가 많이 되신것 같습니다
휘 광정 소산선조 계보에서 면암 휘 우의 아드님 "구옹" 휘 병탁 선조가 학식도 깊고 향촌사회에서 꽤 명망높던 인물이였는데 진짜 족보 요약본에 호가 게재되어 있지 않단 말인가? 그렇다면 소산종가에서 필히 시정해야할 일이라고 보임. 소산 선생의 현손 휘 응직은 사마입격하고 또한 학문이 높았을 터인데?! 난 사실 족보도 100% 믿지않음. 일전에 나의 가계도를 작성하려 족보를 한때 파본적이 있는데 내 가계도에서만도 한자와 생몰년 잘못 표기된것 몇건을 발견했고..타문중의 족보 행장엔 문과방목/사마방목과 전혀 맞지않는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고..묘갈명도 어떤땐 틀리고. 반드시 국가의 공문서와 대치 비교를 거듭 거쳐야함
잃어버린 60~100년 세월이지요
저의 계보도에도 오타 및 틀린것이 있습니다 차차말씀드리지요 그러나 위대한 선조님이 하도 많아서 수은공파 이야기는 평생 기술해도 안끝납니다
백프로는 아니지만 두번의 족보간행을 보았을때 후손이 선조님 이야기를 몰라서 놓친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약 호도 틀려서 다시 수정한것 도 있지만 수은공파 후손이 대략 천명선인것을 가정해 보면 두번의 파보는 사견으로 정확도가 매우 높습니다 물론 틀린 오타도 발견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