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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朝鮮史]의 상고사[上古史]로부터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우주[宇宙] 만물[萬物]이 생성[生成]되고, 천지[天地]가 혼돈[混沌]의 상태를 벗어면서, 인간[人間]과 만물[萬物]의 변화[變化]는 시작되고, 인간[人間]의 역사[歷史]도 시작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地球]에는, 그 변화[變化]와 역사[歷史]의 흔적[痕迹]이 지구 전체에 산재[散在]하고 있으며, 수 많은 인간[人間]과 종족[種族]이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겪으며 이루어 놓은 흔적[痕迹]과,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세계[世界]의 여러 나라에 산재[散在]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중에서, 세계인[世界人]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은, 단연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고대[古代]의 건축물[建築物]이다.
이 피라미드군은 아프리카 북부, 중남미, 중국[中國]의 서안[西安], 동북[東北]삼성[三省], 동[東] 유럽의 근래 발굴되고 있는 피라미드 군들이다.
이러한 고대[古代]의 유적[遺跡]을 바라보면서, 역사[歷史]에 관해서, 다시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은, 이러한 피라미드 형태[形態]의 축조물[築造物]들은, 같은 정신[精神]과 혼[魂]을 가진 민족[民族]들이 고대[古代]에 세계[世界]로 진출하면서 남긴 인류[人類]의 유산[遺産]임은 분명[分明]하다는 것이다.
뜻이 있는 많은 한국[韓國]의 제현[諸賢]들이, 이 피라미드군들은, 한민족[韓民族]이 고대[古代]에 세계[世界]로 진출한 증거[證據]이며, 건축[建築]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근거[根據]로, 만주[滿洲]와 서안[西安]의 피라미드 형태의 축조물[築造物]들을 증거[證據]로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주장[主張]을 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기록[記錄]과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이 존재[存在]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사[朝鮮史] 고대[古代]의 상고사[上古史]에 있어서, 한[韓] 민족[民族]의 시원[始原]을 찾아서, 그 근원[根源]을 파악하고, 한[韓] 민족[民族]의 역사[歷史]의 체계를 세우고, 한[韓] 민족[民族]의 국본[國本]을 정립[正立]하는것은 중요[重要]한 일이며, 그 후예[後裔]들이 반드시 수행[遂行] 해야 할 사명[使命]이요, 선대[先代]의 정신[精神]과 얼과 혼[魂]의 지상[地上]의 명[命]이다.
식민사학[植民史學]에 병들은 자들은, 민족[民族]의 사서[史書]를 가지고, 무조건 위서[僞書]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과거에 일본을 위시하여 조선[朝鮮]을 침략[侵略]하여 온갖 만행을 저지른 외세[外勢]들의 행태[行態]는 모든 것이 옳으며, 그 들이 저지른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대한 왜곡[歪曲]과 조작[造作], 간교[奸巧]하고 비열[卑劣]한 작태를 잘한 일이며, 옳은 일이라고 보는 것인지, 다시금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역대[歷代] 조선사[朝鮮史]의 고적[古蹟]들을 모조리 약탈[掠奪]하고, 불사르며 사찰[寺刹], 무덤을 가리지 않고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모든 것을 쓸어간 그 자들이, 지금 우리에게 그 역사[歷史]의 유산[遺産]을 일부라도 돌려주고 있는가 ?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역사서[歷史書]와,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기 위하여 외롭고 힘든 길을 걸으며 노력하는 같은 한국[韓國] 사람을 비하[卑下]하고, 비난[非難]하며 훼방[毁謗]을 놓는 자들은, 자가 자신의 선대[先代]를 버리고, 미래[未來]에 오는 자기 자신들의 후손[後孫]들에게, 만대[萬代]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행태[行態]가 아니고, 그 무엇 이겠는가 ?
근세[近世] 조선[朝鮮]의 대[大] 선유[先儒]들도, 그 들이 남긴 문집[文集]을 통하여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들에 대하여, 역사[歷史]의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에 어긋난 일들을, 많은 글들을 통하여 논증[論證]하고 있다.
경전[經典]을 포함하여 수 많은 역사[歷史]속의 고적[古蹟]들이, 완벽한 것은 없다. 다만, 옛 선대[先代]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길을 가는 것일 뿐이다.
본인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역사서[歷史書]들이, 그 것이 과장[誇張]되고,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고, 전설[傳說]과 신화[神話]에 기인 했더라도, 그 내용들이 설명[說明]하고 가리키는 곳을 따라,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올바로 알고자 그러한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감히 지나온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흐려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
환국[桓國]의 시작은, 기원전 7197년부터 시작하며, 신시[神市]의 시대는, 기원전 3898년부터 시작된다. 단군[檀君]시대는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대로 기원전 2333년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때는 중국[中國]의 당[唐]요[堯]의 시대이다.
본인은 [朝鮮史]를 통칭[統稱] 일만년[一萬年]의 조선사[朝鮮史]로 부르는 것은, 민족[民族]의 정신[精神]과 혼[魂]과 얼을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양[西洋]의 학자[學者]들이 세계[世界]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文明]이라는 슈메르 문명[文明]을 포함하여, 인류[人類] 역사[歷史]의 가장 거대한 축조[築造]물인 세계의 피라미드와, 대륙[大陸]에 산재[散在]하고 있는 거대한
왕릉[王陵]으로 추정[推定]되는 피라미드 형태[形態]의 무덤은, 일만년[一萬年] 한[韓]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만이, 이에 대한 해답[解答]을 줄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얼마 전에 이에 대한 정밀[精密]한 실측 조사[調査]를 마쳤다. 역사[歷史]는 기록[記錄]을 통하여,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한, 증거[證據]와 고증[考證]으로 그 진실[眞實]과 허실[虛實]을 가려내야 하지 않겠는가 ?
문명[文明] 세계에 살고 있다는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노라면, 한마디로 가관이 아니다. 한국[韓國] 고대[古代]의 철기[鐵器] 문화[文化]가 원 삼국이라는 어이없는 세기[世紀]에 머무는데, 대륙[大陸]에서는 기원전 3500 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지 이미 오래이다.
반도[半島]의 학자[學者]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
신화[神話]와 전설[傳說]로 치부하던, 치우천황 [蚩尤天皇]의 동두철액[銅頭鐵額]의 기록[記錄]이, 그에 버금가는 철기[鐵器]가 발굴되고, 과학이 이를 입증[立證]하므로서, 반도[半島]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의 논리는, 하루 아침에 휴지가 되고 말지 않았는가 ?
국내에 소장[所藏]되고 있는 청동[靑銅]거울에 새겨져 있는 1만3천개의 원과 선에 대한 설명조차 하지 못하는 자들이, 삼국[三國]의 시작을 원시시대라고 근엄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역사[歷史]를 대하는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를 다시금 깊이 돌아보게 하고 있다.
많은 세계[世界]의 학자[學者]들이 피라미드에 대한 연구[硏究]를 하며, 그들 나름대로 논리[論理]를 펴고 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또한, 이에 대한 서양[西洋] 학자[學者]들의 조사[調査]내용과 견해를 들어보면, 그 시원[始原]도 모르고 그 함축[含蓄]하고 있는 의미[依微]도 모르며, 꼭 뿌리 없는 나무와 같으니, 더 논[論]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
어느 누구 하나, 이에 대한 확실[確實]하고, 시원하며 명쾌[明快]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해답[解答]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근원[根源]이 되는 시원지[始原地]를 찾아서, 심도[深度]있는 조사[調査]와 연구[硏究]로, 이를 명쾌[明快]하게 밝혀야 하는데, 이러한 일을 진행[進行]하는 학술[學術]단체나 국가[國家]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하는 개인은 현재[現在]까지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現實]이다.
부도지[符都誌]를 신봉하는 분들은, 천산[天山]의 마고성[麻姑城]을 그 시원지[始原地]로 보고 있으나, 이에 대한 확실[確實]한 고증[考證]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더 안타까운 일은 부도[符都]의 자리가 장구[長久]한 세월속에 옮겨지며, 결국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북방[北方]에 안착한다는 주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現在]에도 보스니아에서는 피라미드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이곳 주위에서 발굴되고 있는 자료[資料]들을 보면, 묻혀진 역사[歷史]의 비사[祕史]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느끼게 하고 있다
본인은 십[十] 수년전[數年前], 모든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을 뒤로하고, 백지[白紙] 상태의 마음으로 한국[韓國]에서 시작하여, 흑해에 이르기까지의 고대[古代]로부터, 근세[近世]에 이르기까지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을 현지 조사[調査] 하였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事實]들은, 기존에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歷史]에 대한 교육[敎育]이,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는 거리가 먼, 얼마나 위선[僞善]적인 교육[敎育]이었는가를 절실히 체감[體感] 하였다.
우리의 현실[現實]앞에 놓여진 조선인[朝鮮人]의 손으로 기록[記錄]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는, 한정되어 있으며, 그나마 그때 당시[當時]의 원전[原典]이라고 보아지는 것은, 극[極] 소수[小數]의 사서[史書]와 선대[先代]의 문집[文集]이 소량 전[傳]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장구[長久]한 일만년[一萬年] 역사[歷史]의 중심[中心]은, 대륙[大陸]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역사서[歷史書]와 유적[遺跡] 유물[遺物]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다만 여기서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의 영역[領域]은, 유라시아를 넘나드는 광활[廣闊]한 지역[地域] 이었음을 다시금 분명[分明]히 천명[闡明]하고 밝히고자 한다.
우리의 상고사[上古史]인 고조선[古朝鮮]의 중심[中心]이 된, 태백산[太白山]의 아사달[阿斯達]은, 지금도 온갖 설[說]만 분분[紛紛]할 뿐, 그 위치[位置]를 정확히 밝히고 찾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삼국[三國]인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시원지[始原地]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
우리의 상고시대[上古時代]의 고대사[古代史]는, 고조선[古朝鮮]과 삼국[三國]의 시원지[始原地]와 깊은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그 역사[歷史]의 맥[脈]을 이어 왔다.
조선사[朝鮮史]가 일만년[一萬年]의 장구[長久]하고 유구[悠久]한 역사[歷史]임은, 고대[古代]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서[歷史書]의 문헌[文獻]과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을 대입시켜 고찰[考察] 하면서, 이를 고증[考證]해 나아가면 이를 증명[證明]하고도 남는다.
다만 그러한 일들을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이 수행[遂行]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환국[桓國]으로부터, 고조선[古朝鮮], 고조선[古朝鮮]을 이어 부여[夫餘]가 일어났고, 이 부여[夫餘]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900년[九百年]의 역사[歷史]를 시작하고, 신라[新羅]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제일먼저 나라를 건국[建國]한 것으로 기록[記錄]되고 있지만, 이는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는 차이가 있는 기록[記錄]임이 틀림이 없으리라.
그러나 신라[新羅]는 1000년[千年]의 왕업[王業]을 이룩한 나라이다.
고조선[古朝鮮]의 뒤를 이어 일어난 부여[扶餘], 부여[扶餘]의 뒤를 이어 일어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고조선[古朝鮮]의 근간[根幹] 지지[地址]인 유주[幽州]와 요동[遼東], 요서[遼西], 대황지중[大荒之中]의 불함산[不咸山] 기슭에서, 천년[千年] 왕조[王朝]의 대업[大業]의 기틀을 세웠다.
이는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와 선대[先代]들의 문집[文集] 속에서 일관되게 기록[記錄]되고 있으며, 대륙사[大陸史]또한 이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유독 신라[新羅]만은, 단군[檀君]의 후예[後裔]들임은 분명한데, 대륙사[大陸史]에서는 진[秦]의 망인[亡人]으로 기록[記錄]하고 있고, 신화[神話] 전설[傳說]이 함축[含蓄]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록[記錄] 또한 틀림이 없는 역사[歷史]의 사실[事實]일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에서는, 신라[新羅]의 시조[始祖]는 알에서 태어났으며, 박[朴], 석[昔], 김[金]의 세 성씨[姓氏]가 왕위[王位]를 이어 받으며, 삼국[三國] 중에서 유일하게 여왕[女王]이 있던 나라이다.
이러한 신라[新羅]의 역사[歷史]속에는, 틀림없이 후대[後代]에 전[傳]해지지 않는 신라[新羅] 역사[歷史]에 대한 비사[祕史]가 드러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신라[新羅]의 김씨[金氏]는, 고대[古代]의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를 선조[先祖]로 한다고 기록[記錄]되고 있음이니 이 또한 역사[歷史]의 사실[事實]일 것이다.
동문선 제64권[東文選第六十四卷]
보 안남록 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
최치원(崔致遠)
交趾四封。圖經詳矣。然而管多生䝤。境邇諸蕃。略採俚譚。用標方誌。安南之爲府也。廵屬一十二郡。 峯驩演愛陸長郡諒武定武安蘇茂唐林。 羇縻五十八州。府城東至南溟四百餘里。有山橫亘。千里而遙 [중략]
교지(交趾)의 사방 경계는 지도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관내에 요족(䝤族)이 많고, 지역이 여러 번족(蕃族)과 가깝다. 대략 지방의 얘기를 모아서 그곳 지리를 기록한다. 안남(安南)의 부(府)는 돌아가면서 12군(郡)이 소속되었는데 봉관연애육장군(峯驩濱愛陸長郡)양무정무 안소무당림(諒武定武安蘇茂唐林) 58개의 주를 총괄한다. 부의성 동쪽에 남쪽 바다까지 400여 리인데 산이 천리나 되게 가로질러 멀리 뻗어 있다. [중략]
동문선 제64권[東文選第六十四卷]
보 안남록 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
최치원(崔致遠)
水之西南。則通闍婆,大食之國。陸之西北則接女國烏蠻之路。曾無亭候。莫審塗程。跂履者。計日指期。沉浮者。占風定信 [중략]
물의 서남쪽은 곧 도파(闍婆)와 대식국(大食國)으로 통하고 육지에서 서북쪽으로는 곧 여국(女國)과 오만(烏蠻)으로 통하는 길이다. 일찍이 도로를 관장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에 노정(路程)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날수를 헤어서 기한을 정하고, 배로 다니는 사람은 풍랑을 보고 약속을 정한다. [중략]
성호사설 제1권[星湖僿說第一卷]
천지문(天地門)
여국(女國)
옛날부터 서쪽에 여국(女國)이 있다고 한다.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보면, 다만 “달단(韃靼)의 서쪽에 옛날의 여국이 있었다. 그 나라 풍속에는 봄철에 남자 한 사람만이 그곳에 오는 것을 허용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죽여 버렸는데 지금은 다른 나라에 병합하고 그 명칭만 남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장 근사하다.그러나 아들을 낳기만 하면 죽여 버렸다고 하니, 그럼, 봄철에 들어오는 남자는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빌려오는 것일 터인즉 이는 한때의 습속일 것이다. [중략]
연경제전집속집책십육[硏經齋全集續集冊十六]
동국지리변[東國地理辨]
월성변[月城辨]
月城。今慶州也。一稱鷄林。陳壽史云。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辰王治月支國。月支國者。考之圖經。卽慶州也。豈月城之故號歟。然月支者。漢西方胡種也 [중략]
월성[月城]은 지금의 경주이다. 일칭 계림[鷄林]이라고 한다.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 이르기를 한[韓]은 세 종류가 있는데, 일왈 마한[馬韓], 이왈 진한[辰韓], 삼왈 변한[弁韓]이다. 진한[辰韓]은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진왕[辰王]이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렸으며, 월지국[月支國]을 도경[圖經]을 상고하여 보건데, 즉 경주[慶州]이다. 월지국[月支國]이 월성[月城]의 고호[故號]가 되었다. 월지[月支]는 한[漢]나라 때 서방[西方] 호[胡]의 종족[種族]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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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사직단[社稷壇] 부[府]의 서쪽에 있다. [중략] 성모사(聖母祠) 서악(西嶽)의 선도산(仙桃山)에 있다. [중략]
한 나라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년에 고허 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옆의 수풀 사이를 바라보니, 흰 말이 꿇어앉아 절하는 모양으로 있는 것이 보였다. 가서보니, 말은 홀연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 길렀더니, 나이 13세에 자질이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6부의 사람들은 그의 탄생이 신기하므로 임금으로 세우고,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이라고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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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진한[辰韓]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고 하므로, 큰 알이 박과 같다고 하여 박(朴)을 성(姓)으로 삼았으며, 거서간(居西干)은 방언(方言)에, ‘높은 어른’을 일컫는 말이다. 알영정(閼英井) 본부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시조 5년에 용(龍)이 이 우물에서 나타나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보고 이상하게 여겨 거두어 양육하고,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장성하자 덕스러운 용모가 있었다. 시조(始祖)가 왕비로 맞아들이니, 어진 행실이 있어서 내조(內助)를 잘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두 명의 성인이라고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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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아진포(阿珍浦)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있는데, 용성국(龍城國)이라고도 한다. 그 나라 임금 함달파(含達婆)가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려야 한다.” 하니, 그 아내가 비단으로 싸서 궤 속에 넣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축원하기를, “어디든 인연 있는 곳에 닿아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어라.”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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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진한(辰韓) 아진포에 이르렀을 때 한 노파가 열어보니, 어린애가 들어 있었다. 거두어 길렀더니, 장성하자 풍채가 뛰어나고 밝으며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姓氏)를 모르는데, 처음 왔을 때에 까치가 날아와 울었으니, 까치 작(鵲) 자에서 새조(鳥) 자를 떼어 버리고 석(昔) 자로 성을 삼는 것이 좋으며, 또 궤를 풀고 나왔으니, 벗고 풀었다는 뜻으로 탈해(脫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임금이 그의 훌륭함을 듣고 그를 사위로 삼았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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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유리왕(儒理王)이 죽으려 할 때 유언하기를, “선왕(先王)의 유명(遺命)에, ‘내가 죽은 뒤에는 아들이냐 사위이냐를 따지지 말고, 나이가 많으면서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 하셨다.” 하고, 드디어 탈해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이가 신라[新羅]의 제4대 임금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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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안압지(雁鴨池) 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는데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峯)을 본떴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臨海殿) 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 [중략]
고대[古代]에 신라[新羅]와 아랍의 역사[歷史]속에는 과연 어떤 역사[歷史]의 비사[祕史]가 담겨져 있는 것인가 ?
지금의 흑해 주변에 있었던 여국[女國]과, 신라[新羅]의 석탈해왕[昔脫解王], 즉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의 사이에는 어떤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있는 것인가 ?
중세기 아랍측의 문헌[文獻]에는, 신라에 관하여 상당히 많은 역사[歷史]의 자료[資料]들이 담겨져 있다. 아랍사람들에게 신라[新羅]는 동방[東方]의 이상향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중국[中國]의 동쪽에 있는 신라[新羅]는 공기가 맑고, 물이 좋으며 땅이 기름지고 부[富]가 많다고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또한, 신라[新羅]에는 황금이 많은 금[金]의 나라이며, 신라인[新羅人]들은 마음씨가 선[善]하고 착하기 때문에, 아랍인들이 한번 들어가면 신라[新羅]를 떠나지 않고 정착[定着] 한다고 기록[記錄]을 하고 있다.
신라[新羅]인들은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풍기고, 전염병[傳染病]이나 질병[疾病]은 거의 없으며,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 신라[新羅]에 오면 바로 치유[治癒]되는데 이는 알라신의 시혜자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中國]과의 관계에서는 중국[中國]의 황제[皇帝]와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이 천벌[天罰]을 내려 가뭄이 들게 한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신라[新羅]에 대하여 신기하고 흥미[興味]있는 기록[記錄]들을 많이 남기고 있으며, 신라[新羅]와의 무역[貿易]관계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한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음이다.
천산[天山]을 넘어 중동지역을 조사[調査] 하면서, 끝 없는 의문[疑問]에,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을 뒤돌아보게 하는 일이 계속 된 적이 있다.
그것은 조선사[朝鮮史]와 대륙사[大陸史]에서는, 그 기록[記錄]의 흔적[痕迹] 조차도 찾아 볼수 없고 나타나지 않는,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고성[古城]들 때문이었다. 천산[天山]을 기점으로 해서 서[西]쪽으로 계속이어지는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속의 고성[古城]과 성곽[城郭]들이, 아랍을 향하여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성곽[城郭]들은 고대[古代]에 모두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이 축조[築造]한 것이다. 후대[後代]에 쌓은 아랍과 유럽 의 성곽[城郭]들은, 그 모양[模樣]과 형태[形態]부터가 다르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유적[遺跡]들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가,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자들에게 약탈[掠奪]되지 않고 분실[紛失]되지 않았다면, 모두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 기록[記錄]으로 남아 오늘날 후세[後世]들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역사[歷史]에, 지금 같은 혼란[混亂]스러운 일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시리아와 터어키가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는 지중해[地中海]의 동부[東部]지방,......... 푸른 초목이라고는 풀 한포기 찾아 볼수 없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 사막[沙漠]의 연속,......... 태양[太陽]이 하늘에 떠 이글거리면,......... 사막[沙漠]의 모래는 불가마속처럼 달아오르고,........ 모래를 휘감아 불어오는 사막[沙漠]의 바람은 한치 앞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이곳에,........... 고대[古代]의 역사[歷史]에 대한 의문[疑問]을 끊임없이 반복[反復]하게 하는 유서[由緖] 깊은 고대[古代]의 성곽[城郭]이, 수[數] 천년[千年]의 풍파[風波]를 견디며, 장구[長久]한 역사[歷史]의 고대[古代]에 관한 비사[祕史]를 오는 이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 성곽[城郭]의 모양[模樣]과 형태[形態]는, 살아 있는 거북과 같다. 성곽[城郭]은 두 개로 축조[築造] 되어 있는데, 규모가 큰 성[城]은 거북의 머리가 서북[西北]쪽을 향하고 있으며, 거북의 머리 앞에는 둥근 산 봉우리가 있으며, 이 산의 위에는 또 하나의 유적[遺跡]이 자라잡고 있다. 규모가 작은 거북성의 하나는, 이 큰 거북성의 남[南]쪽 뒤편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그 형상[形象]이 어미 거북을 따라가는 형상[形象]이다.
지금은 사막[沙漠]으로 변해버린 황막[荒漠]한 곳이지만, 이 성곽[城郭]을 축조[築造]할 당시, 그 옛날에는 푸른 초원으로 뒤덮인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고 윤택[潤澤]한 환경[環境] 이었을 것이다. 그 누가 풀 한포기 없는 광막[廣漠]한 사막[沙漠]에 이러한 거대한 성곽[城郭]을 축조[築造] 하겠는가 ?
이 지역은, 고대[古代]의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여국[女國]이 있는 지역으로 지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락국[駕洛國]의 구지가[龜旨歌]와 탈해왕[脫解王]의 고사[故事]가 일치되고 있기 때문에, 고대[古代]에 신라[新羅]의 역사[歷史]와 가락국[駕洛國]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고찰[考察]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세기[中世紀] 아랍의 지도[地圖]에는 신라[新羅]가 표시되어 있고, 아랍과 신라[新羅]와의 여러 가지 문헌[文獻] 자료[資料]를 차지하고라도, 신라[新羅]가 반도[半島]에 있었다면, 신라[新羅]와 아랍의 교류[交流]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김수로[金首露 왕[王]과, 인도 허황후[許皇后]와의 관계, 그리고 경주[慶州] 릉원[陵園]의 서역인[西域人] 돌 조각상[彫刻像]등 신라[新羅]와 아랍의 고대[古代]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역사[歷史]의 비사[祕史]가 있음은 분명[分明]한 것이다.
고대[古代]의 아랍 역사[歷史]에 있어서, 거북과 어떤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있을 것인가 ?
가정선생문집권지십[稼亭先生文集卷之十]
계림부공관서루시서[雞林府公館西樓詩序]
余至東京客舍。登東樓。殊無佳致。迺陟西樓。頗壯麗軒豁。城郭山川。一覽而盡。三藏法師旋公大書倚風樓三字。而無題詠者 [중략]
내가 동경(東京 경주(慶州))의 객사에 도착한 뒤에 동루(東樓)에 올라가 보았더니 아름다운 경치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서루에 올라가 보았더니 꽤나 장려하였음은 물론 앞이 툭 틔어서 성곽과 산천이 한눈에 모두 들어왔다. 그런데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의풍루(倚風樓)라고 큰 글자로 쓴 현판만 붙어 있을 뿐, 제영(題詠)한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중략]
가정선생문집권지십[稼亭先生文集卷之十]
계림부공관서루시서[雞林府公館西樓詩序]
惟是府千年王都。古賢遺迹。往往而有。自入本國。爲東京亦將五百載。其繁華佳麗冠於東南。而仗節觀風。剖符宣化者。又多詩人墨客。意必有紅壁紗籠銀鉤玉筯輝映其間。以今所見。惟賓軒所題一絶句在耳。先儒金君綏首唱也 [중략]
생각건대 이 계림부는 1000년을 이어 온 왕도(王都)로서 고현(古賢)의 유적이 가는 데마다 남아 있고, 본국에 편입되어 동경이 된 뒤로 또 장차 500년이 되려고 하니, 번화하고 가려(佳麗)한 면에서 동남 지방의 으뜸이 되는 곳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절(符節)을 나누어 받고 이곳에 와서 풍속을 관찰하고 교화를 선양한 자들 또한 시인 묵객이 많았을 것이니, 짐작건대 홍벽(紅壁) 사롱(紗籠)과 은구(銀鉤) 옥저(玉筯)가 그 사이에서 휘황하게 비쳤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것이라곤 빈헌(賓軒)에 걸린 절구 한 수가 유일한데, 이 시는 선유(先儒) 김군수(金君綏)가 수창한 것이었다. [중략]
신라[新羅] 천년[千年] 왕도[王都]의 경주[慶州],........... 계림부[雞林府]는, 대륙[大陸]의 동해[東海]가에서,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을 뒤로하고, 그 고풍[古風]의 여운[餘韻]을 간직하고, 오늘도 말없이 청산[靑山]과 대양[大洋]을 바라보고 있다.
고려[高麗]의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임해전[臨海殿]에서 맞이하고, 천년[千年]의 왕업[王業]을 고려[高麗]에 넘긴 경주[慶州]는, 지금도 그 당시의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 부합[符合]되는, 어긋남이 없는 조건과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일부 당시의 모습을 보존[保存]하고 있으며, 천년[千年] 고도[古都]의 위용[威容]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피폐[疲弊]함은, 망극하기 이를 데 없다.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제13권[第一集詩文集第十三卷]
송진택시공광하유백두산서기유[送震澤申公光河游白頭山序己酉]
白頭山卽經所云不咸山。而地志稱長白山者是也。其脈西起鮮卑。東北至黑龍江之上。其一支南折至我界之北。崛起而爲之祖。北鎭女眞烏喇。南爲靺鞨。西爲閭延茂昌。西南爲渤海。其根蟠地將數千百里。上爲大澤周八十里 [중략]
백두산(白頭山)은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불함산(不咸山)이고, 지지(地志 지리서)에 이른바 장백산(長白山)이다. 그 산맥이 서쪽으로 선비(鮮卑)에서 일어나서, 동북쪽으로 흑룡강(黑龍江)의 위에 이르고, 그 한 가닥이 남으로 꺾이어 우리나라 경계의 북쪽에 이르러 우뚝하게 일어나서 북진(北鎭)ㆍ여진(女眞)ㆍ오랄(烏喇)의 으뜸이 되었으며, 남쪽으로 말갈(靺鞨)이 되고, 서쪽으로 여연(閭延)ㆍ무창(茂昌)이 되고, 서남쪽으로 발해(渤海)가 되었는데, 그 뿌리가 땅에 서리어 수천 리나 뻗어 있다. 그 위에는 큰 못이 되어 주위가 80리나 된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13권[第一集詩文集第十三卷]
송한교리치응사연서시위서장관[送韓校理致應使燕序時爲書狀官]
장성(長城)의 남쪽, 오령(五嶺)의 북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중국’이라 하고, 요하(遼河)의 동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동국(東國)’이라 한다. 동국 사람으로서 중국을 유람하는 것을 감탄하고 자랑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나의 소견으로 살펴보면, 그 이른바 ‘중국’이란 것이 나는 그것이 ‘중앙[中]’이 되는 까닭을 모르겠으며, 이른바 ‘동국’이란 것도 나는 그것이 ‘동쪽’이 되는 까닭을 모르겠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13권[第一集詩文集第十三卷]
송한교리치응사연서시위서장관[送韓校理致應使燕序時爲書狀官]
何以稱焉。有堯舜禹湯之治之謂中國。有孔顏思孟之學之謂中國。今所以謂中國者何存焉。若聖人之治。聖人之學。東國旣得而移之矣。復何必求諸遠哉 [중략]
이른바 ‘중국’이란 무엇을 두고 일컫는 것인가. 요ㆍ순ㆍ우ㆍ탕(堯舜禹湯)의 정치가 있는 곳을 중국이라 하고, 공자ㆍ안자(顔子)ㆍ자사(子思)ㆍ맹자의 학문이 있는 곳을 중국이라 하는데 오늘날 중국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 성인의 정치와 성인의 학문 같은 것은 동국이 이미 얻어서 옮겨왔는데, 다시 멀리에서 구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제12권[第一集詩文集第十二卷]
송부령도호이종영부임서[送富寧都護李鍾英赴任序]
부령부(富寧府)는 마천령(摩天嶺) 북쪽에 있으니 나라의 변방이다. 남쪽으로 포정사(布政司 조선 시대 감사가 집무하던 관청)가 천 리나 떨어져 있고 더 남쪽으로 서울이 2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겹겹이 싸인 산과 감돌아 흐르는 시내가 있어 지세가 막혀 험하다. 그래서 염찰사(廉察使)의 염탐은 소루함이 많고, 헌사(憲司)의 규핵(糾覈) 또한 너무 멀어서 미칠 수가 없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제12권[第一集詩文集第十二卷]
송부령도호이종영부임서[送富寧都護李鍾英赴任序]
富寧本北沃沮之地。漢武帝時屬玄郡。高句麗太武神王取爲己地。渤海之時屬東京龍原府。金時徙門水以南。總爲內地。而富寧屬耶懶路。康宗之時。石適歡徇地于曷懶甸。今興斡塞立府于三潺水今三水可驗也。此時高麗尹瓘。逐女眞略其地。尋復還之。元時屬合蘭路。我國之初。太祖拓地。置孔鏡等七郡。富寧屬鏡城郡。稱石幕之地 [중략]
부령은 본디 북옥저(北沃沮)의 땅으로 한 무제(漢武帝) 때에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하였고, 고구려 태무신왕(太武神王)이 이를 취하여 자기 땅으로 해(渤海) 때에는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에 속하였다. 금(金) 나라 때에는 문수(門水) 이남을 옮겨 모두 내지(內地)로 삼았는데, 부령은 야라로(耶懶路)에 속하였다. 고려 강종(康宗) 때에 석적환(石適歡)이 갈라전(曷懶甸) 지금의 함흥(咸興). 과 알새(斡塞)를 순행(巡行)하고, 삼잔수(三潺水) 지금의 삼수(三水). 에 부(府)를 설립하였으니, 이 일을 증험할 수 있다. 이때 고려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하였다가 곧 되돌려 주었다. 원(元) 나라 때에는 합란로(合蘭路)에 속하였으며, 우리 조선 초기에는 태조께서 영토를 개척하여 공주(孔州)ㆍ경성(鏡城) 등 7군을 두었는데, 부령은 경성군에 속하여 석막(石幕)의 땅으로 일컬어졌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제12권[第一集詩文集第十二卷]
송부령도호이종영부임서[送富寧都護李鍾英赴任序]
英陵之時。金宗瑞開拓河壖。始置寧北鎭於石幕故地。至其末年。陞都護府。號曰富寧。爲六鎭之一。穆陵之時。野人摩吐歸化。始置茂山府。爲沿河六鎭之一。然富寧猶稱邊邑。善於其職者。陞之爲防禦使。銓格也。都護至府。考圖閱志。如有疎繆者。正之如此。亦牧民者之所宜勉也 [중략]
영릉(英陵 세종의 능, 즉 세종을 가리킴) 때에는 김종서(金宗瑞)가 간목하 연변을 개척하여 비로소 석막의 옛 땅에 영북진(寧北鎭)을 두었다가, 말년에 와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여 부령이라 부르고 육진(六鎭)의 하나로 삼았다. 목릉(穆陵 선조의 능, 즉 선조를 가리킴) 때에는 야인(野人) 마토(摩吐)가 귀화(歸化)하자 비로소 무산부(茂山府)를 두어 간목하 연변 육진의 하나로 삼았다. 부령은 하찮은 변읍(邊邑)으로 불리었지만, 그곳을 잘 다스린 사람은 승진시켜 방어사(防禦使)로 삼았으니, 이는 전조(銓曹)의 격례(格例)이다.도호부사는 그 부에 이르러 지도(地圖)와 지지(地志)를 고증하고 열람해 보아야 한다. 만일 엉성하고 잘못된 것이 있거든 이와 같이 바로잡는 것도 목민관이 힘써야 할 일이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燕都近胡。每多憑陵之慮。地利如此。猶得以控制天下者何歟。燉煌長掖。折入版圖。而匈奴始衰。福餘泰寧。旋撤藩籬。而蒙古復熾 [중략]
연경(燕京 금(金)ㆍ원(元)ㆍ명(明)ㆍ청(淸)의 수도)은 오랑캐와 접근해 있어 언제나 오랑캐가 침범하는 염려가 많았다. 지리(地利)의 조건들이 이러한데도 천하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 나라가 돈황(燉煌 한(漢) 나라에서 북방에 설치한 고을 이름)과 장액(張掖 한(漢) 나라에서 북방에 설치한 고을 이름) 등을 판도 안으로 떼어들이므로 흉노(匈奴)가 비로소 쇠약해졌고 당 나라가 복여(福餘 땅 이름)와 태령(泰寧 땅 이름) 등에서 변방 방어를 철수하므로 몽고(蒙古)가 다시 번성해졌으며,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唯金元以來。每都燕京。以威夷狄。玆所謂守要害而據上頭也。其所以控制四方。又何足疑乎。燉煌張掖。實爲匈奴之右臂。福餘泰寧。足塞蒙古之咽喉。則其折其撤而或衰或熾者。固其勢也 [중략]
오직 금 나라와 원 나라 이후로 언제나 연경에 수도를 정하여 오랑캐들을 위압시켰으니, 이는 이른바 요해지를 지키고 두뇌부(頭腦部)를 점거한 셈입니다. 그들이 사방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을 어찌 다시 의심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돈황(燉煌)과 장액(張掖)은 참으로 흉노(匈奴)의 오른팔에 해당하고, 복여(福餘)와 태령(泰寧)은 충분히 몽고를 방어할 수 있는 요새지인데, 그 지방을 영토 안으로 떼어들이거나 방어선을 철수함에 따라, 흉노가 쇠약해지기도 하고 몽고가 번성해지기도 하였던 것은 정말 자연의 형세입니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以東方言之。一隅連陸。三面阻海。朝鮮之號。遠自檀君。肅愼之名。載在周乘 [중략]
우리나라로 말하면, 한쪽만 대륙과 연결되고 삼면(三面)은 바다로 막혀 있다. 조선이란 국호는 멀리 단군 시대부터 사용되었고, 숙신(肅愼)이란 국명은 주(周) 나라 역사에 실려 있으며. [중략]
대륙[大陸]을 호령하며 천하[天下]를 평정한 삼국[三國]의 뒤를 이은 고려[高麗], 비록 서북계[西北界]로는 고구려[高句麗]에 미치지 못했지만, 천하[天下]에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룩한 고려[高麗]를 이어받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 이 근세[近世]의 조선[朝鮮]이 과연 반도[半島]의 한국[韓國] 땅에 있었는가 ?
당시를 살았던 조선[朝鮮]의 대학자[大學者]로, 국가[國家] 경영의 불후의 저서를 남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유[先儒]의 기록[記錄]을 보면, 조선[朝鮮]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수 많은 대유[大儒]들의 문집[文集]과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에 전하는 데로, 조선[朝鮮]은 대륙[大陸]의 그 자체였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동국[東國]이라는 말은, 지금의 알타이산맥과 천산[天山]을 기점으로 그 동[東]쪽을 동국[東國]이라고 했으며, 이 동국[東國]이 바로 조선[朝鮮]의 그 자체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역사[歷史]는,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가 아니고, 한국[韓國]의 역사도 아니며, 조선[朝鮮史]의 역사[歷史]를 말살[抹殺]시키기 위하여, 조선사[朝鮮史] 후예[後裔]들의 정신[精神]과 혼[魂]을 영원히 병들게 하여 도도히 흐르는 역사[歷史]의 맥[脈]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교육[敎育]을 받아온 것이다.
백두산[白頭山]의 서남[西南]쪽으로 발해[渤海]가 되었고, 백두산[白頭山]이 북진[北鎭]이 되어, 그 서[西]쪽으로 함경도[咸鏡道]의 여연[閭延] 무창[茂昌]이 되었으며, 요수[遼水]의 동[東]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동국[東國]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말까지, 연경[燕京]을 다녀온 조선[朝鮮]의 연행[燕行] 사신[使臣]단의 기록[記錄]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다.
또한 원사[元史]와 명사[明史], 청사[淸史]와도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일치하는 기록[記錄]이니, 이러함에도 우리의 역사[歷史]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 되지 않았다고 주장[主張]할 자가 있을 것인가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제12권[第一集詩文集第十二卷]
척발위론[拓跋魏論]
聖人之法。以中國而夷狄則夷狄之。以夷狄而中國則中國之。中國與夷狄。在其道與政。不在乎疆域也。 [중략]
성인(聖人)의 법은, 중국(中國)이면서도 오랑캐와 같은 행동을 하면 오랑캐로 대우하고 오랑캐이면서도 중국과 같은 행동을 하면 중국으로 대우한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은 도리와 정치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 지역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제12권[第一集詩文集第十二卷]
척발위론[拓跋魏論]
故周之先。間於獯粥混夷之中。未嘗非夷狄也。而一朝有如太王王季者興。而禮樂文物可述焉則中國之 [중략]
때문에 주(周) 나라의 선대(先代)는 훈육(獯鬻)과 곤이(昆夷) 사이에 있었으니 오랑캐가 아닐 수 없으나, 하루아침에 태왕(太王)ㆍ왕계(王季) 같은 이들이 일어나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참신하여지자 중국[中國]으로 대우한 것이다. [중략]
돈황[燉煌]과 장액[張掖]이 흉노[匈奴]의 오른 팔에 해당되고, 복여[福餘], 태령[泰寧]은, 충분히 몽고[蒙古]를 방어 할수 있는 요새지인데,.......... 지금의 돈황[燉煌]과 장액[張掖]은, 근세[近世]에 옮겨진 지명[地名]일 뿐이다.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이 드러나는 것은, 하[夏], 은[殷], 주[周]를 비롯하여, 역대[歷代] 중국[中國]의 왕조[王朝]들은, 지금의 천산[天山] 인근[隣近]에서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한 국가[國家]들이며, 천하[天下]를 통일 했다는 진[秦]나라도 이곳에 있었으며, 진[秦]나라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지금의 카자흐스탄의 일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중앙아시아의 광야[廣野]에는, 흉노[匈奴]의 전초 기지이며, 보루였던 구탈[區脫)]이 원형을 유지하고 상당수 존재[存在]하고 있다.
우리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찾아가면서,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역사서[歷史書]가 가리키는 현지 실사[實査]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고지도[古地圖]와 지명[地名]들을, 지도[地圖]에 표시된 대로 그 지역을 가보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지역들이 허다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 그 것은 지명[地名]들이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상관없이 역사[歷史]를 조작[造作]한 자들에 의해서 본래의 지역에서 이동했기 때문이다.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羅封五嶽九州。麗置四京十道。眞興之巡北境。功著闢土。景德之改邑名。意出變夷。亦可指其處而論其事歟。渤海舊疆。半入契丹 則麗祖統一。能無餘恨 [중략]
신라는 오악(五嶽)과 구주(九州) 등을 봉하였고, 고구려는 사경(四京)과 십도(十道) 등을 설치하였으며 진흥왕(眞興王)은 북쪽 국경을 순수(巡狩)한 것은 그 공적이 국토를 개척하는 데 현저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고을 이름들을 개칭한 것은 그 뜻이 오랑캐의 풍습을 변혁시키려는 데서 나온 것인데, 이것 역시 그 소재를 지적하여 사실들을 논할 수 있겠는가. 발해(渤海)의 옛 강토가 절반쯤은 거란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고려 태조가 통일은 하였으나 어찌 여한이 없겠으며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臣伏惟我東方負山環海。地利有險阻之固。用夏變夷。文物致煥爛之美。小華之號。洵其宜矣。朝鮮得名。已自箕聖之前。肅愼錫命。舊載孔壁之書。東方之見數於中國。厥唯久矣 [중략]
신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산을 짊어지고 바다에 둘러싸였으므로 지리(地利)는 험고(險固)한 면이 있고, 중국 제도를 이용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변혁시켰으니, 문물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므로 소중화(小中華)라는 칭호가 진정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조선으로 이름을 얻은 것은 벌써 기자(箕子) 이전부터였고, 숙신(肅愼)으로 명명된 것은 공자(孔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상서(尙書)에 실려 있으니, 이로 본다면 우리나라가 중국에서 불려지게 된 것은 매우 오랩니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至開土王時。得瀦水以北。至長壽王時。得漢水以北。蠶食靑丘。遂據其半 [중략]
광개토왕(廣開土王) 시대에 이르러서는 저수(瀦水) 이북까지를 차지하였고, 장수왕(長壽王) 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강 이북까지를 차지하여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별칭)를 점차 먹어들어와, 마침내는 그 절반 가량을 차지하였습니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蓋馬之果爲何山者。臣按班固之志。有西蓋馬屬于玄菟郡。據三國史。句麗太武神王親征蓋馬國。以其地爲郡縣。西蓋馬者。今所云分水嶺也。 [중략]
개마(蓋馬)가 과연 어느 산(山)인가에 대해서는 신이 반고의 《한서》지리지를 살펴보건대 ‘서개마(西蓋馬)가 현도군(玄菟郡)에 소속되어 있다.’ 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개마국(蓋馬國)을 직접 정복하고 나서, 그 땅을 군(郡) ㆍ현(縣)으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서개마는 지금 말하는 분수령(分水嶺)인 것입니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臣以爲彼旣云西蓋馬。理宜有東蓋馬。得非白頭山爲東蓋馬乎。通典云東沃沮在蓋馬大山之東。蓋馬者白頭也 [중략]
신은 생각하건대, 한서(漢書)에 이미 ‘서개마가 있다.’ 하였으니, 당연히 동개마(東蓋馬)도 있어야 할 터인바, 아마 백두산이 동개마가 아니겠습니까. 《통전(通典)》에 ‘동옥저(東沃沮)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하였으니, 개마는 곧 백두산입니다. [중략]
순암선생문집권지십[順菴先生文集卷之十]
상성호선생서[上星湖先生書]
暇日草一幅地圖。西北記遼瀋烏喇寧古。自東北海。外至全羅海之東而記日本。又其外列書諸蠻。又自遼海。至全羅西海。記中國山東江南浙江等省沿海州郡而觀之。我東雖云海外偏邦。實四面受敵之地也 [중략]
여가 있는 날 지도 한 폭을 그려서 서북쪽에는 요심(遼瀋)·오라(烏喇)·영고(寧古)를 적어 넣고, 동북해외(東北海外)로부터 전라해(全羅海)의 동쪽에 이르기까지에는 일본을 적어 넣고 또 그 밖에 여러 만이국(蠻夷國)을 죽 적었습니다. 그리고 또 요해(遼海)로부터 전라서해(全羅西海)에 이르기까지에는 중국의 산동성(山東省)·강남성(江南省)·절강성(浙江省) 등 연해주군(沿海州郡)을 적어 넣고 보니, 우리 나라가 비록 해외 편방(海外偏邦)이라 하지만 실은 사면으로 외적을 받는 땅입니다. [중략]
순암선생문집권지십[順菴先生文集卷之十]
상성호선생서[上星湖先生書]
倭人乘船冦掠。無處不到。麗季。東北道常受其害。今聞東海水宗漸低。倭之漁採者。多出我東海。若蔚陵島之類。無時不到。頃年馬倭請開蔘市時。亦曰爾若不許。則渡爾東海。採蔘于江原道及北道云。此亦可慮。 [중략]
또한 왜인은 노략질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고려 말에 동·북도가 항상 그 피해를 받았습니다. 지금 들으니, 동해의 수심이 점점 낮아지므로 고기잡이 왜인들이 대부분 우리 동해로 나와 울릉도 같은 데는 이르지 않을 때가 없다 합니다. 근년에 대마도 왜인이 삼(蔘) 시장을 열기를 청할 때에도 “당신네가 만일 허락해주지 않으면 당신네 동해를 건너가 강원도와 북도에서 삼을 캐겠다.” 하였다니, 이 일 또한 염려됩니다. [중략]
해동잡록[海東雜錄二]
김종서[金宗瑞]
수언[粹言]
金宗瑞旣設六鎭。徙南民以實之。日置酒張樂。大饗將士。吏民苦之。或言其不可。乃曰。風沙絶塞。將士飢苦。以約始後必無終。一日夜宴。反側之徒。射中酒樽。左右驚擾。宗瑞自若曰。奸人欲試我。何能爲哉 [중략]
김종서가 육진을 설치하고 난뒤 남도 백성을 옮겨 그 곳을 채우고, 매일 주연을 베풀고 풍악을 잡혀 크게 장병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관리와 백성들이 괴로워하여 어떤 이는 그 옳지 않음을 말하였더니, 김종서가 말하기를, “바람과 모래만이 날리는 먼 변방에서 장병들이 굶주리고 고생하는데 간략하게 시작한다면 뒤에는 반드시 끝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어느날 밤에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 불평하는 무리들이 활을 쏘아 술통을 맞히매 좌우가 모두 놀라 소란하였으나, 종서는 태연자약히 말하기를, “간인(奸人)이 나를 시험해 본 것이지 제가 감히 무엇을 하겠는가.” 하였다. [중략]
동문선권지105[東文選卷之一百五]
역대제왕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
天下至廣也。內自中國。外薄四海。不知其幾千萬里也。約而圖之於數尺之幅。其致詳難矣。故爲圖者。率皆踈略。惟吳門李澤民。聲敎廣被。圖頗爲詳備。而歷代帝王國都沿革。則天台僧淸濬混一疆理圖備載焉 [중략]
천하가 지극히 넓다. 안으로 중국과 밖으로는 사해(四海)가 몇 천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요약하여 수척(數尺)되는 넓이에 그리게 되니, 자세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그림 그리는 자들이 대개 다소 삭제하고 간략하게 하는데, 오직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聖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게 구비하였으며, 역대 제왕 국도 연혁(歷代帝王國都沿革)은 천태승 청준(天台僧淸濬)의 1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갖추어 실렸다. [중략]
동문선권지105[東文選卷之一百五]
역대제왕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
建文四年夏。左政丞上洛金公 士衡。右政丞丹陽李公 茂。爕理之暇。參究是圖。命檢詳李薈。更加詳校。合爲一圖。[중략]
건문(建文) 4년 여름에 좌정승(左政承) 상락 김공(上洛金公) 사형(士衡)ㆍ우정승(右政承) 단양 이공(丹陽李公) 이름은 무(茂) 이 정사를 화[變]하게 다스리는 여가에 이 그림을 참고하여 연구하고 검상 이회(檢詳李會)에게 명하여, 다시 더 상세히 교정하고 광피도를 합하여 한 도를 만들었다. [중략]
동문선권지105[東文選卷之一百五]
역대제왕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
其遼水以東及本國疆域澤民之圖。亦多闕略。今特增廣本國地圖。而附以日本。勒成新圖。井然可觀。誠可以不出戶而知天下也。夫觀圖籍而知地域之遐邇。亦爲治之一助也。二公所以拳拳於此圖者。其規模局量之大。可知矣 [중략]
그 요수(遼水) 동쪽과 우리 나라 강역에는 택민의 광피도에도 또한 많이 빠져서 간략한데, 지금 특별히 우리 나라 지도를 더 넓히고 일본(日本)을 붙여 새로 그림을 새겨 이룩하니, 조리가 정하여 볼 만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개 지도를 보면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알게 되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있었다.김ㆍ가 두 공이 그림에 힘쓰고 힘썼으니, 그 규모와 국량의 큰 바를 알 수 있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惟我國家。受天休命。全有大東。分八道而州郡星羅。環四圉而鎭堡碁錯。經緯過數千里。休養且累百年 [중략]
우리나라가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받아 대동(大東)을 전부 차지한 이후 8도(道)로 구분하여 주(州)와 군(郡)이 별처럼 벌여 있고, 사방으로 방어하는 진(鎭)과 보(堡)가 바둑알처럼 널려 있어, 소유한 국토는 수천 리가 더 되고 양성한 민력(民力)은 수백 년이 넘었다. [중략]
다산 시문집[茶山詩文集]
제일집시문집8권[第一集詩文集第八卷]
지리책[地理策]
沃野膏壤。桑麻自足。深林大澤。貨財日興。南有筠簵漆絲之饒。北有蔘茸皮革之產。山有千章之材。水居千石之魚。而民物之殷庶。風氣之文明。庶乎其甲於外服矣 [중략]
기름진 들과 땅에는 상마(桑麻)가 자급 자족되고, 깊은 산림(山林)과 큰 못에는 재화(財貨)가 날로 흥성하여, 남쪽 지방에는 균로(筠簵 화살대)와 칠사(漆絲) 등의 풍요함이 있고, 북쪽 지방에는 인삼(人蔘)과 녹용(鹿茸)ㆍ피혁(皮革) 등의 생산이 있으며, 산에는 크나큰 재목들이 있고 물에서는 수많은 어류(魚類)들이 살아, 풍족한 재물과 문명(文明)한 풍속이 아마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제일일 것이다. [중략]
지금 들으니 동해[東海]의 수심이 점점 낮아진다고 하니, 고기잡이 왜인들이 대부분 우리 동해로 나와, 울릉도[蔚陵島] 같은 데는 이르지 않을 때가 없다고 한다.
백두산[白頭山]에 인접하고 있는 동해[東海]가 수심이 낮아진다고 하는 이 기록[記錄]은,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과 같은 내용이다.
연행록[燕行錄]에서, 이 바다를 저들은 동해[東海]라 하고, 우리는 서해[西海]라고 한다는 이러한 기록[記錄]은, 조선[朝鮮]의 백두산[白頭山]이 바로 알타이 산맥에 있다는 것을 징험[徵驗]하는 것이다.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북방[北方]에서 일어나 천하[天下]를 평정하고, 고려[高麗]보다 국경[國境]을 더 크게 넓혔다.
유아국가[惟我國家] 수천휴명[受天休命] 전유대동[全有大東] 우리나라가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받아, 대동[大東]을 전부 차지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역사[歷史]의 상식[常識]과 지식[知識]은 과연 어떠한가 ?
나라를 잃은 국가[國家]의 피해[被害]는 지금까지 국가[國家]의 국본[國本]을 뒤흔들고 있으며, 이러한 상태가 몇 세대[世代]를 지난다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은, 국가[國家]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뿌리 없는 민족[民族]이 되고 말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인 오늘날 우리가, 왜곡[歪曲]과 조작[造作]과 기만[欺瞞]과 위선[僞善]으로 가득한, 피폐[疲弊]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그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을 찾아서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미래[未來]와 후손[後孫]들을 위하여 반드시 수행[遂行]해야 할 중요[重要]한 과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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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알쏭달쏭 어렵습니다. 중국이 있고 요하동쪽은 동국조선이고, 요하서쪽은 서국 즉 서방이라는 말인데요, 중앙의 천자인 중국과 동국조선의 관계가 어렵네요. 그라믄 중국사람은 동국조선인과 다른부류입니까?
현재에 중국이라고 부르는 중국 왕조의 실체는, 요순 이래로 주, 한, 당, 송, 명나라를 중국이라고 볼수 있는데, 이들의 역대 왕조들의 위치는, 근래에 우리가 배워 온대로 지금의 중국 대륙이 절대 아닙니다. 당요의 본래 위치는 천산을 기점으로 그 인근 지역일 뿐입니다. 이는 대륙사 원전과 조선사의 근래 기록과도 일치되는 내용 입니다. 항상 쟁점이 되는 난제가 요동과 요수인데, 지금의 하북성 유역이 어찌 요동과 요수가 될수 있겠습니까 ? 고대의 역사서 원전의 기록을 제외하고 가까이 근세의 역사 기록에서도 일맥 상통하는 내용 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당요가 있었던 지역과, 공맹의 가르침이 있던 지역에 있던 나라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다산 선생님의 말씀이 정확한 것입니다. 근세에 있었던 명나라의 위치도, 하북성의 연경이 명나라의 도읍지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조선이 망한 빈자리에 명이라는 옷을 입힌것에 불과 합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의견이 다를수 있으나, 요동과 연경은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국경 인근 지역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곳에 살고 있는 분들 중에서 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함에도 지금의 하북성이 연경의 유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식민사관의 피해가 나타나고 있는 단면일 뿐 입니다.
지중해 와 중앙 아시아 조선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며, 다만 고대에, 고구려에 이르는 역사에 있어서, 지중해 인근과 중앙 아시아, 서역등과의 관계는, 드러나지 않고, 기록이 희미하지만,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 합니다. 삼국의 이후로 조선사의 왕조들은 요동과 요서를 기점으로 그 동쪽이 대대로 고유의 터전이며, 이는 근세에 조선이 나라의 운을 다하는시까지 그대로 유지가 된 것입니다. 근세에 중국이라는 명나라를 제외하고, 원나라와 청나라는, 중국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만복이 함께하며,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좋은 말씀 보면서, 느끽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 있는데, 저는 <하은주>는 모두 우리의 역사라고 봅니다. 이것은 워낙 오래된 몇 쳔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지금 그 유물유적도 소수 존재합니다. 그러나 역사서는 당시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혈통관게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는 것은 바로 그 증거라고 봅니다.
한 가지 우려스러운 일은 "<중아지방의 조선>과 <근대조선>까지도 그곳에 있었다"는 식의 주장들입니다. 물론 소수의 의견 정도입니다만.........."역사의 진실을 찾자"는 분들이 "근거도, 고증도, 증거도"도 전혀 없는 짜깁기한 이야기들을 사실인 냥 하는 것에 걱정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동쪽 땅, 일 만리 광활한 땅에 누가 있었으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고........."조선사의 진실을 찾아보자"는 사람들끼리 말 싸움하고,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인종. 종족. 풍습이란 하루 아침에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을 텐데.......안타까울 뿐입니다.
제가 알고있었던 상식은 중국이란 조선의 큰 울타리내에서 중앙에 있는 경기도를 즉 관내 또는 기내 라고 부르는곳을 중국이라고 인식하고있었는데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환국고려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은 천산지경에 있었고 또한 요하도 같은곳에 있는데 요수 동쪽은 동국조선이다 ! 그라믄 이주장이 사실일때 조선왕조실록도 거의 대부분 사실일겁니다. 임진왜란을 예로들어 왜놈들이 바로 동국조선을 침략했는데 선조는 서쪽으로 몽진을하고 곧 중국이라는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는 기록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명나라(중국)지상군은 요동을 통해 동국조선으로 왔다치면 수군은 어느방향으로 조선에 왔을까요? 천산지경에 있었는데요...
중국이란 기내지역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전 "환국고려"님의 글을 보면, 현 중국내에 있었다고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님의 말씀대로 <중국은 기전, 기내, 경기지방입니다.> 환국고려님의 코멘트가 있을 것 같군요.
중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선의 中祖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역사속에서 거론되는 중국이라는 나라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임진 왜란은, 역사서와 문집등의 내용을 보더라도, 왜의 근거지와 침략로가 북쪽, 서쪽, 남동쪽 등 거의 사방에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왜의 실체가 정확히 규명이 될때, 진린의 수군에 대한 의문은 스스로 풀릴 것입니다. 본인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의 나라에 대하여, 역사서의 기록에 나타나는 내용을 보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황제라는 호칭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그러한 나라들은 조선사의 가지와 잎이 될뿐 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수 있습니다.
조선사가 대륙의 역사인가 ? 아니면 제후국이며 반도의 역사인가 ? 조선이 천자의 국가인가 ? 아니면 국왕만이 있는 소국인가 ? 이에 대한 답은, 당시를 살았던 선대의 기록으로 대신 합니다.
天子의 뒤를 이은 王을 宗이라고 하고, 공훈이 큰 왕을 祖라고 한다. 육룡이 서쪽으로 떠났고, 칠묘가 피난살이를 해야하며, ....... 칠묘와 오묘가 서쪽으로 피난을 해야하며, .........이와 같은 것이 조선의 실체이며, 이러한 기록들은 왜곡과 조작의 화를 피하여 전하는, 오염되지 않은 기록임을 새겨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