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절을 세우다
-간경도감과 승과실시(1455~1468년)-
세조는 정변을 일으켜 집권하는 과정에서 친족과 정적을 많이 살해한 데 대한 죄책감에서였던지 즉위하자 지금까지의 배불정책을 중지하고 불교를 숭봉했다. 그는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다. 일찍이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석가와 공자의 도에 대하여 그 우열을 언급하면서,“석씨(불교)의 도는 공자의 도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같다”고 했을 만큼 세조는 불교를 잘 이해하였고 또 좋아했다.
1457년(세조 3)에 세자의 명복을 위해 왕은 손수 금강경을 베껴 썼다.1458년(세조 4)에는 혜각존자신미와 판선종사수미, 선사 학열 등을 시켜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간행하여 각도의 명찰 대찰에 나누어 보관시켰다. 1459년(세조 5)에는 왕이 왕자 시절 (세종 때)에 지었던 <석보상절>과 그것을 보고 세종이 부처님의 덕을 찬양하여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본하여 <월인석보>라 하여 출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불교음악인 <영산회상곡> 지었다.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이 영산회상곡은 우리 아악의 대작이며, 한국 음악사에서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세조는 1461년에는 간경도감을 두어 능엄경·법화경·금강경·원각경·반야심경 등 주요경전을 우리말 (훈민정음)로 번역하여 간행했다. 이때 간경도감에서 번역·간행된 경전은 거의 세조가 직접 중심이 되어 번역하고 구결한 것으로서, 이 번역·간행사업은 당시의 고승 신미·수미·홍준 등과 대신 윤사로·황수신·김수온·한계희 등 간경도감의 여러 관료 유학자들의 도움과 힘이 컸었다.
세종 때에 창제된 훈민정음으로 불경을 번역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불경을 우리글로 번역하여 간행함으로써, 지난날 식자층의 전유물이던 불교 경전이 대중화될 계기를 마련하였고, 이는 문화사적으로도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조 때의 불경 번역·간행사업은 단순히 왕실 기복적인 불사로 평가할 수는 없다. 세조는 의식적으로 불경을 인쇄하여 널리 배포함으로써 불교의 포교와 불교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특히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등의 서적은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것들이며, 여기에 씌어진 한글은 어학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서 그 고판본은 서지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세조는 또한 고려 때의 풍속인 전경법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대규모 독경행진 의식이었다. "선교 양종의 승려 수백 명이 불경을 외며 불상을 모신 가마 뒤를 따라 행진했다. 대궐에서 나오면 임금이 광화문에 나와 배웅하였다. 온종일 시가행진을 하면 관청의 관리들이 다투어 공양하였다" 그는 또 세종 때 금지한 승려의 도성 출입을 다시 허용하고, 관속들이 사찰을 무단 침범하는 것을 엄금하는 등 승려의 권익을 보장하였다. 법을 어긴 승려도 일단 사전에 왕의 허가를 받은 뒤 구금하게 하였고, 출가수속(세금을 바치고 도첩을 받는 일)도 관가에서 일부러 지연하거나 거부하지 못하게 하였다.
승려선발시험에 관한 법도 제정하여 <경국대전>에 명기하였다. 즉 승려가 되려면 본산에서 금강경·반야심경·진언다라니 능엄주를 시험 보아 합격한 뒤 예조에 세금으로 베 30필을 바치도록 했다. 100필(서민은 150필)이나 바쳐야 했던 태조 때에 비해 출가수속을 훨씬 완화시킨 것이다.
세조는 세종의 친형인 효령대군의 독실한 불교 신앙과 그에 따른 상서를 내세우며 왕실불교의 원찰로 원각사를 세웠다. 지금의 파고다공원 자리인 서울 중심에 대규모의 왕실 원찰 원각사를 창건한 것은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을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선이 개국 되고 나서 고려 때 왕실 사찰이었던 흥복사를 없애고 그 터에 유교의 예악을 관장하는 악학도감과 관습도감·예장도감을 들어앉혔는데, 이제 세조는 그것들을 다 헐어버리고 옛 절보다 훨씬 규모가 큰 원각사를 세운 것이다. 원각사는 청기와 8만 장을 덮었고, 13층 석탑을 세웠으며 구리 5만 근을 들여 큰 종을 설치하는 등 엄청난 비용과 노동력을 들였다. 1465년(세조 11), 원각사가 준공되자 승려 2만 명을 초대하여 대접하였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효령대군이 번역한 원각경을 강설하는 법회와 낙성식을 열었다.
< 불교사 100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