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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이림 부장판사님께]
현재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사건의 당사자로서 입을 열기 조심스럽습니다만,
부장님께서 먼저 지목하여 언급하셨기에 부득이 첨언을 올립니다.
20년간 지켜온 법관의 긍지, 그리고 사법부의 명예를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셨다는 해명의 글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판사도 때론 말하고 싶다!" 는 진솔한 고백이 많은 법원가족의 공감을 얻었을 것입니다.
산고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판결문 작성과정과 선고경위 등을 잘 설명해주셔서 의구심을 해소하고 신뢰회복에 도움을 주셨습니다.
일단 정교한 글을 게시한 후에도 다시 박성웅 계장과 댓글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철두철미하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암튼 법정이 아닌 곳에서 아드님의 아픔을 걱정하는 인간적 모습을 뵙게 되어 재판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엉뚱한 조중동의 왜곡]
그런데 부장님이 원했건 원치 않았건 거대언론의 입맛에 맞는 먹잇감을 던져 주셨습니다.
오늘까지도 조중동과 한국일보, 문화일보 등은 날마다 야비한 사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판사님! 판사님! 우리 판사님!
당신께서는 이미 헌법기관으로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막강한 판단권까지 갖고 계십니다.
꼭 이렇게 여론에까지 호소를 해야만 하시는지요?
판결로 말하시고, 코트넷에서도 또 말하고 조중동을 통해서까지 입장을 재확인하신다면.....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와 힘을 남용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국민을 선택할 것인가, 조중동을 선택할 것인가]
저는 피고인 최후진술에서 부장님께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건은 법률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문제라고!
언론소비자는 세계적으로도 처벌된 유례가 없는 사건인지라 당사자 간의 대립은 첨예하였습니다.
고소당사자인 조중동은 집요하게 법정을 감시하면서 틈틈이 왜곡기사를 썼고,
피고인들과 민변과 학자들은 한결같이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부장님도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처음부터 검찰의 악의적인 표적수사였습니다.
법무부 장관의 정치적 압력이 있었고, 이에 따라 검찰은 억지스러운 미국판례를 근거로 기소하였습니다.
뉴라이트의 광고불매행위는 전혀 문제삼지 않는 등 극도로 편파적인 검찰은 정권의 하수인처럼
표적으로 선발된 24명의 시민에게만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림 부장님도 조중동의 피해자이신데.....]
부장님께서도 스스로 조중동으로부터 당한 언론테러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당하게 진행한 재판절차에 대해서 악의적인 보도와 사설로 공격하는 조중동을 겪어본 여러 판사님들께서 속상해하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언론의 거짓말에 피해 입은 소비자들이 항의를 하면, 죄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장님이 선택하신 것은 신문사의 거짓말할 자유와 그 광고이익을 보장하는 결론이었습니다
판례를 동원하여 다수 네티즌 또는 소비자들을 공모공동정범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소비자운동은 반드시 위력을 수반하여 그 뜻을 관철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에 대한 처벌사례를 만드셨습니다.
이림 부장님은 나약해 보이는 국민보다는 거대언론 조중동이 더 두려우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자와 약자에게 똑같이 중립적이신 판사님!]
저는 판사님을 보수나 진보라는 잣대로 재단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법관의 양심에 따른 공평무사한 판결을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사실상 악의 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육강식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판관의 역할은 결국 강자의 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서울의 정모 부장판사님은 ‘법관은 현행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자’라고 갈파하셨습니다.
그러나 법은 지배세력과 권력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판사님은 선배인 김영혜 부장께서 당부하신 ‘시대정의’와 ‘역사의식’을 고민하셨나요?
120페이지의 언소주 판결문에는 고민의 흔적도 없이, 검찰의 공소장이 그대로 복제되어 있더군요.
[선택은 언제나 아쉬움이 따릅니다.]
모든 재판은 승패가 있지만, 역사적 평가는 항상 국민주권, 소비자주권의 편입니다.
부장님도 소비자의 한 사람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선택에 의해 조중동의 영업권 보호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결과 조중동으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으셨습니다.
다만, 일부(전체 네티즌 중 약 0.0001%)의 불만스러운 태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칭찬은 접어둔 채, 왜 불평만 끄집어내셔서 '재판불복의 행태'라고 공개적인 고발을 하신단 말입니까?
저는 국민의 기본권과 소비자 권리를 옹호했던 죄로 이미 공모공동정범으로 몰려 있습니다.
그런데 부장님께서 판결이후의 피고인들이 '표변하여 비난과 저주, 인간본성이 의심'된다는 등으로 언급하셨습니다.
반성의 빛이 없다는 거죠.
덕분에 24명의 평범한 아줌마, 교사, 직장인, 학생, 공무원, 의사 등으로 구성된
힘없는 피고인들은 매우 불안한 항소심을 맞게 되었습니다.
[내일 14:00 언소주 사건의 항소심 공판기일이 시작됩니다]
이림 부장님께서 올리신 감성적인 게시글은 매우 호소력이 있지만, 한편으로 많은 법원가족들이 우려를 표명합니다.
2심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하여 1심 판사가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경우는 법원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더구나 그 내용은 1심 판결의 결론과 판시내용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입장이 명백합니다.
담당 재판장에 대한 압력과 예단으로 작용하지 않을 거라는 위로는 공허하기만 합니다.
[임의배당이 아무 문제없다고요?]
이림 부장판사님!
한 가지 여쭤봅니다.
임의배당은 헌법이 보장한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 아닌가요?
정당한 이유 없이 특정판사님들이 배제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심각한 헌법파괴행위입니다.
대법원에서도 지난 진상조사 등의 과정에서 임의배당의 문제점을 인정하였고, 현재 제도개혁 TFT를 통해 해결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임의배당의 부끄러움을 아는 서울중앙법원 이인재 법원장님은 배당에 관한 정보공개청구를 거부하셨습니다.
( 이에 법원노조가 정보공개를 위한 행정소송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이림 부장님은 ‘임의배당의 정당성’을 강변하시다 보니, 재판권 독립문제를 제기하신 분들조차 못마땅하셨나 봅니다.
동료 부장판사님에 대하여 ‘신영철 법원장의 재판간여 문제를 처음으로 외부에 알린 판사’라고 적시하신 것은
현재의 살벌한 공안정국에서 은근한 공격이 되고 남습니다. 이 점은 조심스레 사과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판결불신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부장님은 판결존중을 말씀하셨습니다.
밤새도록 일하고 주말근무를 밥 먹듯이 하는 부장님의 노고를 존경하면서,
진정한 명예를 고민하시는데 도움이 되도록 근대사법의 뒷이야기 자료를 덧붙입니다. 꼭 혼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읽느라 힘들거나 바쁘신 분들은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림 부장님이 강조하신 대로 자긍심 하나로 버티는 판사들이 존경받는 풍토가 되려면,
국민의 신뢰회복이 절실합니다.
판사가 최선을 다한 판결을 했다고 존중을 강요하면, 국민은 수긍할까요?
존경받는 법원은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원이며, 그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완전한 사법권 독립! 그리고 용기있는 판사들의 소신이 우리 사법부를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법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근대사법 비하인드 스토리
몇 년 전 어느 법원장이 변호사로 변신하면서 “시민단체 때문에 사법부 독립이 훼손되고 있다”는 인기발언을 남겼습니다.
우리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간섭받는 부당한 현실의 아픔을 악성민원인 탓으로 돌리려는 말 그대로 견강부회였습니다.
대법원 근처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1인 시위 때문에, 정말 그 분들 때문에 사법부가 존중되지 않고 있습니까?
재판권침해는 권력에 의한 것이 가장 치명적입니다.
사법독립이 절실한 본질적 이유는 정치권력의 외압 때문입니다.
이림 판사님!
판결이후에 고통받으신다는 판사님은 상대적으로 행복하신 분입니다.
선배판사들이 사법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소신판결을 했던 역사를 아십니까?
우리는 목포앞바다의 운저리가 아니기에 과거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현명한 인간은 똑같은 실수와 비극을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차분하게 한번 해방이후의 근대사법역사를 더듬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과거사위원회의 자료를 참조한 내용이며, 한홍구 교수님의 글을 인용합니다.
불행했던 시대를 거쳤던 본인의 이름이 회색으로 표시되는 분은 돌이키기 싫은 치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과연 잘못된 판결로 고통받은 사법피해자와 가족들의 억울함에 비할 수 있을까요?
1. [일본판사를 재활용하여 출발한 남한사법부]
조선총독부 판사 정원은 250명이었는데, 거의 일본인이었고 일본어로 재판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서울 정동의 대법정에서는 드디어 한국사람이 한복을 입고 재판을 진행하는 근대사법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남한에 150여명의 한국인 변호사가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인력이 부족하자 미국정부는 일제치하의 법원서기나 통역관들에게도 자격을 부여하여, 판검사로 임용하였습니다. 이때 친일행각은 전혀 묻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미국에 의해 임명된 김용무 대법원장은 1946년 6월 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다음과 같이 훈시하였습니다.
“법원의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언급하는 자는 사법부에 근무할 자격이 없다”
그것은 친일정권의 썩은 뿌리에서 썩은 열매가 나오는 것을 증명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별수없이 그때의 법원은 눈치보기 판결을 많이 했습니다.
1947년 독립투사 등을 납치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김두한 등에게 한국인 판사들은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보복이 두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그 사건을 강제이송하여 김두한 등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오히려 미군정 군사재판소가 원칙적인 법적용을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1년 후 대통령이 된 이승만님은 김두한님을 특별사면하였습니다.
2. [가인 이병로와 안윤출 부장판사]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은 인권변호사였던 가인 김병로 어른께서 맡으셨습니다. 민족정기와 사법독립을 위해 노력하셨던 그 분의 고군분투는 많은 후배 법조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용기는 법관들에게도 전염되는 특성이 있나 봅니다.
1952. 4. 26.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서민호 국회의원이 구속되자, 국회는 석방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검찰이 석방지휘를 하지 않고, 조선방직 근로자 3천명을 동원하여 데모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법원을 포위하고 “서의원을 풀어주면 판사를 죽이겠다”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1952. 5. 19. 안윤출 부장판사는 구속집행정지결정으로 피고인을 석방하였습니다.
이 때 정체불명의 단체들(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이 법원에 몰려와 “안윤출을 죽이자”고 외치거나 하숙집까지 습격했습니다. 결국 안윤출 판사님은 시골의 처갓집에 숨어있다가 얼마후 대한민국 법관재임용탈락 제 1호를 기록하고 법복을 벗었습니다.
이 때에도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승만에 협조요구에 맞서 법관의 독립성을 옹호하였던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1957년 12월 정년퇴임으로 법원을 떠난 후, 사법부는 정권에 예속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무시무시한 시대상황에서도 황당한 국가보안법, 뇌물사건 등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던 용기있는 판사님들은 지금이라도 사법부의 표상으로 사법기념관에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이승만과 조봉암, 그리고 사법부].
1958년 7월 2일 진보당 조봉암 총재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사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정치깡패가 활개치던 무서운 시절이었지만,
유병진 부장의 소신이 돋보이는 판결이었습니다.
그런데 7월 5일 “빨갱이 유병진 판사를 타도하자”는 수백명의 청년들이 대법원에 난입하였습니다.
그들이 행패를 부리는 동안은 경찰관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특정계장에게는 마음껏 막말과 행패를 부리는 권리가 용인되는 반면, 문제점을 지적하는 직원들에게 즉각 글 삭제를 요구하는 우리 코트넷경찰의 운영과 닮았습니다.)
김병로 대법원장의 뒤를 이은 조용순 대법원장은 국가안보에 협조하자는 취지의 훈시를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고등법원과 대법원이 간첩죄를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결국 차기 대통령선거를 1년 앞둔 1959. 7. 31. 이승만 정권은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진보당 조봉암 총재에게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정적살해의 이 드라마에서 엑스트라 역할을 했던 것이 우리 사법부였다고 평가된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습니까?
4. [판사 재임용 탈락과 홍일원 부장판사]
이승만은 사법부 길들이기를 위해 무시무시한 법관연임법을 적용하였습니다.
1958년과 1959년에 걸쳐 연임대상자의 4분의 1을 탈락시켰습니다.
물론 안윤출, 유병진 등 권력에 미운 털이 박힌 판사들이 포함되었고, 서울지법 윤학로 부장은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사법침해를 겪으면서도 서울고법 홍일원 부장님은 [경향신문 폐간처분 집행정지]를 결정하였습니다.
민주언론에 대한 부당한 폐간탄압에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당시 법원장이던 오필선 고등부장과 김두일 대법관 등의 압박 속에서도 홍일원 판사는 소신을 지켰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살해협박과 처삼촌의 은행계좌까지 추적당하는 보복을 당하였습니다.
5 [4.19.와 윤병칠 부장판사의 용기]
얼마후 서울고등법원에서는 경향신문 폐간이 합당하다며 정부측의 손을 들어주었고,
다시 대법원은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었습니다.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 보전처분을 1년여 지연시켰고, 경향신문은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침내 4.19. 민중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때 대법원은 신속히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이승만이 물러난다는 발표를 하자마자, 3시간만에 경향신문 쪽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당시 조용순 대법원장, 변옥주 대법관, 김두일 대법관, 배정현 대법관 등은 부랴부랴 전화협의를 통해 재판했으며,
판결문 서명조차 소급해서 서명했던 것입니다.
권력이 국민으로 이동했다는 현실에 놀랍도록 적응이 빨랐던 대법관들의 처세술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윤병칠 부장판사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고 준기소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형사피고인이 되어야 할 대법원 판사들은 하급심의 윤병칠 판사에 대한 기피신청을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이 때에도 서울지법과 고법의 하위판사들은 분연히 일어나서 사법신뢰 회복과 책임자 사퇴를 요구하였습니다.
오늘날 신영철 대법관에 대하여 직무수행이 부적절하다는 식의 돌려말하기가 아니었습니다. 사퇴를 요구하는 직격탄을 날렸고,
결국 조용순, 김두일, 변옥주 대법관들은 법원에서 쫓겨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 사법역사상 유례가 없는 코미디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6. [군사정권 암흑기와 판사 정신교육]
1961년 5.16. 군사쿠테타를 통해 민중의 열망을 짓밟은 박정희 정권은 3권분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법부를 지배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시기에 헌정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1963년까지 혁명재판소로 불렸던 법원은 군부통제를 받으며 사법부의 암흑기를 보냈습니다.
심지어 시내 극장에 판사들을 불러놓고, 통행금지 위반자처벌 등 공포정치에 사법부를 이용하였습니다.
박정희는 홍필용 군법무관을 대법원 감독관으로 파견하였고, 52명의 법관을 퇴출시켰습니다.
물론 윤병칠 판사가 포함되어 있었지요. 또 1962년에는 현역군인인 전우영 대령이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무렵의 판검사님들은 매주 군사 혁명찬양과 공산주의비판 등의 정신교육을 받았습니다.
법관에게도 국민복이라는 옷을 입히고, 법원복도에 줄을 그어 좌측통행을 강요하기도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7. [둘로 쪼개진 서울지방법원과 무장군인의 법원난동]
1963년 서울지방법원의 김제형 원장님은 깐깐한 판사였습니다.
군사정권에 협조하지 않는 김제형 원장이 강직한 대법관이 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법원조직법을 개정해버렸습니다. 민사지법과 형사지법으로 분리해버린 것입니다.
황당한 법원쪼개기가 시행된 후, 특히 형사지법에 대하여는 정권의 개입이 노골화되었습니다.
1964년 5월 21일 시위를 했던 대학생들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정복을 입은 수경사 군인들은 권총과 카빈소총으로 무장하고,
서울 형사지법 당직실에 난입하였습니다. 이들은 “영장을 기각한 판사놈이 어떤 놈이냐”라고 행패를 부리다가,
담당자인 양헌 판사가 퇴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자택에까지 찾아가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이 깡패군인들은 대부분 무죄나 특별사면되었습니다.
8. [검찰의 굴욕 -신직수와 민복기]
박정희 정권은 검찰까지 장악하기 위해 36세의 신직수 검찰총장을 전격 발탁하였습니다.
어린 신직수는 물만난 고기처럼 활개를 쳤고, 법무부 장관 민복기는 그와 환상의 콤비를 이루었습니다.
1964년 8월, 계엄령을 내린 박정희 시대의 제왕은 정보기관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장 박형욱은 정권안보를 위하여 1차 인민혁명당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서울지검에 송치했지요. 그나마 양심적인 검사들(이용훈 검사 등)이 남아있었던 검찰에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사건을 기소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습니다. 민복기 법무부 장관은 상명하복을 주장하며 공소장 서명을 강요하였고, 이 때 이용훈 부장검사가 제출한 사표는 신직수에게 수리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검찰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죠.
후에 신직수님은 법무부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을 10여년 해먹었고,
을사조약 친일파 민병석의 아드님이신 민복기님은 법원으로 건너와 5대와 6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민복기 대법원장 임기중에 인혁당 사법살인이 이루어졌고, 퇴임후에도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로 잘 살았습니다.)
9. [판사들의 수난]
1964년 동백림 사건의 무죄를 선고한 주운화 대법관에 대하여 “법관의 가면을 쓰고 도사린 붉은 늑대”
“김일성의 앞잡이” 라고 규탄대회가 열렸습니다. 이것은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의한 관제데모였음이 훗날 밝혀졌습니다.
1971년 유명한 1차 사법파동이 일어났습니다.
평소 무죄판결을 많이낸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재판장과 배석판사가 표적이었습니다.
7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두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습니다.
제주도에 현장검증을 가면서 변호인으로부터 비용을 받았다(당시의 법원관행이었음)는 혐의였습니다.
수석부장인 유태흥 판사가 영장을 기각하자 검찰은 “두 판사가 성접대를 받았다”고 보강하여 영장을 재청구하였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10. [제 1차 사법파동]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노골적인 법원길들이기였습니다.
이에 우리의 판사님들은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극에 달하는 정권의 만행을 더 이상 견딜수 없었을 것입니다.
판사실에 도청장치를 하거나 무죄선고하는 법관의 예금통장 뒷조사, 미행과 함정수사를 하기도 하였고,
용공분자로 협박하거나 가족들 신원조회까지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판사들은 법관길들이기를 중단할 것과 사법권 독립을 요구하면서 집단사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달여만에 영장청구했던 담당검사를 전보인사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것이 1차 사법파동이었던 것입니다.
11. [사법부의 자발적 충성]
박정희정권의 헌법파괴행위가 이어지던 시절은 판사목숨이 파리목숨이었습니다.
1973년 3월 법관재임용에서 48명의 법관이 탈락되었습니다.
시위학생에 대한 무죄선고, 영장기각을 선택한 판사들이 거의 법복을 벗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판사들은 길들여질 수 밖에 없었고, 중앙정보부의 요구에 충실하였습니다.
법관은 탄핵 금고이상의 선고없이는 파면되지 않는다는 강력한 신분보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판사님들은 너무 쉽게 권력에 굴복한 것은 아닌지 씁쓸하기만 합니다.
군사정권에 외압에 대하여 현직법관이 저항하다가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높다란 법대에 앉은 판사들은 피고인들이 당했던 가혹한 고문에 대해
“상처가 있는지 확인해보자”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검찰의 조작된 증거를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결국 박정희시대 형사법정에서는 수많은 양심수들을 오로지 -자백을 유일한 증거로 하여- 유죄로 인정하는
자동판매기 판결이 양산되었습니다. 심지어 “경부고속도로는 4차선이다” 또는 “짜장면은 싸고 맛있어”라는 얘기조차
간첩이 수집한 국가기밀이라고 공소장에 올렸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판사들은 이에 순응하여 사형과 무기징역을 남발하였던 것입니다.
12. [대법원장 퇴임의 변]
그 시간들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친일파들이 남한사법부를 장악한 이래로 다시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는 국민의 신뢰를 축적하지 못했습니다.
해방이후 잠시 가인 김병로 어른께서 사법독립의 위상을 지켰던 적은 있지만,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은 아직도 법원을 맴돌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대법원장님은 퇴임사에서 사법부를 한자로 ‘司法部’ 라고 표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법원장 취임초에는 포부와 이상이 컸으나 과거를 돌아보면 오직 회한과 오욕의 역사였다”
자신의 취임사에서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질 시대정신’을 강조하셨던 우리 이용훈 대법원장님의 퇴임사는 과연 어떤 내용이 될지 궁금합니다.
[에필로그]
2009년 오늘의 사법현실은 어떻습니까?
만인에게 공평하다는 법은 여전히 유전무죄의 전통을 유지하며, 오천만 국민 중 만명에게만 공평합니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공화국 원리는 명박민국에서 적용되지 않습니다.
1%의 소수특별권력은 우리 법원에도 있으며, 그것을 말하는 자는 징계에 처합니다.
어느 날 사법부를 직접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포플리즘에 휘둘리지 말고, 권력맞춤형 판결을 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비민주적인 정책에 항의하는 다수의 국민들의 입을 막기 위하여, 촛불집회를 처벌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부응하여 특정판사에게 사건배당을 배제하거나 전화압력, 이메일독촉의 재판침해행위를 자행한 법원장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지금도 대법원 대법정 높은 법대에 올라앉아 국민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혹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법권 독립을 외쳤던 판사님들에게 ‘법관재임용탈락’이라는 반격을 고민하고 계실까요?
지금도 가인 김병로 어르신께서는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법권 독립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지만, 판사 한분 한분의 소명의식을 먹고 자랄 것입니다.
오늘도 과중한 격무에 시달리면서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법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전국의 평판사님들, 공무원노동자들께 깊은 존경심과 사랑을 보냅니다.
바쁘신 가운데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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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휼륭한 글이네요
글을 읽으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과거 군사독제시절 대통령 앞에서 충성맹세를 한 대법원장이 떠오릅니다.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내일이군요....이 나라에도 희망이 있기를....
사법부를 위한 충정어린 글이군요....
법은 잘 모르지만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말 항상 기억하고있는데 우리판사님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검찰은 권력의 시녀노릇하지만 법원만큼은 국민의 편에 서주십시요
이런 소중한 글을 읽게되어 감사합니다..그런데 특이한점은 그시대나 지금이나 변한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공통분모인 친일파,매국노 들이 지금도 여전히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이것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모두 바라는 세상은 없지요..우리들의 노력이 더해져 그런 세상이 빨리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참 훌륭한 내용입니다.좋~~다.
더불어님....그냥 오늘은 감사하다고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정곡을 찌르는글 감사합니다
화이팅^^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떡찰 그리고 법원...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권력을 가진자가 원하기만 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언행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권력과 함께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단지 알량한 법조문으로 양심을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될 법조문을 찾는 데에 노력할 뿐이지요. 그 노력이 가상하다고 할까요? 더불어님... 글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미국판례라니 누가 사대수구 아니랄까봐 ㅡ,.ㅡ
좋은글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친일 하면 3대가 흥한다가 아니라 대대손손 흥하는군...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는것 모두 이루시기를..
더불어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옛날처럼 반대파는 아예 싹을 잘라야 되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되풀이를 언제까지 어어가려는지...더불어님 수고 많으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세계 어느나라도 불매운동이 불법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과연 어떤 결정을 할지 두고 봅시다. 장문의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더불어님 화이팅!!!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이림 부장을 자갈치 시장에 보내서 한 3년만 장사시키면 국민의 편에서 상식적인 판결을 내릴텐데....
항소심에서는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판결을 기대합니다.
법관의 직에 충실하고자 한 법관은 오늘도 법원을 떠나고 있으나, 신영철이는 아직도 대법관실에 숨어지내고 있으니 이 판사도 신영철이가 되고 싶은 모야이네요. 판사 임용 절차를 고쳐야 합니다. 최소한 사회 생활 10뇬은 한 사람이라야 법이 사람을 잡기 위한 건 지 돕기 위한 건 지 판단이 서지 않겠어요? 종이에 인쇄된 법밖에 알지 못하는 비린내 나는 판사에게 뭔 인간을 위한 판결을 기대하겟습니까?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엄청 힘들게 쓰신 글이네요. 훌륭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며, 본인의 무지함이 부끄럽군요. 힘내세요, 정의가 외롭지만은 않다고 믿습니다.
멋진글 잘읽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과거 역사군요.아직도 과거 역사가 청산 되지 않고 친일매국세력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찰 노릇입니다.
법은 정의의 편에 서야합니다. 초심을 간직하세요 법관님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잘보고 갑니다...눈에 쏘옥 들어오네여..감사합니다
정말 우리나라 사법부의 히스토리를 잘 정리해주신 것 같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에 의해서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애써 큰 용기 없이 자신에게 선처를 처한 분께 동정표를 드립니다. 하지만, 남을 해한다고 그 상처가 아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너 죽어야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닐런지요. 하긴, 그렇게 싸우고 물어 뜯는 것도 아름답다면 생명이 있기에 아름다운 법이지요.
이림판사(님) , 외압으로 힘들었을거라는 그나마의 동정은 나의 사치였다. 이림판사를 나의 살생부에 올린다.
판사나 검사나 어려운 고시를 통과한 사람들인데.. 제일 중요한 헌법 제1조를 잃어버린 넘들이 너무 많다. 그러면 국민들에게 이러한 아픔을 주지 않을텐데..
더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안타깝게도 비겁하고 못된 판사들 만이 잘 먹는 삶을 살았네요.. 물론 잘 살았을 지는 미지수이지만,,
더불어님 글쓰시느라 무척 고생 많았겠어요.응원 합니다
와. 참 긴 글이지만 대한민국 재판관들의 요약본이군요. 다시 한번 읽어볼 가치가 있네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글이었습니다 더불어님께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정신이 번쩍듭니다. 용감한분이 계셨고, 비겁한놈이 끼어 있네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대단한 열의가 느껴지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