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어머니, 아버지, 창현이와 함께... 한강에서 대학 낙방에 대해 슬퍼한다.
술 한잔 하고 어머니와 같이 울었던 기억.
아름다운 강가에서... 아름다운 어머니가 울면서 나를 토닥이시던 기억.
차에 있던 아버지와 창현이는 내가 강으로 들어가는 줄 알고 나온다.
정말 많이 울었다.
장면 2:
단기 연수를 가던 날... 친구들의 비행기표까지 다 들고 있던 제가 집에다가 비행기표를 놓고 왔다.
아버지께서 꽤 많은 돈을 물어주셨다.
나는 그 때 솔직히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장면 3:
단기 연수에 다녀온 후 나는 미국행에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내 길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이자까야 미금점에서 설겆이를 하다가 울화통이 터져서 어머니께 이야기 했다.
미국에 꼭 가야 하는데, 피곤해서 토플 공부를 못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나에게 그럼, 얼마간 쉬면서 토플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그 후에도 나는 두번의 시험을 더 본 후에야 원하는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장면 4: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학기 중인데다가 만만치 않은 비행기 표값, 그리고 이제 돌이 갓 지난 아이 때문에 한국에 갈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밤새 속이 상해서 울었다. 하지만 그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장면 5: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내가 한국에 갔을 때 아버지께서 너처럼 상식이 없고 독서량이 부족한 사람이 무슨 박사냐는 말을 들었다. 그 말씀에 발끈해서 집에 있던 문학 전집을 들고 다녔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만나는 친구들은 다들 회사 얘기로 바빴다. 나는 3개월 백수 생활을 하며 이제 내가 학위를 받기 전까지는 절대로 한국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다. 그 해 여름은 그 일들 이외에도 나에게 가장 가슴 아픈 여름을 만들어 줄 만한 일들이 참 많았다. 그 이후로 아직까지 한번도 한국에 가지않고 있다.
멈출 수도 있었는데...
여러가지 장면들이 기억이 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저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다.
외삼촌이 내가 재수하던 시절해 주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너는 특별히 잘난 것이 없으니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솔직히 박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멈췄어야 할 순간들이 너무 많았었는데..
얼마전 페이스북에서 원준이를 만났다.
예전에 같이 외고 공부를 하던 원준이..
미국에서 학부를 나와서 LA의 한 금융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남억이가 어제 미국에 석사를 하러 들어왔다.
오늘 통화를 하면서... 그래도 네가 제일 가방 끈이 길지 않냐... 그랬다.
하하.. 하하... 하하...
인생 역전... 그런게 있나? 그런 건 없다.
나는 왜 그 아이들처럼 현명하지 못했을까.
오늘 동부에 있는 학교에 지원을 했다. 학교를 옮길 생각이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도 알만한 학교로 옮기는 것이 목표다.
그 학교를 시작으로 몇몇 학교에 지원을 할 생각이다.
대부분 학교들이 한국에 있는 사람들도 왠만한 사람들은 알만한 학교들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하고 공부하는 한국인들을 보면 한계를 느낀다.
깊이가 없음에 항상 슬퍼하고... 나의 한계에 대해서 언제나 힘이 부치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들과 또 경쟁하려 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흉내를 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멈출 수도 있었는데..
내 스스로를 버렸더라면...
한계를 제일 처음 느꼈던 "장면 1"에서 진작에 멈췄더라면...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대로. 아주대 정도는 갈 수 있었을텐데... 경북대 정도는 갈 수 있었을텐데...
외삼촌 말씀대로 나는 특별한 놈이 아니었는데..
아버지 말씀대로 나는 박사를 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운이 없어서 동아 방송대를 간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실력이었었는데..
나는 그걸 인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장면 1에서 알아차렸더라면... 장면 2, 장면 3, 장면 4, 장면 5...
그런 아픈 장면들이 없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럼, 지금까지도 흉내내면서 힘들어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그 머리 좋고 어릴 적부터 열심히 공부하던 박사들을 따라가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됐을텐데...
나보다 집안 환경도 좋고 머리도 좋았던 그 아이들, 그러면서도 공부도 열심히 했던 그 아이들보다도 긴 가방끈...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미국 사람 중에서도 2%밖에 안 된다는 박사.
98%가 가지 않는 그 길을 나는 왜 걸어왔을까... 그저 그 2%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98%가 별로 관심없어하는 그 2%.
내 나이 이제 서른 다섯. 내가 선택한 길이니 후회는 없다. 후회를 해서도 안 된다.
그건, 내가 피곤해서 공부할 시간 없다고 투정부릴 때에도 밤낮 바꿔가며 이 못난 아들 뒷바라지 하던 어머니께도 못할 짓이지.
뼈골빠져서 아들 교수 만들어놓고 아짂까지 아무 덕도 못 보고 계신 어머니, 아버지께 못할 짓이지.
그래. 오늘도 흉내내자. 열심히 흉내내다 보면 나도 언젠가 그 사람들 비슷하게는 되어 있겠지.
그러다보면 아버지 친구분들 모시고 원동 마을 회관에서 잔치한번 거하게 열어드릴 수 있겠지.
할아버지 산소에 준희 데리고 가서 떳떳하게 인사드릴 날이 오겠지.
시골 계신 친척분들 모두 초대해서 아이고 이제사 사람 노릇하게 됐습니다. 하고 겸손한 척 이야기 할 날이 오겠지.
다행인 건, 흉내내는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가 아니었음에도 박사학위도 있고 교수직도 있다는 것.
후회 말자. 울지도 말자. 조금만 더 참고 달리자. 아버지도, 어머니도, 창현이도, 초아도... 꿋꿋이 달리고 있지 않은가.
내가 넘어지면서 바톤을 놓치고 허둥대는 바람에 등수가 많이 밀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있지 않은가.
무릎에 난 생채기 쯤. 눈물 한번 쓱 닦고 달리다보면 다 낫는것. 넘어졌던 거 생각한다고 등수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니까.
첫댓글 그래,
사람은 어차피 후회하면서 사는거다.
세상에 나서 후회하고
왜 여기까지 왔지? 하면서 후회하고
그 때 그 나이에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하고....
그래도 지나고 보면
그렇게 후회라도 할 수 있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는 것을
알지~~~
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니까 영화 박하사탕이 생각납니다.
설경구가 마지막에 "나 돌아갈래" 하고 절규하던 모습...
저도 지금의 아버지 나이가 되면 지금의 제 모습이 후외될 수도 그리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앞으로는 더욱 행복한 일이 많을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