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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천국‥♡ 스크랩 2009신춘문예 당선시
글과그림 추천 0 조회 61 10.02.22 08: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늘은 달이 다 닳고 /- 민구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
그늘에 셀 수 없이 많은 구멍이 나있다 바람만 불어도 쉽게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앉아본다
수족이 시린 저 앞산 느티나무의 머리를 감기는 건 오랫동안 곤줄박이의 몫이었다
곤줄박이는 나무의 가는 모근을 모아서 집을 짓는다
눈이 선한 저 새들에게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연장이 있다 얼마 전 죽은 곤줄박이에
떼 지어 모인 개미들이 그것을 수거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일과를 마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와서 달이 떠오를 무렵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데,
이때 달은 비누다
뿌리가 단단히 박혀서 번뇌만으로는 달에 못 미치는 나무의 머리통을 곤줄박이가 대신,
벅벅 긁어주는지, 나무 아래 하얀 달 거품이 흥건하다
오늘은 달이 다 닳고 잡히는 족족 손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걸렸나
우물에 가서 밤새 몸을 불리는 달을 봐라
여간 해서 불어나지 않는 욕망의 칼,
부릅뜨고 나를 노린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난쟁이행성 134340에 대한 보고서 / 도미솔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됐다수금지화목토천해명의 끝별 명왕성은난쟁이행성 134340번이란우주실업자 등록번호를 받았다그때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한 남편은지구에서부터 점점 어두워져 갔다명왕성은 남편의 별그가 꿈꾸던 밤하늘의 유토피아빛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별이 될 수 없어수평선 같았던 한쪽 어깨가 기울어그의 하늘과 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는 꿈을 간직한 소년에서 마법이 풀린꿈이 없는 중년이 되어버렸다명왕성은 폐기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남편의 관절은 17도 기울어진 채 고장이 났다상처에 얼음주머니 대고 자는 불편한 잠은불규칙한 삶의 공전궤도를 만들었다이제 누구도 남편을 별이라 부르지 않는다알비스럼 낙센에프정 니소론정식사 후 늘 먹어야하는 남편의 알약들이그를 따라 도는 작은 행성으로 남았다남편을 기다리며 밝히는 가족의 불빛과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그릇이그의 태양계였으니, 늙은 아버지와아내와 아들딸을 빛 밝은 곳에 앞세우고그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 끝 추운 곳에서밀려나지 않기 위해 노예처럼 일했을 뿐이다절룩거리고 욱신거리는 관절로남편은 점점 작아지며 낮아지기 시작했다그도 난쟁이별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그가 돌아오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그가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그 길을 작아진 그림자만이 따라오는데남편은 그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지구의 한 해가 명왕성에서는 248년그 시간을 광속에 실어 보내고 나면남편은 다시 별의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명왕성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2009년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어둠서만 숨쉬던 내 시에도 햇빛이…

내 방에는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침은 내 방을 찾아오지 않고 멀리서 보고 있습니다. 그 어둠이 무서워 전등 스위치를 찾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스위치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끝이 없는 일은 나를 더욱 내 방에서 나갈 수 없는 외톨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후가 저물어가는 시간 낯선 번호의 전화가 왔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서만 숨을 쉬었던 시에게도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다시는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기쁩니다. 당선 소식을 자랑하고 싶어 여기 저기 전화를 겁니다. 햇빛도 덩달아 신이 나서 내 방안 구석구석 돌아다닙니다.
아침 햇빛이 베란다 가득 들어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햇빛이 따라옵니다. 환하게 비치는 내 몸을 봅니다. 내 몸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서있습니다. 어둠에서만 숨을 쉰 내 언어들도 이 햇빛에서 고른 숨을 쉬게 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합니다. 오랜 기도를 끝내고 나는 일어납니다.
먼저 부족한 시를 뽑아 주신 국제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늦은 시 공부에도 늘 칭찬만 해주신 엄마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며 묵묵히 나를 믿어주고 밤 늦도록 컴퓨터 앞에만 있는 나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주곤 했던 남편과 우리 아이들, 민지 양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시의 씨앗을 찾으러 같이 다녔던 조덕자, 이궁로, 유금오 시인에게도 마음 가득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 나를 위해 기도해주던 진영미 씨에게도 그동안 많이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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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본명 도순태 ▷1957년 경북 경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9 경향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

‘ ? 피쉬’ / 양수덕

땡볕더위에 잎맥만 남은 이파리 하나 지하도 계단 바닥에 누워 있던 청년은 양말까지 신고 노르스름한 병색이었다 젊음이 더 이상 수작 피우지 않아서 좋아? 싫어? 스스로 묻다가 무거운 짐 원없이 내려놓았다 피쉬라는 물고기는 물 속 바위에 낙엽처럼 매달려 산다 콘크리트 계단에 몸을 붙인 청년의 물살을 떨다 만 지느러미 뢴트겐에서 춤추던 가시, 가물가물 동전 몇 개 등록상표처럼 찍혀 있는 손바닥과 염주 감은 손목의 그림자만이 화끈거린다 채 풀지 못한 과제 놓아버린 손아귀 청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세상의 푸른 이마였던 그의 꿈이 요새에 갇혀서 해저로 달리는 환상열차 잎사귀인지 물고기인지를 한 땀 바느질한 지하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이들이 다리 하나 하늘에 걸칠 때

시 부문 심사평- 개성있는 언어 활달하게 구사 심사위원 황
예심을 통과해 본심의 대상이 된 열다섯 분의 작품 가운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정수연씨의 ‘숙련공’이었다. 시를 쓰고 있는 자기 세대의 어법을 개성적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행과 행의 관계를 긴밀하게 조직하는 힘이 부족해 보였고, ‘숙련공’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감각적인 표현에 구체적인 사유를 담지 못한 허약한 표현이 많았다. 시에서 강한 정신력과 숙련된 언어는 함께 이루어진다. ‘도원역’과 ‘아주 조금만 남은 것들’을 쓴 김우찬씨는 언어를 정제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갈고 닦은 언어는 새롭다기보다 익숙하고 편안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언어나 세계를 향한 모험이 보이지 않는다. 시에 지루한 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안웅선씨의 ‘창밖으로 오분’은 창을 내다보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개성적인 어조로 붙잡아내는 그 착상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끌고 나가는 힘이 부족해 환상으로 잇대어진 연결 부분은 실감이 부족했다. 감탄어미와 ‘치명’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시의 끝을 맺고 있는 것도 안일한 수법이다. 양수덕씨는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개성있는 언어를 활달하게 구사하고 있다. 언어에 개인적 표현이 많아 소통부재의 위험이 보이기도 하나, 당선작 ‘ 피쉬’에서는 지하도의 걸인이라고 하는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묘사력과 참신한 비유로 대상을 섬세하게 구현해내었다. 말은 자신의 생각을 갈고 닦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을 이 세계로 실어보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신춘문예의 당선을 계기로 세계 속으로 자아를 밀고 나갈 수 있는 힘도 함께 얻기를 바란다.

시 부문 당선소감- “이제 내게도 뿌리가 생긴 것 같다”

시 부문 당선자 양수덕씨(55·본명 양선희)는 기자를 두 번 놀라게 했다. 첫번째는 적지 않은 나이로 ‘늦깎이 등단’을 했다는 점이었다. 두번째는 그럼에도 그의 시가 젊고 감각적이라는 것이다. 양씨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명제를 재확인시켜주었다.

“뿌리가 없던 사람에게 뿌리가 생긴 것 같습니다. 시에서 많은 실패를 겪었고, 희망도 안 보여 스스로가 바람 같다고 느꼈어요. 제가 당선된 것은 시를 잘 써서라기보다 저 같이 뿌리없이 사는 사람들, 존재감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뿌리가 없다고 했지만, 양씨에게 시는 자신의 존재 그 자체였다. 성신여자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도 시에 대한 꿈을 한시도 접지 않았다. 40대 초반 자비로 시집을 내기도 한 그가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8년 전. 혼자 쓰는 시는 발전이 없다는 생각에 시 공부모임에 나갔다. 지금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 시사랑회 화요팀에서 공부하고 있다.시에 대한 애정 하나로 외길을 걸어왔지만, 신춘문예 등에서 낙선을 거듭하며 아픔도 많이 겪었다. “한 선생님이 ‘시를 열심히 쓰다 보면 언젠가 시가 보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큰 용기가 됐습니다. 주변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살았는데 이제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기분입니다.”당선작 ‘ 피쉬’는 양씨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 목격한 젊은 걸인을 보고 가슴이 아파 시를 쓰게 됐다. “살다 보니 제가 모르는 사람도 스승이고,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도 스승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를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양씨는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가 너무 놀라 심장마비라도 걸릴까봐’ 나중에 조용히 당선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오래 지켜봐줬던 부모님, 형제, 친구, 주변사람들, 시사랑 화요팀 선생님뿐 아니라 인연 있었던 선생님들, 시사랑에서 함께 공부한 분들께 감사의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양씨에겐 시가 바로 그 자신이다. “그동안 혼자 즐기려고 시를 썼지만, 이제 사람들이 위안받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2009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춘 /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 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전주 삼천변에 자원재활용센터 요요자원이 있다

시 당선소감

"이제 시작..사람냄새 채우겠다"

이미 일가를 이루었어야 할 다 늦은 때 나를 찾아온 시는, 내가 나를 달달 볶게 했다. 소싯적 이웃집 가시내처럼 희멀건 목덜미 슬쩍 내보이고는, 풀풀 살 냄새 흘리고는 그뿐,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숱한 밤 잠 못 들고 열뜨게 했다. 먹다 남은 소주병을 찾게 한 밤이 많았다.
희미한 불빛을 따라가다 돌부리에 차여 고꾸라졌었다. 고꾸라진 나를 일으켜 세우고 깨진 무르팍 쓰리게 닦아 딱지 앉게 해준 형 같은 아우가 있다. 그 상처 덧나지 않도록 호호 불어 처매주고, 다시는 넘어지지 말라고 두 다리에 힘을 넣어준 선생님이 계신다.
내게 언제까지 곁눈질 할 수 있는 핑계 하나 만들어 준 전북일보와 두 분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린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많다. 강연호 교수님 고맙습니다. 박성우 시인 고맙다. 고향집을 홀로 지키는 어머니,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들 지혁 동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루한 내 삶에 위로가 된 적도 아주 없진 않았던 시, 재촉하지 않겠다.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밤새 풀잎에 이슬 내리는 소리 또박또박 받아 적겠다. 원고지 한 칸 한 칸 사람냄새 채워 넣겠다.
아파트 모퉁이에 '행복수선'이라는 헌옷 수선집이 있다. 해지고 구멍 난 옷만 수선되는 게 아니라, 조각나고 망가진 우리들 행복도 수선될 수 있다면 좋겠다. 뜻하지 않은 경제난으로 춥고 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 빨리 왔으면 참 좋겠다.

◆약력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현 한국전력 전주전력관리처 근무

*2009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 / 윤은희
1
골목의 연탄 냄새 부풀어 전생의 어스름 빛으로 울적한 저녁
길바닥의 검푸른 이끼들 엄지손톱 半의 半 크기 달빛에 물들었다
아르정탱Argentan * 에 맨발로 들어가 자주 꾸는 꿈 벗어두고 나왔다

2
예전에 방앗간이었다는 전설 알고 있다
아,르,정,탱, 하고 불러보는데 안쪽 벽 타고 ‘돌돌돌’ 물소리 흘러내린다
남자들의 이야기 소리, 쉼 없는 흐름에 세월 함께 묻혀졌다
무대 뒤쪽 갤러리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의 The Flower Vendor를
힐끔,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계절의 호흡이 울다가 지쳤나보다

3
나무로 된 제단(祭壇)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높지 않은 천장과 벽을 지나 기억字 다락방에 들어갔다
먼지 깔린 마루 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눈꺼풀 깜빡인다
습기 묻어 닳은 웃음 나무 계단을 미친 듯 닦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없었다

4
하루 종일 굶었다
마티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 은그릇 반짝거림이 딸꾹질 한다
이슬 맺힌 잎사귀 후려치는 듯, 벽난로의 기둥이 꽃화분 훔쳐보고 있다

5
미친 여자의 하이힐처럼 똑딱대는 子正무렵
오늘은 '도둑맞은 시간에 걸어오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연인을 능욕한 천박한 권태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손도 닿기 전에 시들기 시작하는 마른 허브잎
그날은 불안을 잠식하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의심은 달착지근한 냄새로 붙어 있었다

6
詩를 생각하다 그만,
생선 눈알처럼 벌겋게 달구어진 子音들, 꼭꼭 밀어 넣어 반죽한다
슬픔 뚝뚝 떠내어 ‘대리만족’ 이라는 수제비를 굽는다
기호를 품지 않은 낱말 대리만족을 모른다
세상의 조롱거리 내 몫이 아니지

7
물안개 추파秋波처럼 미끄러지다 까무러치는 호수 주변을 손잡고 뛰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하겠다던 맹세는 황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입술의 냄새는 서걱거리는 먼지처럼 까칠해졌다
사나흘 내린 비 끝에 다시 아르정탱에 갔습니다
본능의 능숙함이 당신의 입술을 더듬거렸습니다.당신의 입술은 나의 미각만을 기억할 뿐
두 시 방향으로 기운 햇살의 온화함이 묻어 있어요

8
주인장
오늘은 Leonard Cohen의 Famous Blue Raincoat를 들을 수 있겠소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요
약하게 슬어지는 音調, 불구가 된 기억에는 없다
건너 편 테이블의 핑크재킷과 홍차 사이에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말할 수 없는 어색함 감돌았다
다만 성스런 스푼이 빛바랜 비단옷 차림으로 춤추고 있다

9
그날은
교리의 꽃봉오리에 충실한 교회 사람들
마음씨 좋지만 우둔한 젊은 청춘들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매끈하게 빠진 조약돌 하나 주머니에 넣고 땀이 나도록 문질러도
손이 헤지 않을 그런 신부와 결혼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각별한 의식儀式
주인장이 누구에게나 봄소식 하나 던져 준 날이다

10
오늘은
여자들 불편하게 하는 소박한 음악 연주회가 있어요
콘트라베이스를 든 남자의 팔뚝이 검게 그을다만 남성성을 과시하고 있어요
첼로의 숨결소리, 매일 밤 떠오르는 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카스트라토를 죽이지는 마세요
수족관의 주홍빛 물고기들
살아, 살아 외침을 거듭하고 있다
함께 살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 소녀를 위로하는
무조건적인 달, 높이 떠올라
호수는 물안개의 소름으로 노닥거리고 있었다
(손끝 적셔주는 빗방울 떨어져 분열증 낚아챌 때,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해요)

11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기다린다
서로 같은 나라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표준말에 서투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투리에 서투르다
그런데 표준말을 잘하고 또한 사투리도 잘하는 사람이 죽는다
무슨 뜻, 어떤 의도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

12
남자 둘 여자 하나
쭈그린 술친구들입니다
한 사람의 맹세가 나뭇가지 위 잔설殘雪에 반짝이고 있어요
술 그리고 여름날의 여자만 저울질하겠다 말했지요
맥주의 쓴맛을 혀 위에 굴리며 곁눈짓으로 농담을 엿들었다
혼자 잠드는 침대처럼 사는 게 아쉽다고 느껴질 때면
Bevinda의 “다시 스무살이 된다면”이 떠올랐어요

13
'장미빛 인생'을 닮지 않은
장미 입술에 입맞춤 한다고 장미가 웃겠어요
오히려 우리가 울었지요
그대 떠났을 때 나는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질 거예요건너 보이는 트라이엄프 아파트의 커튼 찢겨져 방향 없이 나부낀다
不在의 냄새, 비온 후의 버섯이 되었다

14
서리 내리는 차가운 11월
골목길 빠져나오는데
검은 상복 벗어던지지 못한 숙녀의 얼굴 빤히 쳐다보는 여름날의 구름은 못내 불편하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염려하고 있는가
구름의 맥박은 거의 고동치지 않았다

15
밤이면 내 꿈을 흔들어 놓던 그대는
홀린 듯 둥글게 닫힌 가방을 열고 몰래 감추어둔 햇빛을 쏟아 부었다
-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빛이 필요해

16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경절형 심장이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55m 종루에 사로잡혀 길게 하품하더니
졸음을 재촉하고 있다
다트의 화살은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는구나

17
빵 굽는 냄새 속,
기억은 회초리 맞은 情에 사로잡혀
한낮의 깊은 그림자 소진해 버렸다
걸어 두어 목이 잘린 꿈 외투 걸치듯 입고 나왔다

* 대구 수성구 파동 664번지에 있는 카페

윤은희
2009 신춘문예 당선소감
숨쉬기 운동에는 적당한 햇볕이 필요해 지난 두 해 동안 詩와 나는 서로 의존하며 살아왔다
시가 그 모습을 가지게 되는 시각화(visualization) 작업을 통해, 이해하고 양육하며 내 인생이 파편으로 취급당하지 않도록 협력하였다
당선 소식을 접하는 순간, 상상력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부자가 된 기분이다. 거친 들판을 가로질러 별안간 봄이 오는 것 또한 보인다.
詩의 양식을 혼자 먹어야 하듯이 시인에게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그러나 오늘의 그것은 슬픈 교만이 깃든 기쁨의 눈물이 되리라
벽돌이 가득 든 배낭을 어깨에 올려놓은 중압감을 잠시 내려놓고 기쁨은 상속된다는 의미를 새긴다
이 시대 여성의 미덕이 ‘타인을 배려하는 윤리ethic of care'라면 그 주제어에 대한 가치 깊은 천착(穿鑿)이야말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여성의 문학적 역할과 그 파급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으리라.
당선작이 ‘잘 빚어진 항아리’와 같은 훌륭한 작품은 아닐지라도 “결정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르헤스의 말을 변명으로 대신하면서 앞으로도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글읽기와 글쓰기는 계속할 것이다.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도약할 수 있는 열정의 꿀씨를 던져주시어 초심자의 마음으로 자신을 독려하고 삭정(削正)하라는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호흡이 긴 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말로 시 앞에서 직면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울산대 구광렬 교수님, 17년 동안 시와 반시를 이끌어온 구석본 교수님 그리고 손진은 교수님, 김상환 선생님, 고희림 시인께도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사랑을 표현하기에 서툴기만한 가족과 시와 반시 전체 회원님들 이 기쁨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새해에는 언어의 영매가 되어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넓어진다.

▲경북 경주 출생
▲계명대 일반대학원 영문학과 졸업

김종 시인
;심사평

시적 요건 장치 담긴 총체적 기상도

'신춘문예'는 한 신문사의 대단한 일년농사다.
그리고 이 일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겐 두꺼운 지층을 열고 나온 새싹의 그 파릇한 정신과 가능성을 보여드리는 일이다.
세상이 저물고 나서야 떠오르는 얼굴, 새해의 일출이다. 무등산의 저 너른 오지랖을 덮어버릴 넘치는 그 일출 같은 생명력이 당선자라면 이것만으로도 '신춘문예'가 작품을 읽어낸 독자들에게 보답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남겨진 작품들은 '트래픽 잼', '새벽, 삼당 민박집 콩밭을 걸으며', '엄마가 움직이지 않아요', '프레임 아웃', '하회탈', '딱지를 접으며', 그리고 당선작으로 뽑은 '아르정탱(Argentan)안을 습관적으로 엿보기' 등이었다.
이들 작품들은 저마다 신인에게 필요한 패기와 발랄함, 시적 개성 등이 숨쉬고 있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에 올려도 손색이 없겠다 싶었다.
허나 선택에는 항시 '보다 더 좋은'이라는 조건이 걸리는 터여서 '아르정탱…'이 뽑힌 것이다.
당선작은 우선 시적 길이부터가 근년의 경향에서 조금 예외이다싶게 장시적 모습을 띠고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그리고 당선작이 지닌 장시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갖가지 시적 여러 요건이나 장치들이 담겨 있어서 그야말로 시에 대한 총체적 기상도를 읽어낼 수 있다.
이같은 길이를 파탄 없이 끌고 가는 시인의 저력이 돋보였고 후일의 야심 또한 읽을 수 있었다. 적어도 손끝에 달린 몇개의 감각과 재주로 세상에 덤비는 얄팍함도 덜어낼 수 있었다.
덧붙여 동반 응모작품 또한 고른 수준을 보인 점도 이 시인을 더욱 미덥게 한 부분이다.
그래서 '아르정탱…'에게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당선작'이라는 배 한척을 내어드리기로 한 것이다. 응모자 모두의 건승을 빈다.


*[2009 신문 한라문예] 시 당선작

오래된 잠 / 이민화

다섯 송이의 메꽃이 피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알리는 검은 적막을 깨고,
돌담을 딛고 야금야금 기어올라
초가지붕 위에 흘림체로 풀어놓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람벽이
움찔 다리를 절면,
마당가에 선 감나무도 키를 낮춘다.
아버지의 귀가에서 나던 솔가지 타는 냄새
너덜너덜해진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도꼭지
끄윽끄윽 울음을 뱉어낸다.
산 그림자 마당으로 내려서면,
거미줄에 걸린 붉은 노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먼지 쌓인 잠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면
아버지의 오래된 시간이 푸석한 얼굴로 깨어난다.
늙은 집이 메꽃을 피우고 있다.

시 당선소감

시 당선자 이민화씨 "처음으로 이름 석 자를 얻은 기분"

새벽에 꿈을 꾸었다. 누군가 하얀 봉투를 제 손에 꼭 쥐어주고 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그럴싸한 일이 생길 듯한 예감, 응모 작품을 보내고는 잊어버리리라 생각했으면서도 은근한 기대와 설렘으로 지낸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포기 쪽으로 기울던 참이었다. 올해도 빈손으로 한 해를 건너는가보다 하며 초조한 기다림은 허탈함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당선 통보를 받았다.
3년 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무슨 용기로 뛰어들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저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신이 났다. 그런데 시를 쓸수록 자신이 없어지고 한쪽 가슴께에 통증이 왔다. 중간에 주저앉기도 여러 차례, 결국 시의 길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쓰는 것보다 쓰지 않는 것이 더 힘들고 아팠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많이 아팠던 기억뿐이다. 오랜 기간 병원을 들락거렸지만 병명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저를 업고 다니시느라 어머니의 등에서는 항상 쉰내가 났다. 하지만 그 냄새가 결코 싫지 않았다. 그러기에 글을 쓰게 된다면 꼭 어머니의 냄새에 대한 글을 써 보고 싶었다. 이제 그 출발점에 서 있다.
누구보다 기뻐해준 남편과 아이들한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특히 그 동안 온갖 짜증 다 받아준 남편한테 더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주말마다 시의 벽돌을 함께 쌓는 다층문학동인과 지도해 주신 변종태 선생님, 부족한 글을 선택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아울러 고마움을 전한다. 살아 계셨으면 엄지손가락 치켜세우며 기뻐하셨을 시아버님께 이 상을 바치고 싶다.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자만하지 않을 생각이다.

▷65년 경남 남해 출생 ▷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다층문학동인▷제주MBC 여성백일장 시부문 동상 ▷제주신인문학상 시당선 ▷동서커피문학상

시 심사평

언어로 잘 그려낸 아버지의 폐가 풍경
응모작품은 2백여 명이 보내온 8백여 편이었다. 2008년 1백 50여명 6백여편에 견주면 응모자만도 50여 명이나 늘어났다. 응모자들을 살펴보자면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 곳곳에서 10대에서 80대까지 고루 응모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응모한 시 작품들은 풍족하게 많은데도 평년 수준을 밑도는 이상한 현상을 보였다. 당선작을 고르는 데 그래서 진땀이 났다.
우선 10편, 강병철의 '허수아비', 장유정의 '빈집', 권혁찬의 '노트북', 이민화의 '오래된 잠', 김웅철의 '11월 대정 골', 한규현의 '밥', 엄계옥의 '매미 집', 정현의 '곶감', 권삼현의 '까치밥', 임창선의 '우리 집 베란다에서는'을 뽑았다. 여기서 5편을 뽑았다. '허수아비''빈집' '노트북' '오래된 잠' '11월 대정 골'이 그것들이다. 모두 만만찮은 시 쓰기의 경지에 있다. 그런데도 모두 조금씩 부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구두점 쓰기 등에 좀더 마음 썼으면 한다. 여기서 '부족감'이라고 지적하는 바는 읽고난 뒤에 받는 시 읽기의 감동이다. 시 읽기는 혼의 울림을 깨닫는 자리가 아닌가. '11월의 대정 골'은 제주어로 시를 쓰고 그 시를 표준어로 다시 쓰고 있다. 아무리 인간의 혼이 언어라 하더라도 그 혼의 노래를 두루 알려져 있지 않는 토박이어로 쓴다는 것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마침내 우리는 최종심에서 '빈집'을 떨어뜨리고 당선작으로 '오래된 잠'을 뽑기로 했다. 시의 구조가 견고하지 못한 점도 없지 않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데 아기자기한 사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절제된 감정을 언어로 수채화 그리듯이 잘 그려내었다. 시간 구조도 과거를 현재로 잘 풀어냈다. 아버지가 살았던 집이 폐가인 데도 '낡은 집'이 아니고 '늙은 집'으로 의인화시키는 놀라운 표현을 간단히 해내고 있다. 정진하시라!


*2009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 온 뒤 / 구민숙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
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
또르르! 굴러
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
그것 훔쳐보려 숫총각 강낭콩 줄기는 목이 한 뼘 반이나 늘어나고
처마 밑에 들여 놓은 자전거 바퀴는 달리지 않아도 신이 났다
빗방울의 허물어지지 않은 둥근 선 안에는
주저앉지 않은 꿈들이
명랑한 송사리 떼처럼 오글거리고
서른여섯 나는, 물컹해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며
녀석들을 살짝 만져보고도 싶다
그래, 내게도 저런 가슴이 있었지
열일곱, 연분홍 유두가 장식처럼 화사하던,
주눅 들지 않은 노래로 충전되어
금방이라도 둥실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던

나는 바구니에 담아 내 온
일곱 살 아이의 반바지와 말 안 듣길 소문 난 신랑의 양말과
목욕 수건들과 75 A컵 내 분홍 브래지어를 널지 못한다.


[당선소감]

많이 부끄럽습니다. 아직 시인이 될 그릇이 못 됨을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밥 짓고 빨래하고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모든 일들이 시와 같아야 함을, 그 모든 일들이 이미 시임을 알면서도 순간순간 욕심 부리고 옹졸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으니 아직 시인이라는 이름을 받기에는 멀었지요.
하지만 한 편으론 참 기쁩니다. 3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당선의 소식이 마침내 제 몫이 되었다는 것이 꿈처럼 낯설지만 그래도 이 기쁨 무엇과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저의 무엇을 보고 부족한 저의 손을 들어 주셨는지 심사위원님과 대전일보사에 빚을 진 기분입니다.
이 부끄러움과 감사함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길바닥만 내려다보던 제가 이제 손차양을 하고 길 너머를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 너머에 닿으려면 쪼그려 앉아 제 마음속 강물 줄기 오래 바라다보는 일 더 많아야 함을 압니다.
새벽마다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평생을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사신 아버지, 당선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하던 남편과 나의 보석 두 아들들 그리고 처음 시에 입문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제게 가르침을 주신 권선생님과 등단문의 산방거인님께 감사드립니다. 네 기쁨이 온전히 내 기쁨이 된다던 친구와 서림문학회 동인들 감사합니다. 평생 삶으로써 시를 쓸 것을 당부하신 중학교 은사님의 말씀이 앞으로 제 글의 지표가 될 것임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일이어야 함을 또한 압니다.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심사평…˝메시지 분명하고 시적 논리 합당˝
예심을 거쳐 선자들에게 넘어온 스무 분의 30여 편의 시들 중 선자들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당선을 겨룬 작품은 다음 세 편이었다.
<멀리 보는 잠언>은 요즈음 유행하는 시들의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식하는 감각은 신선했고 형상화 방식 또한 개성적이었다. 특히 “석양 무렵 던져진 새들에게서 붉은 사과향이 난다” 같은 표현에서 보이듯 그는 느낌을 형상화하는 데 장점을 지녔다. 그러나 시상의 전체적인 전개가 추상적이고 모호했으며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그 메시지가 불분명했다. 시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의 한 양식인 한 추상적 전언의 약점은 더욱 치명적인 것이다.

<허물어지는 것들>은 앞의 작품과 달리 이른바 메시지가 분명한 사실주의적 기율의 시였다. 그러나 그의 시는 현실의 ‘재현’에 충실한 나머지 그 현실적 모사를 한 단계 뛰어넘는, 이른바 시적 비약의 순간을 자기 작품에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약점을 범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들이 피랍선원들과 아홉시 뉴스, 조간 속 활자들을 거쳐 지난 암흑의 시절 “외삼촌이 허물던 야심한 밤들”에까지 육박하고 있으나 그 너머, 다른 세상을 구현하려는 데까진 미치지 못한 채 그야말로 현실의 모사 속에 갑갑하게 갇히고 말았다. 네루다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지만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 또한 죽은 시인이라는 말을 이 시인은 명심하기 바란다.

<비 온 뒤>는 우선 깨끗하게 정돈된 작품이며 메시지가 분명하고 시적 논리가 합당하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의 결점을 충분히 뛰어넘고도 남는 작품이었다. “빨랫줄에 매달린 빗방울들/열일곱 가슴처럼 탱탱하다/또르르! 굴러/자기네들끼리 몸 섞으며 노는/ 싱싱하고 탐스런 가슴이 일렬횡대, 환하니 눈부시다”라는 첫 부분의 표현들에서 보듯 이 시는 어느 날 우연히 목격된 ‘빗방울들’에서 시적 사념을 출발시켜 그것을 약동하는 언어의 충전으로 끌고 나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시로써’ 터트릴 줄 아는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괜스리 어렵거나 추상적이거나 한 표현 한 구절 없이 자기 소리를 하나의 작품 안에 오롯이 담아낼 줄 아는 그 시적 절제 또한 믿음직스러웠다. 한마디로 싱싱하고 단정하며 마지막 연에서 보듯 장난기 어린 웃음이 배시시 행간 밖으로 삐어져나올 듯한 작품이다. 선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그의 감각이, 그의 언어가 사념과 철학을 동반하며서, 오늘의 유행에 주눅들지 않으면서 더욱 깊은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오세영 이시영)


기와 이야기 / 이수윤

육차선 도로가 생기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부쩍 몸피를 키워
산 밑의 각화동 마을은 몸을 더 엎드린다

예쁜 눈썹으로 웃는 기와는
알고 보면 지나온 이야기가 무거워
한평생 돌아눕지도 못한 거였다
아팠던, 그리고 달던 들숨과 날숨의 흔적에
풀꽃을 피우며 결리는 어깨뼈를 겯고
너나들이를 한다
그러다 문득
세월은 생각을 돌려놓는 큰손이라며
기와는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본다

된장 꽃으로 핀 푸른곰팡이도 밉지만은 않은 객
선선히 걷어내면 풋고추가 달다는 어머니는

먼데 소식에 귀를 세우는 능소화
하늘을 능멸하고 조소하는 그것을 왜 심으셨나
기와는 말없이 다 알고 있다
어머니의 젊음, 비릿한 날개를 단
붉은 꽃잎이 기와의 머릿속에 별처럼 누벼질 때
어머니는 오이냉국에 찬 밥 한 그릇의
밥상을 받기 위해 칠십 평생 달려온
밭고랑을 또 달린다

모서리가 닳아서 어머니 같은 기와 속엔
시간의 붉은 피가 이야기로 갇혀 있다
당선소감

"매몰 직전 당선 감사"
부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캐롤이 울려 퍼지는 오늘, 향기로운 전령이 도착했다.
뜨겁게 숨쉬다가 젖은 채 식어버렸던 나의 클론들아 지하에서나마 귀를 열고 들어라.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부활은 고스란히 너희의 몫이구나.
늦었지만 이 소중한 소식이 어두웠던 너네의 전생을 위로하겠니?
얼음 구유에서 식어가며 토해냈을 원망의 자모들을 분리해서 백지 위에 촘촘히 세운다면, 물고기 알 같은 나의 생리를 용서하겠니?
아테나의 분노 속에서 억울하게 사라져간 나의 아라크네여,
환한 등불이었던 너의 작품이 그 긴 세월 내게 보낸 응원을
헛되지 않게 하겠다.
내 안의 나야, 눈 속의 눈으로만 보이는 건강하게 솟구치는 귀두를 영접할 수 있겠니? 이제부터 태어나는 분신들의 진화를 고스란히 감당하겠니?
또 수 개의 물음표를 안았다. 치열하게 궁금해 하며 살아가야 할 나의 의무가 행복하다. 문학의 궤도를 벗어나 산 세월, 안드로메다처럼 여기실 존경하는 선생님들 제가 이렇게 살아있었습니다.
어버이 같으신 전원범 선생님, 광주대 대학원 문창과 선생님들, 이름도 아득하실 허형만 선생님, 부지런하고 씩씩한 서연정시인, 금초문학 동인님들, 우리시 동인님들. 희곡에 머리 부딪히고 몽롱하던 지문과 대사 여러분 그동안의 잠적을 용서하시겠습니까? 매몰당한, 압사 직전의 저를 발굴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큰절 올립니다. 따뜻한 자리 마련해주신 전남일보사에도 감사드립니다.
폭서에도 얼어붙는 나의 냉기를 함께 참아준 진, 영, 용, 우야 사랑한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1961년 진도 출생
△광주대 대학원 석사, 희곡창작 전공
△시조시집 '은행이 익어 갈 때'출간


*[2009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털실감기'(매일신문)


털실감기
김영식
나는 실을 풀고
할머닌 실을 감고
호롱불빛이 감기고
부엉이소리가 감기고
사과처럼 둥글어지는 실타래
나는 지겨워져 빨리 풀고
할머닌 엉킨다며 천천히 감고
슬슬 하품이 감기고
펄펄 함박눈이 감기고
어느새 호박처럼 커진 실타래
할머닌 뽀송뽀송 나를 감고
나는 도란도란 할머닐 풀고

◇ 당선소감
골목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바람이 살짝 덧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흰 손을 잡고 교차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커피숍에 마주앉았다. 오후는 강물처럼 흘러가고 사람들은 거리를 부유하고 있었다. 삶은 이처럼 타인의 얼굴을 하고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불현듯 나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아! 우린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을까요?’
그녀의 목덜미 위로 커피향이 안개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저 아찔한 바람의 머리에 새털구름 한 조각을 올려놓을까? 아니면 구절초 한 송이를? 망설이는데 타닥타닥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첫눈이었다.
갈색의 찻잔 속으로 눈송이들이 배추흰나비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카푸치노 같은 눈을 저어 맞은 편 바람에게 건넸다. 그녀의 쇄골이 잠시 흔들린 건 아마도 삐걱거리는 낡은 탁자 때문이었으리라. 웃을 때 드러나는 바람의 덧니 사이에 움막을 짓고 이 겨울은 좀 더 외롭고 높고 쓸쓸해져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시의 길로 이끌어주신 구림 이근식 선생님과 경주대학교 손진은 교수님에게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기쁨을 경주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반 문우들, 열정이 넘쳐나는 <시 in> 동인들, 통영의 한률 형,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힘이 들 때 기꺼이 곁이 되어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영식
▷ 필명·김환
▷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 1960년 경북포항 출생
▷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포항 해양경찰서 근무

*문화일보 신춘문예

즐거운 장례식/강지희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심사평] 죽음을 보는 눈이 새롭다는 장점을 더 높이 샀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8명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 남은 작품은 이강해씨의 ‘집들이’, 강지희씨의 ‘즐거운 장례식’ 2편이었다.
‘집들이’는 탄탄한 내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점이 먼저 단점으로 지적됐다. ‘사랑은 시작하기도 전에 슬프고/ 살아보기 전에 무덤이다’ 등의 표현 또한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멋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져 자연히 ‘즐거운 장례식’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됐다.
‘즐거운 장례식’ 또한 단순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으나 그러한 단점보다는 죽음을 보는 눈이 새롭다는 장점을 더 높이 샀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존의 생각을 즐겁게 뒤집는 역설적 묘미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름대로 높은 시적 성취도를 이루고 있다.
‘관을 들어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작은아버지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긍정성과 순응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자 기쁨의 축제다.
작은아버지는 ‘암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릴’ 정도로 오히려 남은 가족들을 위로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위로하는 이 반어적 발상을 통한 시적 구현은 이 시인의 앞날에 대한 신뢰의 깊이를 더해준다. 앞으로 한국시단을 빛내는 시인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당선소감]당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막막하다. 기찻길 옆 우리 집은 탱자나무가 담장이었다. 손에 상처가 생기는 줄도 모르고 울타리가 낳은 노란 전구알 같은 탱자에 경부선 기차 소리를 받아 적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자주 내가 쓰는 언어로 세계의 결을 환하게 열고 싶었지만 제 몸을 가시로 감싼 탱자나무처럼 가시 속에 숨은 시의 언어들은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빠져 달아나는 언어의 꼬리, 그 미끄러짐들. 그때마다 나는 네모난 종이로 학을 접었다. 일곱 번 몸을 접고 마지막 날개를 펴주어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 내 언어를 들고 푸른 신호등을 따라 삼각지 로터리를 도는데 어떤 목소리가 내 옷깃을 파고 들었다. 갑자기 마른 몸을 털며 종이학이 날아오르고, 갖가지 색깔로 접었던 물고기들이 별로 살아나 파닥이기 시작했다.
당선!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두렵고 막막했지만 가시가 심장을 찔러대도 모든 아픈 몸들을 보듬으며 나아갈 것이다. 칠년 만에 보내준 화해의 품 안엔 가시가 있을 테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믿듯 나의 시를 믿기로 한다.
부족한 제 시에 손을 들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언어를 빛나게 갈고닦아 시에 부려 놓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이기철 교수님, 시어가 대상과 나를 만나 어떻게 새로운 몸과 현실을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주신 손진은 교수님 두 분께 두고두고 감사의 마음을 전해도 모자라는 느낌이다.
늘 바쁘게 쫓기는 시간들을 불평 없이 뒷바라지해준 남편, 수능으로 고생하는 딸 지수가 고맙고 당선 소식에 가장 기뻐해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함께 보듬고 격려해준 영남대와 경주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문우들이 떠오른다. 지면을 빌려 따뜻했던 마음들에 손을 내민다. 저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과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

▲1963년 영천 출생
▲영남대·경주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재학중
▲페이퍼 로즈 공예연구실 원장


*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너와집 - 박미산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심사평 신선하고 맛깔스럽게 쓴 아주 따뜻한 시

◇신경림;◇유종호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이 수준이나 내용이 비슷비슷했다. 특별히 개성 있는 시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실직’(이재근), ‘나비의 꿈’(문계현), ‘너와집’(박미산) 같은 작품들은 신춘문예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준은 넉넉히 되었다.먼저 ‘실직’은 삶에 뿌리박은 정서의 시로서 호소력을 갖는다. 한데 무언가 신선한 맛이 덜하고, 죽음의 이미지가 시를 무겁게 만든다. 게다가 너무 건조하다. 같은 작자의 ‘얼굴’은 읽는 재미는 ‘실직’보다 낫겠는데, 산만하고 장황한 것이 흠이다. ‘나비의 꿈’은 장애인 부부의 외식 나들이가 소재가 된 시로서,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비유가 좀 억지스럽고 관념적이다. 외국인 근로자가 화자가 되고 있는 ‘붉고 둥그스름한 다라이’는 정리가 더 돼야 할 소재 같다.하지만 남과 같지 않은 상상력은 그의 앞날에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너와집’은 아주 따듯한 시여서 일단 호감이 간다. 물론 ‘너와집’은 실제의 너와집이기보다 ‘당신’과 ‘내’가 만든 사랑의 집일 터, 그 비유가 호소력이 있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말이나 감각도 신선하고 맛깔스럽다. ‘문둥이가 사는 마을, 이랑진 무덤들 사이에도’는 열두 살 여름의 추억을 소재로 하고 있는 시로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힌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두 심사위원은 최종적으로 박미산의 ‘너와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느리게 공부하는 내게 격려·질책해 준 선생님께 감사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라든가 막막한 나날이 계속될 때마다 산을 탔다. 바싹 마른 말이 먼지를 피우며 스르르 무너지려 할 때 지리산을 완주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설악과 북한산에 다니면서 내 몸을 다져 밟았다. 잘근잘근 밟혀 돌아오면 후줄근한 내 몸에서 말들이 피어나왔다. 허기진 가슴에서 바람이, 구름이, 안개가 시로 피어났고 때로는 미처 피어나지 못한 말들은 나도 모르게 곳곳에 쌓여 갔다. 찰랑찰랑 의심하던 사랑을, 요절을, 시를 여름 계곡에 떠나보내고 푸른빛이 사라져 이슥해진 나의 겨울 계곡은 은빛의 물 뿌리가 드러났다. 바닥이 다 드러난 나는 솔솔 내리는 눈발에 목을 축이고 사모하는 긴 혀를 따라 구불구불 의심했던 길을 다시 갔다. 피어나지 못했던 말은 부패되지 않은 채 골짜기로 흐르고 있었으며 이리저리 부딪치며 새 물길을 터뜨리기도 했다. 지난밤 나는 가장 예쁜 꿈을 꾸었다. 눈 쌓인 계곡에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면서도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살문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내가 존경했던 선생님께서 철없는 나에게 ‘늦게 피는 꽃’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지진아처럼 느리게 공부하는 나에게 격려와 질책을 아낌없이 해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시 합평회를 할 때마다 묵사발을 만들어준 수요시창작팀, 유안진 선생님, 장만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님과 구십이 넘도록 식당일을 하시는 친정어머니, 묵묵히 나를 지켜준 남편과 사랑하는 두 딸 단비와 차래에게도 고마움을 보낸다. 십년을 함께 땀 흘린 택견패들에게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고, 무엇보다도 유종호 선생님과 신경림 선생님 두 분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 유연해지고 너그러워진 말로 살냄새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나는 우리들의 삶을 감싸 안는 따뜻함이 묻어나는 시를 씀으로써 두 분 심사위원께 두고두고 은혜를 갚을 참이다.
박미산(본명: 박명옥)▲1954년 인천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방송대 강사

*장조문학신문 당선작

고물차 팔던 날/최윤희몇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가망 없다고누군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나는 차가운 종이에 종말을 서명했다 강철 심장으로도 못 견디는 게 있었구나세월. 그 허름한 옷을 입으면우리네 사막에는 모래바람 부는가낯선 이에게 너를 두고 오는 버스 칸끝내 아내 얼굴에 두 줄기 햇살 빛난다툭 툭 어깨를 쳐봤으나그럴수록 우물 속 깊은 두레박 소리가 난다한 때 새파란 어깨를 걸고 쏘다니던늠름한 은빛 기억 때문일까이제 우리도 낡아 간다는 사실 때문인가결코 헐값에 합의 한 건손때 묻은 기억까지 처분한 게 아닌데그녀는 고물만 보면입에서 허기진 바람소리를 낸다창밖으로 쫓아가는 가련한 시선구식으로 물 긷는 미련한 낭만주의자 그 옆자리가 따뜻하다[당선소감]내 청춘은 아스팔트 위에 피었다. 시리도록 타오르는 푸른 불꽃처럼 피었다. 더운 가슴과 뜨거운 눈물이 마르던 어느 날 생각했다. 이대로 죽고 싶다고. 붉은 동백꽃처럼 소리 없이 뚝뚝 떨어지며 죽고 싶었다. 유언도 인사도 없이 죽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유언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남자의 시를 쓰고 싶었다. 수없이 많은 실패는 단 한 번의 좌절도 아니었다. 뼈아픔도 피눈물도 아니다. 나는 오늘 다시 태어난다. 나에게는 나를 직접 가르치고 다듬은 선생님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젖동냥을 하듯 사숙(私淑)하면서 푸른 새벽을 기다렸다. 바로 오늘이다. 오늘이 끝이 아니라 비로소 내게 주어진, 내가 선택한 나의 첫날이다. 늦었지만 이제부터 전속력으로 달린다. 진군이다. 그리고 나에게 새날을 주신 박인과 선생님과 고용길 시인, 이상미 시인, 김기수 시인, 최성훈 시인님께 성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 끝에 남을 단 한편의 글을 소원하며 이제 새 길을 떠납니다 2009년 01월 01일
새해아침 최윤희 올림.

[프로필]? ‘67. 3. 부산시 출생? '89. 2. 동아대학교 졸업? '89. 3. 농촌진흥청 경남농촌진흥원 근무? '96. 7. 농림수산식품부 국립식물검역원 영남지원 근무(검역관)? '08.11. 제20회 부산가톨릭문예공모전 가작 수상

[접시]

시계 접시가 앞에 있다. 호모 엑스페르투스(homo expertus)*는 접시 위에 떨고 있다 애처로운 눈과 마주쳤을 때엔 미안하다. 나는 시방 굶주린 식탐이다. 사(沙)접시는 일회용 접시가 아닌 우리네 인생 접시 안에 빛깔 좋은 어둠들이 모여 있다. 붉은 토마토, 노란 오렌지, 흰 실타래, 파란 고추, 빛살 좋은 생선회조차 일상을 움켜잡고 떨고 있다 인생은 수평으로 드러누워 접시 안을 비어놓은 눈물 한 방울 '큰 소리를 내면 접시가 깨어진다.'는 이것은 진부한 얘기이다 그래서 정갈한 내 머리카락은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호모 엑스페르투스(homo expertus): 실험하는 인간의 속성

당선소감]기축년 희망찬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아들과 함께 해돋이 맞이하러 부용산에 오를 준비를 하던 참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니 새해 첫날, 가장 먼저 날아든 신춘문예당선통보는 찌릿했습니다. 기쁜 소식은 중심을 잃지 않는 올곧은 시인이 되라는 채찍으로 생각하고 시 짓는데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저에게 용기를 주신 창조문학신문과 서툰 작품을 선 하여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들이며 현재 투병 중인 아들에게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 또한,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새해 복 많이 짓고 하시는 소망 이루십시오." 감사합니다

2009년 01월 01 새해아침 김 형 출 올림.

[프로필]경남 함양출생
육군3사관학교 졸업 및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국제펜클럽한국본부회문인협회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연어를 꿈꾸다/김영희
시작이 끝이었나, 물길이 희미하다매일 밤 고향으로 회귀하는 꿈꾸지만 길이란 보이지 않는 미망迷妄 속의 긴 강줄기바다와 강 만나는 소용돌이 길목에서은빛 비늘 털실 풀듯 올올이 뜯겨져도뱃속에 감춘 꿈 하나 잰걸음 꼬리 친다내 다시 태어나면 참꽃으로 피고 싶다붉은 구름 얼룩달록 켜켜로 쌓인 아픔흐르는 물속에 풀고 가풀막을 오른다끝없이 이어지는 도저한 역류의 몸짓마지막 불꽃이 타는 저녁 강은 황홀하다비로소 바람에 맡겨 눈감고 몸을 연다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술빵 냄새의 시간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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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 에 나오는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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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김 은 주 △1980년 서울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누군가는 만남에 대한 어휘가 가치 있다 했지만 나는, 미래의 이별들을 모으느라 하루를 보내곤 했다. 가령, 눈이 오면 눈의 일부처럼 만남을 맞고, 흩날리거나 녹아 없어지는 눈을 보며 이별이 아팠다. 그러한 내력으로 연연해하며 살았다.
연연의 목록이 추가될 때마다 구덩이를 팠다. 얕기도, 넓기도 한 연유들이 둥글게 고인 구덩이들. 그 속에 풀리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녹아 없어지지 않을 삶의 문제를 대신해 스르르 몸을 녹였다. 그 구덩이 안팎에서 만만한 한 生을 들여다보려 시를 썼다. 게으름과 무책임을 가책으로나마 아플 수 있는 시간. 이제 서른이니 뭐라도 하나는 구원해야하지 않을까, 골몰하는 밤이 앞으로도 길겠다.

習은 어린 새의 퍼덕임이라고, 날기 위한 연습에 멈춤이 있어선 안 된다 알려주신 장석남 선생님, 다른 시선은 틀린 게 아니라 특별하다 가르쳐주신 권혁웅 선생님께 인사 올린다. 통증의 마디인 어머니, 일평생 소슬함의 자루를 매고 가는 아버지,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근원 창수 창현 창미 세 형제들, 많은 것의 동기가 되는 민혁,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 이리, 내 모든 풍경의 흉곽인 달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아가는 연습을 하도록 어깨를 두드려주신 이시영, 남진우 선생님께 조금은 더디어도 주저앉지 않을 거란 다짐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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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심사위원 이시영(시인), 남진우(시인)

마지막까지 선자들의 눈길을 끈 이들은 '술빵 냄새의 시간' 등을 투고한 김은주와 '꽃 피는 일' 등을 보내온 류화, 두 사람이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과 돌파력이란 점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새벽녘 시장에서 돼지 잡는 장면을 다룬 '꽃피는 일'은 동물의 몸을 부위별로 분리하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처참한 장면을 복사꽃이 피어 가지를 타고 뻗어나가는 것과 중첩시킴으로써 기발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탐미적 시선이 공존하는 그의 시는 이미지의 조형 능력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질서를 투시하는 만만치 않은 인식의 깊이를 내장하고 있었다.

김은주의 작품은 심각한 현실에 정공법으로 대응하기보단 가볍게 우회해서 대응하는 여유와 다채로운 화법이 돋보였다. 비근한 현실에서 예기치 않은 놀라움을 끌어낼 줄 아는 이 응모자의 시는 친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한 양태를 포착하고 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이 있는 대신 단조롭게 여겨지는데 비해, 김은주의 작품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듯 대상에 따라 화법을 다채롭게 변주할 줄 아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축하와 더불어 정진을 당부한다. 이밖에 선자의 관심을 끈 응모자로는 '바람 부는 날의 모과'의 박은지, '흰 개와 바다'의 이현미, '구불구불거리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의 진유경 등이 있다.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 허균(許筠)

이름 박정민

때늦은 여름밤에 그대 마음 읽는다

지금도 하늘에선 칼 씌워 잠그는 소리

보름달 사약 사발로 떠 먹구름을 삼켰다

어탁(魚拓)처럼 비릿한 실록의 밤마다

먹물로 번져가는 모반의 꿈 잠재우면

뒷산의 멧새소리만 여러 날을 울고 갔다



*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저녁의 황사

정영효

이 모래먼지는 타클라마칸의 깊은 내지에서 흘러왔을 것이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걷다 느낀 사막의 질감

나는 가파른 사구를 오른 낙타의 고단한 입술과

구름의 부피를 재는 순례자의 눈빛을 생각한다

사막에서 바깥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뿐이다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은 경계로 방향을 다스리며

죽은 이의 영혼도 보내지 않는다는 타클라마칸

순례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는 것이므로

끝을 떠올리는 그들에게는 배경마저 짐이 되었으리라

순간,잠들어가는 육신을 더듬으며

연기처럼 일어섰을 먼지들은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들의 꿈에 제(祭)를 올리고 이곳으로 왔나

피부에 적막하게 닿는 황사는

사막의 영혼이 타고 남은 재인지

태양이 지나간 하늘에 무덤처럼 달이 떠오르고 있다

어스름에 부식하는 지붕을 쓰고 잠든 내 창에도

그들의 꿈이 뿌려졌을 텐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늘

나는 앞을 쫓지만 뒤를 버리지 못했다

멀리 낙타의 종소리가 들리고

황사를 입은 저녁이 내게는 무겁다


*중앙일보 신춘문예

증명사진 / 김재준


창문 밖의 풍향계는 한사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곧추 세우며 떨고 있다 매서운 날들이 나를 후려왔듯이 바람의 거친 속도가 철봉 위에 다만 놓여있을 뿐인 저 화살을 어디론가 날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동을 치며 제 자리에서 한없이 날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며 멈춰 있는 것이 때로는 무서운 전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력서에 붙일 추운 얼굴에 밀랍 미소를 만드는 순간

팟, 빛의 칼날이 내려치는 2.5×3㎝의 단두(斷頭)
나는 잠시 시력을 잃고 보이지 않는 하얀 피를 흩뿌린다

자, 한 번 더 찍습니다
내일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번이라도 즐거이 목을 늘여놓을 것이다 절박한 시윗줄에서 날카로운 화살 한 대가 내 몸을 뚫고 날아오르자 망치를 맞는 젊은 쇳소리가 길게 울린다
나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얼굴로 빛의 칼날을 받는다

[심사평]

시에 기운이 없다. 살가운 서정의 만지작거림도 없고, 이 더러운 세상을 후려치는 거대담론의 포효도 없고, 형식의 실험을 위한 대담한 모험심도 없다. 시가 죽어 가는가? 기력은 시들시들하고, 목소리는 다 고만고만하다. 가족·밥·가난·고향과 같은 비슷비슷한 소재가 넘치고, 대부분 평서형 종결어미로 만족하고 거기에 그냥 머무른다.
사소한 이야기를 그저 사소하게 마무리하는 것으로 시인의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까?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 그렇다. 심사를 하는 내내 당선작을 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더 유심히 응모작들을 읽었다. 일정한 수준에 근접했다고 판단해서 최종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정길호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고래’는 온돌방의 고래와 바다의 고래를 말놀이 기법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시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상상력으로 메우지 못해 뒷부분으로 갈수록 공허했다.
이성임의 ‘클립 속의 여자’는 다른 응모작들을 포함해 단단한 언어 구성능력을 보여주지만 멋이 지나치고 소품에 그치고 있다.
오승근의 ‘소리를 줍다’는 시적 묘사에 공을 들인 시인데, 말투가 시를 앞서나간다. 시어와 일상어의 차이, 혹은 그 둘 사이의 절제를 좀 더 공부했으면 한다.
당선작과 함께 끝까지 겨룬 이혜경의 ‘가벼운 집’은 시를 전개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고 시가 생기는 지점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적 대상을 너무 안이하게 이해하는 바람에 그 핵심을 집어내는 데 미흡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재준의 ‘증명사진’을 흔쾌히 당선작으로 골랐다. 풍향계를 다룬 기성시인의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했지만 취업이라는 현대사회의 다소 무거운 고민을 예리한 관찰과 안정된 문장으로 매우 잘 포착하고 있다.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의한 비유가 적절하고, 구조도 완결미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더 큰 시인으로 성공하기 바란다.
-이문재, 안도현


[당선소감]

오늘 순천만 갈대밭을 다녀왔습니다. 석양 속에서 푸른 날들이었으나 마른 화살들로 가득한 벌을 걸으며 나는 이 벌판처럼 아름다운 과녁이었는가, 푸르게 날아와 주었던 캄캄하게 식어가는 내 화상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기적인 연인처럼 시에게 세상을 변혁하라, 길을 보여달라 악을 쓰다 차갑게 배신했지만 긴 시간 동안 잠복해 있다가 불현듯 나야 나, 이 사람아, 어깨를 쳐준 시에게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다락에 넣어둔 먼지 쌓인 꿈을 닦아주며 다시 써 볼 것을 권해준 기연이 씨. 나의 아내여, 당신이 베풀어준 이 많은 것을 나는 다 어찌 할 수 없습니다.
해찬아 슬아야, 나의 신앙들아. 나는 너희에게 어떤 아버지일까. 주위에서 나를 닮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두렵고 무서웠단다. 나의 시는 미래의 너희들에게 남기는 편지일 것이니, 내 심장의 소리와 색깔을 적을 것이다. 비루할지라도 아름답게 보아주렴.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절벽에서 한 점 가능성을 귀히 여겨 손을 내밀어주신 정윤천 선생님, 시의 엄정함을 가르쳐 주신 강인한 선생님, 매 시편마다 쓴소릴 아끼지 않으셨던 큰누님 강정숙 선생님, 다시 시를 쓰는 길의 절반을 대신 걸어준 고성만, 조성국 형. 놀이터가 되어준 시인회의, 시마을과 시마을 동인, 영원한 마음의 고향 터앝문학동인회 그리고 광주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시 당선소감“꿈에 그리던 별 따다가 내 방에 걸어”

관련핫이슈창간 43주년 중앙 신인문학상그림자는 아무도 기대지 않은 벽에서 몰려와 잡풀 무성한 골목 안에 슬며시 몸을 풀어 놓고 갔다. 그런 날 밤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친구의 고층 아파트를 찾아가곤 했다. 나를 달로 화성으로 북극성으로 날라다 줄 것 같던 사각의 방. 한 번도 눌러 보지 못한 비밀의 버튼은 꽤나 높은 곳에 매달려 반짝였다. 별을 딸 수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올라탈 수 있던 공중의 꿈들.
그런 반짝이는 꿈들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당선 통보로 즐거운 나의 일상 하나를 잃게 되었지만, 별 하나 따다가 내 방에 걸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낙선을 반복할 때마다 시 쓰기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펜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머니의 유언에 있었다. 어머니와 마지막 순간 꼭 좋은 시인이 되겠다고 약속한 지 7년 만에 당신과의 약속을 절반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쁠 따름이다. 하늘에서 얼마나 흐뭇해하고 계실지, 그 미소가 오늘 밤 계속 아른거린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 아직 너무도 부족한 나에게 시 쓰는 것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끝까지 살아남는 시인이 되리라는 약속과 함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이토록 반짝이는 언어의 빛들을 처음 알려주신 양승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게으른 나를 항상 뜨겁게 채찍질하시며 시에게 목숨 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박주택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열심히 쓰라고 언제나 따뜻하게 격려해 주신 김재홍, 김종회 선생님과 이문재 선생님, 그리고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신 최상진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끝까지 함께 시 쓰기를 약속한 재범·은기·규진·진명·은지·현진을 비롯한 여러 경희문예창작단 선후배 여러분과 문학도로서의 삶에 나침반이 되어 준 현대문학연구회의 선배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하늘새재 선후배들을 비롯해 따뜻이 관심 가져준 국문과 선후배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 밖에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은 분들이 너무도 많지만, 지면이 작은 것을 핑계 삼아 차후에 일일이 감사함을 전하겠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임채순님을 비롯한 온 가족과 함께 이 기쁨을 누리고 싶다.

시 심사평
“사물을 보는 시선 삶 전체로 향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을 하게 되어 있다. 낙선한 한 사람으로 이 글을 읽을 것이다. 최소한 유심히 읽을 만한 사람은 그 낙선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심사소감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듯싶다. 실은 심사소감처럼 상투적이고 설득력 없는 글도 없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이 바뀌어도, 심지어는 응모된 작품들의 경향이 그렇게나 변해도 예나 지금이나 초지일관 심사소감은 새롭지 않다거나 아니면 유행을 탄다거나 낡은 전통에 매달려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시를 쓰라는 말씀인가! 대안의 예를 제시해 주시든지….이렇게 투덜거릴 것이다. 심사위원 당사자들의 시나 글을 새삼 떠올리면서, 지적사항에 가장 많이 해당하는 자가 바로 당신이지 않은가! 그 원성이 들려온다(맞다! 모두가 선후에 서서 고투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상투적인 심사평을 계속해서 늘어놓자면, 그럼 왜 그럴까. 새롭다고 느껴졌던 시가 바로 낡아지는 것을 볼 때가 흔하다. 유행을 타는 시다.
평론가들이 많이 언급하는 시인이 고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 소치이다. 젊은 문학도의 조급증은 눈앞의 물결을 수평선으로 착각하는 셈이다.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온 낡디낡은 주문이 있다. 과연 스스로에게 시는 진실(眞實)과 진심(眞心)의 뗏목인가에 대한 되물음이다. ‘우선’ 그것이 아니어서야, 그것이 느껴지지 않아서야 이 하찮은 ‘언어 상태’는 어디에 기댈 것인가. 그 되물음이 깊고 익어서 ‘방법’을 낳고 ‘파괴’를 낳고 다시 익을 때 ‘개성’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엄밀히 신인에게 개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진실한 발성인가가 그 가능성의 초점일 수밖에 없다.

잘 쓴 분들로 삼십여 분이 넘어왔다. 그중 어렵지 않게 세 사람으로 압축이 되었는데 임경섭·조율·이우성 제씨가 그들이다. 모두 삶을 감싸 안으려는 생각의 두께가 다른 응모작들보다 치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율 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에 있는 풍경들을 촘촘히 살피고 선명하게 내면화하는 매혹이 있었다. ‘골목의 무릎’이며 ‘빨래방’ ‘세탁기’ 등의 제목이 말해주듯 거창하지 않은 세목들이 거뜬히 시가 되었는데 일정한 패턴화가 단점이었다. 이에 비해 이우성 씨의 시들은 훨씬 언어미학적으로 경쾌한 맛이 있었다. ‘어쩜 풍경이 멈춰 있다고 생각했을까’ ‘평생 먹을 수 있는 잎사귀가 정해져 있다면’ 같은 시는 군데군데 알 수 없는 이미지의 돌출이 걸리긴 해도 삶의 풍경을 파악하는 감각이 새롭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전체 응모작이 한 작품을 잘라 나열한 것이라 해도 될 만큼 각 작품에 초점이 모아지지 않았고 뒤쪽에 배열한 소품들은 서툴렀다. 가령 ‘오후의 냄새를 떠올리는 내일의 분주함’같은 구절은 치명적이다.

임경섭 씨가 당선자가 되었다. 잘 썼다. 응모한 여섯 편의 시가 모두 고르다는 데 우선 점수가 주어졌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초점을 잃지 않고 삶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말이 세련되지 않은 것은 장점이자 단점인데 진지하고 끈덕진 면으로 보면 장점이고 필요 이상 시가 길어져서 여운을 빼앗는 점에서 단점이다. ‘잘 썼다’는 것은 오래 습작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뜻인데 그것이 자신을 묶고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 주길 바란다. 이, 외진 오솔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한다.

위 언급한 외에 유병록·김상혁·남민영·이해강 씨의 시들이 아까웠으며 더불어 결심에 오른 모든 작품은 심사위원이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좋은 시들임을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

◆심사위원=나희덕·장석남 ◆예심위원=강정·김선우·권혁웅

* 대전일보 동시

경운기 소리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달달달달
오르막 길을 올라가고 있다.


탕탕탕탕
얕은 개울물을 건너고 있다.


통통통통
자갈밭길을 지나가고 있다.


탈탈탈탈
골짜기 밭에 도착한 경운기가
올라 온 길을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덜덜덜덜덜



※ 주요경력

윤보영(尹普泳)

1961년 경북 문경출생

한겨레아동문학작가학교(25기) 졸업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담쟁이 넝쿨 /조원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무럭무럭 구덩이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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