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의 유래
봉산 탈춤은 해서일대에 분포된 탈춤 중의 하나이다.
해서 탈춤의 분포를 보면 사리원, 봉산을 중심으로 황주와 서쪽 평야지대인 안악·재령·신천·장연·송화·은율등지의 탈춤과, 동남쪽 평야지대인 기린·신원·서흥·평산·신막등지의 탈춤과 해안 지대로는 해주·강령·옹진·송림·추화·금산·연백등지의 탈춤으로 크게 셋으로 구분되며, 5일장이 섰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 탈꾼들을 초빙하여 1년에 한번씩은 놀았다고 한다.
이러한 분포로 보아 해서 탈춤은 거의 황해도 전지역에서 놀던 탈춤으로 그 중에서 특히 봉산 탈춤이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일이며, 일제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위의 분포 지역들은 농산물과 수공업 생산물의 교역지이며 소도시였고, 팔역지의 소위 남북직로의 주요 읍 및 장터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탈춤 공연의 경제적 여건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황해도 탈춤은 북으로 대동강을 넘지 못한 반면에 남으로 중부 산대놀이 지역과 남북직로로 연결되었고, 그 극본의 과장과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이 역시 산대도감 계통 탈춤의 한 분파인 해서형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봉산 탈춤의 중흥자로는 약 200년 전의 봉산의 이속 안초목으로 일러오는데, 그가 전남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이 놀이를 많이 개혁하였으며, 그 후 안초목과 같은 이속들이 주로 이 놀이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양주 별산대놀이에는 없고 봉산 탈춤에만 있는 사자춤 과장도 약 80여년 전에 새로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구전으로 미루어 보아서 봉산 탈춤은 200여 년 전부터 있어 온 것이며, 또 다른 지방의 탈춤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면서 개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놀이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연희되며 새벽까지 계속된다. 5월 단오에 노는 것은 조선조말 이래의 일이고, 그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양주 별산대 놀이도 4월 초파일에 등불놀이와 함께 성대히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특히 고려 이래의 연등행사의 전통을 이은 결과인 것 같다. 단오는 중부 이북 지방에서 남부 지방의 추석과 맞먹는 명절로서 성대히 지냈다. 시기적으로 이때가 모내기 직전의 망중한의 시기이며, 단오의 명절놀이로서 봉산·기린·서흥·황주·강령 등지에서 탈춤을 추어 온 것은 벽사와 기년의 행사로서, 또 하지의 축제로서 그 민속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종교의례적 행사에서 점차 오락 위주의 민중의 탈춤으로 발전되어간 것 같다.
산대놀이가 비교적 전업화된 놀이로서 관의 행사와 보다많이 관련된 것에 비하면 봉산 탈춤 등 황해도 탈춤은 주로 농민과 장터의 상인들을 상대로 한 놀이였지만, 역시 원님의 생일이나 그 부임날과 같은 관아의 경사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도 특별히 연회되었다. 다른 군과의 연희 경연에는 5월 6·7·8일에 해주감영에 나가서 놀았고, 우승하면 감사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한다.
봉산탈춤은 원래 봉산 구읍 경수대- 지금의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연희되었으나, 1915년경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겨가고, 경의선철도가 개통되자 이놀이도 사리원으로 옮겨져 경암산 아래에서 행해졌다.
봉산탈춤의 특징
황해도 탈춤은 그 탈, 의상, 춤, 대사 등의 유형으로 보아 기린·서흥·봉산·황주·재령·신천 및 안악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봉산탈춤형과 옹진·강령· 및 해주 등지의 탈춤을 대표하는 해주 탈춤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봉산 탈춤의 연출 형식도 양주 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며, 피리·젓대·북·장구·해금으로 구성된 이른바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염불·타령·굿거리곡에 맞추어 추는 춤이 주가 되고 여기에 몸짓과 동작과 재담과 노래가 따르는 탈춤으로, 가무적부분과 연극적부분으로 그 구성을 크게 나눌 수 있다. 그 춤은 중부지방에 남아 오는 양주 별산대놀이의 춤이나, 느린 사위로 긴 장삼 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의 해주 탈춤형의 장삼춤에 비하면 활발하며, 장삼 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한삼을 경쾌하게 휘뿌리면서 두 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 하는 깨끼춤이 기본이 된다.
목중춤은 오광대의 말뚝이춤과 마찬가지로 도무(跳舞)로서 모닥불 우리를 뛰어넘는 것으로 장기를 자랑했는데, 이것은 대륙에서 전래한 건무의 영향을 상정케 한다. 춤사위의 분류는 양주 별산대춤처럼 자세하지는 못하나 팔목중의 외사위·곱(겹)사위·양사위·만사위, 취발이의 깨끼춤(깨끼리춤), 말뚝이의 두어춤(양반들을 돼지우리 속에 몰아넣는다고 해서), 미얄의 궁둥이춤과 까치걸음, 팔목중의 뭇동춤 등의 사위 명칭이 있으며, 불림에 따라 장단을 청하고 춤을 춘다.
의상은 김진옥이 어렸을 때는 자주 무당의 옷을 징발하여 썼다고 하며, 그러한 연유에선지 목중의 원색 더거리(더그레)같은 것은 몹시 화려하다. 팔목중은 원래 장삼 위에 더거리를 입으며, 더거리는 붉은 원동에 초록색 소매를 달고, 소매 끝에 각기 청황남색 등의 끝동을 달았으며, 긴 한삼을 손목에 달고 그것을 휘드르면서 춤을 추어, 고구려 무복 유고(儒袴)의 전통을 생각케 한다. 그리고 다리에는 행전을 치고 웃대님을 맨다. 이에 비해 해주 탈춤은 주로 회색 칠베장삼을 공통으로 입으며, 그 소매 홍태기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다.
봉산 탈춤의 내용은 양주별산대놀이와 비슷하며, 과장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제1과장은 사상좌춤, 제2과장은 팔목중춤(제1경 목중춤, 제2경 법고놀이),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제1경 노장춤,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미얄춤이다. 이중에서 팔목중·사당춤·사자춤 과장이 양주 별산대놀이와 다르나, 김진옥의 증언에 의하면 양주 별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제2팔목중춤 과장에 '법고놀이'가 있었고, 제6양반춤 과장에 포도부장이 나오기도 하였다고 하니 동일한 산대도감 계통의 탈춤에서의 분파임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연희자는 모두 남자였고, 그것도 그 지방 이속들이었으므로 사회적으로 그리 천시되지 않았고, 그 연기가 세습되어 왔는데, 1920년대에 들어서 기생조합이 생긴 후로 남자 대신 기생들이 상좌와 소무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사리원으로 옮겨오기 전에 봉산 탈춤을 놀았던 경수대는 앞산 밑 강변의 평평한 터로 석벽 밑에 겨우 무릎이 닿을 높이의 돌축대를 쌓은 것이며, 그 나지막한 축대 위에서 사방에 횃불을 밝히고 놀았다. 반면 사리원의 가설무대는 경암루 앞 광장에 28개의 구획을 가진 반원형의 다락을 세우고, 그 안마당에 멍석을 깔아 탈판을 마련하였다. 이 28개 다락 중 탈판 오른쪽 제3의 구획이 탈막청으로 쓰여졌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경암루 뒤를 탈막으로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반원형 2층 관람석 다락의 사용권은 공연비용을 대는 상인들에게 주어 그들이 단골손님을 초대하거나 음식을 사먹는 사람에게 한해서 자리를 주게도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놀이에 사용되는 비용을 따로 입장료를 받아서 채우지 않고, 읍민 중 유지와 상인들에게 염출했던 것이다.
봉산 탈춤의 길놀이는 탈놀이에 출연하는 일부가 악공의 주악을 선두로 사자·말뚝이·취발이·포도부장·소무·양반·영감·상좌·노장 그리고 남강노인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이 때 원숭이는 앞뒤로 뛰어다니며 장난한다. 일주하는 도중에 광장에 이르면 행렬자는 모두 어울려서 한참 춤을 추고, 다시 열을 지어 지정된 놀이터로 가서 본격적인 탈춤을 시작한다. 원숭이와 사자는 놀이판이 좁아지면 관객을 정리하여 이를 넓히는 일도 한다. 근래에는 길놀이가 없고, 대신 나무판에 광고문을 적어 사방에 붙였을 뿐이라고 한다.
봉산탈춤에 사용되는 가면은 종이탈이며 그 종류는 아래와 같다. 상좌(4), 목중(8), 거사(6, 목중탈을 겸용), 사당(소무탈 겸용), 노장, 소무, 신장수, 원숭이, 취발이, 맏양반(샌님), 둘째양반(서방님), 셋째양반(종가집 도련님) 말뚝이, 영감, 미얄, 덜머리집, 남강노인, 무당(소무탈 겸용), 사자로 모두 34역이나 겸용이 많아 가면은 26개가 사용된다.
봉산탈춤은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김진옥(1894~1969,첫목중·노장역), 이근성(1895~1978, 목중·취발이·사자역), 김용익(1902~79, 목중·마부·거사역), 양소운(1924년생, 사당·미얄역), 최경명(1912~85, 말뚝이·취발이역), 김선봉(1922~97, 상좌·소무역), 윤 옥(1925년생, 상좌·덜머리집·무당역), 오명옥(1906~87, 피리·해금·악사)등 8명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1997년 현재 양소운과 윤 옥 만이 생존하고 김기수(1936년생, 노장·목중역)가 1987년, 김애선(1937년생, 소무·상좌·목중역)이 1989년에 보유자로 추가 지정되었다.
봉산탈춤의 몸짓
한국 조선시대 대표적인 놀이문화 봉산탈춤입니다.
저의 초등학교6학년때 선생님이 국악에 관심이 많으셔서 조금 알았는데요...
이 봉산탈춤이 서양의 오페라와 다른점은 바로 관객의 참여라네요...
봉산 탈춤은 관객마져 한명의 배우로 보고 연기 한다는 군요...
멋집니다 우리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