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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행일정이 빠듯해서 약간 서둘러야 했다.
어느 여행사의 여행일정을 비교해보아도 패키지일정은 상품가격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대동소이 했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품위있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라고 생각했던 국내굴지의 대표여행사들도 지금은 품격이 낮아지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저가 상품으로도 의외로 품위있는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라는 말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여행사의 품격이 거의 평준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소의 청결문제인 것같다.
숙면을 기대해 볼 수 있기때문이다.
언제나 아침은 모닝 콜이 울리고 식사 시간, 출발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달리 가슴이 설래고 두근거렸다.
그것은 아마도 나의 전공분야인 서양사 유적지가 코앞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기사는 버스 트렁크 문을 열어놓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쭉 그렇게 해왔듯이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사는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다.
헝가리와 체코는 본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소속된 국가다.
다만 민족이 다를 뿐 형제나 다름없이 700년을 거의 함께해왔다.
제1차세계대전 패배로 오스트리아는 혹독한 댓가를 치뤄야했다.
비엔나 시청
상대국가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기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갈기갈기 찢기고 혈육 또한 이산의 아품을 겪어야 했다.
헝가리와 체코가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갔기때문이다.
이들 국가는 과거에 한 국가에 소속되어 민심의 결속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따뜻했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국립 오페라하우스
새벽공기를 마시며 홀로 타국 호텔 앞에 서있는 기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왠지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국가, 오스트리아 호텔 앞에서 담배를 입에 머금은 채 홀로 서있는 기사의 모습이 측은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가 각기 독립된 국가 라고 하더라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과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국 때처럼 이동하는데 전혀 불편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질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엔나 재래시장
겉으로 보기는 기사가 오스트리아 내국인인지 체코인인지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
단일 화폐인 유로화를 사용하고 자유 왕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체코가 분단 되었던 이유는 민족이 다르기때문이라는 것도 하나의 원인도 있을 수 있겠으나 통치자의 그릇된 판단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비엔나 쉔부론 궁전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를 거쳐 체코를 한바퀴 도는 이번 여행이 기사에게는 상쾌할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사의 밝은 표정으로 보아서 과거의 그늘진 역사를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기사는 한치의 틈도 없을 만큼 행동이 민첩하고 성실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미소가 더욱 아름답고 값지게 보였다.
기사는 도로 전방 만을 응시하며 운전을 하고 있었을 뿐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직업에 대한 긍지가 남같지 않아 보였다.
롯데관광여행사의 전속 기사가 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기사는 늘 조심성과 성실한 운전으로 승객에게 편안함을 제공했으며 마시는 물은 1유로에 공급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이 조금 많이 팔린다 싶으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기도 했다.
쉔부론 궁전 기념탑
나라마다 각기 다른 교통법규가 적용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위기에 직면할 때도 있었으나 그때마다 기사는 슬기롭게 대처했다.
그의 버스 45인 승은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회사 제품이었다.
아주 안락하고 승차 감이 좋았다.
왠만한 아파트 한채 값과 비슷하다고 하니 쉽게 구입할 수 있을 것같지 않았다.
때문에 기사는 버스를 대단히 애지중지했다.
쉔부론 궁전에서
아침에 승차할때면 버스바닥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기사에게 신뢰감이 든 이유였다.
버스의 마스코트인 가이드 또한 언제나 일행의 건강과 일정을 챙겼다.
그녀는 마치 고등학교 수학여행단을 거느리고 떠나는 교사처럼보였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여름 별장
나는 서울 송파구 방산고등학교 재직 시 고등학생들을 거느리고 중국 석도진에 수학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장보고의 행적을 조사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책임은 막중했다.
학생들의 돌출된 행동때문이었다.
가이드도 그러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번 여행자들의 성향은 각기 달랐다.
쉔부론 궁전에서
때문에 공통분모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각기 성격과 취향이 다르고 거주지가 다르기때문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이 통하는 두 젊은이가 있었다.
인생의 즐거움을 여행에서 찾는 분들 이었다.
한분은 50대 초반으로 남편과 사랑하는 자녀들을 집에 두고 있었고, 다른 한분은 프리랜서로 아직은 미혼이었다.
벨베데레 궁전
우연히 여행 도중에 만났다 하지만 두사람은 단짝이었다.
자유분방하고 도전정신이 남달라 부럽기도 하였다.
나는 역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나 유서깊은 사적지를 주로 방문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만난 두 젊은이들은 세계일주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밝고 붙임성 좋은 두 젊은이들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왜 좀더 젊어서 세계일주라는 생각을 하지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동요되었다.
인생은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실패를 두려워할줄 모르는 두여성이 호감이 갔다.
그래서인지 두 여성과 맥주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살아가는데는 정답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두젊은이들로 부터 인생을 배웠다.
서울 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두 젊은이들을 만난다면 맥주를 대접하고 싶다.
크림트의 명작 "키스"
버스는 어느새 비엔나시 성 슈테판성당으로 접근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버스는 시내로 진입할 수 없었다.
기사는 성 슈테판 성당 근처에 우리일행을 내려주고 사라졌다.
거대한 성 슈테판 성당이 우리 일행을 압도했다.
비엔나시의 랜드마크 라 할 수 있을 만큼 웅장 했으며 이곳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같이하고 있었다.
밑에서 성 슈테판성당의 첨탑을 바라보니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스페인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보았던 성당 들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늘을 찌를뜻 높이 솟아있는 첨탑의 높이만 달랐다.
성 슈테판성당은 독일 바이에른 주의 파사우에 있는 성당이다.
서기 720년경에 건축 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1668년에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 되었다.
안전 대칭이란 뜻이다.
케른트너 거리
알프스 이북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성당으로 전면 양쪽 꼭대기에 양파 모양처럼 생긴 둥근 두 탑이 있었다.
이 탑은 후기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성당안으로 들어갔다.
어둑어둑한 성당내부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간혹 인간들의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채색된 유리창 사이로 햇볕이 투영되고 있었다.
그 햇볕을 타고 춤을 추며 너울너울 제단위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천사였다.
케른트너 거리
벽화가 그려진 성당내부의 천정은 높이를 해아릴 수 없었다.
까마득한 높이의 천정에 그려진 천지창조인듯한 프레스코 벽화가 신비스러운 비밀을 감싸고 있었다.
영혼이 안식처를 찾은 것처럼 가슴이 안정되고 편안했다.
벽화는 1679년부터 1684년에 걸쳐 완성된 벽화다.
성당에 모두 다섯 개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되고 단장된 것으로 보아 최근에 교체된 것같았다.
성 슈테판성당
성 슈테판성당의 대미는 둥근 원주 모양의 기둥이었다.
이 기둥에 계단이 있었는데 탑꼭데기까지 올라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계단의 폭이 매우 좁아 두사람이 겨우 교차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여러 사람이 내려올 때는 벽에 기대서서 기다려야만 통행이 가능했다.
성 슈테판성당 꼭데기에서 시내를 바라다보는 광경은 가히 환상적일 것 같았다.
그래서 4유로를 지불하고 표를 한 장 구입한 후 올라갔다.
성 슈테판 성당
그동안 집에서 등산을 꾸준히 했기때문에 탑을 오르는 데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원통형 공간이 너무 좁고 공기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여기에 좁은 원통형 공간을 돌면서 계속 올라가다보니 머리가 빙빙 돌고 현기증이났다.
가이드가 조심하라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다.
나의 경솔한 행동이 후회되기 시작하였다.
케른트너 거리
그러나 더 걱정이 되었던 것은 이후 여행에 미칠 영향때문이었다.
호흡을 조절시키기 위해 올라가는 속도를 약간 줄였다.
그랬더니 이상한 징후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심신이 안정되었다.
여기서 다시 되돌아간다면 인생 최대의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다시 위로 걷기 시작했다.
정상까지 시간은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정상의 홀은 사방이 벽으로 막힌 밀폐된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많았다.
케른트너 거리
산소가 희박해서 속이 메스꺼웠다.
밖의 테라스로 나갈 수 있는 곳은 양쪽 두군데 문 뿐이었다.
안전한 관람을 위해 벽은 쇠창살로 막아 놓았다.
쇠창살 사이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묘한 여운을 주었다.
구원받지 못한 나의 영혼에게 구원의 손길이 뻗은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의 묵은 찌꺼기 까지도 바람에 날려 내보내고 싶었다.
케른트너 거리
비엔나시 성 슈테판성당은 모차르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인생의 첫 출발점인 결혼식과 생의 종말인 장례식이 우연히도 겹친 곳이 이곳 성 슈테판성당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모차르트가 없는 현실은 상상해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모차르트가 오스트리아 국민들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비엔나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케른트너 거리를 걸었다.
성 슈테판성당 내부
케른트너 거리는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성 슈테판 성당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보행자 전용 도로로 길이는 대략 600m 정도가 될 것 같다.
거리는 낯설고 생소하여 처음에는 어색 했으나 근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거리는 점점 나의 혼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있었다.
건물 하나하나가 모양이 다르고 특색이 있어 국가지정 문화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성 슈테판성당 모형도
도로 양쪽에는 선물 용품점과 액세서리점, 부티크, 레스토랑, 카페가 늘어서 있었다.
서울 강남역 보다는 번잡하지 않았으나 다른 모습의 건물들이 넋을 잃게 하였다.
오스트리아가 전통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것은 가치관의 차이때문이라 생각이 들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식당 내부보다는 밖을 선호하고 있었다.
그만큼 바깥 공기가 청정하고 신선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성 슈테판성당 탑 위에서
깨끗하게 정장을 한 어느 노부부가 맥주 두잔을 시켜놓고 오전내내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평생동안을 연애하듯 연인처럼 살아왔을 터인데 도 아직도 이야기 주제가 넘쳐난듯 보였다.
행복해 보였다.
이렇게 행복한 노부부가 케른트너 거리 식당에 앉아서 소일하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도 있었다.
자본주의 국가라면 어느 곳에서나 볼 수있는 풍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누구도 이러한 모습에 관심을 표방한 사람은 없었다.
성 슈테판 성당 탑 위에서
다시 쉔부론 궁전으로 이동했다.
쉔부론 궁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으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쉔부론 궁전에 도착하면서 부터 정신적이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한 여성의 운명이 너무 기구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린 시절은 화려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절정기를 맞이했으며 거의 유럽을 제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의 행복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늘 시녀 들과 함께 화려하게 조성된 꽃길을 걸으며 술래잡기도 했다.
때로는 벌과 나비가 되기도 하는 등 세상에서 동떨어진 우리안에서 천사가 되어갔던 것이다.
성 슈테판성당 탑 위에서
그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나이는 15살, 이제 갓 피어난 한떨기 장미꽃이었다.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한 어린 소녀에게 정략 결혼의 손길이 뻗어왔다.
이 시기는 누구도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절대왕정 시대라 할 수 있었다.
절대왕정 군주의 명령이 곧 지상의 명령 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19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된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 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여느 왕실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패션과 여흥, 사교를 즐기며 처녀때처럼 바깥 세상과는 등진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녀에게 왕실에 대한 의무와 소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생산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 혼자의 노력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남편인 루이 16세가 성기능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친정 어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왕비로서의 의무’를 강조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케른트너 거리
동생 부부의 고충을 보다 못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요제프 2세는 프랑스로 건너가 루이 16세에게 남자가 되는 비결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루이 16세는 드디어 마리 앙투아네트를 임신시켰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은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고 말았다.
프랑스 루이 16세는 국민들로 부터 신망받는 왕이 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유약하고 소심한 성격인 그가 심각한 국가 재정문제를 뛰어 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발생의 원인을 흔히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때문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제도의 모순이란 뜻이다.
제 1 신분인 성직자와 제2 신분인 귀족은 면세 등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제 3신분인 평민들은 특권에세 제외되는 등 신분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비엔나 국회 의사당
이러한 신분적 차별때문에 제 3신분은 갈수록 생활이 악화되어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왕실은 아메리카 독립전쟁을 나몰라 할 수도 없었다.
루이 16세는 성직자와 귀족 에게도 십시일반으로 약간의 세금을 징수 하려 하였다.
그러나 제 1,2신분인 성직자와 귀족은 그것마져 거절하였다.
루이 16세는 재정악화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하다가 결국 삼부 회를 소집하고 말았다.
그러나 삼부회 표결방식 문제를 놓고 제1, 2신분과 제 3신분이 평평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양측은 한발자국도 밀리지 않으려 하였다.
제 1, 2신분은 신분제식 표결 방식을 주장했고 제 3신분은 머릿수 표결 방식을 주장하였다.
양측이 쉽게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삼부 회는 지리멸렬 상태가 되어갔다.
제 3신분은 여기서 밀린다면 더이상 생활이 낳아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번 대립이 제 3신분 에게는 사활이 걸리는 싸움이었다.
평민들은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강수를 두고 말았다.
정치범이 다수 수감되어 있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것이다.
탈옥한 정치범이 혁명에 가세하면서 혁명은 불시에 파리 시 전체로 확산되어 갔다.
혁명은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으나 루이 16세는 파리에서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
루이 16세의 도주계획은 혁명정부는 물론 프랑스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고 말았다.
루이 16세서의 도피는 혁명정부에 대한 거부를 의미했기때문이다.
특히 8월부터 추진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반 프랑스 동맹군이 프랑스 혁명군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했던 것은 사전에 반 프랑스동맹국들과 내통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구심을 낳게하였다.
결혼 초부터 국민들로 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욕심많고 탐구심 많은 아름다운 젊은이 들
1791년 6월 20일 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파리 시를 몰래 빠져나갔던 루이 16세는 국경 근처 바렌에서 시민군에게 발각되어 파리 시로 강제 압송되었다.
파리 시민은 열광하였다.
여기에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 되었던 정치 범들이 가세하면서 광장은 더욱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치는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속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뜨거운 열기속에서 루이 16세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혁명군은 콩코르드 광장에 단두대를 설치했다.
단두대를 “기요틴”이라고도 했다.
“기요틴”이 고안했기 때문이다.
단두대는 작두와 비슷하긴 했으나 훨씬 자동화 된 것이다.
고통없이 단칼에 목을 벨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사각형 틀의 꼭대기에 기울어진 칼이 매달려있었다.
끈만 잡아당기면 언제든지 매달린 칼이 스르르 밑으로 내려오도록 설치되어 있었다.
단두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사시나무 떨듯 움츠렸다.
하물며 칼이 내려오는 소리를 직접 듣고 있으면 사지가 떨리고 혼이 달아났을 것이다.
칼 끝이 어낙 예리하고 무겁기때문에 가속도가 붙어 나무조각도 토막냈다.
단두대 아래는 목이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는 나무 틀이 있었으며 그 옆에 바구니가 있었다.
칼이 내려와서 목을 가르면 머리통은 대굴대굴 굴러 바구니로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사람의 손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단두대는 공포심의 상징이었다.
시현 보다는 전시 효과가 훨씬 더 컸다.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1793년 10월 16일에 단두대로 처형되고 말았다.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태어나 왕실의 재롱 둥이로 성장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말이 없다.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는 후세 역사가 입증할 것이다.
다시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서 검색대를 거쳐야 했다.
가방은 위탁시키고 아이 패드만 손에 들었다.
박물관 내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가족사진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끌게 했던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천진난만하고 여린 눈망울 때문이었다.
얼굴은 햇사과 처럼 푸등푸등하며 티없이 맑아 보였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을까?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이성적 판단이 영글기전 이었기 때문이다.
육신은 이제 여성으로 갓 피아나려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사고와 육신은 얼어붙은듯 했다.
자신의 주변은 늘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보겠다고 아우성이는 이리와 늑대 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다.
그러나 행복 했다기 보다는 출신때문에 멍에가 무거워 가혹 하기만 했다.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을 피력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녀는 세상의 낭떠러지로 밀려나고 말았다.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된 것이다.
좋든 싫든 친정을 떠나 시가로 가야 했다.
정략 결혼이라는 미명아래 명령이 떨어지면 어디든 가야 했다.
그러나 세상의 돌아가는 꼴이 당최 삼상치 않았다.
시끄럽고 어지러웠다.
왕족이라면 만사 형통 하였는데 프랑스에서는 먹혀 들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풀수 없는 숙제 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하녀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왜 그리 난리냐?
백성들이 빵을 달라고 한데요.
빵을 주면 될 것 아니냐?
빵이 없어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주면 될 것 아니냐?
당시 구중 궁궐 안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였다.
그들은 물질이 풍족하여 마음껏 풍요를 누리며 살면서도 세상밖의 물정은 전혀 몰랐다.
세상밖의 모든 사람들도 자신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신분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족이나 귀족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람은 비참했다.
가족의 의식주 만으로도 생활은 어려웠고 여가란 있을 수 없었다.
왕이나 귀족에게 납부하는 중세때문이었다.
국가가 징수하는 세금은 천정부지 치솟았다.
이에 생활이 어려운 평민들은 꿈틀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왕은 요즘 주식 회사의 대표이사나 같고 귀족은 회사 중역이나 같았다.
회사가 평사원을 쥐어짜 듯 왕과 중역은 평민을 쥐어짰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 사회를 이해못한 것은 당연했다.
구중 궁궐에서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쉔부론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물이 1.440개 방에 내재되어 있었다.
그 중 46개만이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 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 제일의 명문가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를 좀더 심도있게 관찰할 수 없었다는 것이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디시 벨베데레 궁전으로 이동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작 “키스”를 감상하기 위해서다.
세계적인 명작을 코앞에 두고도 느끼는 감정이 별로 없다라는 것은 그림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체코에서 이민해 온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업과 판화가로 활동했으나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때문에 클림트의 어린 시절은 암울하고 우울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14세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졸업 후에 그의 동생 에른스트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으나 생활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80년대에 이르러 국립 극장과 미술사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리면서 부터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작품 성향은 차츰 변해갔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가 그의 작품세계에 자주 등장 하게 되었다.
획일적인 변신을 꾀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작품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일부는 외설 성으로 그를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 키스”라는 각품이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하여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있었든지 발을 내디딜 틈이 없었다.
드디어 우리 앞에 황금빛 색깔로 금박을 입힌 작품이 나타났다.
“키스”라는 작품이었다.
찬란하고 화려했다.
이 작품을 감상하고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웃고 넘겨야할 내용 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 환희의 작품이 무엇때문에 유명한 지는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부에 대한 상징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포인트를 가리키며 가이드는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연인의 머리를 잡고 자신에게 향하게 하여 그녀의 볼에 입맞추고 있는 남자의 남성성이 특히 강조되고 있었다.
남자의 강인한 노력과 능력이 없다면 가정은 사상 누각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여자가 절벽위에서 무릎을 꿇고 남성을 바라보며 안고있는 자세는 여성의 지극한 사랑 없이는 안전한 가정이 형성될 수 없다는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이 그림이야말로 가족 구성의 실체같기도 했다.
이 시대의 순수한 사랑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건 없는 사랑을 분출시키고 있는 것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탑 모양을 연상 케 하는 후광 형태 역시 남자 등의 윤곽을 따라 결정되고 있어, 모든 움직임과 힘이 마치 그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여자의 태도가 수동적으로 비춰지는 이유는 연인 앞에서 무릎을 끓고 있는 그녀의 자세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남녀의 얼굴은 전통적인 사실주의로 처리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의상과 배경은 타원, 삼각형, 곡선과 소용돌이의 문양과 다양한 색채를 마치 모자이크처럼 배치하여 장식하였다.
이와 같은 장식은 흔히 그의 그림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별하는 요소로 이해되고 있다.
클림트는 생물학적으로 남녀를 구분할 때 남자를 검정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거친 형태로 표현하였다.
반면 여자는 다채로운 꽃무늬와 원형과 곡선 같은 요소들을 통해 한결 부드러운 형태로 나타냈다.
짧은 감상 시간이긴 하였으나 “키스”를 통해 가정에서 남녀 역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나 현대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가페 적 사랑이 없으면 가정은 무너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