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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를 썼기 때문에, 윤동주
박 일
답답한 시대와 <소년(少年)>
2007년 하반기부터 ‘신시 100년’의 표어를 내걸고 시문화운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육당의 ‘海에게서 少年에게’가 발표된 지, 금년(2008년)이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시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이 높아졌으면 좋겠다.
‘海에게서 少年에게’는 신시의 효시다. 창가의 형태를 탈피하였다곤 하지만 각 연과 행을 대비시켜 보면 어떤 정형의 율(창가의 탈을 확실히 벗지 못한?)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형태상의 어설픔 때문에 신체시라는 이름으로 신시의 효시로 잡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동시는 아니겠는가.
육당(1890~1957)이 <소년(少年)>지를 창간할 당시 만18세였다. 그 나이 때문에 출판사 대표도 될 수 없어 그의 형 최창남의 이름을 끌어들였다. <소년>지도 최창남의 이름으로 발행했고, ‘海에게서 少年에게’도 무기명이었다.
<소년>지 창간에 대하여 조연현은 그의 <한국현대문학사>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목전에 가까워오는 한일합병이라는 비통한 정치적인 암흑에 직면하여 국가가 민족의 장래를 소년에게 의탁하려는 계몽적인 의도가 뚜렷이 표시되어 있다. 잡지의 제명을 <소년>이라 한 이유도 이로써 알 수 있다.’라고.
그렇다면 소년은 누구인가? 이에 대하여 어린이라고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소년>지 영인본을 낸 박순재는 <소년>지 독자와 관련하여 ‘반드시 나이 어린 소년을 대상으로 한 것만은 아닌 것이며 널리 청장년에게까지도 읽혔던 교양지로서 개화 운동 전달의 기수였으며 신문화 계몽으로 일관된 것이었다.’라고 하여 소년의 범위를 상당히 넓혀놓았다. 결국 계몽이라는 목적에 맞추었기 때문에 넓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다수의 문학평론가도 같은 견해를 보인다. 그렇게 정리되어야 ‘海에게서 少年에게’가 신시의 효시로써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海에게서 少年에게’는 동시에 더 가깝다는 논리를 펴고 싶을 뿐이다.
그 이유는 <소년>지에도 소년의 범위를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는 점이다. ‘甲童伊와 乙童伊의 相從’에서 갑은 15세. 을은 9세로 밝혀 놓았다. 그러니까 <소년>은 9세에서 15세의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여 발행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소년>의 창간 취지에도 ‘우리 대한으로 하야곰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 하랴 하면 능히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여라’라고 하였다. 이것은 을사보호조규 이후로 국내 현실이 암울해지고 답답해지는 현실에서 소년의 교도를 통하여 조국의 미래를 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海에게서 少年에게’도 미래의 한국인 소년을 위한 메시지였다. 그는 청장년이나 기성인을 교도할 만한 나이도 아니었으니까.
청년을 위한 잡지 <청춘(靑春)>을 1914년에 따로 발간한 것만 보아도 소년은 소년일 뿐이다. 그러니까 ‘海에게서 少年에게’는 동시의 효시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동시를 썼기 때문에
윤동주(1917~1945)는 생전에 시집을 발간하려고 했다 한다. 조선일보에 연재한 ‘애송시 100편’ 중 윤동주의 ‘서시’를 48번 째 소개하면서 문태준(시인)은 다음과 같이 썼었다. ‘종교적인 순교의 의지로도 읽히고, 독립에의 의지로도 읽히는 등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갖고 있는 이 시를 쓴 것은 1941년 11월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는 1941년 자선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시국을 염려해서 시집 출간 연기를 권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43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출감을 기다렸지만 불운하게도 해방을 불과 반 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의 차디찬 바닥에서 옥사했다.’ 이런 시국 때문에 그는 물론 그의 시도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출판은커녕 시 한 편 발표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친일 문제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윤동주의 지순하면서 고고하게, 여린 것 같아도 강직하게 일제강점기라는 어둠과 황폐한 시대를 초월하고 극복하려는 행위는 우리 후세들이 그의 문학 사상 선양만으로 어찌 다 보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윤동주는 동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으로써 더 빛날 수 있었다. 요즘에도 동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퍽 고무적인 일이다. 시의 표현 영역의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계간 <어린이글수레>, 격월간 <어린이문예>에서도 시인이 쓴 동시를 한 편씩 올리고 있고, 시인들의 동시집 출간(안도현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최승호 <말놀이 동시집>, 신현림 <초코파이 자전거>, 김기택 <방귀>, 이기철 <나무는 즐거워> 등)도 꾸준히 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지용, 박목월, 김상옥 등 유명 작고 문인들도 동시를 발표했었다.
잠시 외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극히 일부의 조사이긴 하지만 문학에는 성인과 아동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문학의 개척자 마크 트웨인도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을 발표했고, 영국의 스티븐슨도 <보물섬>과 동시집 <동시의 꽃밭> 등을 내었다. 1907년 영국의 커플링은 동화 <정글북>으로 당당하게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1912년 노벨상 수상자인 독일의 하우트만은 동화극 <한넬레의 승천>, <파파는 춤춘다> 등을 썼고 인형극도 창작하기도 했다. 1913년 노벨상 수상자인 인도의 타고르도 동시집 <초승달>을 펴내기도 했다. 197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이작 싱거도 동화작가였다. 이 외에도 어린이를 위한 S ․ F 소설을 비롯한 과학동화 등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신현득이 <월간문학>(2008. 5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신문학은 소년 계도를 앞세운 주권운동에서 시작되었다’는 평론에도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윤동주도 동시를 썼다. 10대 후반부터 동시를 썼는데, 동시는 그의 동심과 순결성을 형상화시키는 그릇으로 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가톨릭 소년> 등에 동시 발표의 장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뜬 <가톨릭 소년>은 ‘1934년 천주교 만주·연길 교구에서 창간했다.(중략) 발행인은 아펠만(Appelmann) 신부, 주간은 김구정(金九鼎), 평론가 서상렬, 화가 구본웅, 교육자 장내원 등이 편집에 참여했다. 주로 교회사·서양사·과학기술·청소년 문제에 관한 논문을 싣고, 동화·동요·동시 등의 아동문학 작품도 실었다. 1938년 일본에서 창간된 어린이잡지〈빛〉이 우리나라에 무료로 배포되자, 발행부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경영이 어려워졌고, 또 총독부로부터 일제를 선전하는 글을 실으라는 압력을 계속 받아 1940년 폐간’된 어린이 잡지다. 그러니까 고향에서 발행하고 있는 이 잡지는 정지용의 문학성을 키우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본고에서 ‘동시를 썼기 때문에, 윤동주’라는 제목은 어쩌면 윤동주가 동시를 통하여 동심과 휴머니즘 지향의 순백한 시 세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붙여본 것이다. 동시를 썼기 때문에 유명한 시인이라는 의미는 아님을 밝혀둔다.
동시를 쓴 이유
윤동주는 시와 더불어 동시도 썼다. 딱히 시와 동시라는 장르를 의식하고 시작을 했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자를 의식하기보다 모티프에 따라 시와 동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동시는 시와 이질적이거나 하위, 상위 개념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든 동시든 시의 범주 안에서 동일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와 시의 구분은 잠재적 독자를 염두에 둔 방법론상의 편의를 겨냥한 수단일 따름이지, 문학의 본질적 국면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윤동주가 훌륭한 동시를 썼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대한 편견이나 비하의 감정이 있었다면 훌훌 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학의 한 장르로써 올바르게 인식되길 소망하는 것은 한 아동문학가의 노파심일 뿐일까.
윤동주가 동시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논문은 문학평론가 최명표이다. 그는 ‘원시적(原始的) 평화(平和)의 훼절(毁節)과 심리적(心理的) 대응(對應)’이라는 제목의 윤동주 동시론(계간 <아동문학평론> 1992년 봄(제62)호, 여름(제63)호, 가을(제64)호)을 발표했다.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본격적으로 동시류의 창작에 나선 이유는, 대략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평양의 객지 생활이 주는 허전한 고독감을 들 수 있다. 인간이 본래의 고향을 떠나 타관살이 할 적에 가장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회귀욕일 것이다. 이것이 원시적 평화가 숨쉬는 유년기를 노래하는 동시류의 창작 에네르기로 발전적 발산을 거듭하였을 것이다. 둘째, 당시 윤동주가 다니던 숭실중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한 명목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 조치된다. 그는 이 조치에 앞서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가 귀향하였을 적에 그는 이른바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 관헌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일신상의 위험에 처한 윤동주는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동시류의 창작에 적극 나섰을 것이다. 셋째, 당시 윤동주는 자기 나름대로 확고한 시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시 ‘공상(空想)’을 1935년 10월에 발간된 <숭실활천(崇實活泉)>에 발표하면서, 문익환의 시를 보고 무안을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윤동주는 이 시기에 상당한 시론을 구비하였으며, 그것이 동시류의 창작을 후원하였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윤동주는 1935년에 발간된 <정지용(鄭芝溶) 시집(詩集)>을 애독하였다. 이 시집은 편제상 특이한 점이 있는 바, 동시류를 유명한 성인시와 동열로 묶고 있다. 이 점은 윤동주에게 많은 시사를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로 하여금 동시류의 창작에 전력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시작상의 변화는 그의 시적 방향을 구획하면서, 그만의 고유한 시세계 구축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신호로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동시류는 뒤에 쓰여지는 시편들의 원형적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시류를 포괄적이나마 정리하는 일은, 그의 시세계를 올곧게 이해하는데 유효할 수 있다. 윤동주가 쓴 동시류는 대략 35편에 달하며, 시기적으로는 1935년 12월 24일부터 1941년에 걸쳐 있다. 이 무렵에 그는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광명중학을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갓 입학한 뒤였다.‘
몇 편의 동시
윤동주의 <서시>처럼 애송되는 동시는 없다. 그러나 약 35편이나 되기 때문에 읽을 만한 동시들도 많다. <한국대표동시 60>(한국헤밍웨이 간)에는 ‘눈’이 실려 있다.
지난 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눈’ 전문
한국명작동시선정위원회가 엮은 <100년 후에도 읽고 싶은 한국명작동시>(예림당 간)에는 ‘오줌싸개 지도’가 실려 있다.
밧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는
간밤에 내 동생
오줌 싸서 그린 지도.
위에 큰 것은
꿈에 본 만주 땅
그 아래
길고도 가는 건 우리 땅.
-‘오줌싸개 지도’
<한국명작동시마을>(박두순 엮음. 아동문예 간)에는 ‘귀두라미와 나와’가 실려 있다.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아무에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귀뚜라미와 나와
달 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귀뚜라미와 나와’ 전문
아동문학평론가 김용희, 박뎍규가 조선일보에 <5월의 동심>. <6월의 소망>이란 타이틀로 연재한 동시들을 한 권에 묶은 <너의 가슴에 별 하나 빠뜨렸네>(청동거울 간)에는 ‘호주머니’가 실려 있다. 이 동시는 계간 <오늘의 동시문학>(2008년 봄호)이 기획특집으로 시도한 ‘한국 동시 100년에 빛나는 100편의 동시’에도 실려 있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이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호주머니’ 전문
그의 동시 세계
위의 동시들을 통하여 작품 세계의 일면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시대상을 감안하여 동시인 윤동주가 어떤 정서를 갖고 있느냐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를 모두 동원하였다. 이미 그의 시에서도 순결과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현실에 굴하지 않고 강직하게 살아온 그의 삶이 모두 규명되었다면, 동시에도 그것이 얼마나 배어 있을까 되찾아보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눈’은 ‘덮어주는 이불’이다. 눈은 추워하는 지붕, 길과 밭을 덮어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당시의 시대상이 겨울이 아니었던가.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서라도 덮어버리고 싶었다. 여기에 동원된 것이 ‘눈’이었다. 마지막 연을 다시 읽어보면 ‘그러기에/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하였다. 봄눈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오직 겨울눈만이 추운 겨울을 덮어줄 수 있다고 본 것은 겨울과 맞서고 싶은 시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애민, 애족의 정서가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오줌싸개 지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붙어 있다. ‘시인은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시에다 그 뜻을 숨겨 두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기가 있는 집에서 흔히 있는 일을 글감으로 했습니다. 동생이 오줌을 싸서 요에 지도가 생겼습니다. 그것을 두고 하나는 만주 땅, 하나는 우리 땅이라 했습니다. 우리 땅을 말할 수 없었던 시대였는데, 짧은 시귀에 우리 땅을 찾자는 뜻을 숨겨 둔 것입니다.’ 더 부언할 것이 없다. 우리 국토에 대한 애정을 ‘오줌싸개 지도’에 갖다 붙인 그의 형상화 솜씨에 놀라움이 느껴질 뿐이다. 표면적으로 형제의 우애가 느껴지면서도 비극적 현실의 희화가 아닐까.
‘귀뚜라미와 나와’에 대해서는 최명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윤동주의 내성적 성격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다른 시편에는 이야기가 노출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시치미 떼기로 일관하고 있다. 대화 내용을 남에게 쉬 공개할 수 없는 시대나 상황은 분명히 바람직스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언어생활에서 보더라도, 유년기가 아닌 소년기나 청년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화자의 입장을 시화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은 결국 자기에게 불안감으로 엄습해온다. 이 시로 인하여 윤동주는 더 이상 원시적 평화의 세계만을 노래할 수 없는 시대적 조건에 직면하였거나, 자아를 반추하는 습벽을 체질화하였는지 모른다.’
‘호주머니’에 대해서는 엮은이들이 신랄하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의 시인일 뿐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널리 사랑받는 윤동주 시인이 스무 살 때 쓴 시입니다. 윤동주를 일컬어 흔히 ’별의 시인‘이라고 하지요. 맑고 순수한 이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그 시심의 바탕에 바로 동시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주머니에 무엇 하나 넣어 둘 것 없는 “가난”한 일상을 오히려 운치 있게 “풍족하다”고 말한 역설이 빛납니다.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할 때의 앙증스러운 질량감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듯하지요. 윤동주는 서울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1938년)부터 더는 동시를 쓰지 않습니다. 별을 꿈꾸고 노래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얘기지요. 자신에게서 동시를 빼앗은 세상 앞에서 그는 점점 고뇌에 가득한 얼굴이 되어 갔지요.’
맺으면서
이상에서 그의 동시 세계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그의 동시도 시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치하의 아픔과 고뇌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다만, 아동의 시각에 맞추어 형상화하였다는 것이다. 동시였기 때문에 ‘눈’과 같은 비유어로써 절묘하게 표현했다. ‘귀두라미와 나와’에서도 공개할 수 없는 화자의 입장을 나타내면서 시대적 상황을 암시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 땅이라 말할 수 없는 시대 상황에서도 ‘오줌싸개 지도’란 희화를 통하여 애국을 고취하고 있는 것도 그의 민족의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하였다.
‘호주머니’는 널리 읽히고 있는 윤동주의 동시 중의 한 편이다. ‘걱정’이란 시어가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텅 빈, 모두를 잃어버린 조국의 모습임을 이해한다면 내 주먹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 동시라도 널리 읽혀서 ‘서시’를 비롯한 그의 시만큼 그의 동시도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윤동주가 최초로 쓴 동시가 ‘조개껍질’(1935년, 만17세)이었다. 정지용의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문학의 뿌리인 순수와 동심의 시심도 키웠으리라 생각하지만, 그의 시도 순결과 순진무구한 혼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성서에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의 문학이 동심의 원형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천성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신앙심이었다. 이는 그의 시도 이해할 수 있는 풍향계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두 편의 동시를 소개한다. 그의 최초의 동시이며 동심의식이 선명하게 표출되어 있는 ‘조개껍질’과 비유가 참신하여 동시의 멋을 잘 나타낸 ‘반딧불’이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 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소리.
―‘조개껍질’ 전문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달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반딧불’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