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회 이해-32. 슈바르츠(C. F. Schwartz)
트랑케바르 개신교 선교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슈바르츠이다.
그는 1750년에 인도에 도착하여 1798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사역을 계속했다.
그는 순전한 성품의 영향력으로 널리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넒은 마음과 목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첫 12년간 가르치고 설교하고 가끔 멀리 떨어진 곳들에 복음전하고 돌보는 일을 했다.
그는 트리치노폴리에서 개종시킨 사람들과 영국 수비대 군인들 가운데서의 사역을 발견했다.
그는 폭발사고에 희생당한 이들의 자녀를 위한 고아원을 설립하고 1766년에는 교회를 세웠다.
그에 의하여 1767년 영국의 선교가 독일의 루터교도와 함께 하는 사역으로 발전되었다.
얼마 후에 마드라스의 영국 총독은 슈바르츠를 영국군의 종군목사로 임명했다.
그는 자신의 첫해 종군목사 봉급 전부를 선교 건물들을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봉급 절반을 선교비로 사용했고 많은 액수를 자선을 위해 내어주었다.
그는 인도 사역자들과 함께 그 지역에 전도여행을 다녔다.
그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도 배웠는데 이는 트리치노폴리에 머물던 아르코트의 무슬림 통치자와 그의 궁정 관리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슈바르츠는 자신의 여행 중에 자주 그리스도인 회중들이 있는 탄조르를 방문했다.
그는 그 지역의 왕 툴자지와 친분을 맺게 되었는데 그는 슈바르츠가 탄조르로 오기를 원했다.
1778년에 그는 탄조르로 옮겨오게 되었고, 그 후 20년 동안 이곳은 그의 선교본부가 되었다.
1779년에 그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평화를 위한 사신이 되었다.
하지만 이 사신 업무는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다.
슈바르츠는 다시 탄조르 왕국의 내부 행정 분야에 깊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왕의 관리들의 실정이 계속되고 거주민들이 떠나자 영국은 슈바르츠에 행정위원회를 맡겼다.
슈바르츠는 탄조르 왕국의 행정관이 되었다.
그는 아미르 싱의 양아들 세르포지를 감옥에서 구해내었고 그의 유력한 후견인이 되었다.
그 소년은 슈바르츠와 가까워졌고 왕이 된 후 슈바르츠의 비문에 보은의 마음을 기록했다.
슈바르츠는 공적인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자신이 복음을 맡은 봉사자와 목사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업무를 보면서도 아침 기도를 드리며 세례 후보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초청되어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이 들어 여행이 어렵자 그는 나무 밑에 앉아 교리문답생에게 자신의 일기를 읽도록 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언제나 검소한 생활을 하여 보수의 대부분을 선교사역에 사용했다.
그는 탄조르에서 자신에게 세례를 요청하는 마라타인 브라만 과부 하나를 만났다.
그러나 그녀가 한 영국장교와 함께 살고 있었기에 그 요청을 거절했다.
장교가 죽고 나자 슈바르츠는 그녀에게 세례를 주고 클로린다(Clorinda)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 여인은 그 후 팔람코따의 매우 열성적인 교인이 되었다.
그곳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은 그녀의 노력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1784년 탄조르에 와서 그 교회를 돌볼 누군가를 임명해줄 것을 간청했다.
슈바르츠는 1785년 두 번째로 팔라코따를 방문했고 교리문답교사인 사띠아나덴을 남겨두었다.
1790년 사띠아나덴은 루터교 예식으로 안수를 받고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을 감당했다.
슈바르츠는 사띠아나덴을 겸손하고 사심이 없으며 좋은 설교자, 동료와 지역민을 다루는 일에 숙련된 사람이요 빈약한 급료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슈바르츠는 1789년 2월 탄조르에서 죽었으며 그의 시대에 트랑케바르 선교는 절정에 달했다.
시릴 퍼스의 <인도교회사>에서 (임한중 역)